교학만 배웠을 때, 물라빠리야야경(근본법문의 경, M1)
물라빠리야야경(Mūlapariyāyasutta, M1)
맛지마니까야의 첫 번째 경이 물라빠리야야경(Mūlapariyāyasutta, M1)이다. 다른 경들과 달리 194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져 있는 긴 길이의 경이다. 페이지 수로 따지면 주석을 포함하여 44페이지에 달한다.
이 경에 대한 우리말 이름은 전재성박사의 번역의 경우 ‘근본법문의 경’이라 하였고, 대림스님의 경우 ‘뿌리에 대한 법문 경’이라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경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니!
그런데 이 경에서 가장 마지막 문단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하고 있다.
Idamavoca bhagavā.
Na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기뻐하지 않았다.
(물라빠리야야경-Mūlapariyāyasutta- 근본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설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승들은 만족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경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 수행승들은 만족하여 세존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 지녔다.”라든가,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를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라고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다니 어떤 법문이길레 그랬을까? 이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라문출신의 수행승들은 예전의 견해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자신들이 부처님처럼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그들의 자만심이 겸손으로 바뀌었을 때에 고따마까의 경(Gotamakasutta:AN.I.276)을 설했다고 한다. Mdb.1165에 따르면, 수행승들이 만족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이 법문이 그들 자신의 자만심이 상처받기 쉬운 영역까지 너무 깊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Na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주석, 전재성박사)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자들은 바라문출신의 비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부처님처럼 많이 배웠다는 자만심이 생겨 났다고 한다. 이를 안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하자 기분이 언짢아 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냐나몰리 비구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부분에 대한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은 냐나몰리 비구의 의견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세존의 말씀을 무슨 이유로 기뻐하지 않았는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경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다.
세존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네 아승지겁 동안 바라밀을 완성하시고서 일체지(sabbaññutā)를 얻으셨다. 그런 세존께서 어찌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는 법문을 하셨는가?
그것은 오직 그들의 자만심을 꺽기 위해서였다. 세존께서는 이들이 자만심을 꺽지 않고서는 도와 과를 얻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을 설하리라.’라고 법문을 시작하셨다. …
한때 3베다에 통달한 오백명의 바라문 학도들이 세존의 법문을 듣고는 감각적 욕망에서 위험을 보고 출리에서 이익을 보면서 세존의 곁으로 출가했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습득하고서는 그 배움에 의지하여 자만이 생겼다.“세존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에 안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세존께 문안드리지도 않았고 법문을 들으러 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로 이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을 설하셨고, 그들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은 위대하시고, 견줄 이 없다고 자만심이 꺽여 부처님께 문안드리고 법을 듣는 것에 성심을 다했다. …
그 뒤 한때 세존께서 지방을 순회하시다가 웨살리에 도착하여 고따마까 탑묘에 머무실 때 이 오백명의 비구들의 지혜가 익은 것을 아시고 ‘고따마까 경(A3;123)을 설하셨다. 이 경을 듣고 이 오백명의 비구들은 그 자리에서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MA.i.56~59)
(Na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주석, 대림스님)
마치 법화경의 증상만인(增上慢人)을 보는 것 같다. 법화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려 하자 5천명의 증상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는 장면이 있다. 증상만에 대한 불교사전을 보면, “소견소법(小見小法), 즉 소승에 만족하고 다시 다른 법 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리.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자신하는 무리..”라고 설명 되어 있다. 자만심으로 가득찬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법화경의 증상만 모델?
물라빠리야야경에서도 오백명의 수행승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도 전혀 기뻐하지 않은 것은 자만심 때문이다. 냐나몰리 비구의 해설에 따르면, 브라만 출신 수행승들의 아상이 하늘을 찌를 듣한 기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여도 전혀 만족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법문 도중에 퇴장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증상만들이 퇴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퇴장한 후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자만심에 가득찬 증상만을 소승의 무리로 간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라빠리야야경의 주석에 따르면 자만심에 가득찬 오백명의 수행승들을 교화하여 마침내 모두 아라한이 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점이 대승불교 경전과의 차이점이다. 후대에 편집된 법화경에서 증상만의 모델이 아마도 물라빠리야야경의 오백명의 수행승이었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길레
그렇다면 브라만 출신의 오백명의 비구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은 어떤 내용일까. 대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길레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그리고 전혀 기뻐하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냐나몰리 비구의 해설에 따르면 그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도 기뻐하지도 않은 것은 그들이 부처님의 법문의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법문은 어떤 내용일까.
경에서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된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빠알리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의 번역을 원전과 영역과 함께 실었다.
구 분 |
내 용 |
빠알리 원전 |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paṭhaviṃ paṭhavito sañjānāti.
Paṭhaviṃ paṭhavito saññatvā paṭhaviṃ maññati paṭhaviyā maññati paṭhavito maññati paṭhaviṃ me'ti6 maññati. Paṭhaviṃ abhinandati. Taṃ kissa hetu?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
전재성박사역 |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의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인정하지 않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
대림스님역 |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런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런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땅을 땅이라고 인식한다. 땅을 땅이라고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땅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고, 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땅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영역 |
“Here, bhikkhus, the not learned ordinary man, not seeing Great Men, not clever and not trained in the noble Teaching, perceives earth, thinking it's earth, becomes earth, thinks it is mine, delights. What is the reason? I call it not knowing thoroughly. |
1)빠알리어 : Mūlapariyāyasuttaṃ(M1)
2)전재성박사역 : 맛지마니까야 개정판(근본법문의 경 M1, 한국빠알리성전협회)
3) 대림스님역: 맛지마니까야(뿌리에 대한 법문 경 M1, 초기불전연구원)
4)영역: Origin and Behaviour of All Thoughts(M1)
먼저 용어에 대한 번역을 보면 아리야(ariyā)에 대하여 ‘고귀한 님’과 ‘성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영어로는 ‘Great Men’으로 번역 되어 있다.
빠알리어 ariyā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전재성박사는 ‘고귀한 님은 붓다, 연각불과 부처님의 제자를 말한다’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 성자들이란 부처님과 벽지불과 세존의 제자들을 말한다. 혹은 부처님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아리야에 대하여 ‘고귀한 님’과 ‘성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어 번역의 차이이고, 또 단수와 복수의 차이이다.
24가지 모르는 것들
경에서 ‘땅(pathavi)’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적을 지수화풍 사대를 말할 때 그 ‘지(地, earth)’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땅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배우지 못한 보통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땅 뿐만이 아니다. 땅을 비롯하여 물, 불, 바람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사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경에 따르면 모르는 것이 더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
전재성박사역 |
대림스님역 |
영역 |
pathavi |
땅 |
땅 |
earth |
āpa |
물 |
물 |
water |
Teja |
불 |
불 |
fire |
Vāya |
바람 |
바람 |
air |
Bhūta |
존재들 |
존재들 |
the produced |
Deva |
신들 |
신들 |
gods |
Pajāpati |
창조주 |
빠자빠띠 |
Lord of Creations |
Brahma |
하느님 |
브라흐마 |
Brahmā |
Ābhassarā |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신들 |
광음천 |
Radiance |
Subhakiṇṇā |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 |
변정천 |
Supreme Good |
Vehapphalā |
탁월한 과보로 얻은 하느님 세계의 신들 |
광과천 |
Power in the air |
Abhibhu |
승리하는 하느님 세계의 신들 |
승자천 |
the Vanquished |
Ākāsānañcāyatana |
무한공간의 세계 |
공무변처 |
the Sphere of Space |
Viññāṇañcāyatana |
무한의식의 세계 |
식무변처 |
the Sphere of Conscioussness |
Ākiñcaññāyatana |
아무것도 없는 세계 |
무소유처 |
No-thingness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 |
비상비비상처 |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
Diṭṭha |
보여진 것 |
본 것 |
the seen |
Suta |
들려진 것 |
들은 것 |
the heard |
Muta |
감각된 것 |
감지한 것 |
the scented |
Viññāta |
인식된 것 |
안 것 |
the cognized |
Ekatta |
하나인 것 |
동일한 것 |
Unity |
Nānatta |
다양한 것 |
다른 것 |
Diversity |
Sabba |
모든 것 |
일체 |
Omipresence |
Nibbāna |
열반 |
열반 |
Extinction |
이상 24가지 사항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 사항 중에 용어에 대한 번역을 보면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가급적 우리말로 풀어 쓸려고 노력하였고 대림스님의 경우 한역 아함경이나 대승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빠자빠띠(Pajāpati)를 창조주로
용어 중에 빠자빠띠(Pajāpati)가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창조주’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jāpatiṃ: 베다 시대에 빠자빠띠(Pajāpati)는 영역에서 창조주(Lord of Creation)라고도 번역되는 존재로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일역에서처럼 생주신(生主神)이라고 번역한다. 살아있는 뭇삶의 주인이라는 말인데, 제석천과 같은 신들의 제왕의 하나로 신들의 제왕가운데 제석천 다음으로 두 번째 지위를 점한다.
(Pajāpatiṃ, 전재성박사)
빠자빠띠(Pajāpati)를 창조주로 번역한 이유는 이 말 뜻 자체가 중생들의 주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영역에서도 Lord of Creation라 하여 창조주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 빠자빠띠는 욕계의 천상에서 제석천 다음으로 두 번째 위치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유일신교 창조주 이미지와 비슷하다.
창조주는 악마(마라)
이렇게 전재성박사가 빠자빠띠(Pajāpati)에 대하여 창조주라고 번역한 것과 비교하여 초불의 대림스님은 원어 그대로 빠자빠띠로 하였다.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마라(Māra)를 ‘빠자빠띠’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이 마라는 타화자재천의 신의 세계에 산다. 1) 미모를 갖추고 수명이 길고 큰 행복을 가진 빠자빠띠를 보거나 듣고는 즐기면서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2) 빠자빠띠의 상태를 얻고서는 나는 중생들의 왕이고 지배자라고 자만을 일으키면서 빠자빠띠를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3) 빠자빠띠는 항상하고 영원하다거나 혹은 단멸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지 못하고 힘도 없고 정진력도 없이 운명과 우연의 일치와 천성의 틀에 짜여서 여섯종류의 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생각하면서 빠자빠띠를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MA.i.33~34)
빠자빠띠(Pajāpati, Sk. Prajāpati, 쁘라자빠띠, 창조의 신)는 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 인도의 신이다. 베다에서는 인드라나 아그니스 등과 같은 베다 문헌의 가장 유력한 신들을 쁘라자빠띠(Prajāpati)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위에서 인용하였듯이 마라가 바로 빠자빠띠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자는 빠알리 음가대로 빠자빠띠로 음역을 하였다.
마라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마라 견책 경’(M50) 2절의 주해를 참조할 것.
(Pajāpati 주석, 대림스님)
An attempt to depict the creative activities of Prajapati,
a steel engraving from the 1850s
초불의 대림스님 주석에 따르면 빠자빠띠의 뜻이 두 가지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마라’이고 또 하나는 ‘창조주’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빠자빠디는 악마라는 뜻이고, 베다 문헌에 따르면 창조주가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불의 경우 주석서를 중시하기 때문에 빠자빠띠를 마라로 본다고 하였다.
주석서의 내용을 존중한다면 빠자빠띠를 악마로 번역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초불의 경우 주석서의 내용대로 빠자빠띠가 악마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악마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음가대로 빠지빠띠로 번역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빠자빠띠에 대한 해석이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와 초불의 대림스님의 다름을 알 수 있다. 주석서의 내용대로 라면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악마일 것이다. 주석서 의견을 존중한다면 창조주는 악마임에 틀림 없다.
왜 하느님이라 번역하였을까?
다음으로 브라흐마 (Brahma)에 대한 번역어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에서는 음가대로 ‘브라흐마’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에서는 브라흐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에 비하여, 초불의 경우 때에 따라 범천이나 브라흐마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라흐마는 한역으로 범천이라 한다. 이 단어가 쓰이는 용례는 대범천과 여래와 바라문, 부모, 장자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으로 번역된 브라흐마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전재성박사의 맛지마니까야 부록에 있는 ‘불교의 세계관’에 실려 있는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미세한 물질의 세계, 즉 색계에 사는 존재(色有: rupabhava)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들의 하느님 세계(범중천)에서 궁극적인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진 신들의 하느님 세계(색구경천=유정천)에 이르기까지 첫 번째 선정에서 네 번째 선정에 이르기까지 명상의 깊이를 조건으로 화생하는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이 세계들은 첫 번째 선정의 하느님 세계(초선천)에서부터 청정한 삶을 사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Suddhavasakayika deva: 정거천은 무정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까지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첫 번째 선정의 하느님 세계부터는 하느님 세계에 소속된다.
(불교의 세계관, 맛지마니까야 부록, 전재성박사)
The Creator of World and the Vedas
이상 색계에 대한 내용이다. 색계에 사는 존재에 대하여 하느님이라고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색계(無色有: arupabhava)에 사는 존재도 역시 하느님이라 한다.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에 사는 신들을 말한다. 이들 세계에 사는 신들 역시 이들 선정에 이르기끼지 명상의 깊이를 조건으로 화현된 존재를 말한다.
이렇게 색계와 무색계를 하늘나라(천상계) 또는 하느님 세계(범천계)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화생되려면 윤리적이고 명상적인 경지를 얼마 만큼 성취하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감각적 쾌락을 기반으로 한 욕계 육욕천과 엄연히 다른 세계이다.
구약의 창조주와 신약의 하느님
욕계 육욕천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투영된 천상이다. 특히 창조주라 불리우는 천상계를 화락천이라 하는데 이는 타화자재천 바로 아래에 있는 천상으로서 두 번째로 높은 욕계천상이다.
화락천의 존재가 고대인도의 창조주라 불리우는 빠자빠띠를 말하는데 불교 주석서에는 마라(악마)라 칭하고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유일신교의 구약에서 보는 성내고 질투하는 창조주의 모습은 화락천의 빠자빠띠와 유사하다.
신약에서의 하느님은 구약에서의 창조주와 다른 진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색계나 무색계 천상의 존재로 보여진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 천상의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불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신 종래 사용해 왔던 광음천, 광과천, 공무변천 등의 한자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능동태인가 수동태인가
다음으로 빠알리어 딧따(Diṭṭh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보여진 것이라고 수동태를 사용하였으나 초불에서는 본 것이라고 하여 능동태로 번역하였다. 영역은 ‘the seen’으로 되어 있어 수동태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빠알리 원전과 영역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빠알리 원전 |
Diṭṭhaṃ diṭṭhato sañjānāti. Diṭṭhaṃ diṭṭhato saññatvā diṭṭhaṃ maññati. Diṭṭhasmiṃ maññati. Diṭṭhato maññati. Diṭṭhaṃ me'ti maññati. Diṭṭhaṃ abhinandati. |
전재성박사역 |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 나서, 보여진 것을 생각하고 보여진 것 가운데 생각하고 보여진 것으로부터 생각하며 ‘보여진 것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보여진 것에 대하여 즐거워 한다. |
대림스님역 |
그는 본 것을 본 것이라 인식한다. 본 것을 본 것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본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본 것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본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본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본 것을 기뻐한다. |
영역 |
Perceives the seen, thinking it is the seen becomes the seer, thinks it's mine and delights. |
인식작용에 대한 것이다. 사물을 보았을 때, 소리를 들었을 때 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이 다섯가지 감각대상과 부딫쳤을 때 인식과정이 일어나는데 전재성 박사는 ‘보여진 것’이라 하여 수동으로 표현하였고, 초불의 경우 ‘본 것’이라 하여 능동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Pps.I.37에 따르면, 보여진 것(Diṭṭhaṃ)은 신체적 시각(maṃsacakkhu: 육안)과 정신적 시각(dibbacakkhu : 하늘 눈, 천안)으로 보여진 것 즉, 형상의 세계를 말한다.
(Diṭṭhaṃ diṭṭhato sañjānāti : 전재성박사 주석)
초불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 것(diṭṭha)은 육안(maṃsa-cakkhu)으로 본 것과 천안(dibba-cakkhu)으로 본 것 모두를 말한다. 이것은 형색의 감각장소(색처, rupayatana)와 동의어이다. 본 것을 본 것이라고 인식한다는 것도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MA.i.37)
(초불, 대림스님 주석)
양 주석을 보니 동일한 출처이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Pps.I.37라 하였고, 대림스님의 경우 MA.i.37라 하였으나 같은 출처라 본다. 그런데 해석은 수동태와 능동태로 서로 다르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주의를 기울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눈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은 ‘눈의 감성(cakkhu-pasāda)’과 ‘형상의 대상(rūpa-ārammaṇa)’과 ‘빛 (āloka)’과 ‘주의 기울임 (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이 중 강한 대상만 받아 들여지고 나머지는 지나친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여지는 것이다.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듣고 싶지 않다고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들려질 뿐이다. 따라서 보여지기 때문에 보는 것이고, 들려 지기 때문에 듣는 것이다. 그 중에 강한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 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눈먼 장님이나 귀먼 사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 나지 않는 것일까. 비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이 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생각이 나는 것이다.
생각이 일아나는 것은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마노)의 문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인데, 이는 ‘심장토대 (hadaya-vatthu)’와 ‘법인 대상(dhamma-ārammaṇa)’과 ‘바왕가(bhavaṇga)’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과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으로 나누고 있는데, 마음의 문에서만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순의문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이라 하고, 오문과 의문 모두를 포함한 인식과정을 ‘잡문인식과정(missaka-dvāra-vīthi)’이라 한다.
이렇게 보여지고, 들어지고, 생각나지는 것에 대한 인식과정에서 가장 강한 대상이 등록된다. 그 외 미약한 대상은 마음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보기 싫어도 볼 수 밖에 없고, 듣기 싫어도 들을 수 밖에 없고, 생각하기 싫어도 생각 날 수 밖에 없는 대상이지만 모두 받아 들여 등록된다면 우리의 머리는 터져 버릴 것이다. 가장 강한 대상만 받아 들이고 나머지는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생각한다면, 내가 본다면, 내가 듣는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이고, 들려 지는 것이고, 생각 나는 것이다.
교학적으로만 알았을 때
이렇게 배우지 못한 보통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무려 24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땅에 대하여 알지 못할까. 왜 존재들에 대하여, 왜 신들에 대하여, 왜 에깟따(Ekatta)에 대하여, 왜 삽바(Sabba) 등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 오백명의 브라만 출신 수행승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도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주제인 땅(지), 물(수), 불(화), 바람(풍) 사대에 대해서 조차 모르니 창조주(Pajāpati) 나 하느님(brahma)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인 것(Ekatta)’ 과 ‘모든 것(Sabba)’, ‘다양한 것(Nānatta)’ 등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열반(Nibbāna) 또한 제대로 알 리 없다.
못 배운 보통사람들이 알고 있는 열반은 잘못 규정된 열반이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여기서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대상을 갖춘 것이나 네 가지 선정에 대한 완전한 향락을 즐기는 것으로 아는 ‘현법열반(現法涅槃, ditthadhamma- nibbāna)’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많이 배웠다는 브라만 출신들이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교학적으로 많이 알았지만 수행을 통해서 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없는 안온을 구하려 배우는 학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구 분 |
내 용 |
빠알리 원전 |
Yopi so bhikkhave bhikkhu sekho appattamānaso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o viharati, sopi paṭhaviṃ paṭhavito abhijānāti. Paṭhaviṃ paṭhavito abhiññāya paṭhaviṃ māmaññi. Paṭhaviyā māmaññi. Paṭhavito māmaññi. Paṭhaviṃ me'ti māmaññi. Paṭhaviṃ mābhinandi. Taṃ kissa hetu? Pariññeyyaṃ tassā'ti vadāmi. |
전재성박사역 |
수행승들이여, 위없는 안온을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어도 위없는 안온을 구하려 배우는 학인이 있다. 그는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나서, 땅을 생각하지 않고 땅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으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땅에 대해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나는 말한다. |
대림스님역 |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는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유학으로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隱)을 원하면서 머문다. 그는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안다. 땅을 땅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잘 알아 [자신을] 땅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을]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땅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땅을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영역 |
Bhikkhus, that bhikkhu who is a trainer not attained to his aim yet, abiding desirous of attaining the end of the yoke, he too knows well earth, knowing earth and become earth, should not think it's mine and delight. What is the reason? I say, should thoroughly understand it.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려는 학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학인(sekha)’은 아라한과를 증득 하지 못한 부처님의 제자를 뜻한다. 그래서 초불번역에서는 ‘유학’으로 번역하였다.
주석적 번역
그런데 초불번역을 보면 유학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빠알리 원전에 없는 말이다. 빠알리 원전에 ‘아라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아눗따라(anuttara)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최상의’ ‘최고의’ 라는 뜻이다. 이루 미루어 주석적 번역임을 알 수 있다.
‘anuttaraṃ yogakkhemaṃ’로 표현되어 있는 문장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위없는 안온’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위없는 유가안은(瑜伽安隱)’이라고 한자를 섞은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유가안은은 요가케마(yogakkhema)의 한역으로서, 유가(瑜伽)는 요가(yoga)의 음역이고, 안은(安隱)은 케마(khema)의 의역이다. 한자어를 섞어 뜻을 보충 하는 것 역시 주석적 번역에 속할 것이다.
반복구문 생략
이후 이어지는 문장은 학인을 주어로 하는 24가지 주제에 대한 반복구문이 이어진다. 그런데 초불의 번역을 보면 “ 그는 물을…불을…바람을…”식으로 되어 있어서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반복구문 생략 없이 모두 실어 놓았다. 이는 빠알리원전과 영역에서도 반복구문 생략 없이 모두 실어져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빠알리원전-맛지마니까야-M1.docx 영역_맛지마니까야-M1.docx
교학 동호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교학으로만 이해 하려 들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안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교학과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
실제로 수행처에서는 교학과 수행을 병행하고 있다. 지도법사가 법문을 하고, 법문이 끝나면 경행과 좌선을 한다, 좌선이 끝나면 인터뷰를 하여 수행지도를 받는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실참수행없이 오로지 교학만 공부하는 경우 “땅을 땅으로 여기고”로 시작 되는 부처님의 법문처럼 실재하는 현상을 알 수 없다. 그런 모임을 수행모임이라 하지 않고 ‘동호회’ 또는 ‘공부모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명(是名) A, 그 이름이 A이다
여기서 “땅을 땅으로 여기고” 라는 말은 마치 금강경의 “A 즉비(卽非) A, 시명(是名) A”에서 “시명(是名) A”를 연상케 한다. 땅을 땅으로 여긴 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름 뿐인 땅을 땅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과 같다. 마찬가지로 하느님(brahma)역시 이름 뿐인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두 24가지가 모두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 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 출신들이 교학만 알았지 실참 수행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을 요소로 보면
이에 대한 적절한 법문이 있다. BBS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시간에 묘원 법사는 지수화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몸에는 땅의 요소와 물의 요소와 불의 요소와 바람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사대라고 하는데, 바로 지수화풍입니다. 우리 몸이 지수화풍이라는 것이 아니고 몸이 이러한 네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분석도 부처님이 치유의 목적을 두고 분석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 몸이라고 아는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을 요소로 분석하신 것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내 몸이라고 알지만, 요소로 보면 몸이 가지고 있는 실재 하는 성품을 봅니다. 그래서 몸을 하나의 물질적 현상으로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년 10월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묘원법사는 몸을 물질로 보고 몸안의 실재하는 성품을 보자고 하였다. 그성품이 지수화풍 사대라는 것이다. 그런 몸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땅의 성품, 물의 성품, 불의 성품, 바람의 성품 등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
이어서 묘원법사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지수화풍 네 가지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식론이에요. 존재는 그 것 자체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이 때의 인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귀결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알면 무아를 알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 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 이야기 우리 많이 들어 보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지극히 사변적인 것이에요. 존재의 실재는 인식을 통해서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관념(개념)과 실재의 문제이에요.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라서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식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보아서 사물을 바르게 통찰 할 수가 있습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년 10월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묘원법사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하여 말하였다. 존재론이라는 것은 실체를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이는 서양철학의 기반이라 한다. 그래서 관념(개념)론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데, 관념론으로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접근해야만 고유의 성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 손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 손이 있습니다. 이 손은 두 가지 의미로써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념으로서의 손과 또 다른 하나는 실재로서의 손입니다.
관념으로서의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입니다. 그런데 이 때 명칭의 손은 하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손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 손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손, 손 명칭을 붙여 보았자 손을 인식할 수 없어요.
그래서 손이 있는지를 알려면 손에 있는 지대인 단단함과 부드러움, 또는 수대인 무거움과 가벼움, 그리고 화대인 따뜻함과 차가움, 그리고 풍대인 진동을 통해서 비로소 손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년 10월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손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경에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땅을 땅으로 여기고”라든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여기고”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손이 손임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을 통하여 단단함(지대), 무거움(수대), 따뜻함(화대), 진동(풍대) 등 사대를 인식하였을 때 손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손의 실재는 매 순간 변한다. 지수화풍 사대의 성품으로 보았을 때 매순간 느낌이 변하기 때문에 손이라는 실재에서 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 깨달음이 없는 이유
그러나 손을 존재로 보고 단지 손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을 때 변하는 느낌을 볼 수 없어서 항상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이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 하는 것과 똑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서양철학도 이와 마찬가지라 한다.
몸을 존재의 개념으로 보면 사대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의 극명한 출발이 여기서부터 갈라집니다. 서양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대상을 인식으로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어요. 거기에선 무상, 고, 무아를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열반도 없습니다. 오직 존재를 인식으로 접근 하는 불교에서만 무상, 고, 무아를 보아서 집착이 끊어진 열반에 이르러요.
(묘원법사,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년 10월 29일자,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5:사대)
이 세상의 어느 종교에도 불교 이외에 열반은 없다고 한다. 열반은 오직 뷸교에만 있는데, 이는 몸을 존재로 보지 않고 인식으로 보기 때문이라 한다. 딱딱함, 따뜻함 등 느낌으로 보니까 바로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이 드러나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그렇지 않은 종교는 창조주(Pajāpati)나 하느님(brahma) 등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귀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학과 수행의 양날개로
맛지마니까야의 첫 번째 경 물라빠리야야경(Mūlapariyāyasutta, M1)에 등장하는 오백명의 수행자들은 자만심이 매우 강하였다. 교단에 들어 오기 전에 이미 3베다에 통달한 그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이해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었다고 본다. 이론으로 알고 교학만 늘었지 수행을 통하여 안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부처님이 24가지에 이르는 근본 법문을 하였는데, 법문을 듣고서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알지 못한 것이고, 부처님은 법문으로서 그들을 나무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행이 뒷바침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땅 등 24가지에 대하여 존재론적 개념으로 알지 말고, 인식론적으로 ‘실재’를 알아차리는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손에서 느끼는 딱딱함으로 지대를 느끼고, 가벼움으로 수대를 느끼고, 따뜻함으로 화대를 느끼고, 진동으로 풍대를 느낀다면 그 외 것은 실재 하지 않고 단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을 땅으로 여기고”라는 말은 개념화 된 것을 말하고,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라는 말은 개념이 구조화 되고 사념이 확장된 것으로서 ‘빠빤짜(papañca 戱論)’라 볼 수 있다. 더구나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희론(빠빤짜)을 즐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느님, 열반 등 개념화 된 모든 것이 해당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새가 양 날개로 날듯이 교학과 수행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맛지마니까야 첫번째 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2012-1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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