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1. 27. 12:47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생명은 귀중한 것이다. 잘난 자나 못 난자 역시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런 생명을 불꽃에 비유할 수 있다.

 

산불이 났을 때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에 솟구친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기세가 무섭다. 이처럼 불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리기도 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불이 없다면 밥을 해 먹을 수 없고 불을 때서 방바닥을 따뜻 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가전제품으로 밥도 해먹을 수 있고 난방도 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불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아궁이의 불이나 산불이나 불의 특성으로 본다면 똑같은 불이다. 땔감이 다를 뿐 불의 특징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쑨다리까]

“그대는 어떤 가문 출신입니까?”

 

[세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진리로 길들여지고 감관의 제어를 갖추고

지혜를 달성하고 청정한 삶을 이룬님,

제사가 정해졌으니 마땅히 그를 초빙하라.

올바른 때에 공양 받을 만한 이에게 헌공하라.”

 

(순다리까경-Sundarikasutta-쑨다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9(1-9), 전재성님역)

 

 

바라문 순다리까가 강언덕에서 불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주변을 보니 두건을 쓴 부처님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두건을 벗자 삭발한 모습을 보고 이 자는 빡빡 깍은 중이네하며 돌아 가려 했다. 아마도 천한 가문의 사람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문 순다리까는 바라문 중에서도 빡빡깍은 자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대는 어느 가문 출신입니까?”라고 물어 본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불의 비유를 들어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가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이렇게 비천한 가문에서도 현자가 나올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불의 비유를 들었는데,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아쌀라야나여,

또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왕위를 이어 받은 왕족계급의 왕이 여러 출신의 사람 백여 명을 모아놓고

 

‘존자들이여,

귀족 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당신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혀라.

 

존자들이여,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당신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혀라.’

 

고 했다고 합시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

 

(앗살라야나경-Assalāyanasutta-아쌀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전재성님역)

 

 

불은 화염과 광채와 광명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땔감에 따라 불의 특징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귀한 자가 전단향의 목재를 땔감으로 하면 그 불꽃이 더 광채가 나고 더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천한 자가 길거리에서 주어온 잡목을 땔감으로 해도 불의 화염이나 광채, 광명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미천한 가문에서도 현자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가문이나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의 비유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지만 또 한편으로 평등의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다. 어느 땔감이든지 불꽃이 일어난다는 그 자체는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귀한 자나 미천한 자, 잘난 자나 못난 자 모두 불꽃 같은 생애를 살아 간다. 그러나 그 불꽃이 꺼질 때도 있을 것이다.

 

땔감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한 번 타오르는 불꽃은 여간해서 꺼지지 않는다. 땔감이 계속 공급되는 한 불꽃은 끝까지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뭇삶들에게 있어서 계속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딧따빠리야야경-Ādittapariyāya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3-6), 전재성님역)

 

 

연소경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경은 부처님이 세 번째로 설법한 경이 한다. 깟사빠 삼형제의 지도 아래 천여 명이 불을 숭배하는 결발행자가 있었는데,  부처님이 신통의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킨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인하여 태어남이 있다고 하였다. 시각, 청각 등 오욕락으로 인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땔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욕심을 내면 낼 수록, 성을 내면 낼수록 땔감의 양은 점점 많아져 불이 그 만큼 더 오래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의 비유로 설명한 윤회

 

이와 같이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대표 되는 번뇌는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땔감이 된다. 그래서 불의 비유를 들어 윤회를 설명하기도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재생연결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불의 비유를 들기도 한다.

 

 

등불이 하나의 심지로부터 다른 심지로 옮겨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불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어느 한 법도 과거생에서 이생으론 혹은 이생에서 내생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청정도론, 제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22절)

 

 

여기 등불이 있는데 다른 등불로 옮겨 갈 수 없다. 현재 등불은 남아 있는 기름으로 인하여 계속 타오르는데, 그 불을 바로 이전의 불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촛불을 다른 초에 붙이듯이 ....”

 

하지만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임종의 순간에 다시 다른 생명체의 수정란에 반영되어 나의 내생이 시작됩니다.
식이 매 찰나 생멸한다는 점에서 '무상 -> 무아'이고
현생의 마지막 식이 내생의 첫 식으로 이어지기에 '윤회'합니다.
마치 촛불을 다른 초에 붙이듯이 ....

 

(김성철교수, 무아와 윤회에 대한 김성철 교수님의 답글)

 

 

윤회한다고 하여 촛불을 다른 초에 붙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마치 윤회의 주체가 있어서 몸만 바꾸는 듯한 환생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윤회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월간 해인에서 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우유가 버터로 되고 버터가 치즈로 될 때, 우유의 상태에서 버터의 상태로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존재는 없다. 단지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변화하면서계속이 있는 것이다.

 

나가세나는 다른 비유를 든다. 밤에 등불을 켜 두면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탄다. 이럴 경우“새벽 등불은 밤중 등불과 같고 밤중 등불은 초저녁 등불과 같습니까’‘아닙니다’ 등불은 계속해서 타고 있으므로 한 찰라도 같을 리 없다. 그렇다면 ‘새벽, 밤중, 초저녁의 등불은 각각 다른 등불입니까’ ‘아닙니다. 온 밤을 같은 등불이 탑니다’ 그 등잔에 그 등불인 것이다. 초저녁 등불에서 새벽 등불까지 계속되는 고정 불변의 존재가 없으면서도 등불은 계속되는 것이다.

 

(호진스님, 밀린다왕문경에서의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월간해인 )

 

 

호진스님은 윤회하는 것에 대하여 변화하는 것이라 하였다. 마치 우유가 버터로 변하듯이 단지 변화만 있을 뿐이라 한다.

 

이는 조건이 바뀐 것을 말한다. 우유가 버터로 바뀔 만한 조건이 형성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등불 역시 밤새도록 타오르지만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같은 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유의 비유와 불의 비유는 어린 아이 비유로도 설명된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 달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윤회하는 존재에 대하여 나가세나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관계라 하였다. 이는 불일불이(不一不異)를 말한다.

 

망고씨와 망고나무 비유

 

그런데 무아윤회론에서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업과 과보에 대한 것이다. 윤회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은 사람이 지은 대로 받는 것이 원칙인데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가는 영혼체와 같은 존재가 없다면,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호진스님은 밀린다왕과 나가세나의 토론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망고를 홈치다가 망고 나무 주인에게 붙잡혀 왕에게 끌려와서, ‘내가 가지고 간 망고는 이 사람의 망고는 아닙니다. 이 사람이 심은 망고와 내가 가지고 간 망고는 다른 것입니다’하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망고 도둑의 논리는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썩어 버렸고 자기가 가지고 간 망고는, 망고주인이 심은 망고에서 썩어 나와 그것이 자라 망고 나무가 되어 거기에서 열린 망고이므로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와 자기가 따간 망고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절도죄竊盜罪’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망고 도둑의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정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둑이 홈친 망고는 망고 주인이 심은 망고에서 나온 것이므로 망고 주인의 망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회에서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영혼 같은 존재가 없고, 죽는 존재와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지만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죽은 존재가 지은 업에 의해 재생했으므로 앞 존재가 지은 업은 뒷 존재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나가세나의 표현을 빌린다면 “다시 태어나는 존재와 죽은 존재와는 다르지만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죽은 존재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전에 지은 죄()에서 해방된다고는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진스님, 밀린다왕문경에서의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월간해인 )

 

 

망고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망고씨는 망고나무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건만 맞으면 발아 되어 망고나무가 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이전의 죽은 존재와 다르지만, 새로 태어난 존재는 이전의 존재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업의 주인, 상속자가 된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업에서 결코 해방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mmasakkā māava,               깜마삭까 마나와

sattā kammadāyādā                삿따 깜마다야다

kammayoni                        깜마요니

kammabandhu                      깜마반두

kammapaisaraā.                 깜마빠띠사라나

Kamma satte vibhajati          깜망 삿떼 위바자띠

yadida hīnappaītatāyāti.      야디당 히납빠니따따야띠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a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이렇게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는 윤회의 원인 된다. 그래서 탐욕의 불길, 성냄의 불길, 어리석음의 불길이 타오르면 그 땔감을 재료로 하여 불은 계속 타오를  것이라 한다. 이렇게 땔감이 남아 있는 한 불길은 계속 타오를 수 밖에 없는데 죽는다고 해서 불이 꺼져 버리는 것일까.

 

인터넷시대의 단멸론자들

 

인터넷시대에 볼 수 있는 현상이 단멸론이다. 그들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데 주장하는 것을 보면 외도사상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단멸론 카페까지 만들어 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다. 그런 단멸론자의 주장중에 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서에서는 “5/12/18(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
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교의 윤회 개념을 정의한다면
5
온이 현세에서의 찰나생 찰나멸 연기의 연속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만
이것을 뻥튀겨서 그러한 연속관계가 인간 사후에도 그대로 재생연결된다고 보는 것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제법무아] 사상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봅니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도 반하는 것입니다.
초가 다 타버리면 촛불도 꺼져버리지요.

(단멸론자, http://cafe.daum.net/realbuddhism/2Mwv/1326?docid=1E6C22Mwv132620101105134033)

 

 

인터넷단멸론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죽음과 함께 정신도 육체도 모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의 비유를 들고 있다. 초가 다 버리면 촛불이 꺼져 버리듯이 누구나 죽면 단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되는 것이 연기법인데 매우 단순하게 활용한다. 그것은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육체를 대입하고 저것에 정신을 대입하면,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논리에 딱 들어 맞는다.  

 

조건 발생적 연기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다. 조건 발생적 연기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기법이 단멸론으로 활용될 것을 예상하였음인지 부처님은 연기송에 이어 반드시 다음과 같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이와 같이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는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반드시 함께 설하였다. 따라서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상호의존 연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삿된 주장으로서 육사외도의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아라한이든 중생이든 다 똑같다고?

 

또 하나 단멸론자들의 자주 인용하는 정형구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라한은 윤회(힌두교적인 의미의 윤회)에서 벗어나고,
아라한이 아닌 모든 중생은 윤회한다는 것도 모순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아라한이든 중생이든 다 똑 같은 무상연기존재입니다.
아라한이 윤회한다면 중생도 윤회할 것이고,
아라한이 윤회하지 않는다면 중생 또한 윤회하지 않는 것이지요.

 

(단멸론자, http://cafe.daum.net/realbuddhism/2Mwv/1326?docid=1E6C22Mwv132620101105134033)

 

 

단멸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번뇌 다한 아라한이나 범부중생이나 죽게 되면 다 똑 같이 단멸한다는 논리이다. 아라한이라고 해서 윤회가 끝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라고 해서 윤회한다는 것은 모순이라 한다. 아라한이든 범부중생이든 모두 무상한 존재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에 따라 정신도 또한 함께 소멸 되어 남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이런 주장은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이자 유물론자인 아지따 케사깜발린의 주장과 너무나 유사하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이 있을 때에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네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흙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죽은 자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재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는 견해를 일으킨다.

 

(낫티딘나경-Natthidinnasutta-보시도 없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4:5(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육사외도 아지따 께사깔발린의 주장을 비판 하였다. 이중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는 유물론자의 주장은 오늘날 인터넷단멸론자들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인터넷 단멸론자들은 아라한이든 중생이든 다 똑 같은 무상한 존재들들이다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자를 아라한에 대입하고, 어리석은 자를 범부중생에 대입하면 너무나 똑 같은 말이 된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이나 번뇌로 가득찬 범부중생들이나 죽으면 누구나 단멸한다는 것이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다. 마치 부처님이 후대 단멸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할 것을 예측하고 법문한 것처럼 보인다.   

 

불이 꺼진다면

 

땔감이 다하면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거대한 불기둥을 내뿜고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는 산불도 나무가 다 타버리고 나면 더 이상 불이 나지 않을 것이다. 촛불이나 등불 역시 마찬가지이다. 초가 다 타버리고 기름이 다 소진 되면 더 이상 불꽃을 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뭇삶에 있어서 시각이나 청각 등에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윤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불꽃이 사라진 상태는 어떤 것일까. 악기왓차곳따경(M72)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은 풀과 섶의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겨집니다.”

 

(악기왓차곳따경 -Aggivacchagotta su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Candle off

 

 

 

불이 꺼진다는 것은 열반을 의미한다. 이는 연료가 다 탓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료는 다른 곳에서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공급되어진 것을 말한다. 탐욕이라는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과보가 생기듯이, 탐욕을 일으키는 연료가 있기 때문에 불이 타올라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윤회를 일으키는 연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불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연료공급의 중단은 누군가 중단 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른 중단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연료가 중단 되었을 때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이를 열반이라 한다.

 

꺼진 불로 묘사된 열반

 

꺼진 불로 묘사된 것이 열반이다. 꺼진 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꺼진 불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다. 단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꺼졌기 때문에, 열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열반은 서술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 -Aggivacchagotta su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절대로 있다(절대유)’고 여기는 영원주의와 절대로 없다(절대무)’고 여기는 허무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부처님의 열반에 대하여 무주처열반, 법신상주, 허공속의 몸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열반은 말이나 글로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단지 연료가 없으면 불이 꺼지듯이,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에 드는 것 또한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2012-11-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