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이란? 눈먼 거북이 비유와 수행자의 허물벗기
물방게의 변신
EBS 다큐 프로를 보았다. ‘한국의 강 3부, 생명을 품다’라는 프로이다. 프로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나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작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곤충에서 나비가 되는 장면이었다.
물속에서 살던 물방게가 물 밖으로 나와 변신하는 장면이다. 아이들 장난감 로봇이 자동차로 변신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장면은 놀라움 그자체이다. 더구나 남겨진 형체를 보면 마치 시체를 보는 것 같다.
마치 몸에서 또 몸이 빠져 나오는 듯한 변신인데, 변신된 몸체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날개가 달린 모습을 보면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옷을 갈아 입는 듯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환골탈퇴하는 장면이 경이롭다.
세상을 살다보면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의 깜냥(感量)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이를 ‘경이(驚異)롭다’고 한다. EBS다큐 프로에서 본 생명의 탄생 역시 경이로운 것이었다. 새의 알이 부화하는 장면이라든가, 부화된 새가 급격히 자라서 비상하는 장면을 보면 경이로움을 넘어서 ‘기적’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
어떤 이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다고 하였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느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 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차동엽신부, "신이 준 건 자유의지 --- 그것 잘못 쓸 땐 고통")
이병철 전회장의 영적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송이 피어난 꽃을 보면서 신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신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필연적으로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 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명과 빅뱅
번데기 모양의 곤충에서 날개 달린 나비로 변신 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작은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태어 나는 것 역시 기적이다.
열달 동안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란다. 그런데 태어 날 때 보면 눈, 코, 입등 사람의 형체를 갖추어 태어난다. 열달 동안 무슨일이 일어 났을까. 태내에서 영양을 공급받아 자란 것일까. 열달동안 아이가 뱃속에 자랐다기 보다 ‘폭발’하였다는 표현이 적합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시작 된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 되었듯이 한 생명 역시 대폭발로 시작 된 것이다.
눈먼 거북이 이야기
EBS다큐에서 남생이알이 부화되는 것을 보았다. 땅속에서 부화된 새끼 남생이가 본능적으로 물을 향하여 간다. 등에는 딱딱한 각질이 동그란 모양으로 얹혀져 있다. 얹혀진 각질을 운명처럼 지고 물속으로 달려 가는 남생이 새끼 모습에서 인간으로 태어 난 것이 축복과도 같음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눈먼 거북이 이야기이다. ‘맹구우목’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들이 법문할 때 즐겨 사용하는 비유이다. 인간으로 태어 나기도 어렵지만 불법만나기도 그에 못지 않게 어럽다는 것을 비유해서 주로 법문한다.
인간지위를 얻기 어려운 이유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스님들이 하는 이야기와 약간 다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눈먼 거북이 비유를 하는 것은 같지만 특히 악처에 대하여 비중있게 다룬다. 그래서 악처에 떨어진 자가 인간지위를 획득하는 것에 대하여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 있을 가능성 보다 더 희박하다는 것이다. 한 번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한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동물이나 곤충, 어류 등 축생계으로 떨어진 중생들이 인간의 지위를 획득할 가망이 거의 없는 것은 ‘약육강식’때문이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것을 말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강이나 호수에서
EBS다큐 프로를 보면 매우 평화로운 광경을 보여 준다. 푸른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가고, 강위에는 물새들의 유유하게 노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수중에 대면 상황은 달라진다. 먹이 사슬에 따른 약육강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유유하게 물위를 헤엄치는 물새들 역시 끊임 없이 먹이를 찾아 다닌다. 먹이를 물어서 갓 부화환 새끼에게 먹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미새가 물어 준 먹이를 받아 먹은 새끼는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자란다. 주어진 기간내에 성장해서 독립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 성장속도는 차라리 폭발에 가깝다. 이 모두가 먹이 사슬에 따른 희생물이 공급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강이나 호수가 사실 알고 보면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의 비정한 생존경쟁의 현장인 것이다.
먹이 사슬에 따른 생존현장에 법이 있을 리 없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이로 하여 개체가 유지되고 종족이 번식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매일 살생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선행공덕을 쌓을 수 없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동물이나 곤충 등 축생계에 떨어지면 인간의 지위에 오를 가망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인간지위를 받더라도
그런데 경에 따르면 인간의 지위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럴경우 어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약육강식의 동물, 곤충, 어류 등 축생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받는 것이 눈먼거북이 비유보다 더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나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지위는 낮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인간이 되도 비천한 가문이나 여러가지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머무는 기간이 극히 짧은 이유
문제는 인간으로 머무는 기간이 극히 짧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신구의 삼업에 따른 악행의 결과로 본다. 이는 오랫동안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과보로 볼 수 있다.
비록 인간의 지위를 획득했을지 몰라도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쉽게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음행을 하는 등 오계를 어기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업을 짓기 때문에 더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괴로운 곳(아귀), 나쁜 곳(아수라), 타락한 곳(축생), 지옥’이라 한다.
죽을 수도 없는 지옥고
경에 따르면 악처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지옥에 떨어진 자에 대한 고통을 보면 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다음에 지옥의 옥졸들은 그의 발을 위로하고 머리를 아래로 매달아 뒤끓고 뜨겁고 불타고 시뻘겋게 달궈진 가마솥에 던져 넣는다. 그는 거기서 끓어서 삶아진다. 그는 한번은 위로 떠오르고 한번은 가라앉고, 한번은 옆으로 간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매우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 지옥에 떨어진 존재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만일 죽어서 끝난다면 여러 번이라도 죽을 수 있지만, 죽지 않게 하는 것은 그만큼 더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악업이 다하면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지옥과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유일신교의 지옥은 한 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지옥으로 묘사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맛에 탐착하는 자들은
이렇게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곳이 지옥이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축생의 경우 잡아먹고 또 잡아 먹히기가 다반사이다. 그래서 죽으면 또 태어난다. 태어나면 또 잡아먹고 잡아 먹히기를 반복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맛에 대한 탐착이 있기 때문에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전개 되어 축생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 등 욕심이 많고 어리석은 자는 축생(태생, 난생)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런 자들을 요즘에도 볼 수 있다.
TV를 보면 경쟁적으로 음식에 대하여 보도 하고 있다. 맛집탐방이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여 준다. 특히 살아 있는 생물을 솥에 삼거나, 심지어 날 것으로 먹는 장면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또 물가나 바닷가에서 낚시 하는 장면도 보여 주고 그 자리에서 회쳐 먹는 장면도 보여준다. 이 모두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
맛에 탐착하여 살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행위는 축생과 다름 없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축생(태생, 난생)계에 형성될 조건이 ‘우치’와 ‘탐욕’인데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몸이 파괴 되어 죽은 후에 그에 대한 과보로서 물속에 태어나고 죽인 생물의 동료로 태어 날 것이라 한다.
수행자의 변신
EBS다큐프로에서 본 물방게의 변신 장면은 작은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물방게가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날개가 달린 전혀 다른 몸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도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sabbaṃ vitathamīdanti vītarāgo,
So bhikkhu jahāti orapāraṃ urago jiṇṇamiva tacaṃ purāṇaṃ.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탐욕을 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우라가경-Uraga Sutta- The Snake-뱀의 경 11번 게송, 숫따니빠따 Sn1.1, 전재성님역)
파충류나 곤충은 성장함에 따라 허물이나 표피를 벗는다. 뱀도 파충류이기 때문에 허물을 벗는데 이를 비유하여 수행자도 역시 허물을 벗듯이 ‘이 세상도 저 세상도(orapāra)’ 다 버려야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 세상은 ‘욕계’에 해당되는 것이고, 저 세상은 ‘색계와 무색계’에 해당 되는 것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버린 다는 것은 그 어느 세계에도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마치 묵은 허물을 벗듯이 이 세상도 저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남이란?
수행자가 수행을 하여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태어 나지 않았을 때 이는 큰 변화이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 보다 곤충이 날개를 가진 나비로 변신 하는 것 보다 더 극적인 변신이다. 이는 다름아닌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기 때문이다.
중생에서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는 것은 아니라 한다. 단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이라 한다. 세상은 이전이나 이후나 그대로 있는 것이다. 바뀐 것은 마음이다. 그래서 제 2의 탄생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제 1의 탄생과 비교하면, 제1의 탄생이 육체적 폭발로 인한 육체적 탄생이라면, 제 2의 탄생은 정신적 폭발로 인한 허물벗기라 볼 수 있다. 이런 변신은 인간의 지위를 가졌을 때 유리하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 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스런 것은 약육강식의 축생, 죽을 수도 없는 지옥을 면하는 것이라 한다.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에 놓여 있는 태생과 난생, 습생의 축생계의 태어남과 죽음은 다반사인데, 태어남이란 바로 이들 축생계를 지칭하는 것이라 한다. 이에 반하여 인간으로 태어남은 눈먼거북이 비유처럼 희유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태어남이란 말은 인간 보다 축생계에 쓰이는 말이라 한다.
2012-12-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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