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홀로 있어도, 두려움과 공포의 경(M4)
한번 무섬증이 들자
들은 이야기이다. 어느 수행자가 홀로 산속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무서움이 들더라는 것이다. 한번 무섬증이 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하산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맛지마니까야에 나홀로 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숲속에서 홀로 수행하는 수행자가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모두 12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 요인은 무엇일까. 양번역서를 비교해 보았다.
두려움과 공포의 경(M4)
불교에 대하여 공부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 많이 아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방법도 있고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도 있다.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은 경전을 접하면 된다.
현재 빠알리니까야의 경우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하나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물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전연구원(초불)의 번역물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번역물이 있다는 것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있어서 축복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바야베라와경(Bhayabheravasutta, M3)이 있다. 우리말로 ‘두려움과 공포의 경’이라고 번역되었다. 숲속에서 홀로 수행과정에 있어서 발생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양번역서와 원본, 영역을 비교하여 보았다.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 빠알리원본: Majjhima Nikāya, Bhayabheravasuttaṃ M4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두려움과 공포의 경 M4
- 초기불전연구원(초불): 맛지마니까야 중간길이로 설하신 경, 두려움과 공포 경 M4
- 영역: Majjhima Nikāya , Great Fear M4
1.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Ye'me bho gotama kulaputtā bhavantaṃ gotamaṃ uddissa saddhā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ā bhavaṃ tesaṃ gotamo pubbaṅgamo. Bhavaṃ tesaṃ gotamo bahukāro bhavaṃ tesaṃ gotamo samādapetā. Bhoto ca gotamassa sā janatā diṭṭhānugatiṃ āpajjatīti. |
전재성박사역 |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이들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존자 고따마에게 귀의하여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그들보다 앞서가는 자이며, 존자 고따마께서는 그들을 돕는 자이며, 존자 고따마께서는 그들을 안내하는 자입니까? 또한 그 사람들은 존자 고따마를 본보기로 삼는 것입니까?” |
초불역 |
“고따마 존자시여, 이들 좋은 가문의 아들[善男子]들은 고따마 존자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집을 나와 출가했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그들의 지도자이시고, 고따마 존자께서는 그들을 돕는 분이시며 고따마 존자께서는 그들의 인도자이십니까? 이 사람들은 고따마 존자님을 본보기로 삼습니까?” |
영역 |
“Good Gotama, to those sons of clansmen who have gone forth from the household and put on robes, out of faith, good Gotama, is the foremost, is of great help, is the instigater, and they in turn become imitations of good Gotama.” |
빠알리어 꿀라뿟따(kulaputtā)가 있다. 이를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과 ‘좋은 가문의 아들[善男子]들’이라고 번역 되었다. 한자어로 선남자(善男子)라 한다. 빠알리사전에 ‘young man of a good family’으로 영역되어 있다.
빠알리어 중에 ‘사두(sādhu)’가 있다. 이는 ‘좋다(good)’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선재(善哉)’라고 번역되었다. 금강경에 ‘善哉 善哉’라고 된 문장이 있는데, 이는 “훌륭하고 훌륭하도다”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어느 스님은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그려, 그려”라고 번역한 것을 보았다.
출가한 것에 대하여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라고 번역 되어 있다. 이는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ā’에 대한 것이다. Agāra가 집(house)을 의미하고, Anagāriya가 집없음(homelessness)을 의미하고, pabbajitā가 승려가 되는 것 (become a monk)을 뜻하기 때문에, 빠알리어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ā는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라는 뜻이 된다. 이 문구는 정형화 되어 있어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초불번역을 보면 ‘집을 나와 출가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영역은 ‘from the household and put on robes’으로 ‘집으로 나와 승복을 입다’라고 되어 있다.
2. 신체적 행위가 청정하지 않은 자가 홀로 숲에 있을 때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Tassa mayhaṃ brāhmaṇa etadahosi: ye kho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parisuddhakāyakammantā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Aparisuddha2 kāyakammantasandosahetu have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aṃ bhayabheravaṃ avhayanti3, na kho panāhaṃ aparisuddha2 kāyakammanto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risuddhakāyakammantohamasmi. Ye hi vo ariyā parisuddhakāyakammantā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ṃ aññatamo4. Etamahaṃ brāhmaṇa parisuddhakāyakammantataṃ5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ṃ araññe vihārāya. |
전재성박사역 |
바라문이여, 그 때 나는 ‘어떠한 수행자들이든 성직자들이든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하지 않고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들어가면,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 수행자 성직자들은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신체적인 행위를 청정하게 하지 않고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지 않는다. 나는 신체적행위를 청정하게 한다. 나는 신체적 행위를 청정하게 한, 고귀한 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간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신체적 행위의 청정함을 보고 숲속에 머무는 데 커다란 안도감을 발견했습니다. |
초불역 |
“바라문이여, 그 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살생 등] 몸의 행위[身行]가 청정하지 못한 자들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하게 되면, 몸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 올것이다. 그러나 나는 몸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한 채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나는 몸의 행위가 청정하다. 나는 몸의 행위가 청정한 성스런 자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한다’ 바라문이여,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이 몸의 행위가 청정함을 보면서 더욱더 숲 속에 머무는 데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
영역 |
Those recluses and brahmins impure in bodily actions abiding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come to much fear and evil owing to their impurity. I abide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pure in bodily actions The noble ones are pure in bodily actions, am one of them, and abide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with much conf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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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홀로 수행하기에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는 12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번째 요인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 행위가 청정하지 않은 자가 홀로 숲에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켜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자가 홀로 숲에 그것도 그믐밤에 앉아 있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몸으로 지은 죄업이 없어야 숲에서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용어 비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
성전협회 |
초불 |
영역 |
samaṇā |
수행자들 |
사문 |
Recluses(은둔자들) |
brāhmaṇā |
성직자들 |
바라문 |
brahmins |
kāyakamma |
신체적인 행위 |
[살생 등] 몸의 행위[身行] |
bodily actions |
3. 탈역되고 생략되고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Tassa mayhaṃ brāhmaṇa, etadahosi: ye kho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parisuddhājīvā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aparisuddhājīvasandosahetu have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aṃ bhayabheravaṃ avhayanti, na kho panāhaṃ aparisuddhājīvo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risuddhājīvohamasmi. Ye hi vo ariyā parisuddhājīvā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ṃ aññatamo. Etamahaṃ brāhmaṇa parisuddhājīvataṃ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ṃ araññe vihārāya.
|
전재성박사역 |
(탈역됨) |
초불역 |
…생계[命]가 청정하지 못한 자들이(생략구문사용) |
영역 |
Those recluses and brahmins in livelihood impure abiding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come to much fear and evil owing to their impurity. I abide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pure in livelihood. The noble ones are pure in livelihood, am one of them and abide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with much confidence.. |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행위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지와(jīvā)’이다. 이를 ‘생활’ 또는 ‘생계’라 번역된다. 영역은 livelihood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구절이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에서는 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불의 경우 구문이 생략되어 있다.
초불번역의 특징인 반복구문의 경우 …를 이용하여 단어만 나열하는 생략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말의 행위[口行]가 청정하지 못한 자들이… 마노의 행위[意行]가 청정하지 못한 자들이…생계[命]가 청정하지 못한 자들이’ 식으로 반복구문이 생략 되어 있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반복구문의 생략없이 모두 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해제의 일러두기를 보면 ‘모든 경에서 생략된 내용들은 모두 복원해서 독자가 알기 쉽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말 하나하나가 고유한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의 번역에서 ‘jīvā’와 관련된 절이 탈역된 것은 왜 이런 현상이 벌어 졌는지 알 수 없다. PTS본과 영역에도 모두 실려 있기 때문에 실수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탈역 되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4.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Tassa mayhaṃ brāhmaṇa etadahosi [PTS Page 020] [\q 20/] ye kho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uṭṭhassati asampajānā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muṭṭhassati asampajānasandosahetu have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aṃ bhayabheravaṃ avhayanti3. Na kho panāhaṃ muṭṭhassati asampajāno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upaṭṭhitasatihamasmi.3 Ye hi vo ariyā upaṭṭhitasatī araññe vanapatthāni 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ṃ aññatamo4. Etamahaṃ brāhmaṇa upaṭṭhisatitaṃ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ṃ araññe vihārāya. |
전재성박사역 |
바라문이여, 그 때 나는 ‘어떠한 수행자들이든 성직자들이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면서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들어가면,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올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 수행자 성직자들은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면서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지 않는다. 나는 새김을 확립한다. 나는 새김을 확립하는 한, 고귀한 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간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새김이 확립된 것을 보고 숲속에 머무는 데 커다란 안도감을 발견했습니다. |
초불역 |
“바라문이여, 그 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마음챙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는 자들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하게 되면, 마음챙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는 것으로 인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 올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챙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나는 마음챙김을 확립했다. 나는 마음챙김을 확립한 성스런 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한다’ 바라문이여,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이 마음챙김을 확립함을 보면서 더욱더 숲 속에 머무는 데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
영역 |
“Brahmin, it occured to me thus: Those recluses and brahmins, without mindfulness, unaware, abiding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come to much fear and evil owing to that trend. I abide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mindfulness established. The noble ones abide in jungle forests and paths mindfulness established, am one of them and abide in jungle forests and paths with much confidence. |
12가지 중에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두려움과 공포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띠에 대한 것으로 muṭṭhassati가 있는데, 이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부사로서 ‘잊어버리는(forgetful)’으로 되어 있다. Asampajānā는 sampajānā에 부정 접두어 A가 붙어 ‘알아차림이 없는’ 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 ‘muṭṭhassati asampajānā’에 대하여 성전협회는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올바로 알아채지 못하면서’라 하였고, 초불의 경우 ‘마음챙김이 없고 알아차림이 없는’이라 하였다. 가장 큰 차이는 빠알리어 사띠(sati)에 대한 번역어이다. 새김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삼빠자나(sampajānā)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알아차림으로 번역 되었다.
초불의 경우 문장을 보면 따옴표 안에 미래형인 ‘올것이다’와 과거형인 ‘확립했다’와 현재형인 ‘거주한다’로 되어 있다. 작은 따옴표 안에 시제가 혼합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회의 경우 작은 따옴표 안의 문장은 모두 현재형이다. 따옴표 밖에서는 과거형으로 ‘발견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보살로서 삶을 살았을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의 초반부에 “바라문이여, 내가 아직 깨닫기 전에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라고 시작 된다.
5. 지혜가 없을 때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Tassa mayhaṃ brāhmaṇa etadahosi: ye kho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duppaññā elamūgā4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duppañña elamūgasandosahetu have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kusalaṃ bhayabheravaṃ avhayanti3. Na kho panāhaṃ duppañño elamūgo araññe vanapatthāni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paññāsampannohamasmi. Ye hi vo ariyā paññāsampannā araññe vanapatthāni 1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tesamahaṃ aññatamo4. Etamahaṃ brāhmaṇa paññāsampadaṃ attani sampassamāno bhiyyo pallomamāpādiṃ araññe vihārāya.
|
전재성박사역 |
바라문이여, 그 때에 나는 ‘어떠한 수행자들이든 성직자들이든 지혜가 없이 바보가 되어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면, 지혜가 없이 바보가 된 것을 원인으로 이 수행자 성직자들은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지혜가 없이 바보가 되어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지 않는다. 나는 지혜를 갖춘다. 나는 지혜를 갖추는 한, 고귀한 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간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지혜를 갖춘 것을 보고 숲속에 머무는 데 커다란 안도감을 발견했습니다. |
초불역 |
“바라문이여, 그 때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통찰지가 없고 멍청이 같은 자들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하게 되면, 통찰지가 없고 멍청한 것으로 인해 그 사문-바라문들은 해로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 올것이다. 그러나 나는 통찰지가 없고 멍청이 같이 되어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 나는 통찰지를 구족한 성스런 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거주한다’ 바라문이여,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이 통찰지를 구족을 보면서 더욱더 숲 속에 머무는 데 안전함을 느꼈습니다.” |
영역 |
“Brahmin, it occured to me thus: Those recluses and brahmins, deaf and dumb, lacking in wisdom, abiding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come to much fear and evil owing to that trend. I abide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endowed with wisdom. The noble ones abide in jungle forests and paths endowed with wisdom, am one of them and abide in jungle forests and paths with much confidence. . |
12가지 중에 지혜가 없을 때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지혜가 없다는 것은 어리석어서 ‘바보’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혜를 갖춘 다음에 숲속에 들어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말이 ‘paññāsampannohamasmi’이다. 이를 성전협회에서 ‘나는 지혜를 갖춘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라고 과거형우로 번역하였다. 따옴표 밖에서는 모두 과거형이다. 부처님이 보살로서 살 때를 회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paññā에 대한 번역이 ‘지혜’와 ‘통찰지’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주석에서 빅쿠 보디의 주석을 인용하여 “완전히 깨닫기 이전의 보살의 지혜와 집중에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Pps.I.118에 따르면, 그것은 통찰의 지혜(vipassanapaññā)나 길의 지혜(maggapaññā)가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는 지혜(arammanavavatthanapaññā) 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쿠 보디의 견해에 따른다면 보살의 지혜는 완전한 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paññā에 대하여 통찰지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고, 더구나 “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라고 과거형으로 번역한 것 또한 무리가 있어 보인다.
paññāsampannohamasmi복합어에 대한 초불의 주석은 없다. 다만 ‘멍청이’라는 뜻의 elamūgā에 대하여 상세하게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엘라무가(elamūgā)는 엘라무카(ela-mūkhā)에서 khā가 gā로 변용된 것으로 ‘입에 침을 흘리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6.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水是水)’의 원형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Santi kho pana brāhmaṇa eke samaṇabrāhmaṇā rattiṃyeva samānaṃ divāti sañjānanti, divāyeva samānaṃ rattīti sañjānanti, idamahaṃ tes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mmohavihārasmiṃ vadāmi. Ahaṃ kho pana brāhmaṇa rattiṃyeva samānaṃ rattīti sañjānāmi, divāyeva samānaṃ divāti sañjānāmi. mameva n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asammohadhammo satto loke uppanno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12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nti. |
전재성박사역 |
바라문이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낮을 밤으로 인식하고 밤을 낮으로 인식합니다. 그들 성직자들이나 수행자들에게 ‘그것은 어리석음에 기인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나는 밤을 밤으로 인식하고 낮을 낮으로 인식합니다. 바라문이여, 누군가에 대해 ‘미혹을 여읜 존재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안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올바로 말한다면 바라문이여, ‘미혹을 여읜 존재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안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나타났다.’고 말하는 그것은 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
초불역 |
“바라문이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밤인데도 ‘이것은 낮이다’라고 인식하고, 낮인데도 ‘이것은 밤이다’라고 인식합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이를 두고 그들 사문-바라문들은 어리석음 속에 서 산다고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나는 밤이면 ‘이것은 밤이다.’라고 인식하고 낮이면 ‘이것은 낮이다’라고 인식합니다. 바라문이여, 누군가가 말하면서 ‘어리석음의 본성을 초월한 분이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그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에게 바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두고 그렇게 말할 때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
영역 |
“Brahmin, there are certain recluses and brahmins who perceive the night as the day and the day as the night. I say they abide in delusion. I perceive the night as the night, and the day as the day. Sayiing it rightly the non-deluded being is born in the world for the good and well being of many, out of compassion for gods and men. Saying it rightly, am that non-deluded being born for the good and well being of many, out of compassion for gods and men. |
숲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신구의 3업에 따른 악행과 다섯가지 장애 등 12가지 요인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나는 밤을 밤으로 인식하고 낮을 낮으로 인식합니다 (rattiṃyeva samānaṃ rattīti sañjānāmi, divāyeva samānaṃ divāti sañjānāmi)”라고 말씀 하신다. Rattīti는 ‘밤(night)’의 의미이고, samāna는 ‘같다(same)’는 의미이고, sañjāni는 ‘인식하다(recognized)’라는 의미이고, divā는 ‘낮(day)’을 의미한다. 그래서 ‘rattiṃyeva samānaṃ rattīti sañjānāmi’는 ‘밤을 밤으로 인식하고’라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은 ‘밤은 밤, 낮은 낮’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주석에서 선불교의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水是水)”이라는 말의 원형이라 한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水是水)’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청원선사의 어록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이요 물은 녹수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뒤에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 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더니,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이제는 산이 의연코 산이요 물이 의연코 물이더라.”
(rattiṃyeva samānaṃ rattīti sañjānāmi, divāyeva samānaṃ divāti sañjānāmi 주석, 전재성박사)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밤은 밤, 낮은 낮’이라는 말이 선가의 ‘산은 산, 물은 물’의 원형이라고 전재성박사는 각주를 달았다. 하지만 초불에서는 이에 대한 주석이 다르다.
초불에서는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잘 못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첫째로 출정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새소리 때문이라고 주석서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인 ‘밤은 밤, 낮은 낮’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7. 두 가지 유익한 점
구 분 |
내 용 |
빠알리원본 |
Siyā kho pana te brāhmaṇa evamassa: ajjāpi nūna samaṇo gotamo avītarāgo avītadoso avītamoho, tasmā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tīti. Na kho panetaṃ brāhmaṇa evaṃ daṭṭhabbaṃ. Dve kho ahaṃ brāhmaṇa atthavase sampassamāno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āmi: attano ca diṭṭhadhammasukhavihāraṃ sampassamāno, pacchimañca janataṃ anukampamānoti. |
전재성박사역 |
그런데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수행자 고따마는 아직까지도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냄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바라문이여, 그대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로 가는 것은 거기에서 두 가지 유익한 점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자신의 현세의 행복한 삶을 보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느낍니다.” |
초불역 |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탐욕을 없애지 못했고 성냄을 없애지 못했고 미혹을 없애지 못하여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하는구나.’라고. 바라문이여, 그렇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두 가지 이익을 보면서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 거주합니다. 내 스스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묾을 보고, 또한 다음 세대를 연민하기 때문입니다.” |
영역 |
“Brahmin, it might occur to you, is the recluse Gotama even today not free from greed, hate and delusion, that he abides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it should not be thought in that manner. “Brahmin, I see two good reasons for abaiding on beds and seats in remote jungle forests and paths: For a pleasant abiding here and now and out of compassion for the future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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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거기에서 나는 자신의 현세의 행복한 삶을 보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느낍니다.”라고 말함으로서, 바라문 지눗소니의 질문에 긴 대답을 마친다.
그래서 처음 더블 따옴표 ‘“’가 나온 이래 12가지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끝나고 마지막 더불 따옴표 ‘”’를 침으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맺고 있다. 이에 반하여 초불의 경우 더불 따옴표를 문장 중간에 계속 침으로서 마치 여러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비친다.
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숲에서 머무는 이유에 대하여 “거기에서 나는 자신의 현세의 행복한 삶을 보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느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현세의 행복한 삶에 대한 빠알리어는 ‘diṭṭhadhammasukhavihāraṃ’이라는 복합어이다. 여기서 ‘딧따담마(diṭṭhadhamma)’는 ‘현법(現法)’이라 하는데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뜻한다.
얼굴빛이 맑고 깨끗한 이유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숲에 있으면 지금 여기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아랸냐경(Araññasutta, 숲속의 경, S1:10)을 떠 올리게 한다. 아란냐경은 다음과 같다.
Atītaṃ nānusocanti nappajappanti'nāgataṃ,
Paccuppannena yāpenti tena vaṇṇo pasīdati.
Anāgatappajappāya atītassānusocanā,
Etena bālā sussanti naḷova harito lutoti.
[세존]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아랸냐경-Araññasutta-숲속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0(1-10), 전재성님역)
비록 하루 한끼 밖에 먹지 않는 숲속의 생활이지만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다. 이는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항상 ‘지금 여기(diṭṭhadhamma)’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미래세대에 대한 연민 때문에
이런 행복한 모습을 후대에 보여 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숲에 있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이 경에서 ‘후세의 사람들(pacchimañca janataṃ)’과 ‘자비를 느낀다 (anukampamānoti)’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Pps.I.129 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숲속의 처소에 자주 가는 것을 보고 수행승들이 그 모범을 따르고 괴로움의 종식을 향하여 수행의 고삐를 죄는 한, 후대의 수행승세대도 ‘미래의 세대에 대한 연민’을 가질 것이다.
(pacchimañca janataṃ에 대한 주석, 전재성박사)
부처님이 후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하여 숲속에 자주 들어 갔다고 한다. 이는 또한 수행의 고삐를 죄는 것도 되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미래 세대에 대한 ‘연민(anukampā, compassion)’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초불의 번역서에는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행복한 숲속에서
양번역서와 빠알리원전 그리고 영역을 놓고 경을 읽어 보았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어를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터넷에 서비스 되고 있는 빠알리 사전 사이트( http://www.palidictionary.appspot.com/ )와 번역서에 있는 주석을 보고 내용 파악을 하였을 뿐이다.
경에서는 수행자가 숲속에서 홀로 수행을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12가지로 설명해 놓다. 이는 수행중에 일어 날 수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어두운 수행처에서 홀로 있을 때 과거에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은 자신이 지은 죄업에 대한 과보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것이기 때문에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가 청정하게 하면 어두운 숲속에서 홀로 있어도 두렵거나 공포가 들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숲속에 홀로 있다는 것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행복이다. 그래서 아란냐경에서는 비록 한끼 밖에 먹지 않는 수행자일지라도 얼굴 빛은 맑고 깨끗하다고 하였다.
2012-12-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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