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윤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18. 18:43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윤회

 

 

 

잘난 자와 못난 자 그리고 아주 못난 자

 

잘나고 똑똑한 자들은 세상 살아가기가 수월하다. 남들 보다 월등한 지능과 우월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 보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세 코스를 밞아 사회 각 분야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에 못나고 아둔한 자들은 세상 살아가기가 고단한다. 남들보다 지능이 낮고 신체적 조건도 보잘 것 없어서 출세코스를 밞기 힘들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곳에 위치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저하게 아주 못난 자들도 있다. 지능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너무 열세이기 때문에 남들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잘나고 똑똑한 자들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만일 우월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잘난 자와 못난 자, 용모가 준수한 자와 추한 자 등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것일까. 왜 생긴 모습과 성향이 모두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라고 말씀 하였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뭇삶들의 차별이 생겨 난다는 것이다. 이를 한자용어로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라 한다. 출세간의 정견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정견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른 것이 바른 견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업을 지은 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하는 자가 역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 발생의 연기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수 많은 생을 살아 왔다. 그 수 많은 생중에 갖가지 경험을 하였다. 어느 생에서는 잘난 자로 살았고, 또 어느 생에서는 못난 자로 태어 났다. 또 어느 생에서는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아주 못난 자로 태어난 적도 있었다. 또 어느 생에서는 약육강식의 축생계에서 태어난 적도 있고,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지옥에서 태어난 적도 있었다. 이런 윤회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띠나깟타경-Tiakaṭṭhasutta-풀과 나뭇가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이용하여 족보식으로 따져서, 아버지의 어버지는 누구이고, 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 식으로 설명하려 든다면, 잠부디빠(jambudipa, 염부제, 인도)의 모든 풀과 나뭇가지를 동원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소급이 허구인 이유

 

바이블을 보면 아담의 셋째 아늘인 ''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 “식의 낳고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이는 최초의 원인에서부터 내려 가는 족보 형식이다. 대부분의 족보가 시조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이 근원을 따져 가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하였다. 현재 나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는 누구이고 ,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라고 하는 식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조상의 족보 따지기 식의 윤회가 왜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최초의 시작을 설정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動者)와 같은 절대자를 가정해야 하는 논리적 허구이며, 무한소급(regressus infinitum)은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허구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므로 인식론적으로 효력이 없다.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sayutta, S15) 해제, 전재성박사)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식의 물음은 논리적 허구라 한다. 그렇게 무한소급하여 따져 올라 가다 보면 이 세상의 원인이 되는 창조자 내지 절대자를 가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바이블에서 아담의 아들은 누구이고 식의 것과 똑 같은 말이다. 또 무한소급은 존재론적으로 허구이고 더구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이치와 같기 때문에 인식론적으로도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윤회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유

 

무명에 덮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여 왔다. 그런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만일 아버지는 아버지의 누구 하는 식으로 무한소급하여 시작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절대유)’하는 절대유를 가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절대유와 절대무를 모두 부정한다. 그 대신 연기법적으로 중도를 취한다. 그래서 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절대무는 성립하지 않고, 또 법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절대유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조건 발생적 연기를 관찰할 때 유와 무의 극단적 견해는 사라질 것이라는 깟짜나곳따경(S12:15)에서의 가르침과 같다. 따라서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면 윤회의 끝 또한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윤회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연기법에 따른 것으로서 이는 절대유를 바탕으로 하는 우파니샤드적 범아일여의 영원주의절대무를 바탕으로 하는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윤회해 온 것일까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 윤회라고 하였다. 비록 시작은 알 수 없지만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윤회해 온 것일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1겁의 시간은 얼마나 깁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한 겁은 참으로 길다. ‘그것은 몇 년 동안이다. 그것은 몇 백 년 동안이다. 그것은 몇 천 년 동안이다. 그것은 몇 십만 년 동안이다’ 식으로 쉽게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볼 수는 없습니까?”

 

[수행승]

“수행승이여, 가능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큰 바위산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일 요자나이고 넓이가 요자나이고 높이가 요자나이며 간격이 없고 균열이 없고 견고한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번씩 까씨국의 옷으로 스치고 지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큰 바위산이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버리는 기간이 있다. 한 겁은 그것보다 더욱 긴 시간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여, 겁은 긴 시간이다.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긴 겁이지만 수 겁을 윤회하고 수백 겁을 윤회하고 수천 겁을 윤회하고 수십만 겁을 윤회하며 살아온 것이다.

 

(빱바따경-Pabbatasutta-산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5(1-5), 전재성님역)

 

 

일 겁에 대한 설명이다. 일 겁에 대한 설명은 큰바위산의 비유뿐만 아니라 겨자씨의 비유(S15:6)’도 있고, ‘제자의 비유(S15:7)’도 있고, ‘갠지스강의 비유(S15:8)’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윤회한 기간이 단지 몇 십만년 정도가 아니라 수십만겁이라 한다. 이는 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시간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최초의 시작이 설정되지 않는 무한한 시간속에서 무명에 방해 받고 갈애에 묶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방황하는 동안 체험하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간통한 과보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시간동안 윤회하면서 별일 다 겪었을 것이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수 없는 태어나고 죽는 동안 좋았던 일보다 슬프고 괴로웠던 일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똥구덩이에 빠진 자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목갈라나와 락카나 존자가 길을 가다가 대화를 나눈 이야기이다. 신통제일이라 불리우는 목갈라나 존자가 길을 가다고 미소를 짓자 락카나 존자가 어떤 연유인지 물어 본다. 목갈라나 존자는 똥구덩이에 빠진 자를 보자 그의 전생을 보았기 때문에 미소 지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든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라자가하에 사는 간통자였다. 그는 업보가 성숙하여 오랜 세월, 오랜 백 년의 세월, 오랜 천 년의 세월, 오랜 십만 년의 세월을 지옥에 떨어졌다가 그 업의 남은 과보에 의해 이와 같이 스스로 초래한 자기 자신의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구타꾸빠경-Gūthakūpasutta-똥구덩이에 빠진 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9:11(2-1),전재성님역)

 

 

현세에서 똥구덩이에 빠진 자는 전생에 간통한 죄로 지옥에 태어 났다. 수십만년 동안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받고 난 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를 경에서는 그 업의 남은 과보에 의해라고 표현 하였다. 지옥고를 고통을 겪었지만 남아 있는 선업의 힘으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어떻게 악처에서 선처로 태어 날 수 있을까

 

어떻게 악처에서 선처인 인간으로 태어 날 수 있을까. 이는 아라한이 되어 더 이상 지은 업이 없어 다시태어남이 없는 한, 어떤 존재이든지 남아 있는 없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지옥에서 지옥고를 겪고 있는 자라도 지은 죄업에 대한 과보가 소멸되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선업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의 힘으로 으로 선처에 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수 많은 생을 살면서 선행을 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업에 대한 공덕이 너무 짧기 때문에 태어나도 낮은 지위의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경에 쓰여 있다.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인간으로 태어나도 높은 지위로도 태어나고 또 낮은지위로도 태어난다. 이에 대하여 꼬살라 상윳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세존]

대왕이여, 세상에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3-1),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의 대화에서 네 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어둠으로 간다는 것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악행으로 인하여 지옥의 어둠으로 간다는 것을 말하고, 빛으로 간다는 것은 그 반대를 말한다.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이렇게 네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 중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대왕이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빛에서 어둠으로 갑니까?.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고 재산과 곡식이 많은 권세 있는 귀족의 집이나 권세 있는 성직자의 집이나 권세 있는 장자의 집과 같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름답고 보기에 좋고 깨끗하고 연꽃과 같은 최상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탈 것, 꽃장식,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나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궁전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내리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말의 등에 내리고 말의 등에서 수레로 내리고 수레에서 땅으로 내리고 땅에서 암흑으로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빛에서 어둠으로 갑니다.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3-1),전재성님역)

 

 

잘나고 똑똑한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용모도 준수하고 지능도 높게 태어난 자가 한 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수월할 것이다. 조금만 머리를 써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좋은 조건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온 갖 못된 짓만 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생에 지은 선업 공덕으로 현생에서 복을 누리지만, 악행을 일삼는다면 더 이상 공덕을 쌓지 않고 까먹게 되어 낮은 세계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코끼리 등 탈 것으로 비유하였다.

 

코끼리 등을 타고 다니다가 점차로 탈 것이 작아져 마침내 땅으로 내려온다고 하였다. 마치 고급 대형승용차를 타고 다니다가 여의치 않자 중형차로, 중형차에서 소형차로 바뀌고 나중에는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비유라 볼 수 있다.

 

인생역전하려면

 

반면에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자들도 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대왕이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가게 되는가.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미천한 가문인 짠달라의 집이나 죽세공의 집이나 사냥꾼의 집이나 수레를 고치는 집이나 청소부의 집이나 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

 

그의 집에는 음식물이 부족하고 생계가 곤란하여 어렵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습니다. 그는 아름답지 않거나 흉칙하게 보이거나 기형이거나 등이 굽었거나 병이 많거나 애꾸눈이거나 손이 뒤틀렸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입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탈 것, 꽃장식,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지상에서 수레에 오르고 수레에서 말의 등에 오르며 말의 등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오르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궁전으로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이 사람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갑니다.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3-1),전재성님역)

 

 

인생역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행공덕을 쌓았을 때 어둠에서 빛으로 간다고 하였는데, 이를 꼬끼리 등을 타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모으면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지는 가 하면, 또 어둠에서 빛으로 가기도 하는 것은 마치  마치 두레박처럼 삼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한량 없는 생을 윤회하다 보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었다.

 

 

수행승들이여, 일 겁의 세월 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0(1-10), 전재성님역)

 

 

 

 

 

Vultures' Peak looking down on the valley of Rajgir with Vepulla to the north

 

 

 

일 겁동안 윤회하면서 남겨진 뼈를 모아 놓으면 베뿔라산보다 더 클 것이라 한다.  베뿔라산(Vepulla)산은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 시를 둘러 싼 다섯 큰 산의 하나이었다.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경에 따르면 우리들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또는 어둠에서 빛으로 끝 없이 유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눈물을 흘렸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sayutta . S15)에 표현되어 있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빠알리원전과 두 번역서, 그리고 영역을 실었다.

 

 

  

     

빠알리원전

Eva dīgharatta bhikkhave, dukkha paccanubhūta, tibba paccanubhūta, vyasana paccanubhūta, vyasana paccanubhūta, kaasi vaḍḍhitā.

Yāvañcida bhikkhave, alameva sabbasakhāresu nibbinditu, ala virajjitu, ala vimuccitu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초불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 그대들은 괴로움을 겪었고 혹독함을 겪었고 재앙을 겪었고 무덤을 증가시켰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형성된 것들[諸行]은 모두 염오해야 마땅하며 그것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해야 마땅하다.

영역

“Thus, monks, you have suffered sharp unpleasantness, severe destruction and filled up cemeteries.

“Monks, it is suitable that you should turn away from all determinations, fade and be released from them.”

(띠나깟타경-Tiakaṭṭhasutta-풀과 나뭇가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 식으로 소급하면 알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자손을 남기지 못하였다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더구나 부모 없이 화생으로 태어 나는 천상이나 지옥 등에 존재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아버지의 누구식은 모순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무명갈애를 들고 있다.

 

무명이 현재 나를 있게 한 요인이라면, 갈애는 미래의 나가 있게 할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벗어나려면 미래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갈애를 일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갈애 이전의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sabbasakhāresu nibbinditu)’ 한다. 윤회의 과정에서 겪었던 어마어마한 우주적 큰 고통, 끔찍한 고통을 말한다.

 

왜 오계를 준수해야 하는가

 

지난 6월 테라와다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법회에서 우리나라 대승불교 법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대승불교 법회에서는 모든 중생을 건지오리다와 같은 거창한 서원을 하지만, 테라와다 법회에서는 그런 서원은 볼 수 없고 빠알리어와 우리말로 된 오계준수 맹세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으로 형성되는 조건이 오계를 인식하고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하고, 주지 않는 물건 가지는 것을 멀리하는 등의 다섯가지 계행을 준수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을 하려 하지 않는다.

 

오계를 준수하기 까지 사람들은 과거 전생에 있어서 수 많은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이는 띵사맛따경(삼십명경, S15:13)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S15:13)”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좀처럼 남의 물건에 손을 대려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과거생에 남의 것을 훔치다 들켜 목이 잘리거나 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마다 눈물로 참회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으로 태어난 것으로 본다.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도, 간통 등 음행을 멀리 하는 것도 과거 생에 눈물로 다짐하며 참회 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이렇게 윤회과정에서 흘린 피와 눈물의 양이 사대양 보다 더 많고, 남겨진 뼈의 양이 큰 산 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면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야(sabbasakhāresu nibbinditu)’ 한다고 하였다. 그런 마음을 내어야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탐욕과 성냄등의 번뇌를 소멸(virajjitu)’ 하여 해탈에 이를 것(vimuccitunti)’이라 한다. 그래서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그쳤을 때 그것을 행복(sukha)’이라 하였다.

 

 

 

2012-12-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