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적멸이 왜 행복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24. 18:05

 

적멸이 왜 행복인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스님에 당선된 밀운스님의 대담을 불교TV사이트에서 보았다. 5년 임기의 원로회의 의장을 맡게 된 밀운스님은 1934년 생으로 봉선사 주지, 제5-9대 중앙종회의원등을 역임하였고, 2004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 하였다.

 

사찰이 어려워져야

 

밀운스님은 불교TV에서 몇 가지 불교현안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중에 귀에 뜨이는 것이 계에 대한 언급이었다. 계행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찰이 어려워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사찰에 돈이 많거나 수행자의 주머니가 여유로우면 계행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종무행정을 포교사에게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한 것이 종무행정에 대한 것이다. 종무행정을 일반신도들 한테 맡길 것이 아니라 포교사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서는 포교사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아는 소리 하는 것이 싫은 거에요라고 말한다. 이는 포교사들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스님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열반송에 대하여

 

스님은 대담이 끝나갈 무렵에 ‘열반송’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고승들이 한 세상 살다 돌아가시면 열반게송을 하는데, 이에 대하여 스님은 맞지 않다고 말한다. “아, 돌아가시는데 기운이 없는데 열반송을 한다는 것이 앞뒤가 안맞는 소리에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열반송은 살아 생전에 건강할 때 미리 지어 놓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밀운스님의 미리 만들어 놓은 열반게

 

그런 스님의 열반송은 어떤 것일까. 자막으로 소개 되어 있는 밀운스님의 열반게을 보면 다음과 같다.

 

 

無量公案     무량공안

佛祖妄語     불조망어

衆生妄想     중생망상

佛祖本性     불조본성

 

천칠백공안이

부처와 조사의 거짓말이다.

중생이 한 생각 일으키는 망상이

부처와 조사의 본성이다.

 

(밀운스님 열반게)

 

 

밀운스님은 미리 작성된 열반게에서 1700백 공안이 거짓이라 하였다. 그 대신 중생이 일으킨 한생각이 부처와 조사의 본성이라 하였다.

 

이런 말은 파격적이다.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한생각 일으키지 말라거나 분별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한 생각 일으키는 것이 본성이라고 말하니 이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적멸위락(寂滅爲樂)에 대하여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하기 전에 스님은 적멸위락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를 밝혔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적멸위락에서 즐길 ()’자를 사용하는 것 대신에 풍류 ()’자를 사용하여 적멸위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한자 자는 즐길 락풍류 악모두 같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스님은 왜 풍류악자를 써야 한다고 주장할까. 불교TV에서 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을 보면 게송에 적멸위락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락’으로 보지말고 ‘악’으로 번역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누구 하나 날 더러 미친놈이라고 그러지 그 말 귀담아 듣고 생각해 본 사람 없어요.

 

그이야긴 무슨소리냐 하면, 적멸에 고가 있고 락이 있을까? 내가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의 본소리이다이겁니다. 모든 일체의 색경계가 나무면 나무의 제소리가 있고 피리는 피리의 제소리가 있듯이, 다 본음이라는 이야기거든요.

 

마음 가운데 자성자리에서 만법을 생할 수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구마라습이 악으로 번역하지 않았겠느냐, 낙이 아니고. 그런데 아무도 들어 주지 아니하고 범생이 오늘 회장님께만 이런 이야기 하네요.

 

(밀운스님, <특집>제8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밀운스님께 듣는다, 불교 tv 2012-12-12)

 

 

적멸위락 게송에서 즐길 락자를 소리 악자로 해석해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또 구마라즙이 락이 아니라 악의 의미로 번역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락이 아니라 악인 이유는 첫 번째로 적멸상태는 괴로움()나 즐거움()의 상태로 볼 수 없는 것이고, 둘째로 적멸이라는 것이 만법을 생할 수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오리지날은 빠알리 니까야에

 

밀운스님은 적멸위락에 대하여 기존의 해석방법과 전혀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적멸위락 게송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놀랍게도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다. 오리지날은 빠알리 니까야에 있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의 웨뿔라빱바따경(S15;20)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웨뿔라빱바따경- Vepullapabbatasutta-베뿔라산의 경, 상유슈따니까야 S15;20, 전재성님역)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뭇삶들은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 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러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았고, 또 흘린 눈물의 양 역시 사대양 보다 더 많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뼈가 웨뿔라 산 만큼이나 쌓였다는 것이다.

 

 

 

 

The bones of one person

 

 

 

그래서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와 같이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말씀 하셨다.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리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한문게송을 보면

 

이 게송은 매우 유명하여 상윳따니까야 도처에 나오고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도 실려 있다. 또한 한문으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다. 밀운스님이 언급한 구절을 포함하여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이 게송에서 생멸(生滅)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그런데 앞의 생멸과 뒤의 생멸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한자어 게송만 놓고 보면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의 경을 읽어 보고 문맥을 통하여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생멸과 뒤의 생멸의 차이는?

 

먼저 앞에 등장하는 생멸은 시생멸법할 때의 생멸을 말한다. 이 때의 생멸은 제행무상에 대한 생멸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sakhārā)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이는 형성된 모든 것을 말한다.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모든 것, 일체를 말한다. 그런데 일체는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것(uppāda-vaya)’이다.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uppādavaya-dhammino)’ 이라고 한다. 이런 자연의 법칙은 무상한 것이다. 인간이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의 생멸(uppāda-vaya)는 삼라만상등 일체에 대한 생멸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 번째의 생멸이 있다. 게송에서 생멸멸이(生滅滅已) 에서의 생멸을 말한다. 이 생멸은 앞서의 생멸의 의미와 달리 오온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나고(Uppajjitvā)’ ‘소멸하는 것( Uppajjitvā )’그치는 것 (vūpasamo)’   행복(sukha)’이라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라 한다. 그런데 앞의 생멸에 나오는 문구와 달리 담마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뒤의 생멸은 자연법칙으로서 생멸이 아니라 오온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 시켰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는데,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 한 것이다. 

 

표로 정리해 보면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앞 생멸

뒤 생멸

빠알리어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우리말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한역

諸行無常     제행무상

生滅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설명

- 자연의 법칙 (uppādavaya-dhammino)으로서 삼라만상에 대한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

- 우리가 어찌 할 수 없음

-오온으로서의 생멸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 시켰을 때 다시 태어남의 없는 것이 행복임

현상

삼라만상

오온(인간)

웨뿔라빱바따경

(S15;20)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모든 형성된 것은 견고하지 않다.”

모든 형성된 것은 불안정하다.”

(제행무상)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리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염오-이욕-해탈)”

 

 

 

이와 같이 앞의 게송에서의 생멸과 뒤의 게송에서의 생멸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앞 게송에서의 생멸은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에 대한 것이고, 뒤의 생멸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는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고 것에서 발생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대표 되는 번뇌를 시켰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는데, 이와 같이 생멸하는 현상이 그쳤을 때(vūpasamo) 그 것을 행복(sukha, 수카)이라 하였다.

 

 이는 경에서 문맥으로도 확인 가능한 것이다. 소위 염오-이욕-해탈이라고 일컬어지는 정형구인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리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라는 문구에서 이다.

 

이처럼 빠알리나까야의 경에서 문맥을 통하여 생멸을 그치는 것이 왜 행복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을 접하지 않고 단지 한문게송만 접하였을 때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특히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관련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적멸위락에 있어서 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

 

적멸위락에 대한 게송은 한자문화권에서 매우 유명한 게송이다. 이 게송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가 설산동자이야기이다.

 

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았을 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수행자가 산속에서 좌선중에 있었는데 어떤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노래소리는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태어나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諸行無常 是生滅法)” 라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를 듣고 수행자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뒤 구절이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나타나서 “내가 지금 배가 고프다. 노래가 더 듣고 싶으면 고기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에 수행자는 자기목숨을 주기로 하고 마지막 구절을 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나고 죽는 그 일마저 사라져버리면 거기에 고요한 즐거움이 있네. (生滅滅已 寂滅為楽)”라는 나머지 구절을 알려 주었다.

 

이 구절을 들은 수행자는 지극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찰의 먹이가 되기로 하였다. 그래서 절벽에서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이때 나찰은 갑자기 제석천으로 변하여 그의 몸을 받아 살려 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설산동자이야기이다. 이 투신설화는 ‘설산게(雪山偈)’라 하여 예로부터 절집에서 애송되었고 일본의 경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게송에 대한 해석은 빠알리니까야와 다르다.

 

문맥으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와 달리 열반에 대하여 상락아정으로 본다. 그래서 열반은 항상하고, 행복한 것이고, 참나인 것이고, 청정한 것으로 본다. 위 설산동자의 게송에서와 같이 적멸에 대하여 고요한 즐거움으로 표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열반자체는 즐겁고 행복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밀운 스님은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적멸 그 상태에 대하여 괴롭다거나 즐겁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대신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 적멸이라는 것이 즐거울 낙이 아니라 소리 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악이라는 것이 자성의 본소리라 한다. 악이라는 것이 마음 가운데 자성자리에서 만법을 생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적멸위락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초기경전의 문맥에 따르면 모두 어긋나는 것이다. 적멸 그 상태가 결코 락이 될 수 없고, 또한 결코 본성의 소리나 자성의 힘이 될 수 없다. 더 이상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그 상태가 되는 것이 행복(sukha,수카)이라고 분명히 명기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말하는 적멸위락은 오온에서 탐진치가 소멸되어 괴로움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을 때 그것을 행복이라 하였다. 오늘날 불자들이 빠알리 니까야를 보고 문맥으로 파악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2012-12-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