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비불교로 나누어지는 세계종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사방에 온통 하얀 눈이 쌓여 있다. 크리스마스날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조계종총무원장스님이 ‘성탄축하메세지’를 발표 하였다고
크리스마스를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성탄절’이라 한다. 달력에도 방송에서도 성탄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용어는 시정되어야 한다.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교주 탄생일을 성탄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조계종기관지라 불리우는 불교신문에서 조차 “조계종총무원장 자승스님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2월 17일 성탄 축하 메시지를 발표하고~(2012-12-17)”라고 보도 하고 있다. 조계종의 최고 수장이 ‘성탄축하메세지’를 발표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인 조차 기독교의 교주의 탄생일은 ‘성탄절’이고, 불교의 창시자의 탄생일은 ‘석가탄신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이다.
크리스마스로 부르는 것이 원칙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성탄절이라고 하는 것일까. 같은 시각 일본과 중국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를까. 일본의 경우 ‘크리스마스(クリスマス)’라 부른다. 한자어로 표기 할 때 종종 ‘降誕祭(강탄제)’, ‘聖誕(성탄제)’, ‘聖夜(성야)’등으로 표기하지만 크리스마스라 불리는 것이 대세이다.
중국의 경우 圣诞节(Christmas)로 불리운다. 성탄절이라는 뜻이다. 미국 등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또는 크리스마스데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고유명사인 크리스마스로 불러 주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포함하여 세계 종교인구는 얼마나 될까.
주요종교인구 구성비율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전세계종교인구 조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기사에 따르면 최대종교는 기독교라고 한다. 22억명으로서 전세계인구의 32%가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다고 한다. 무슬림이 16억명으로 2위이고, 힌두교가 10억명으로서 3위라 한다. 불교는 약 5억명으로서 4위이고 전세계 인구의 7%가 신봉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통계는 미국의 퓨 리서치센터(The Pew Research Center)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한 데이터에 기반한것이라 한다.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를 보면 무슬림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이 무종교(16.3%)임을 알 수 있다.
전세계 불자수는 16억명
기독교 22억, 불교 5억이라는 데이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종교인구에 대한 글 (세계최대종교는 불교, 세계종교인구는 다시 쓰여 져야, 2010-01-11) 을 쓴 적이 있다. 전세계 불자인구는 16억명으로서 세계최대종교는 불교라고 다시 쓰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한 근거로서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각국별 종교인구 통계 자료를 활용하였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 불교인구에 대한 통계자료가 결정적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중국의 경우 불교인구는 적게는 8%에서 많게는 91%로 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8%(1억)-21%(2억7천만)-80%(10억)-91%(12억)으로 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중국의 불교인구 비중을 20%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부분의 종교인구 통계를 보면 최대치로 계산하기 때문에 중국의 불교인구 비중을 80%를 잡았을 때 중국불교인구를 10억명으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인구를 최대치로 잡는 것은 유럽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종교인구의 고무줄 통계
크리스천 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교회의 출석률은 10%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 리서치센터 국가별전세계종교통계’를 내면 프랑스의 기독교인구는 3,956만명으로 전체인구의 61%에 달한다고 보고 된다. 영국의 경우 교회가 텅텅비다시피 하고 무신론자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4400만명으로 73%에 달하고, 독일의 경우 5600만명으로 68%에 달한다. 이와 같이 최대치로 잡기 때문에 기독교의 인구구 22억으로 1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최대치가 반영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日本は統計的にみて約9600万人が仏教徒であり”라고 되어 있어 일본의 불자는 9,600만명으로 계산된다. 거의 1억에 가까운 일본의 불자인구는 전체인구의 75%에 달한다. 물론 일본 신도와 상당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퓨 리서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불자인구는4,500만명으로 전체인구의 35%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중국의 경우 2억4천만명으로서 18%로 비율로 계산 되어 있다. 이는 불교인구조사에 있어서 최소치를 통계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 불교인구는 5억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다’라는 말도 같은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신봉한다고 하여 반드시 훌륭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나 이슬람, 힌두교, 불교가 메이저 종교이지만 신봉하는 숫자로 서열을 매겨 평가를 한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발상이다.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는 종교일지라도 마음에 평화를 주고 위안을 준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종교일 것이다.
메이저 종교의 특징
그런데 메이저 종교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유일신교’라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우 하나의 유일신을 뿌리로 하여 형성된 종교로서 사촌간이라 볼 수 있다. 힌두교의 경우 역시 기독교와 유사하게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다. 다만 불교만이 창조적 신관을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초기불교와 이를 계승한 테라와다불교에 한한다.
초기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불교들, 즉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 등은 초기불교와 동떨어진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 오히려 유일신교적 신관에 더 가까운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道), 천(天), 공(空), 브라흐만, 창조주
이 시대 대표적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 교수에 따르면 궁극적 모든 진리는 하나라고 주장한다. 산에 가는 길이 여럿이 듯이 종교 또한 다양하지만 결국 하나의 정상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본질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되었고,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갖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길희성교수는 “도(道), 천(天), 태극, 공(空),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無),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가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 개념안에 기독교의 창조주도 포함되어 있고, 힌두교의 창조신도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대승불교의 ‘공(空)’의 개념도 창조주와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하나 빠진 것이 있다. 길희성교수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대하여 창조주개념에 포함시켜 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교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일원론의 종교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브라만교가 주류종교이었다. 브라만교의 브라흐마는 창조신이자 최고신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이를 부정하였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를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이렇게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에 영혼이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일원론’을 근거로 하는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에 ‘도로 브라만교’가 되었다. 용수의 공사상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완성이라고?
용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여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다면 대승론자들은 왜 불교를 재해석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미완성 내지 덜 성숙된 것으로 보고 불교를 발전시킨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선사들에게서도 볼 수 있고 일부 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선사들이나 학자들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원시불교라고 칭한다. 원시라는 말이 덜 성숙 하였다는 의미도 있고 불완전 하다는 의미도 내포 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 석가모니의 깨달음 자체를 미완성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발전 시킨 것이 공사상이고, 유식사상, 보살사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차별화 하기 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소승’이라 칭하고 자신들은 스스로 ‘대승’이라고 칭하였다.
중국으로 넘어 온 대승불교는 중국의 노장사상 등 전통사상과 중국인의 현세적이고 현실주의적 사상이 결합하여 독특한 중국불교가 탄생되었다. 이것이 ‘선불교’이다. 그런 선불교에 대하여 대승을 넘어 ‘최상승법’이라 하였다.
이렇게 불교는 시대에 따라 계속 발전되어 온다는 것이 대승불교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이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
하지만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대승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덜 완성되고, 덜 성숙되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완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뜻으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 samma sambodhi)’, 즉 ‘무상정득각’이라 한다. 이런 깨달음을 성취한 자를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라 한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도 볼 수 있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ṃ sammāsambodhi)’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위없는(anuttara)’ 이라는 말을 쓴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었다면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서자 선포할 때가 되자 선언한 것이다.
일체를 아는 자
그런 부처님의 지혜를 ‘일체지(sabbannuta-ñāṇa)’라 한다. 일체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은 처음 만난 유행자 우빠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Sabbāhibhū sabbavidūhamasmī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Sabbañjaho taṇhakkhaye vimutto
Sayaṃ abhiññāya kamuddiseyyaṃ?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ṃ-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일체를 아는자 (sabbavidūhamasmī)’라 하였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정득각자이고 또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대승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 덜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여 별도의 사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꿈의 비유’를 통한 깨달음을 들 수 있다.
한자경 교수의 한마음 강의
여성불교학자로서 이화여대 ‘한자경교수’가 있다. 2007년 불교TV에 방영되었던 한자경 교수의 독특한 꿈의 비유를 통한 무아와 깨달음에 대한 강의 (제7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1부,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는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강의에서 한자경 교수는 “저는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한마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원효의 ‘일심(一心)’사상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일원론 사상을 보는 것 같다.
한자경교수는 삼매의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여 공의 마음, 한마음이 되는 것을 깨달음과 같은 취지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독특한 꿈의 비유를 들었다.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
우리가 꿈을 꿀 때 두 가지의 나가 있다. 하나는 ‘꿈속의 나’이고, 또 하나는 ‘꿈꾸는 나’이다. 꿈속의 나를 소아(i) 또는 가아(假我)로, 꿈꾸는 나를 대아(I) 또는 진아(眞我)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자경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꿈속의 나는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한다.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은 꿈꾸는 나뿐만이 아니다. 삼라만상 모든 기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한다.
그런데 꿈꾸는 나는 꿈속의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한마음이라 한다. 그 한마음은 꿈속의 모든 유정들 속에 들어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마음이라 한다.
이는 우리가 꿈을 꿀 때 알 수 있다. 꿈속에서 꿈속의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꿈꾸는 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꿈속의 나와 객관적 대상을 모두 만들어 내고 인식하는 주체는 꿈꾸는 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이 한마음이라고?
그런데 한자경교수는 꿈속의 나가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꿈을 깨어 꿈꾸는 나와 한마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한마음이라는 것이 ‘공(空)’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이라 한다. 또 한마음에 대하여 한자경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한울에다 존칭인 님을 붙여서 한울님, 하눌님, 하느님이라 불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한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고, 하늘이고, 유교식으로 하면 태극이고, 기독교의 하늘의 주, 천주도 모두 한마음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천주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이 한마음,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서 다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자경 교수,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거짓의 나에서 깨어나 진짜의 나인 한마음을 알게 되면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천주, 부처님 등의 명칭들이 한마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깨달음이 결국 모두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불교 큰일 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꿈의 비유를 이용하여 가아와 진아의 합일을 설명하고, 그런 한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원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의 설명을 듣는 듯하다. 또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자경교수가 추천하는 권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것은 우파니샤드이다. 이유로서 “그게 바로 너이니라”라는 문구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한자경 교수에 대한 강의 내용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어느 네티즌은 다음과 같이 댓글을 달아 주었다.
이 분의 동영상을 오늘에야 보았습니다.
일심(아뢰야식)에서 우주(기세간)와 각 개인(유근신)이 나왔으며(전변) 이것이 일체유심조,유식무경,진공묘유,공즉시색의 뜻 이라네요. 그러면서 우파니샤드와 동학, 기독교의 예를 들며 한울림,하나님,진여,대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자경 님이 이러한 불교관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네요. 이것은 초기불교 뿐만아니라 대승불교도 잘못 이해한 탓이라고 봅니다. 큰일입니다....()
(H님, 한자경 교수의 무아와 한마음 비판, 윤회와 무아 현대적 의미를 보고)
한마디로 한국불교가 큰일 났다는 것이다. 불교학자가 외도의 사상을 불교로 포장하여 강의 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한자경 교수가 추천한 유파니 샤드의 “그게 바로 너이니라”라는 문구는 어떤 것일까.
“그게 바로 너이니라”
“그게 바로 너이니라”라는 문구는 대아와 소아, 진아와 가아가 사실 알고 보면 한몸체라는 것을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의 주석에 따르면, 대범천 사함빠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범천은 초기경전에서 비판의 대상이지만, 사함빠띠는 예외이다. 청원경에 등장하여 법을 설해 주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그런 사함빠띠의 어원 분석을 하면 쏘-아함-빠띠(so-aham-pati)라 한다. 이 뜻은 “내가 그 주인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그게 바로 너이니라”와 일치 한다. 범아일여를 말한다.
부처나 아라한의 사후
범아일여 사상은 브라만교의 핵심사상이다. 그런 브라만교는 절대유에 대한 사상이다. 영원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대화 내용이 있다.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존자 고따마께서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세존]
“밧차여, 나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 -Aggivacchagotta su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유행자 왓차곳따와 부처님과의 대화이다. 왓차곳따가 부처님의 사후에 존재 여부를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절대유에 기반한 영원주의를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는 오늘날 유일신교와 마찬가지로 영원주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영원주의는 철저하게 존재를 바탕으로 한다. 자아나 영혼이 있어서 전변하며 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한다는 것이다.
‘도로 브라만교’가 되는 경우
이와 같이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라는 영원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UdA.340 에 따르면, 여기서 여래는 자아를 말하는데, 그 자아는 행위자 행수자 등 영원하고 견고한 자로서의 여래존재에 관련된 여래라고 묘사되는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는 자아로서 이 자아가 사후에 몸이 파괴된 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Jayatilleke, ‘The Theory of Knowledge’248에 따르면, 이 명제는 초기 우빠니샤드의 학파 가운데 일부에 의해 주장된 것이다. 여기서 여래는 깨달은 님의 영혼이나 진아로 바꾸어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브리핫트 아라니까야(Brhadaranyaka) 우빠니샤드’(Brhad. IV.4)에서는 인간에게 욕심이 없을 경우 육체를 떠난 불사의 생기인 진아는 하느님(梵) 자체이기 때문에 운명한 뒤 곧바로 하느님속에 몰입하여 영원히 산다고 묘사 되어 있다.
또한 찬도기야(Chandogya) 우빠니샤드(Chand.III. 14.3)의 심장 내부에 있는 진아는 쌀알 내지 기장보다도 작은 것이지만 대지 내지는 일체세계 전체보다도 크며 일체의 행위를 품고 일체의 소망을 포용하고 일체의 후각을 갖춘 것으로 언어를 떠나고 애착을 떠난 것으로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梵)이며 육체가 이 세계를 떠난 후에는 진아는 브라흐만과 합한다는 사상은 여래가 사후에 존재함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M72, hoti tathāgato param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주석, 전재성박사)
부처나 아라한의 열반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비판이다. 만일 부처나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이는 브라만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을 예견한 듯한 말씀이다.
불교와 비불교
유명하다고 하여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라고 하여 최고로 종교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은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일원론’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근원에서 모든 것이 시작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것이 또한 공통된 특징이다. 이와 같은 신인합일, 천인합일, 범아일여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전세계 종교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불교만큼은 예외이다. 특히 초기불교와 이를 계승한 테라와다불교는 예외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존재의 근원이니 궁극적 실재와 같은 영원주의를 부정한다. 또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허무주의 역시 부정한다. 이는 모두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견과 단견 등 62가지 견해를 배격하고 성립된 종교가 불교이다. 따라서 세계의 종교는 불교와 비불교로 나눌 수 있다.
불교와 비불교로 나누었을 때 불교의 인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테라와다불교 국가의 불자수가 이에 해당된다. 나머지는 모두 비불교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인 것과 불교아닌 것의 특징은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소아와 대아, 가아와 진아로 나누어 한마음으로 합일 하는 것이라면 이는 브라만교와 가깝다. 그런 우려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악기왓차곳따경 -Aggivacchagotta sutta-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맛지마니까야 M72, 전재성님역)
201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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