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 사실인가 법인가
매일 접촉하며
사람들은 매일 접촉하며 살아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접촉은 시작 된다. 눈의 시야로부터 들어는 대상을 접촉한다. 이어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접촉이 시작된다. 접촉을 함으로서 의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접촉을 빠알리어로 ‘빳사(passa)’라 한다.
빳사는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껴지는 접촉을 말한다. 그래서 빳사에 대하여 ‘감각접촉’이라고도 번역된다. 그런 접촉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접촉된다.
안이비설신의
일반적으로 반야심경에 표현되어 있듯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한 접촉을 말한다. 이를 감각기관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 눈, 귀, 코, 혀, 신체, 두뇌가 된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빠일리 니까야에서는 감각기관을 표시 하는 눈, 귀, 코, 혀, 신체, 두뇌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여섯가지 감역과 관련해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제35번째인 살라야따나상윳따(여섯가지 감역모음)를 말한다. 부처님은 심오한 감각의 심오한 의미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러한 표층적인 개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의 정수라 불리우는 반야심경에서는 ‘무안이비설신의’ 라는 문구가 있어서 표층적 의미의 감각기관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표층적 의미의 감각기관이 왜 빠알리니까야에서 배척 되고 있는 것일까.
인드리야(indriya)
흔히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났을 때~”식으로 설명한다. 이때 안이비설신의는 표층적인 감각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확한 용어는 무엇일까.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눈이라는 말대신 ‘눈의 능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때 능력을 빠알리어로 ‘인드리야(indriya)’라 한다. 인드리야를 초불에서는 ‘기능’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여섯가지 감각기관에 대하여 왜 능력(indriya)라는 말을 붙여, 시각능력, 청각능력 등으로 불렀을까? 이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로 구별되는 공간과 상관이 없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구별된다. 이때에는 니까에서 특별히 인드리야(indriya)라는 용어를 부여하기도 한다. 한역에서는 근(根)이라고 하며, 인드라(indra)신이 신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능력이 행위와 체험의 특수한 영역에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제4권 해제, 전재성박사)
눈을 단지 눈으로 부르지 않고 눈의 능력으로 부르는 이유는, 눈의 능력으로 인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마치 신들의 제왕 인드라신의 권능처럼 보인다고 해서 감각기관에다 인드리야를 붙여, 시각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눈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인드리야에 대하여 ‘기능’이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표층적 감각기관과 인드리야
이와 같이 감각기관에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감각능력은 능력의 도움으로 대상세계의 힘을 부여하고 대상세계를 파악하고 대상세계를 향유하고 대상세계를 격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작용하는 여섯감각기관을 말한다. 따라서 시각능력(cakkhu), 청각능력(sota), 후각능력(ghāna), 미각능력(jivā), 촉각능력(kāyo), 정신능력(mano).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능력은 표층적 의미의 감각기관과 다른 것이다. 이를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섯가지 감각기관 (표층적 감각기관) |
여섯가지 감각능력 (Indriya) |
눈동자(akkhi, 眼) |
시각능력(cakkhu, 眼根) |
귀(kanna, 耳) |
청각능력(sota, 耳根) |
코(nāsā, 鼻) |
후각능력(ghāna,鼻根 ) |
혓바닥(jivhā, 舌) |
미각능력(jivā, 舌根) |
물질적 신체(sarira, 身) |
촉각능력(kāyo, 身根) |
두뇌(matthaluṇga, 意) |
정신능력(mano, 意根) |
표를 보면 표층적 감각기관과 감각능력에 대한 용어가 달리 쓰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의 경우 빠알리어로 악키(akkhi)라 하지만, 시각능력으로 사용될 경우 짝꾸(cakkhu)가 된다. 이를 한자어로 안근(眼根)이라 하는데, 근(根)이라는 말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될 당시 번역된 것이다.
감각능력을 사용한 예를 보면
그렇다면 짝꾸 등의 감각능력을 사용하여 설한 법문은 어떤 것일까.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Cakkhuṃ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gut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Sotaṃ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gut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Ghānaṃ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Jivhā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gut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Kāyo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gut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Mano bhikkhave phassāyatanaṃ adantaṃ aguttaṃ arakkhitaṃ asaṃvutaṃ dukkhādhivāhaṃ hoti.
Ime kho bhikkhave cha phassāyatanā adantā aguttā arakkhitā asaṃvutā dukkhādhivāhā ho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접촉의 감역이 있는데 그것들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찹팟사야따나경-Chaphassāyatanasutta-여섯 접촉의 감역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94(5-1), 전재성님역)
경에서 시각(Cakkhu)은 시각능력을 말하고, 청각(Sota)은 청각능력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감각기관에 대하여 권능(indriya)을 부여 하여 시각능력, 청각능력 등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눈 또는 귀식의 표층적 감각기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각의식(viññaṇa)이 생겨나는 경우
이렇게 감각능력이 있다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시각능력이 있다는 것은 ‘빛의 차동’에 의하여 반응하고, 청각능력은 ‘소리의 파동’에 반응하고, 후각능력은 ‘냄새의 입자’에 반응하고, 촉각능력은 ‘감촉의 대상’에 반응한다. 또 정신능력은 ‘현상과 사물’에 반응한다. 이렇게 외적 대상에 반응함에 따라 의식(viññaṇa)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시각의식(cakkhu-viññaṇa, 眼識)’은 눈의 문을 통하여 시각능력이 형상을 인지함으로서 생겨난다. 다음과 같은 경이 좋은 예가 된다.
Lokassa bhikkhave, samudayañca atthagamañca desissāmi, taṃ suṇātha.
Katamo ca bhikkhave lokassa samudayo?
Cakkhuñca paṭicca rūpe v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ayaṃ kho bhikkhave lokassa samudayo.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로까사무다야경-Lokasamudayasutta-세상의 생겨남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07(1-4),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이치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공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Cakkhuñca paṭicca rūpe v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라고 하였다. ‘조건발생의 연기(paticcasamuppada)’를 설하신 것이다.
여섯가지 의식
이와 같이 여섯가지 감각능력과 여섯가지 감각대상이 만나면 여섯가지 의식이 발생한다. 즉, cakkhuviññā(시각의식), sotaviññāṇa(청각의식), ghānaviññāṇa(후각의식), jivhāviññāṇa(미각의식), kāyoviññāṇa(촉각의식), manoviññāṇa(정신의식) 이렇게 여섯가지 의식이다. 이 중 여섯번째 manoviññāṇa(마노윈냐나)에 대하여 초불에서는 ‘마노알음알이’라 번역하였다. 마노라는 빠알리어와 알음알이라는 우리말을 복합하여 ‘마노알음알이’라 하였는데, 처음 접한사람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괄호를 사용하여 ‘마노알음알이[識]’식으로 표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섯가지 감역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과 여섯가지 대상이 마주쳐서 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여섯감역이라 한다. 감역에 대한 빠알리어는 아야따나(āyatana)이다. 이에 대한 한자어는 ‘처(處)’이다. 초불에서는 ‘감각장소’로 옮겼다. 전재성박사는 ‘감역’으로 옮겼다.
여섯감역은 내외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감각영역이라는 것이 내적인 감각능력에 대한 것과 외부 대상에 대한 것이 모두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섯감역을 내외로 구분하여 나누면 12가지가 된다. 안의 감역 6가지와 밖의 감역 6가지를 합하여 12처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세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이는 방대한 빠알리니까야가 잘 말해 준다. 수행에 대한 가르침에서부터 다영한 가르침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리에 대한 가르침도 상당부분 차지한다. 특히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고 분석한 가르침의 비중이 매우 높다. 여섯가지 감역에 대한 가르침 역시 매우 방대하다.
여섯감역에 대한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34번째 상윳따인 ‘살라야따나상윳따(Saḷāyatanasaṃyutta)’에 실려 있다. 우리말로 여섯가지 감역에 대한 모음이라는 주제로 되어 있는데, 이 상윳따에 실려 있는 경의 수는 근본오십경부터 시작하여 무려 248경에 달한다. 이렇게 많은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섯가지 감역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여섯번째에 해당되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마노를 감각기관으로 보았을 때
여섯감역에서 빠알리어 마노(mano)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신’이라고 번역하였다. 초불에서는 빠알리 원어대로 ‘마노’라 하였다. 참고로 윈냐나(viññāṇa)가 있다.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이 만나서 생겨난 마음을 말한다. 이 윈냐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의식’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에서는 ‘알음알이’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정신이라고 번역된 마노의 경우 정신적 영역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영역의 감각능력이다. 만일 마노에 대하여 정신적 감각기관이라고 본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정신을 육체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위 인터넷에서 불교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마노를 감각기관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 역시 함께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마노에 대하여 육체적 감각기관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인드리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능력’이라 하였다. 그래서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따르면 마노는 ‘정신능력’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담마에 대하여 왜 사실로 번역하였을까?
그런데 이 정신능력의 대상에 대한 것을 빠알리어로 ‘담마’라고 한다. 이 담마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사실’로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기존 관행대로 ‘법(法)’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마노의 대상으로서의 담마에 대하여 왜 사실로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신(의: mano)의 대상으로서 담마(Dhamma)를 필자는 ‘사실’로 번역했다. 이럴 경우 느낌이나 지각이나 형성이나 의식도 정신적인 사실에 포함될 수 있다. 느낌의 작용이나 지각의 작용이나 형성의 작용은 정신과 사실이 만나서 함께 생겨나서 그 감역의 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제4권 해제, 전재성박사)
시각의 대상이 형상이듯이, 마노(정신)의 대상인 담마에 대하여 사실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은 오온에 있어서 느낌(수), 지각(상), 형성(행), 의식(식) 모두 사실에 포함된다고 한다. 물질를 제외한 정신작용 모두를 사실로 본 것이다.
사물에서 사실로 바꾼 이유
그런데 개정판 이전 초판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사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개정판에서 사물에서 사실로 바꾼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사실은 어떤 것일까.
전재성박사가 담마를 사실로 번역하였는데, 이 담마에 대한 번역어가 난해 함을 알 수 있다. 외국의 경우 비구 보디(Bikkhu Bodhi)는 ‘정신적 현상(the mental phenomena)’라 하였고, 우드워드(F.L. Woodword)는 ‘정신적 상태(the mental states)’라 하였고, 독일학자 올덴베르그(H. Oldenberg)와 노이만(K. Neumann)과 가이거(W. Geiger)는 ‘정신의 대상(Geist-Objkt)’으로 하였고, 자이덴슈튀거(K. Seidenstuker)는 사물(Die Dinge)라 번역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초판에서 마노의 대상으로서의 담마를 사물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물이라고 할 경우 정신적 대상이 일상적 의미에서는 제외될 경우가 많으므로 개정판에서는 ‘사실’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담마에 대한 여러 번역어
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에 대한 번역어를 사실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번역어가 적절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광범위한 개념의 빠알리어를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것도 초판과 개정판이 다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가급적 쉽게 전달하고자 함이라 볼 수 있고, 내용이 심오하기 때문에 개별단어 보다 전체적인 문맥을 통하여 파악하기 위한 조치라 보여진다. 그러나 초불의 경우 번역이 난해한 것은 거의 대부분 빠알리 원어로 처리 하였다.
빠알리어 ‘마노(mano)’에 대하여 전재성박사가 ‘정신’으로 번역하였으나 초불의 경우 빠알리 원어 그대로 ‘마노’라 하였고, 마노의 대상인 ‘담마(dhamma)’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사실’로 번역하였으나 초불의 경우 한역 된 그대로인 ‘법(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담마에 대하여 사실과 법으로 된 것에 대하여 어느 것이 더 잘된 번역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말화 하려는 노력과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노력이다. 담마를 단지 법이라고만 한다면, 이는 한역경전의 답습이며, 법이라는 것이 너무 광범위 해서 막연한 느낌이 들어 이해가 쉽지 않는다는 것이다.
담마에 대한 번역어를 표로 보면
참고로 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에 대한 번역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dhamma) 번역어
번역자 |
번 역 |
비 고 |
빠알리 |
dhamma |
|
비구 보디(Bikkhu Bodhi) |
정신적 현상 (the mental phenomena) |
영어권 |
우드워드(F.L. Woodword) |
정신적 상태 (the mental states) |
영어권 |
올덴베르그(H. Oldenberg)와 노이만(K. Neumann)과 가이거(W. Geiger) |
정신의 대상 (Geist-Objkt) |
독일 |
자이덴슈튁거(K. Seidenstuker) |
사물 (Die Dinge) |
독일 |
전재성박사 |
사실 |
초판에서는 ‘사물’, 개정판에서 ‘사실’로 함 |
초불연 |
법(法) |
한역 경전 그대로 사용 |
‘사실’로 번역한 이유
그렇다면 전재성박사는 마노의 대상으로서의 담마에 대하여 왜 ‘사실’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였을까.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법을 비구 보디처럼 현상학적인 부류의 도식위에 정신의 대상으로서의 법을 사물보다는 현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감각대상으로서의 현상이라면 일체, 즉 여섯 가지 감역속에 사물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되는 모순을 낳을 수 있다. 필자는 부처님께서 모든 용어를 일상적 의미에서 사용하였다고 본다. 비구 보디나 많은 다른 불교학자들처럼 정신의 대상에 정신현상이라는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며 일상적 의미에서 대칭적인 구조인 정신-사실로 파악하여 사실로 번역하였다.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제4권 해제,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는 담마에 대하여 사실로 번역한 이유에 대하여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부처님은 설법할 때 알아 듣기 어려운 심오한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법하였음을 말한다. 따라서 ‘마노(mano)-담마(dhamma)’라는 대칭에 대하여 ‘정신-사실’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초불의 번역서를 보면 번역하기 어려운 것은 빠알리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종래의 한역경전에서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마노(mano)-담마(dhamma)’의 경우 ‘마노-법(法)’이라고 번역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초불의 빠알리 번역에 대한 입장은 무엇일까?
초불연의 빠알리 번역에 대한 입장
각묵스님은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임하는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근거 있는 불교, 근거 있는 번역’을 주장한다. 이러한 근거로 초기불전연구원은 주석서 문헌을 중시하고 주석서 문헌의 중심에 있는『청정도론』을 노둣돌로 삼고『청정도론』을 이해하는 방법론이 되는『아비담마 길라잡이』(아비담맛타 상가하)를 의지한다. 왜 근거 있는 번역을 해야 하는가? 번역은 단순한 단어나 문장을 한글로 치환하는 사전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경전의 번역은 자신의 사적인 견해를 배제해야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말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고 더군다나 소설도 수필도 아니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체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정전(正典)이다. 경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언어학적 소양만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중학교 일학년 학생이 막 영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섹스피어의『햄릿』을 번역해보리라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경에 나타나는 특정한 술어와 특정한 구문과 특정한 배경과 특정한 문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경은 부처님의 직계제자들로부터 비롯되어 전승되어온 경에 대한 안목을 빌지 않고서는 결코 심도 깊게 이해될 수 없다.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고민한 것이 바로 빠알리 주석서 문헌(Aṭṭhakathā)이다. 그러므로 주석서는 삼장(Tipiṭaka)에 대한 가장 오래된 권위이다. 그리고 이 주석서의 중심에는『청정도론』이 있다. 혹자는『청정도론』과 주석서들을 단순히 붓다고사라는 주석가의 견해 정도로 치부하려 한다. 그러나『청정도론』서문에서 정리하였듯이 주석서는 결코 붓다고사 스님의 개인 작품이 아니다. 붓다고사 스님은 각 주석서의 서시와 후기 등에서 이러한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붓다고사 스님 이전에 이미 싱할리로 전승되어오던『마하앗타까타』(대주석서)라는 방대한 문헌이 있었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마하앗타까타』는 이미 아쇼까 대왕 때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파하기 이전의 인도 스님들의 일화 등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대한 주석서 문헌들과『청정도론』을 지탱하는 교학적 토대는『아비담마 길라잡이』(아비담맛타상가하)에 멋지게 요약되어 있다. 그래서 남방의 모든 상좌부 불교 나라에서는『청정도론』과『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빠알리 삼장을 이해하는 노둣돌로 삼는다. 이처럼 상좌부 불교는 26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부처님 원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빠알리 삼장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전승해왔다.
초기불전연구원은 이러한 남방불교의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삼장에 대한 전통견해인『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와 복주서를 중시한다. 그래서『아비담마 길라잡이』와『청정도론』을 먼저 역출했고 이를 근거로 하고 토대로 하여 상좌부 전통을 존중하면서 빠알리 삼장의 역경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의 눈으로 본 통합종단 50년 소고)
각묵스님의 글에 따르면 ‘논서를 의지하여’ 번역하였다고 한다. 특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근본 바탕으로 하여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임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논서와 주석서에 바탕을 두지 않는 번역에 대하여 “중학교 일학년 학생이 막 영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섹스피어의 ‘햄릿’ 을 번역해보리라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라는 비유를 들고 있다.
초불연 번역의 특징
오늘날 초기불교를 접하는 불자들은 가장 먼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간행된 도서와 동영상강의를 접한다. 특히 아비담마길라잡이와 청정도론을 먼저 접하는 경우 교리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겪는다.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동영상강의를 들으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이렇게 교리가 어렵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번역어 문제이다. 잡도리, 알음알이, 마노 등 생소한 용어가 많기 때문이다.
초불연의 번역어를 보면 순 우리말로 번역된 용어도 있지만 따로 국어사전을 찾아 보아야하고, 심지어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는 신조어도 보게 된다. 또 너무 광범위한 의미를 품고 있는 빠알리어의 경우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마노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 한편으로 기존 한자용어를 답습하는 경우도 많다.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빠알리니까야를 읽으면 선뜻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대괄호를 이용하여 한자어를 병기하기도 한다. 이를 ‘주석적 번역’이라고 명기 한바 있다.
양번역을 비교해 보면
참고로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초불번역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 Yaṃ sañjānāti taṃ vitakketi. Yaṃ vitakketi taṃ papañceti. Yaṃ papañceti tato nidānaṃ purisaṃ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 |
성전협회 (전재성박사역) |
[깟짜나]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
초불연 (대림스님역) |
도반들이여, 눈이 있고 형색이 있고 눈의 알음알이가 있을 때 감각접촉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감각접촉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느낌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느낌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인식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인식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尋]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일으킨 생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사량분별이 함께한 인식의 더미의 일어남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
“Friends, on account of eye and forms arise eye consciousness. The coincident meeting of the three is contact. on account of contact feelings arise; what is felt is perceived; of what is perceived there is thinking; in thoughts there is diffusedness; on account of that, diffused perceptive components of forms of the past, future, and present cognizable by the eye consciousness arise and behave in that man. |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ḍikasutta-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마두삔디까경(M18)에 있는 핵심내용이다. 희론이 어떻게 발생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빠알리어로 빠짠짜(papañca)라 불리우는 희론이 발생하는 것은 세상의 생겨남의 경(S35:107)에서와 보는 바와 같이 접촉단계와 느낌단계까지 동일하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에 의하여 접촉(phassa)이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접촉으로부터 세상이 생겨나고, 접촉으로부터 괴로움이 생기고, 접촉으로부터 희론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세상이 생겨나는 것과 희론이 생겨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희론이 생겨나는 이유
세상이 생겨남경에서는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다음에 느낌, 갈애, 집착, 태어남,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 희론이 생겨나는 마두삔디까경에서는 삼사화압에 따른 접촉다음에 느낌, 지각, 사유, 희론, 시간과 존재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공통점 |
차이점 |
세상의 발생 |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남.(삼사화합)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접촉이 일어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남.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남. 이후 집착, 태어남,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남. |
희론의 발생 |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남. |
이와 같이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과 느낌까지는 공통이지만 느낌 이후서부터 갈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을 보면
그런데 희론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양번역서의 주석을 보면 설명 또한 차이가 난다.
구 분 |
주석 내용 |
성전협회 (전재성박사역) |
욕망을 조건으로 시간과 존재가 생겨난다고 하는 인식론적인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즉, 여섯감역(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을 통해서 각각의 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자각하고 자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戱論)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의 근거 없는 확장, 즉 희론이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
초불연 (대림스님역) |
여기서 감각접촉과 느낌과 인식은 안식과 함께 생기고[俱生緣], 생각(vitaka)은 안식을 틈 없이 뒤따름[無間緣] 등을 가진, 생각이 함께 한 마음에서 보아야 한다. 사량분별의 부분(papañca-sankha)은 속행(javana)과 함께 생긴다 [俱生緣]. 만약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과거와 미래의 물질들을 언급했는가? 거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눈의 문을 통한 사량 분별이 눈과 현재의 밖의 물질과 감각접촉과 느낌과 인식과 생각을 조건으로 일어나듯이, 눈으로 알아지는 과거와 미래의 밖의 물질에서도 사량분별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언급했다.(MA.ii.77) |
주석을 보면 초불연의 경우 아비담마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4가지 조건 중에서 구생연과 무간연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고, 또 인식과정 17단계에 있는 속행의 예를 들어 희론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주석을 보면 아비담마를 바탕으로 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사용용어를 보면
양번역서를 보면 번역에 사용되는 용어도 다를 뿐만 아니라 주석에 있어서도 내용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용되는 용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구 분 |
내 용 |
Manañcāvuso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 |
성전협회 (전재성박사역) |
벗들이여,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나고, |
초불연 (대림스님역) |
도반들이여,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납니다. |
On account of mind and thoughts arise mind consciousness |
(마두삔디까경-Madhupiṇḍikasutta-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마노(mano)와 담마(dhamm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신과 사실’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노와 법’이라 하였다. 또 마노윈냐나(manoviññāṇ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신의식’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 하였다.
양번역서의 차이점
이와 같이 양번역서를 비교해 보면 용어에서부터 주석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재성박사의 경우 가급적 우리말로 풀어 쓸려고 노력하였고, 초불연의 경우 빠알리 원어 그대로 사용하거나 종래의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주석을 보면 전재성박사의 경우 주석서의 견해를 존중하긴 하지만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고,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종종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초불연의 경우 주석서의 의견을 매우 존중하고 있다. 이는 초불연에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 그리고 주석서의 의견을 바탕으로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임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2012-12-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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