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띠(sati)의 가장 올바른 표현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4. 14:39

 

사띠(sati)의 가장 올바른 표현

 

 

 

 

기억에 의존한 부처님의 제자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주로 기억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 제자들은 이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기곤 하였다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컴퓨터도 없고 녹음기도 없었고, 또 종이도 없었기 때문에 금과옥조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여 이를 기억해 두고 되새겨 보는 방식이 그때 당시의 제자들의 학습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기억의 의미로서 사띠로 본다는 것이다.

 

사띠빳타나경(M10,염처경)에서

 

사띠빳타나경(M10,염처경)에 사띠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를 여러 번역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1)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2)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한다.

3)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4)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한다.

초불

(대림스님)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영역

Abiding reflecting the body in the body, mindful and aware to dispel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for the world. [1]

Abiding reflecting the feeling in feelings, mindful and aware to dispel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for the world. [2]

Abiding reflecting the mental state in the mind, mindful and aware to dispel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for the world. [3]

Abiding reflecting the thought thoughts, mindful and aware, to dispel covetousness and displeasure for the world

 

(사띠빳타나경-Satipaṭṭhānasutta-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마음챙김 대신에 기억으로 바꾸면

 

사띠빳타나경에서 사념처의 대강에 대한 것이다. 이 구문에서 사띠(sati)라는 말이 나온다. 초불의 번역에 따르면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막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뜻 의미가 다가 오지 않는다. 이 때 마음챙김이라는 말 대신에 기억이라는 말로 바꾸면 “~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머문다라고 되는데, 의미가 확연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경에서 마음챙김 대신에 기억이라는 말로 바꾸면 부처님의 말씀하신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띠가 왜 기억인가

 

그렇다면 왜 기억이 중요할까. 그리고 사띠를 왜 기억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한역의 사념처를 말한다. Pps.I.238, Smv.III.741~61과 Pts.II.244~266에 의하면,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ā)란 복합어는 싸띠-우빳타나(sati-upaṭṭhānā)나 싸띠-빳타나(sati-paṭṭhānā)의 두 가지로 분석이 가능한데, 전자일 경우는 ‘새김의 생성’으로 새김의 장치에, 후자일 경우는 ‘새김의 토대’로 새김의 대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복합어의 첫 부분인 싸띠(sati)는 원래는 기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에서는 현재와 관련된 주의 또는 마음챙김이란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역자는 둘 다를 종합할 수 있는 새김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실제로 기억을 통한 새김 없이는 마음챙김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각주,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사띠라는 말은 원래 기억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 기억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기억과 마음챙김 둘 다를 의미라는 뜻에서 새김이라고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전재성박사가 언급한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초불에서 사용하는 사띠번역어에 대한 용어인데, 전재성 박사는 이를 사유(생각)라고도 보고 있다.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다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어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는 화두챙김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사유만 있을 뿐이지 지금 여기에서 대상을 기억한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불의 문구중에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라는 말은 어색하지만, 반면 대상에 대하여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머문다라고 바꾸면 대단히 이해하기 쉬워 진다.

 

청정도론에서도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는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를 붓다고사의 빠일리원문과 냐나몰리의 영역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청정도론에서 사띠에 대한 내용

  

      

빠알리

(Chattha Sangayana Tipitaka 4.0)

 

85. Idāni sato ca sampajānoti ettha saratīti sato. Sampajānātīti sampajāno. Puggalena sati ca sampajaññañca vutta. Tattha saraalakkhaā sati, asammussan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Asammohalakkhaa sampajañña, tīraarasa, pavicayapaccupaṭṭhāna.

(Visuddhimaggo, 4. Pathavīkasianiddeso)

초불

(대림스님)

172.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기는 자고, 알아차리는 자다.  여기서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사람에 속하는 것으로 설해졌다. 마음챙김은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잃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보호함으로 나타난다. 알아차림은 미혹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조사하는 역할을 한다. 탐구함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 제4장 172절, 대림스님역)

영역

(Bhikkhu Ñáóamoli)

172. Now, as to mindful and fully aware: here, he remembers (sarati), thus he is

mindful (sata). He has full awareness (sampajánáti), thus he is fully aware

(sampajána). This is mindfulness and full awareness stated as personal attributes.

Herein, mindfulness has the characteristic of remembering. Its function is not to

forget. It is manifested as guarding. Full awareness has the characteristic of

non-confusion. Its function is to investigate (judge). It is manifested as scrutiny.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 제 4 172절에 사띠(sati)와 삼빠잔나(sampajāna)에 대한 용어 설명이다.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마음챙김은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잃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보호함으로 나타난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부동의 준거틀이라는 청정도론에서 조차 사띠의 의미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정도론과 아비담를 의존하여 역경불사를 한다는 초불에서는 사띠의 원래 의미와 다르게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다. 마음챙김은 화두챙김과 같은 의미로서 마음도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단지 사유에 대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 하기에 충분하다.

 

치매환자의 경우

 

청정도론에서 정의한 대로 사띠의 가장 큰 특징은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잃어 버리지 않게 하고 보호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띠라는 번역어는 기억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들어 가야 한다.

 

만일 사람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치매환자와도 같이 될 것이다. 치매환자는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맞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등 오감을 알아차리지만 이를 기억하여 되새겨 볼 수 없다. 기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 기억했던 것도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전오식에 따른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고, 이와 별도로 마음의 문에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족의 얼굴이나 이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기억의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행에서 왜 기억이 왜 중요할까.

 

강한 대상에 집중하는 이유

 

수행처에서 흔히 하는 말이 알아차리라고 한다. 알아차림에서 시작하여 알아차림으로 끝나는 듯하다. 마치 알아차림 만능주의 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때 알아차림에 대한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띠와 동의어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분명한 앎이라는 뜻의 삼빠잔나가 있긴 하지만, 수행처에서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일반적이다. 이때 알아차림은 대상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라는 의미로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좌선을 할 때 지도법사가 항상 하는 말은 가장 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다리가 저리면 저린 부위에 마음을 두고, 가려우면 가려운데 집중을 하면 된다. 그래서 통증은 손님과도 같다고 말한다. 손님은 내 쫒는 것이 아니라 정중히 맞이 해 주듯이 강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통증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보면 사라진다는 말이 나왔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이 치유된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호흡을 본다는 의미는

 

그런데 강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는 호흡을 보라고 말한다. 호흡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호흡은 매일 먹는 밥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런 호흡의 특징은 무엇일까.

 

호흡을 우리말로 들숨날숨이라 한다. 그래서 호흡을 이용한 수행방법에 대하여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호흡수행에 대하여 들숨날숨 마음챙김이라는 말도 있다. 전재성박사는 호흡새김이라 고 번역하였다. 하였다. ‘들숨날숨 마음챙김이나 호흡새김은 모두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의 번역에 지나지 않는다.

 

아나빠나사띠를 문자그대로 풀이하면 들숨과 날숨을 기억하며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기억작용이 들어가야 수행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만일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놓친다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호흡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기억하고, 잃어 버리지 않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띠이다. 청정도론에 설명되어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호흡을 본다고도 말한다.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의 각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운나바 바라문경’에서는 사띠는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문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혹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해탈 열반으로 지향한다. 이래 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각묵스님의 음성강의 파일에 따르면 사띠를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마음챙김에 대힌 경전적 근거

 

그렇다면 각묵스님이 근거로 하는 운나바 바라문경은 어떤 것일까. 문답식으로 사띠에 대한 것을 정의 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비교 해 보았다.

 

 

운나바브라흐마경에서 사띠에 대한 설명

  

      

빠알리

Imesa kho brāhmaa, pañcanna indriyāna nānāvisayāna nānāgocarāna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 paccanubhontāna mano paisaraa. Manova1 tesa gocaravisaya paccanubhotīti.

1)Manassa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Manassa kho brāhmaa, sati paisaraanti.

2)Satiyā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Satiyā kho brāhmaa: vimutti paisaraanti.

3)Vimuttiyā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Vimuttiyā kho brāhmaa, nibbāna paisaraanti.

4)Nibbānassa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

Accasarā brāhmaa, pañha. Nāsakkhi pañhassa pariyanta gahetu. Nibbānogadha hi brāhmaa brahmacariya vussati nibbānaparāyaa nibbānapariyosānan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바라문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능력은 대상을 달리하고 범주를 달리하니 서로 다른 대상과 범주를 향유하는데, 그것들은 정신을 의지하고 정신이 그것들의 대상과 범주를 향유합니다.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정신은 무엇에 의지합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정신은 새김에 의존합니다.”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새김은 무엇에 의지합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새김은 해탈에 의존합니다.”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해탈은 무엇에 의지합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에 의존합니다.”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열반은 무엇에 의지합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그 질문은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그대는 그 질문의 한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문이여, 청정한 삶을 토대로 하고 열반을 피안으로 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초불

(각묵스님)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음[]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영역

 

 

(운나바브라흐마경-Uṇṇābhabrāhmaasutta-운나바 바라문경, 상윳따니까야 S48:42)

 

 

각묵스님이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경이다.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경에서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마노(mano, 정신,  마음)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Manassa pana bho gotama ki paisaraanti?)”라고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답하기를 정신은 새김에 의존합니다.” 또는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는 이상하고 어색한 말이 되어 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 그것은 마노(마음, 정신)의 역할에 대한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경에서 마노는 청각 등 다섯가지 능력과 대상을 달리 한다고 하였다.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노의 대상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생각이란 무엇일까. 바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시각이나 청각 등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생각이 일어 나기도 하고, 이들과 별도로 순수하게 마음의 문에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마노의 능력에 대하여 부처님은 전오식과 범주를 달리하는 것이라 하였고, 또 반드시 마노를 통하여 전오식의 대상과 범주가 향유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치매환자로 비유하면 이해 하기 쉽다.

 

불교를 한 없이 어렵게 만드는 요인

 

치매환자는 시각, 청각 등 다섯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단지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치매환자는 결정적으로 마노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는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의 얼굴, 심지어 자신이 누구의 얼굴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노의 능력은 다름아닌 기억의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이 그러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번역하여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이를 마음[]은 기억을 의지한다 (Manassa kho brāhmaa, sati paisaraanti.)라고 바꾸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이해 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마음이 기억을 의지하여 대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말하면 불교를 한 없이 어렵게 만들고 심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띠는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챙기는 것처럼 마음을 챙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밥상머리 교육을 하는 이유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어른들이 밥을 먹으면서 한마디 훈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어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을 잘 새겨 듣기를 바란다.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상사가 부하들을 모아 놓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말을 잘 새겨 듣고 기억하라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 제자들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려 했을 것이다. 필기구가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 하신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 기억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되새기는 것이 중요한 수행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기억되고 되새긴 내용이 오늘날 빠알리니까야를 있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설할 것이니 잘 새기도록 해라

 

그래서 부처님은 설법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빠알리

Dukkhassa bhikkhave,

samudayañca atthagamañca desissāmi. Ta suātha.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영역

Monks, I will teach the arising and fading of unpleasantness. Listen to it carefully

 

(둑카사무다야경- Dukkhasamudayasutta-괴로움의 일어남 경, 상윳따니까야 S35:106)

 

 

 

이와 같이 부처님은 제자들이 잘 새겨듣기(desissāmi) 를 바랬다. 이는 기억하여 수행에 활용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수행하는데 있어서 기억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띠의 가장 올바른 표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매우 비불교적이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용어이다. 무상하고 변화무쌍한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행시에 대상을 기억하고 유지해서 법의 속성이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 차리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는 교학적으로도 수행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다.

 

 

  

      

빠알리

Yasmi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 dhamma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tassa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ga yasmi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go tasmi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 gacchati. So tathā sato viharanto ta dhamma paññāya pavicinati pavicarati parivīmasamāpajjati.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수행승이 새김의 깨달음 고리를 닦으면, 그 때  수행승의 새김의 깨달음 고리는 닦임으로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새김을 닦으면서 그는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한다.

영역

 

 

(실라경- Sīlasutta-계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

 

 

 

경에서 아눗사라띠 아누위딱께띠(anussarati anuvitakketi)’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고 번역하였다. 바로 이 구절이 사띠의 정확한 표현이라 한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듣는 것

 

부처님은 자신의 설법을 제자들이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잘 기억하여 수행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바랐다. 이는 칠각지에서 염각지(念覺支)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염각지는 ‘사띠삼보장가(satisambojjhaga)’라 한다. 우리말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의 조건’이라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조건에 왜 사띠가 필요할까.

 

각주에 따르면 사띠보장가는 깨달음을 성취한 수행승의 가르침을 기억함으로써 일어난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듣는 것에서 깨달음을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The Buddha's Teaching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아눗사라띠 아누위딱께띠라 하여 “기억하고 사유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띠의 가장 올바른 표현이라 본다.

 

그 나라의 언어를 이용하여

 

부처님은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말씀 하셨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을 전하라는 말과 같다.

 

만일 언어가 다른 지방으로 전도하로 갔다면 그 지방언어를 사용하여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다른 나라의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알 수 없는 단어를 나열한 경우 부처님이 가르침이 신비화 될 수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되었을 때 처음에는 서역승들이 한역하였다. 이후 중국의 스님들이 인도에 가서 직접 도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삼장법사를 들 수 있다.

 

마치 주문 외우듯

 

삼장법사는 반야심경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Prajñā)를 음역하여 반야(般若)로 하였다.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한 용어를 함부로 한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반야심경 후렴구인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에 대해서도 깊고 오묘한 뜻이 담겨 있는 주문을 함부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역시 음역하여 아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후대사람들은 반야나 주문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였다. 오늘날에도 반야라는 말에 대하여 마치 주문 외우듯이 마하 반야바라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라즈냐는 지혜라는 뜻이다. 지혜라고 번역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요,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고 번역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를 역경불사 하는데 있어서 원칙을 고수 한다고 하여 담마(dhamma)’에 대하여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시는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 하여 한자어 ()’을 고수한다거나, 사띠에 대하여 좀처럼 뜻을 알 수 없는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불교를 한 없이 어렵게 만들고 심오하게 만들었다. 마치 한문경전에서 뜻을 알기 어려운 난자(難字)’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말로

 

2600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 넘어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어렵고 심오한 말로 되어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면 맹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 말로 그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말로 가르침을 전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급적 알아 들을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와 같은 번역이 이루어졌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 하기 어려우니 마치 알 수 없는 화두를 챙기는 것처럼 심오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여 “마음[]은 기억을 의지한다”라고 하거나 “정신은 새김에 의존합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 이런 번역이 이 시대에 요청된다.

 

 

 

 

2013-01-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