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실종된 마음챙김
‘초불발’불교용어
오늘날 초기불교의 경우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어와 번역서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각묵스님의 영상강의는 결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초불발’ 초기불교에 대한 용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도, 방송에서도, 스님들이나 학자 들 또는 일반불자들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만든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용어 중에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사띠(sati)’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그다지 익숙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과 챙김의 합성어로 되어 있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로서, 오로지 초기불교에서만 사용되는 말이고, 초기불전연구원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데
마음과 챙김의 합성어인 마음챙김은 단순히 말한다면 ‘마음을 챙기다’라는 의미이다. 수 많은 마음이 있는데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말일까. 마음이 하루에도 수 없이 바뀌고, 변덕이 죽 끓듯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데 대체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것인가. 먼저 ‘챙기다’라는 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챙기다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제1의 의미가 “(사람이 물건을)사용하기 위해 찾아서 한데 모으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2이 의미는 “사람이 물건을)빠짐이 없도록 살피거나 갖추다”라고 되어 있다. 제3부터 제5의 의미까지 설명되어 있지만 그 어디에도 ‘마음을 챙기다’라는 뜻은 보이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의미로 써서는 안된다고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을까. 불교신문에 연재된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럼 마음챙김(念, sati)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음챙김은 빠알리어 사띠(sati, 念, 기억)의 역어인데 이것은 √smr.(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추상명사로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에서 사띠(sati)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주로 접두어 ‘anu-’를 붙여 ‘아눗사띠(anussati)’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smr.에서 파생된 다른 명사인 ‘사라나(saran.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① 왜 마음챙김인가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 [불교신문 2643호/ 7월28일자], 2010-07-24)
초기불전에서 사띠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수행과 관련해서 기억이라는 의미로 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어로서 마음챙김이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불설안반수의경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서 운나바 바라문경(S48)과 불설안반수의경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마음챙김(화두)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그리고 2세기(후한 시대)에 안세고(安世高)스님이 옮긴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이라는 경의 제목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안세고스님은 아나빠나(a-na-pa-na, 出入息, 들숨날숨)를 안반(安般)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는 염(念)이 아닌 ‘수의(守意)’ 즉 마음(意, mano)을 지키고 보호(守)하는 기능으로 의역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던 최초기에 마음챙김은 보호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것을 참조해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① 왜 마음챙김인가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 [불교신문 2643호/ 7월28일자], 2010-07-24)
이것이 마음챙김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수하는 근거가 되는 경이다. 특히 운나바 바라문경에 실려 있는 문답식대화에서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는 문구를 들었다.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는 것이 경의 내용이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가장 큰 이유라 한다.
화두챙김에서 따 왔다는데
사띠의 의미가 “기억하고 사유한다 (anussarati anuvitakketi”라는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사띠에 대하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기능이라고 규정한 것은 사띠의 원래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일까?
각묵스님은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매진 하고 있다. 동시에 초기불교를 전파 하기 위하여 대중강연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 강연이 음성이나 영상파일로 된 것도 있어서 인터넷 시대에 스님의 강의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스님의 음성파일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냥 멋대로 지 생각나는대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두가지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겼고, 그리고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거의 대부분 마음챙김으로 통일 되고 있다는 겁니다.
챙긴다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에서 수행법인 화두 챙기는 것, 화두를 챙긴다,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가지고 마음챙김이라 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을 초기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하고 연결시켜 주는 번역입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장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비구니 학인 스님들을 위한 강의에서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술어가 나온 배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음챙김이라는 뜻이 운나바 바라문경과 안반수의 경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선불교의 영향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챙김이라는 말의 유래가 화두챙김이라 한다. 화두선을 하다가 망상번뇌가 일어 났을 때 즉각 화두를 챙기듯이, 마음 역시 챙겨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우연이 아니었을 것
간화선의 경우 화두라는 ‘말의 도구’를 이용하여 본래부처를 찾아 가는 수행이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부처인 것을 확인만 하면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본래 부처를 확인하기 위한 말의 도구가 화두인 것이다. 말의 도움을 받아 부처의 성품을 보아 버리면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성불이라 한다.
말의 도구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뭐꼬’이다.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인천 Y선원의 S선사의 법문에 따르면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라며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참구 하다 보면 본마음, 참나를 깨닫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말의 도구라 불리우는 화두와 유사한 개념이 마음챙김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는 각묵스님이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라고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
화두와 마음챙김
수 단 |
목표 |
비 고 |
화두 (선종에서, 스승이 제자를 인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과제를 말로 표현해 주는 것을 이르는 말-국어사전) |
견성성불 |
1)“이 송장 끌고 다니닌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2)“왜 무라고 했을까?” 3)“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을꼬?” |
마음챙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각묵스님) |
해탈 |
1)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S48) 2) 마음(意, mano)을 지키고 보호(守)하는 기능이다. (불설안반수의경) |
음성파일 강의에 따르면 각묵스님은 지금도 화두를 들고 있다고 한다. 출가하여 제방선원을 다니며 7년간 안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자 초기불교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초기불교 전공자로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이 간화선을 다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본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이용하여 견성성불하듯이, 각묵스님의 글을 보면 마치 마음챙김을 이용하여 해탈을 실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두와 마음챙김의 유사성이 보이고, 또 깨달음을 향한 징검다리 내지 도구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기억하고 사유한다 (anussarati anuvitakketi”라는 사띠의 의미와 동떨어져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
각묵스님의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말의 설명에 따르면 철저하게 기억이 배제 되어 있다. 이는 전재성박사의 번역어 새김이 기억과 사유라고 정의한 것과 매우 대조된다. 같은 말을 두고 왜 이렇게 다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번역에 있어서 선발과 후발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빠알리 니까야 번역의 경우 전재성박사가 최초로 번역하였다. 1989년 상윳따니까야 번역본이 나옴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우리말로 된 번역서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용어에 대한 선점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런데 후발 번역자의 경우 선벌번역자가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급적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재성 박사의 ‘호흡새김’에 대하여 초불에서는 ‘들숨날숨마음챙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호흡이라는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풀어진 들숨날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예는 무척많다.
그런데 완전히 뜻을 달리하는 용어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띠 번역어이다. 선발주자는 ‘새김’이라 하였고, 후발주자는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둘 다 한글로 번역 되어 있지만 완전히 다른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내용 또한 다르다. 새김의 경우 ‘기억과 사유’라는 의미로 정의 되었고,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로 연결시켜 주는 기능 내지 마음지킴’으로 정의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띠의 본래의 뜻은 무엇일까.
사띠빳타나경(염처경, M10)에서
37조도품에서 사띠는 무려 8개의 항목에 달한다. 9개로 가장 많은 정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사띠는 37조도품에서 사념처에 4개, 오근에 1개, 오력에 1개, 칠각지에 1개, 팔정도에 1개 하여 모두 여덟개에 달한다. 이중 가장 많은 항목이 사념처이다.
사띠의 바른 의미는 팔정도에 정념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내용은 사띠빳타나경의 서두에 실려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박사 |
초불 |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1)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2)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한다.
3)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4)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한다.
|
비구들이여, 1)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2)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3)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4)법에서 법을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사띠빳타나경-Satipaṭṭhānasutta-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평등의 시대에
빠알리어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수행승이여”라 하였고, 초불에서는 “비구들이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호칭은 두 번역물을 차별화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전재성박사가 빅쿠에 대하여 수행승이라고 번역한 이유에 대한 것을 각주에서 보았다. 이렇게 쓰여 있다.
Bhikkhu: Pps.I.241에 따르면, 수행승은 가르침의 실천을 성취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Bhikkhu 각주, 전재성박사)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에서(saṁsāre) 두려움을(bhayaṁ)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라 하였다. 따라서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를 비구라 하였다. 그런 비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수행승으로 번역하였다.
“비구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종래의 한문경전의 번역을 답습한 것이라 보여진다. 오래 전에 사용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진다면 ‘비구들이여’라는 호칭은 평등의 시대에 맞지 않다. 출가수행자가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출가자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빅카웨에 대하여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 “수행승들이여”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인다. 이런 호칭에 대하여 비구승단 위주의 주류불교에서는 못 마땅하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세상 (loke)이란
경에서 ‘세상 (loke)’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은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산천초목으로 이루어진 기세간을 포함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몸(kāya)’을 말한다.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고 하였을 때 ‘제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제거에 대한 빠알리어는 ‘위네이야(vineyya)’이다. 이는 선정의 성취에 따른 일시적인 제거를 뜻한다. 왜냐하면 세간적인 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도마낫사(domanassa)의 의미
그런데 ‘탐욕과 근심’에 대한 빠알리어가 ‘abhijjhādomanassa’이다. Abhijjhā와 domanassa의 복합어로 되어 있다. 이 아빗자도마낫사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탐욕과 근심’으로 번역하였고, 초불에서는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도마낫사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domanassa: lit. 'sad-mindedness', grief, i.e. mentally painful feeling (cetasika-vedanā), is one of the 5 feelings (vedanā, q.v.) and one of the 22 faculties (indriya, q.v.). According to the Abhidhamma, grief is always associated with antipathy and grudge, and therefore kammically unwholesome (akusala, q.v.) Cf. Tab. I. 30, 31.
(domanassa, http://www.palidictionary.appspot.com/ )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도마낫사는 ‘슬픔마음’ 또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런 상태’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정신적인 고통’이다. 그래서 도마낫사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섯 가지 느낌 중에 정신적인 고통으로 분류 되고 있다.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그런데 초불에서는 이를 ‘싫어 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결과 “욕심과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라고 되어 버려서 ‘마치 싫어 하는 마음’을 버린 것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에서 정형구로 표시 되어 있는 염오-이욕-해탈이라는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가장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이 때 싫어 하는 마음은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을 싫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라고 되어 있어서 자연스럽다.
몸에서 몸으로 관찰한다는 의미는
다음으로 “몸에서 몸으로 관찰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kāye kāyānupassī’를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몸은 ‘물질적인 몸’이라 한다. 물질적인 것 외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신-물질 할 때의 물질을 말한다. 몸은 단지 몸으로 새겨 져야지 몸과 관련된 느낌이나 마음, 사실(법)등으로 새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몸은 단지 몸으로 알아차려야지 몸에 대하여 남자나 여자, 자아나 중생등으로 알아차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네 가지 관찰대상
이를 네 가지 관찰대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관 찰 |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함 (kāye kāyānupassī)
|
여기서 몸은 물질적인 몸으로 지체와 머리등의 것들로 접합을 의미함. 2)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는 반복적 표현은 그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다른 대상과 분리하여 명상의 대상을 정확히 규정할 목적을 가지고 있음. 3) 몸은 단지 그러한 것으로 되새겨야지 몸과 관련된 느낌이나 마음, 사실(법)등으로 새겨져서는 안됨(남자, 여자, 자아, 중생 등으로 돼새겨서는 안됨) |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함 (Vedanāsu vedanānupassī)
|
1)세간적인 느낌. 2)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3)반복적인 표현은 앞의 몸처럼 이해 되어야 함 |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함 (Citte cittānupassī) |
1)세간적인 마음. 2) 반복적인 표현은 앞의 몸처럼 이해 되어야 함. |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 (Dhammesu dhammānupassī) |
1)세간적인 사실(dhamma) 2) 반복적인 표현은 앞의 몸처럼 이해 되어야 함. |
이와 같이 서로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삼빠잔나와 사띠
이렇게 네 가지를 관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라고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sampajāno satim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초불에서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라고 하였다.
삼빠잔나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띠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새김과 마음챙김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구분 |
전재성 박사 |
초불 |
Sampajāno(삼빠잔나) |
올바로 알아차리고 |
분명히 알아차리고 |
Satimā(사띠) |
새김을 확립하여 |
마음챙기면서 |
사띠마(Satimā)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여’와 ‘마음챙기면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새김과 마음챙김은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번역자들이 밝힌 사항이다. ‘기억과 사유’로 해석한 ‘새김’과 ,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고 마음을 보호하고 지키는 기능’으로서 ‘마음챙김’은 다른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
결정적 차이는 기억과 마음이다. 새김에는 ‘기억’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고, 마음챙김에는 ‘마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새김 |
마음챙김 |
기억 |
O |
X |
마음 |
X |
O |
이와 같이 새김에는 기억이 있지만 마음이 없고, 반대로 마음챙김에는 기억이 없지만 마음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고려한다면 싸띠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전재성박사, 싸띠(sati:念)와 새김,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빠알리어 사띠는 어원적으로 마음에 대한 내용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라는 말을 넣어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또한 정진이라는 말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매우 광의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애매모호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과 같은 삼중번역이 될 수 있음을 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기억이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붕어빵 같은 마음챙김
기억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마치 치매환자와 같은 것이다. 치매환자는 전오식을 알아 보고 듣고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정보가 기억되지 않는다. 전오식이 받아 들인 정보(기억)을 종합하면서 이 정보(기억)을 중심으로 과거의 기억을 탐색하면서 다시 재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라 하였다. 이는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기억(sati)을 의지한다.”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기능을 빼 버린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을 사용하여 초불에서는 ““바라문이여, 마음[意]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사띠번역어에서 기억의 기능이 삭제된 마음챙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한국불교에서 포대기는 있는데 애가 없다”라고 하였다. 껍질만 남아 있을 뿐이지 내용이 없다는 것과 같고, 불교의 겉모습만 있을 뿐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종되었다는 말과 같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기억의 기능이 없는 사띠번역어 역시 붕어빵과도 같은 것이다. 진짜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것이다.
걸으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아는 이유
마하사띠빳타나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 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
(마하사띠빳타나경- Mahāsatipaṭṭhānasutta-새김의 토대의 큰 경, 디가니까야 D22, 전재성님역)
행주좌와에 대한 관찰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걷는다. 걷는 중에 분별 망상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면 망상은 끊어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띠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억과 잊지 않음의 기능으로 가능하다. 이런 기억의 ‘잊지 않음’ 기능으로 인하여 관찰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sampajāno satimā”라 하였다. “알아차리고 새김(기억과 사유)을 확립”하라는 것이다. 알아차림과 기억(새김)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오력 배대치기
그런데 초불에서는 이를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고 하였다. 기억이 없이 단지 대상을 지키는 것이 마음챙김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경우가 아마도 ‘무분별지’ 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화두 챙기듯이 마음을 챙겨 하나의 대상에 고정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의 오력을 간화선의 3요체와 배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 대신근은 오력의 믿음과 배대가 되고, 대분지는 정진과 배대되고, 대의정은 ‘염-정-혜 (念.定.慧)’와 배대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염에 대한 것이 사띠이다. 사띠를 기억으로 보지 않고 단지 지킨다는 의미의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였을 때 배대치기가 가능한 것으로 본다.
기억이 실종된 마음챙김
초기불교 보급에 초기불전연구원의 공은 지대하다. 빠알리 논장과 경장을 번역하여 초기불교를 대중화 시켰고 더군다나 전국을 무대로 한 강연과 TV와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음성 또는 영상 강의 자료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에게 감로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초불에서 만들어 낸 전문 술어를 보면 일부 용어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잘 쓰이지 않는 뜻모를 단어는 고사하고 원래의 의미를 반영하지 않는 술어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띠 번역어인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사띠의 뜻이 “기억과 사유”라는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가장 중요한 기억이라는 말을 배제한채 단지 마음 지킴의 의미나 또는 마음과 해탈을 이어 주는 기능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명백히 간화선의 영향때문으로 본다. 마치 화두 챙기듯이 마음을 챙기는 것으로서의 마음챙김을 말한다.
초불의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기억이 없다. 기억이 실종된 마음챙김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2013-01-05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애는 절망에 이르는 길 (0) | 2013.01.15 |
---|---|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0) | 2013.01.08 |
사띠(sati)의 가장 올바른 표현 (0) | 2013.01.04 |
인간의 타락과 계급발생의 원리,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 (0) | 2013.01.01 |
마노의 대상으로서 담마, 사실인가 법인가 (0) | 201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