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갈애는 절망에 이르는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15. 13:03

 

갈애는 절망에 이르는 길

 

 

 

 

아름다운 호수에서

 

따뜻한 봄날 맑고 잔잔한 호수위에 물새들이 노니는 것을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자연다큐 프로를 보면 약한 것이 강한 것의 먹이가 되는 생존경쟁의 생생한 현장으로 변한다.

 

새가 짝을 이루어 알을 낳아 부화 되었을 때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새끼에게 어미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나른다. 부리에는 곤충이 물려 있는데, 이를 통째로 새끼의 입에 넣으면 새끼는 단 입에 꿀꺽 삼켜 버린다. 그러기를 하루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리고 새끼는 몇 일만 지나면 몰라 보게 자라게 된다. 따뜻하고 나른한 봄날 아름다운 호수가 한 켠에서 삶과 죽음의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높은 산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 보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예술작품 처럼 보인다. 도심에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랜드마크건물이 있고 주변에는 하얀 색깔로 대표되는 고층아파트가 즐비하다.

 

 

 

 

 

 

인간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를 내려다 보면 평화롭기 그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호수 속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세계와 다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인간들의 약육강식의 세계는 새들이나 짐승들 보다 더 심하다.

 

미즈넷에서

 

모바일로 종종 인터넷을 본다. 주로 블로그에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살펴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길목에 미즈넷이라는 사이트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다음에서 서비스 되고 있는 사이트로서 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부간의 갈등, 시부모와 갈등, 자식들과의 갈등 등 자신들이 겪는 괴로움에 대하여 솔직하게 올려 놓고 의견을 듣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철저하게 익명으로 올린 글을 보면 상당수가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글이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든가, 아내가 간통을 해서 괴롭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특히 아내가 딴 남자와 바람이 나서 증거를 잡았을 때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는 식으로 올린 글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답글을 보면 한결 같이 빨리 헤어지라고 말한다. 이런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청정도론  자애수행 편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전생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실라와 자따까」에서 실라와 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간통을 한 나쁜 대신이 적의 왕을 불러들여 3백 유순이나 되는 왕국을 점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한 대신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공동묘지에 땅을 파고 천명의 대신들과 함께 목까지 묻혔을 때 마음으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재칼들이 와서 땅을 파헤쳐 주어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목숨을 구하여 야차의 신통으로 자기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자기의 침상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고 서로 맹세를 하여 친구로 여기면서 말했다.

 

“남자는 포부를 가져야 하고

현자는 싫증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음을 보노라.”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자애수행 27절, 대림스님역)

 

 

부처님이 전생에 왕으로 삶을 살아 갔을 때 전생에 수행한 덕을 반조 하라는 내용이다.

 

대신이 왕비와 간통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땅에 묻어 죽이려 했을 때 보살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 침실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었을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는 결코 허용 되지 않는 행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 되는 번뇌를 버리라고 한다.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라도 욕심부리고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생담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대신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고 한다. 성내는 것의 반대가 자애와 연민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외도를 하여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끝은 어디일까.

 

원로의원 스님의 연기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스님들은 대부분 법문할 때 연기법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설령 연기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해도 매우 단편적이다. 다음과 같은 원로의원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서로는 서로를 의지해서 있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연기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고 구분해 부를 이름도 없다. 반대로 남자가 없다면 여자란 구분도 있을 수 없다. 자식이 없는 부모, 부모 없는 자식, 남편 없는 아내, 아내 없는 남편, 사주 없는 고용자, 고용자 없는 사주, 국민 없는 대통령, 대통령 없는 국민, 여당 없는 야당, 야당이 없는 여당이 있을 수 없다. 죽음과 삶, 고통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없다면 나머지 한쪽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의 극단적 논리를 떠나는 것이 ‘중도’다. 이처럼 상대가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도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상대를 무시하고 적대시하고 없애려고만 드니 개인과 세상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 휴심정 2013-01-01)

 

 

한겨레 종교전문기자가 조계종 원로의원 G스님을 찾아가 고견을 듣는 자리에서, 스님이 말한 연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G스님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 있다라고 풀이 한다. 이는 단지 이것과 저것의 논리적 관계와 이유만 설명할 뿐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조건발생적 연기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있다’ ‘없다로 표현 되는 연기방식을 일반적으로 상호의존적 연기라 한다. 그러나 이는 연기에 대하여 일부만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발생적 연기

 

연기는 상호의존성 뿐만 아니라  조건발생적 연기를 포함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적 요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이와 같은 조건발생적 연기송 다음에 12단계의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붙여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한 것일까. 후대 사람들이 연기법에 대하여 단지 상호의존적 연기로만 볼 것을 우려 하여 부처님이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라 보여진다.

 

연기는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41.

Sādhu bhikkhave. Iti kho bhikkhave tumhepi eva vadetha. Ahampi eva vadāmi: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 - yadida avijjāpaccayā sakhārā, sakhār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ūpa, nāmarūpapaccayā saāyatana, sa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hā, tahāpaccayā upādāna,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khāranirodho, 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 viññā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āyatananirodho, sa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hānirodho, ta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54.

 

Sādhu bhikkhave. Iti kho bhikkhave tumhepi eva vadetha. Ahampi eva vadāmi: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 yadida avijjānirodhā sakhāranirodho, 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 viññā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āyatananirodho, sa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hānirodho, tahā 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 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한다. ,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스님이든 법사이든 연기법을 말한다면 이와 같이 조건성을 갖추고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모두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연기법을 올바르게 전달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순관에 따르면 마지막 구절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로 되어 있다. 이 문구에서 빠알리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에 주목한다. 여러 개의 단어가 모여 있는 복합어인데,  이는 soka(슬픔)-parideva(비탄)-dukkha(고통)-domanassa(근심)-upāyāsā(절망)의 복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중 우빠야사(upāyās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절망으로 번역하였다. 영어로는 tribulation(시련, 고난) 또는 grief(비탄, 큰 슬픔)으로 표현된다. 일본어 사전에는 (괴로할 뇌), (시름 수), 絶望(절망)으로 표기 되어 있다. 갈애를 추구한 결과가 시름, 비탄, 절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갈애를 일으키는 정보통신기기

 

TV를 보면 온 갖 자극적인 화면으로 넘쳐난다. 특히 먹는 것에 관한 것이 많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먹거리에 대하여 소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이건 농촌이건 한 상 푸짐 하게 차려 놓고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절로 침이 넘어 갈 정도이다. 또 먹는 장면을 보면 모두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맛을 향과 맛을 음미하고 난 다음 목구멍으로 넘어 가면 그만이다. 아무리 예술품 같은 음식일지라도 나오는 것은 ‘똥’으로 모두 똑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맛에 대한 갈에 뿐만이 아니다. 보는 것에 대한 갈애, 듣는 것에 대한 갈애 등 온통 다섯가지 감각능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자극은 TV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생활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인터넷 공간이야말로 시각적 갈애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접속만 하면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는 성인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산간오지에서도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산간벽지 오지를 막론하고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다. 깊은 산중에서 사는 도인들도 망만 깔려 있으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몸은 세속을 떠났을지라도 마음은 세속을 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터넷 접속이 대표적인 예이다.  

 

산중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위성안테나이다. 안테나가 달려 있다는 것은 세상과 단절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고 하더라고 안테나 하나만 설치 되어 있으면 세상을 훤히 알 수 있다. 이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안테나로 TV를 보고, 인터넷 접속을 한다면 세속을 떠났다고 볼 수 없다. 몸은 세속을 떠나 있지만 마음은 세상을 향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차라리 세상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렇다면 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선방을 그리워 하는 스님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두 차례의 안거철이 있다. 동안거와 하안거이다. 각각 3개월 씩 살다 보면 일년이 안거철인 기간과 비안거철인 기간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우기 한 철 밖에 없었다. 우기에 비가 와서 활동에 지장을 받고 나다니다가 벌레와 같은 생명체를 밝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기후조건이 다른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시행된다. 그러다보니 일년 중 반을 선방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이나 세미나 등을 통하여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선방에 대한 추억이 있는 것 같다. 주지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의 소원이 선방에 가서 참선에만 몰입하고 싶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루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에게 있어서 선방에서 참선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라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선방을 그리워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선방에서는 오로지 참선만 한다고 한다. 예불참석하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참선 밖에 없다 보니 선방출신 스님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신심있는 불자들이라면 모두 외우는 천수경도 못 외는 스님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아스님의 글에 따르면 선방에 오래 있다 보면 무능력자가 되기 쉽다고 한다. 염불이나 법회, 포교 등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요즘 선방에서는 정보통신기기가 허용 되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온 갖 갈애를 일으키고 세속이나 다름 없게 하는 정보통신기기가 있다면 이는 몸은 선방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갈애의 추구는 절망(upāyāsā)으로

 

위성안테나, TV, 인터넷, 스마트 폰 등 정보통신기기에서는 쉴새 없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갈애를 유발하는 화면과 음성을 내 보내고 있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극받는다. 그래서 새로운 갈애를 유발하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미디어 다음에서 볼 수 있는 미즈넷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들을 보면 이럴 경우 어찌 하오리까?”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댓글을 보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식 답변과 거리가 멀다. 역시 갈애에 기반을 둔 댓글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부처님은 무엇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명백하다. 갈애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절망(upāyāsā)’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2013-01-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