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일념즉시무량공간, 일미진중함무량시간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18. 10:26

 

 

일념즉시무량공간, 일미진중함무량시간

 

 

 

 

전철안에서 본 인간스펙트럼

 

어제는 행복했다. 모처럼 큰 일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 달을 유지할 수 있는 분량의 대작이 걸린 것이다. 더구나 중작과 소작 등 몇 개가 겹치는 바람에 이를 처리하느라 매일 쓰다시피 한 글을 올릴 수 없었다.

 

대작을 준 업체를 방문하였다. 답십리역 부근에 있어서 전철로 이동하였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 점심 전후의 전철과 지하철은 한산하였다. 앉아서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 한가한 시간대이어서일까 전철안에는 유독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다. 두툼한 옷차림으로 중무장하고 모자와 마스크까지 쓴 노인들은 느릿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노인들의 경우 무료이기 때문에 전철을 이용한 외출로 보여 진다. 이렇게 전철안에는 아이들에서부터 젊은 대학생, 샐러리맨, 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보여지는 다영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역시 한 눈에 보는 듯 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한 번에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스펙트럼(spectrum)’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스펙트럼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복잡하게 짜여진 현상이나 물질을 단순한 성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양의 크기에 따라 강도의 분포를 배열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스펙트럼에 대한 영어사전을 보면 범위, 잔상으로 해석되어 있다.  아마도 스펙트럼에 대하여 ‘범위’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전철안에서 모든 연령대를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스펙트럼이기 때문이다.

 

스펙트럼 아날라이저(spectrum analyzer)

 

스펙트럼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상하고 특수한 말처럼 보이지만 전자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나 전자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특히 주파수관련 제품을 취급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이는 ‘스펙트럼 아날라이저(spectrum analyzer)’라는 계측기가 있기 때문이다.

 

 

 

 

스펙트럼 아날라이저(spectrum analyzer)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문자 그대로 주파수 분석기이다. 저주파에서 초고주파에 이르기 까지 전주파수대역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특정수파수를 보고 싶으면 스팬(span)을 조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FM방송이 88~108Mhz 대역인데 이 중 특정 방송의 주파수를 보고 싶으면 스팬을 늘리면 해당 방송국의 주파수가 뜬다. 이를 보고 신호의 세기나 변조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주파수 영역은 할당되어 있다. 미국 FCC의 규약에 의하여 주파수에 대한 사용영역이 법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FM대역은 88~108Mhz 범위에서만 사용해야 하고, 지금은 아날로그 TV방송이 중단 되었지만 50~450Mhz 대역까지로 규정되어 있고, UHF대역은 450~900Mhz 로 할당 되어 있는 식이다. 이 보다 높은 주파수 대역도 규정되어 있는데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방송하는 경우 4Ghz대 또는  10Ghz대의 대역이다.

 

주파수를 이용하여 정보를 보내는 이동통신 단말기 역시 지정된 주파수 대역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주파수 관련제품은 지정된 주파수 범위 내에서 전파를 발사 해야 한다. 그래서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가청주파수대역(20hz~15Khz)에서부터 라디오와 TV의 몇 백메가 헤르쯔, 그리고 인공위성의 기가헤르쯔 대역까지 모두 볼 수 있고  또한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스펙트럼 아날라이저는 주파수관련 전자제품의 개발이나 생산에 있어서 필수적인 장비인 것이다.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

 

이렇게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전 주파수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주파수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특정 주파수의 사이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파수는 사이클을 가지고 있다. 1초 동안에 몇 번 주기가 되풀이 되느냐에 따라 주파수가 결정된다. FM대역에서 100메가 헤르쯔(Mhz)로 FM방송을 하고 있다면, 100메가 헤르쯔에 대한 주파수는 일초에 백만사이클이다. 백만 사이클에 음성(가청주파수)를 실어 보내는 것이다. 이를 주파수합성(Frequency synthesizer)이라 한다. 이 합성주파수를 단말기에서는 역순으로 복조하여 소리를 나오게 만든다. 이때 가청주파수대역(20hz~15Khz)의 소리를 분석할 수 있는 계측기가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이다.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

 

 

 

오실로스코프는 주파수에 대한 시간분석기라 볼 수 있다. 특정 주파수에 대하여 타임스팬(time sapn)를 조정하여 주파수의 크기나 찌그러짐 등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파수 관련 제품의 개발이나 생산에 있어서 스펙트럼아날라이저(주파수 분석기)와 오실로스코프(시간 분석기)는 필수적이다. 이 두 장비만 있으면 그 어떤 주파수 관련 제품도 개발해 낼 수 있고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쪼개고 또 쪼개서 보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다. 방송이나 통신, 컴퓨터 , 이동통신단말기 등도 마찬가지이다. 주파수와 관련된 모든 제품을 만든것도 인간이고, 이를 운용하는 것도 인간이고, 이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상품화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창조주가 만들었다면 그 이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해독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주파수관련 제품 개발에 필수적인 장비가 스펙트럼아날라이저와 오실로스코프라 하였다. 이는 주파수와 시간에 관계된 것이다. 하나는 주파수를 분석하는 것이고, 또 하는 시간은 분석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파수를 쪼개고 또 쪼개서 보는 것을 말하고, 또 시간을 또 쪼개고 또 쪼개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주파수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보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사이클을 가진 주파수로 되어 있다. TV에서 움직이는 동영상에 대하여 스펙트럼 아날라이저와 오실로스코프를 이용하여 쪼개고 또 쪼개서 들여다 보면 얼굴은 온데 간데 없고 모두 주기를 가진 주파수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들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들여다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말하면, 방송을 내 보는 것에 대하여 변조(Modulation)’한다고 말하고. 이를 단말기에서는 거꾸로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를 복조(Demodulation)’한다고 말한다. 이런 복조 과정을 거치면 소리와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파수와 시간과의 관계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변복조시스템에서 주목하는 것이 주파수(frequency)와 시간(time)과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주파수와 시간은 ()’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t=1/f 또는 f=1/t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래서 모든 주파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스펙트럼아날라이저(주파수분석기) t=1/f라 볼 수 있고,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오실로스코프(시간분석기) f=1/t라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 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전철안에서 모든 연령대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어린아이를 낮은 저주파영역으로 보고 나이 드신 분을 고주파 영역으로 본다면 전 주파수 대역을 한 순간에 다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한 순간에 전 영역에 걸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은 산천초목 산하대지, 하늘, 사람들 등으로서 시야에 보이는 전 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한 순간에 전 주파수대역(스펙트럼)을 보는 것과 같다. 전 주파수대역을 한 순간에 다 볼 수 있는 스펙트럼 아날라이저 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한 순간에 모두 시야에 들어 온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지나가면 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리고 다 자세하게 들여다 본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오실로스코프(시간분석기)와 같은 것이라 보여진다.

 

오실로스코프는 특정 주파수를 잡아 시간을 벌리고 또 벌려서(쪼개고 또 쪼개서) 자세하게 들여다 보는 것을 말한다. 오실로스코프로 들여다 보면 남는 것은 주기를 갖는 사인파 형식의 주파수로 귀결 되지만 사람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알 수 있고, 더 자세하게 보면 성향까지 파악할 수 있다.

 

볼 수 없다고 하여, 들을 수 없다고 하여

 

한 번 봄으로써 세상이 보인다. 하늘을 쳐다 보았을 때 눈의 시야가 미치는 범위까지 볼 수 있다. 시력이 좋다면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다. 청각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범위는 20hz~15Khz 가 일반적이지만, 사람에 따라 그 이상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박쥐의 경우 인간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고 어두운 동굴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가청주파수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각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FM의 경우 88~108Mhz의 주파수 대역으로 매일 방송하고 있지만 너무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리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주 가득히 수 없이 다양한 주파수가 있지만 우리들의 청각능력의 한계 때문에 다 들을 수 없다. 

 

일체란 무엇인가

 

냄새도, 맛도, 신체적 느낌도, 정신 영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시각능력이나 청각능력이 한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 정신능력(마노)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등의 영역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일체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 한다.

 

(일체의 경, 상윳따니까야 35:23, 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님은 우리의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이 일체라 하였다.

 

세상이 발생되는 원리

 

 이는 또 세상의 일어남으로도 설명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로까사무다야경-Lokasamudayasutta-세상의 생겨남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07(1-4),전재성님역)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 접촉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순간에 자신의 감각능력에 따라 전 영역을 보거나 듣거나 등이 가능한데, 이 중 접촉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았다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 오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에게 시선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남자다또는 여자다라는 판단이 서게 되고, 여자자면 예쁘다또는 섹시하다라는 표상(總相, nimitta)이 일어날 것이다. 이어서 코가 높다든가 눈이 크다든가 등의 신체의 특정 부분에 시선이 집중 되는 세상(細相)을 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감각접촉에 따라 인식을 하게 됨으로 세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사람에 따라 보는 시야가 다를 수 있다. 또 듣는 능력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제눈에 안경이라거나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서 시야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 abhinandunti. Imasamiñca pana veyyākaraasmi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 vītamala dhammacakkhu udapādi: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고 기뻐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명의 수행자들을 모아 놓고 부처님 스스로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최초로 설하자, 다섯명 중에 꼰단냐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묘사 되어 있다. 이때 진리의 눈이 빠알리어로 담마짝꾸(dhammacakkhu)’이다. 이를 법안(法眼)’이라고 한다. 법의 눈이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였던 눈이 생겨난 것이다.

 

지혜의 눈(慧眼, nāna-cakkhu)과 육신의 눈(肉眼, mamsa-cakkhu)

 

이와 같은 법안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두개의 시각이 있다라고 하였다. 하나는 지혜의 눈(慧眼, nāna-cakkhu)’이고, 또 하나는 육신의 눈(肉眼, mamsa-cakkhu)’이라 한다.

 

그런데 지혜의 눈에는 또 다섯가지가 있다. 1) 부처의 눈(佛眼, Buddha-cakkhu)은 존재의 성향내지 잠재적인 경향에 대한 지혜나 감각능력의 성숙도에 지혜를 말하고, 2)진리의 눈(法眼, dhamma-cakkhu)은 낮은 세 단계의 길()과 경지()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3)보편의 눈(普眼, samanta-cakkhu)은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하고, 4)하늘의 눈(天眼, dibba-cakkhu)는 빛의 가득 퍼짐에 의해 생겨나는 지혜라 한다. 마지막으로 5)지혜의 눈(慧眼, pañña-cakkhu)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구별하는 지혜라 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면 여러가지 지혜의 눈이 생겨나는데, 이 중 꼰단냐가 얻은 것은 진리의 눈, 즉 법안(法眼, dhamma-cakkhu)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생겨난 것으로 묘사된 담마짝꾸(dhammacakkhu, 法眼)

 

이와 같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또는 진리의 눈을 얻었다라는 표현을 빠알리니까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처럼 말씀하시자 존자 라훌라는 만족하여 세존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기뻐했다. 그리고 이처럼 말씀하실 때에, 라훌라의 마음은 집착 없이 모든 번뇌에서 해탈했다. 또한 그들 수천의 하늘사람들에게는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먼지 없고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M147, 라훌라에 대한 가르침의 작은 경)

 

 

이와 같이 장자 우빨리는 그 자리에서 티끌 없고 때 묻지 않은 것,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그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의 눈을 얻었다.

(M56, 우빨리의 경)

 

바라문 브라흐마유에게 그 자리에서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먼지 없고 때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M91, 브라흐마유의 경)

 

 

 이와 같이 브처님의 설법을 듣고 없던 눈이 새로 생겨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이미 있는 것이라 든가,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선불교에서와 같이 우리는 본래 깨달은 부처로서 단지 우리가 부처자신임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진리의 눈(담마짝꾸, 법안)은 없는 곳에서 생겨난 것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어로 담마짝깡 우다빠디(dhammacakkhu udapādi)라 되어 있다.

 

여기서 우다빠디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arose; originated , 生起, 등으로 설명 되어 있다. 따라서 담마짝꾸는 이미 내재 되어 갖추어진 것이라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함에 따라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믿어라가 아니라 와서 보라

 

이렇게 진리의 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보아야하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그렇다면 알고 본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Ete ca paivijjha yo gahaṭṭho
Sutav
ā ariyasāvako sapañño
Sabbe
 te tādisāti ñatvā
Iti disv
ā na hāpeti tassa saddhā
Katha
hi duṭṭhena asampaduṭṭha
Suddha
asuddhena sama kareyyāti.

 

이러한 것들을 꿰뚫어 배운 바가 많고,

지혜로운 재가의 고귀한 제자라면,

그들이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알고 또한 보아서,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가 더럽혀진 자와 더럽혀지지 않은 자,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를 똑같이 볼 수 있을 것입니까?”

 

(쭌다경-Cundasutta, 숫따니빠따(Sn1.5),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알고 또한 보아서 (ñatvā Iti disvā)’라는 구문이 있다. 이것이 앎(知)과 봄(見)에 대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은 앎과 봄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나는 알지 못하고 보지못하는 자가 아니라, 알고 또한 보는 자에게 번뇌가 소멸한다는 사실에 관해 말한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번뇌를 소멸할려면 번뇌라는 것을 즉시 알아야 하고 보아야 소멸하는 것이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소멸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믿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항상 와서 보라!(eipassika)”라고 하였지 믿어라!”라고 강조 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앎과 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초전법륜경에서도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라고 선언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앎과 봄의 중요성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신호등의 비유

 

주석에 따르면 앎과 봄의 중요성에 대하여 신호등의 비유를 들기도 한다. 봉사가 붉은 신호등 앞에서는 서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는 가야한다은 가지고 있어도,  실제 신호등 앞에서는 봄이 없으면그의 앎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가 신호등 앞에서 붉은 신호등이나 푸른 신호등을 볼 수 있어도,  붉은 신호등 앞에서 서야 하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 갈 수 있다는 앎이 없으면그의 봄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념즉시무량공간(一念卽是無量空間), 일미진중함무량시간(一微塵中含無量時間)

 

화엄경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말이 있다. ‘한 순간이 무량겁과 같다는 것이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도 있다. ‘한 작은 띠끌속에 시방삼세를 머금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게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이다.

 

 

 

 

 

Andromeda Galaxy

 

 

 

공간을 스펙트럼개념으로 본다면 주파수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시간과 주파수는 t=1/f 또는 f=1/t와 같이 항상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주파수영역(frequency domain)과 시간영역(time domain) 은 함께 비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은 물리법칙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일념, 즉 한순간에 전체 영역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일념즉시무량공간(一念卽是無量空間)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또 한 주파수에서 전시간영역이 커버되기 때문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말은 일미진중함무량시간(一微塵中含無量時間)’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013-01-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