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삼마사띠(正念)가 정온(定蘊)에 속해 있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20. 18:42

 

삼마사띠(正念)가 정온(定蘊)에 속해 있는 이유

 

 

 

검증 되지 않은 글쓰기

 

종종 비밀 댓글을 받는다. 주로 교리에 대한 것이 많다. 그런 댓글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잘 모른다라고 답하고 양해를 구한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출가자도 아니고, 학문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그날 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목하여 글을 올리고 있을 뿐인데 일부 법우님들은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현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고 내용이 길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두 경전에 근거한 내용들이다. 만일 본인의 생각이 반영된 글쓰기를 한다면 A4 한 장 채우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하는 것을 보고 마치  스님들이나 학자들과 같은 레벨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생활인이다. 높은 신분에 있는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바닥에 있는 미천한 존재이다. 따라서 올려 진 글은 검증 되지 않은 미천한 자의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띠에 대하여 더 알고 싶다고

 

지난 번 사띠에 대하여 글쓰기를 한 바 있다.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글쓰기를 하였는데, 사띠의 경우 알면 알수록 점차 더 어려운 용어 같다. 이제까지 1700년 불교역사에서 제대로 접해 본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올려 주셨다.

 

 

더불어 궁금 한것은 사띠(sati)의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어하니 아시는데로 알려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묘원법사의 사띠의 정의를 그대로 옮겨 놓으신 것과 얼마전에 설하시 사띠의 정의와 다른 것 같아 질문을 드립니다 부탁 합니다 저는 KJ에 살고 있으며 이공부가 무척 재미있고 좋아서 연꽃님의 블로그를 열심히 탐독한지가 일년이 되었고 그동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질 못하였는데 .....,그냥 눈물이 나도록 고마웁습니다.

초기불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연꽃님의 블로그를 열심히 추천하고 있습니다.

 

(ㅇ법우님)

 

 

법우님이 올려 주신 글을 보면 마치 유명스타가 된 듯한 느낌이다. 불교방송에서 마음으로 듣는 음악 프로를 보면 진행자인 정목스님에게 보내는 사연을 들을 수 있는데, 그 때 청취자들이 정목스님에 대하여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라든가  감사 합니다등의 말을 듣는다. 마치 그런 소리를 듣는 것 같아 매우 송구스럽다. 스님이나 학자 또는 유명 불교인들과 같이 고귀한 존재도 아닌 미천한 자에게 과분한 언사라 보여 진다.

 

법우님은 사띠의 정확한 뜻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묘원법사의 사띠에 대한 정의와 지난 번 올린 글에 대한 사띠 정의가 다른 것이 아닌지 묻고 있다.

 

사띠, 사띠

 

사띠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지만 알고 있는 사항을 말한다면, 묘원법사의 사띠 개념과 올린 글에서의 사띠 개념, 즉 기억과 사유로서의 사띠 개념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묘원법사의 경우 사띠라는 말에 대하여 알아차림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알아차림이라는 용어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1988년에 최초로 사용하였다는 김재성교수 역시 불교 TV 강좌에서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수 도 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원법사의 알아차림에 대한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묘원법사가 미얀마에서 수행중에 머리에 상기가 왔다고 한다. 머리가 상기 됨에 따라 수행을 거의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에 대하여 사야도에게 물어 보았더니 사야도는 사띠, 사띠라는 말만 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띠는 알아차림이다. 상기 된 부위를 알아차려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기된 부위에 마음을 집중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한 결과 신기하게도 머리가 터지지 않고 상기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사야도가 말한 사띠는 어떤 의미이었을까.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사띠의 의미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기억과 사유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었는데 그것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실라경(S46:3)이다.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계행을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추고 해탈을 갖추고 해탈지견을 갖추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수행승들을 친견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에게 배우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을 가까이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에게 시중드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에 대하여 기억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을 따라 출가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수행승들의 가르침을 듣는다면, 두 가지 멀리 떠남, 즉 몸의 멀리떠남과 마음의 멀리떠남을 통해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세존]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 된다. 수행승이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그 때 수행승의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는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새김을 닦으면서 그는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한다.

 

(실라경- Sīlasutta-계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3, 전재성님역)

 

 

칠각지 중에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nga)’에 대한 것이다. 사띠라는 용어의 근거가 되는 말이 기억하고 사유한다.(anussarati anuvitakketi)’라는 문구가 있다.

 

기억과 사유라는 기능이 있어야 사띠의 올바른 표현방법이라 한다. 이렇게 기억과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앞에 문구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담마(dhamma)’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기억하였다가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왜 기억하고 되새겨 보아야 할까. 이는 바로 앞 문장에 나와 있다. ‘몸의 멀리떠남과 마음의 멀리떠남을 통해서 멀리 떠나기 위해서라는 문구이다. 이는 다름 아닌 해탈을 말한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이야기를 잘 기억 해 두었다가 항상 되새김 하고 사유해야 된다는 말로 받아 들인다.

 

그런데 경에서는 또 새김을 닦으면서 그는 그 가르침을 지혜로 고찰하고 조사하고 탐구한다.”라고 하였다.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함께 지혜롭게 고찰하라는 것이다. 이를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관찰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인다.

 

그렇다면 사야도가 말한 사띠, 사띠라는 말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 하신 것을 되새겨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 , 무아임을 관찰하라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고통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통증이 심해도

 

만일 고통이 영원히 계속 된다면 어떻게 될까. 또 즐거움만 영원히 계속 된다면 어떻게 될까.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나 즐거움은 단지 느낌일 뿐 고통이나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고통을 예로 든다면 고통은 강한 통증을 유발한다. 다리가 골절 되었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골절상을 입은 사람은 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골절상으로 인한 고통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이 지속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주기성을 갖는 것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보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면 1파가 오면 다음에 2파가 오고, 다음에 3파 이런 식으로 연이어 몰려 온다. 마찬가지로 골절상에 따른 통증 역시 1, 2, 3파 식으로 온다. 통증이 일어고 사라지고, 그리고 나서 또 일어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통증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증과 통증 사이에 일시적으로 통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는 통증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통증이 심해도 알아차리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통증에 대하여 사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상, , 무아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념처 수행일 것이다.

 

고요함에 이르게 하는 사띠

 

사띠의 대상은 고통이나 통증 뿐만이 아닐 것이다. 탐욕이나 성냄 역시 사띠의 대상이다. 막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성냄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여 이를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하면 화가 수그러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마음새김으로 고요함에 이르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는 둘 다의 유익을 위한 것이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게송에서 대상에 대하여 사띠한다는 것은 고요함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 고요함이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존]

 빤짤라짠다여, 새김을 확립한 이들은

올바른 삼매를 얻어

차폐 가운데

열반에 이르는 길을 안다네.

 

(빤짤라짠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7(1-7),전재성님역)

 

 

[싸밋디]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했고

새김과 지혜가 성숙해서

마음은 삼매에 잘 들었네.

마음대로 그대의 모습을 바꾸어도

나를 두렵게는 하지 못하리라.

 

(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3-2), 전재성님역)

 

 

첫 번째 게송에서 차폐는 오장애와 오욕락을 말한다. 게송을 보면 사띠를 하여 삼매에 들었다고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삼매를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아 사띠는 삼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념과 정정은 열반에 이르는 수단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삼매가 왜 중요할까.

 

지혜의 작용처럼 보이는 마음챙김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물을 보면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로서 운나바 바라문 경을 들고 있는데, 초불식 사띠의 규정에 따르면 마음챙김(사띠)에 대하여 마음과 해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로 보고 있다. 또 마음챙김에 대하여 문지기 역할로서 대상에 대하여 지키는 역할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하는 초불의 마음챙김에 대하여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됨을 강조 하고 있다. 사띠에서 기억의 기능이 빠져 있는 것이다. 기억의 기능이 빠진 초불의 마음챙김은  마음과 해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이라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마음챙김이 마치 지혜의 작용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현상이 무상--무아라는 사유라는 것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삼매의 기능(정온)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게송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새김을 확립한 이들은 올바른 삼매를 얻어라든가, “새김과 지혜가 성숙해서 마음은 삼매에 잘 들었네라는 구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띠가 지혜의 작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매의 의미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는 팔정도에서 알 수 있다.

 

정념을 정온(定蘊)에 묶어 놓은 이유

 

팔정도를 세글자로 줄이면 --라 한다. 이중 혜온(慧蘊,paññā-kkhandha)에 해당하는 것이 정견정사유이다. 계온(戒蘊, sīla-kkhandha)에 해당되는 것은 정어정업이다. 그런데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에 해당되는 것은 정정진정념정정이라는 사실이다. 삼마사띠가 혜온에 속할 것 같은데 왜 정온에 묶어 놓았을끼. 또 정정진과 정념이 삼매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왜 계정혜 삼학 중에 정온에 묶어 놓았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볼 수 있다.

 

 

Sati: 올바른 새김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새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새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싸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 세 소년이 놀이하러 정원에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 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빌려주어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새김을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새김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마음챙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니까야에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가 함께 주어져 있다. ‘무엇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 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실에 관해 사실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Sati 각주, 상윳따니까야 까씨의 경(S7:11), 전재성박사)

 

 

각주에 따르면 사띠가 혜온이 아닌 정온에 속해 있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사띠(정념)는 위리야(정진)와 사마디(삼매)와 함께 정온을 구성하는데, 정정진은 힘을 의미하고, 정념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정정은 올바른 집중을 의미한다고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붓다고사는 어린 아이 세 명이 담장 높이에 있는 꽃을 따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맨 밑에 등을 받쳐 주는 것이 정정진의 역할이고, 그 위에 서서 꽃을 따는 것을 정정의 역할로 비유하였고, 꽃을 따기 위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빌려 주는 것에 대하여 정념의 역할로 비유하였다. 이렇게 삼박자가 맞았을 때 꽃을 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로 보았을 때 사띠는 정온에 속하는 것으로 정진과 삼매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등으로 번역하여 막연하게 지혜의 작용 정도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함께 해야

 

이렇게 사띠(새김 또는 알아차림)와 위리야(정진)가 사마디(삼매)와 함께 정온에  묶여져 있어서일까 초기불교에서는 삼매의 중요성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이를 잘 말해 준다.

 

 

4.

Khaya virāga amata paīta        카양 위라-강 아마땅 빠니-
Yadajjhag
ā sakyamunī samāhito,          야닷자가- 사꺄무니- 사마-히또
Na tena dhammena samatthi kiñc
ī         나 떼나 담메나 사맛티 낀찌-
Idampi dhamme ratana
paīta         이담삐 담메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5.

Ya buddhaseṭṭho parivaṇṇayī suci     양 붓다셋토 빠리완나이- 쑤찡

Samādhi mānantarikaññamāhu,             사마-디 마-난따리깐냐마-후
Sam
ādhinā  tena samo na vijjati         사마-디나 떼나 사모 나 윗자띠
Idampi dhamme ratana
paīta         이담삐 담메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훌륭하신 깨달은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입니다.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4번과 5번 게송(Imee Ooi창송)

 

 

 

라따나경에 따르면 13개의 게송 중에 위의 4번 과 5번 게송이 삼매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삼매를 통하여 지멸(Khaya)’ 소멸(virāga)’ 불사(amata)’ 승묘(paīta)’ 를 성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바로 열반을 말한다. 열반은 삼매를 통하여 성취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함께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삼매에 든 것은 팔정도에 따르면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 이렇게 세가지가 함께한 정온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삼매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Samādhinā  tena samo na vijjati)’ 라고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사띠(sati)의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어하는 법우님을 위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글을 작성해 보았다. 경전에 따르면 사띠의 의미는 기억과 사유라는 뜻이고, 더 자세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사유를 뜻하고, 또 이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사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띠에 대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기억이라는 의미가 빠져 있기 때문에 적절치 않아 보인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1998년도 처음 이 말을 사용할 당시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한 것이 오늘날 까지 관행처럼 굳어 왔다고 보여진다.

 

또 초불의 경우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등 논장부터 번역하였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적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처음부터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하였더라면 지혜의 작용을 의미하는 듯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초불연의 적극적인 활동의 영향이서일까 주류불교 측 사람들은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억의 기능이 상실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사띠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바뀌어 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개 불로그의 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측에서 본다면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은 잡문에 해당되고, 그런 글을 쓰는 자에 대하여 잡것또는 잡놈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13-0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