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내 몸만 바라 보지요?”32상 80종호와 법신(法身)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23. 22:27

 

 

왜 내 몸만 바라 보지요?”32 80종호와 법신(法身)

 

 

 

금강경 사구게의 원형이 빠일리 니까야에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면 의외로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과 유사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금강경에 유명한 사구게가 여럿 있는데 대부분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금강경 사구게의 원형이 빠일리 니까야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금강경

빠일리 니까야

如筏喩者 (여벌유자)

法尙應捨 (법상응사)

何況非法 (하황비법)

뗏목의 비유로 알아 들어서 물을 건넌 뒤에 뗏목을 놓고 가듯이 법에 대한 집착을 벗어야 하리니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리요.

 

(금강경, 6 정신희유분)

Kathakārī ca so bhikkhave puriso tasmi kulle kiccakārī assa? Idha bhikkhave tassa purisassa uttiṇṇassa pāra gatassa evamassa: bahukāro kho me aya kullo, imāha kulla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 uttiṇṇo, yannūnāha ima kulla thale vā ussādetvā4 udake vā opilāpetvā yena kāma pakkameyyanti. Eva kārī kho so bhikkhave puriso tasmi kulle kiccakārī assa. Evameva kho bhikkhave kullūpamo mayā dhammo desito nittharaatthāya no gahaatthāya. Kullūpama vo bhikkhave dhamma desita ājānantehi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

 

(뱀에 대한비유의 경- Alagaddūpamasutta 맛지마니까 M22, 전재성님역)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여로역여전)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

 

모든 유위법은 꿈 같고, 환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나니, 반드시 이와 같이 볼지니라.

 

(금강경, 32 응화비진분)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āyūpamañca viññā
a

dīpitā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포말 비유의 경-Pheapiṇḍūpama sutta. 상윳따니까야 S22:95,전재성님역)

若以色見我 (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 (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 (시인 행사도) 不能見如來 (불능견여래)

 

만약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

 

(금강경, 26 법신비상분)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박깔리의 경- Vakkali sutta,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재성님역)

 

 

아공법공과 막행막식

 

첫 번째 게송의 경우 너무나 유명한 뗏목의 비유이다. 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듯이 법 아닌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뗏목의 비유가 맛지마 니까야에서도 보인다.

 

맛지마 니까야에는 수 십개의 비유가 실려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뗏목의 비유이다. 그렇다면 금강경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맛지마 니까야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가 금강경과 다른 것이 있다. 금강경에서는 아공법공에 따른 법도 공한 것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니까야에서는 선한 진리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진리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말로 해석된다.

 

부처님의 이러한 태도는 각주에 따르면 도덕적 허무주의로 오해 받기 위해서라 한다. 또 깨달은 자는 선악에 걸림 없이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아공법공을 주장하며 막행막식하는 것을 경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태양의 후예(ādiccabandhu)

 

두 번째 게송의 경우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멋진 게송이다. 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멋지고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게송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송의 원형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로 분류하여 놓고, 이들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물질에 대하여 포말과 같은 것이라 하고, 느낌은 물거품으로, 지각은 아지랑이로, 형성은 파초로,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하였다. 이를 태양의 후예(ādiccabandhu)’가 가르쳤다고 하였다. 태양의 후예는 부처님을 말한다.

 

왜 내 몸만 바라 보지요?”

 

세 번째 게송은 부처의 형상이나 음성만을 보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보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하는 자라 한다. 그런데 구마라집이 번역한 이 게송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후반부의 게송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구마라집본 보다 늦게 번역된 류지본(509년 역출)에 따르면 의 후반부 게송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류지본의 경우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뒤에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 부분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후반부 게송에 대한 것이 상윳따니까야에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라고 표현되어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보는 것이라 하였을까.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어떤 부처님의 제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때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의 아름다움과 목소리에 매료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 마치 미인 강사가 강의를 하는데 강사의 얼굴만 빤히 쳐다 보는 격이 된다.

 

그럴 경우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을까. 아마도 왜 내 몸만 바라 보지요?”라고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리고 “외형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32상을 갖춘 잘생긴 얼굴과 몸매, 그리고 목소리와 같은 외형으로 부처님을 보지 말고 부처님을 보긴 보되 내면의 진리의 부처님을 보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을 말한다. 외형의 아름다운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몸을 가진 부처님을 보라는 것이다.

 

 

 

 

법신(法身)

 

 

 

그래서 부처님은 왁깔리에게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라고 말하였다. 법신으로서 부처님을 보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 게송에서는 나를 보면 법을 본다내용이 빠져 있어서 게송만으로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한 구절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한 구절이 빠지면 내용이 심오해진다고 한다. 빠진 구절 때문에 앞 뒤 문맥이 연결 되지 않아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약이색견아~”시작 되는 게송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법화경 약초유(藥草喩)에서

 

이와 같이 금강경에 실려 있는 세 편의 게송을 통하여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과 비교해 보았다. 비교해 보니 오리지날은 빠알리 니까야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승경전은 기원을 전후로 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대승논사가 대승경전을 편찬 하는데 있어서 빠알리 니까야의 비유나 게송등을 활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금강경 뿐만 아니라 법화경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법화경에서 법화칠유가 매우 유명하다. 화택유(火宅喩). 궁자유(窮子喩), 약초유(藥草喩,雲雨喩), 화성유(化城喩), 의주유(衣珠喩,繫寶珠喩), 계주유(髻珠喩), 의자유(醫子喩) 이렇게 일곱가지의 비유가 있다. 이 중 약초유(藥草喩,雲雨喩)가 있다. 운우유라고도 한다. 약초유는 어떤 내용일까.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나 숲, 그리고 약초는 많지마는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니라. 먹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이나 숲이나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이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을 따라서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마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법화경, 약초유품)

 

 

법화경에 따르면 같은 비가 내려도 받아 들이는 것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골고루 산천초목을 적셔 주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출현한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비를 맞고 자라도 풀과 나무가 차별이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것도 근기에 따라 다름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약초유의 원형 게송

 

이와 유사한 비유가 상윳따니까야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i su lokasmi6 pajjoto ki su lokasmi6 jāgaro,
Ki
su kamme sajīvāna kimassa iriyāpatho.
Ki
su alasa analasañca mātā puttava posati,
Ki
su bhūtūpajīvanti ye pāā pahavisitāti.

 

[하늘사람]

 "무엇이 세상의 불빛이고

무엇이 세상에서 깨어 있음이며

무엇이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또한 무엇이 그의 삶의 길인가?"

 

무엇이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고,

도대체 무엇이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는가?"

 

 

Paññā lokasmi  pajjoto sati lokasmi1 jāgaro,
G
āvo kamme sajīvāna sītassa iriyāpatho.
Vu
ṭṭhi alasa analasañca mātā puttava posati,
Vu
ṭṭhi bhūtūpajīvanti ye pāā pahavisitāti.

 

 

[세존]

 지혜가 세상의 불빛이고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깨어 있음이며,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밭이랑이 그의 삶의 길이네.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빳조따경- Pajjotasutta-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8-10), 전재성님역)

 

 

하늘사람과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하늘 사람이 게송으로 묻고 부처님이 역시 게송으로 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송에서 부처님은 비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가 모든 아이들 한테 골고루 자애를 내 듯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 역시 차별 없이 골고루 적셔 준다는 것이다. 그런 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 게송에서 표현 된 것과 같이 부처님의 지혜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출현으로 인하여 마치 하늘에서 내린 비가 차별 없이 산천초목을 적셔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이런 비의 비유는 법화경에서 약초의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초기경을 보면 대승경전에서 표현된 게송이나 비유나 이야기등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2013-0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