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어떻게 사띠(sati)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30. 15:43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어떻게 사띠(sati)할 것인가

 

 

 

보건소 비뇨기과에 노인들이 급증한다는데

 

나이 든 사람의 성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전문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요즘 보건소 비뇨기과에 노인들의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잘못된 성관계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노인들이 예전의 노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연세드신 분들이 오래 살지 못했고, 먹는 것도 풍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운도 없고, 또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피곤하였다. 그러나 요즘의 경우 과거에 비하여 수명되 늘어 나고 식생활도 좋고 그다지 힘들지 않게 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비교적 건강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건강하고 기운이 넘치는 노인들에게 사회에서 일자리는 주어지지 않다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시간은 많아 지고 할 일은 없다 보니 원초적 본능이 꿈틀 거리는 것이다. 이런 본능은 노인이나 젊은이나 본질은 똑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구를 발산해야 하나 조건이 맞지 않은 경우 성매매내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성병으로 인한 보건소를 찾는 노인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항할 수 없는 아동 성추행이 증가하는가 하면 순간적 충동에 따른 성범죄도 꾸준히 늘어 나고 있다고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사띠와 관련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빠알리어 사띠(sati)에 대하여 마음챙김’, ‘새김등 여러가지 용어가 소개 되고 있는데, 사띠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경전적 근거를 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 혹은 37조도품(助道品) 가운데 항상 제일 먼저 나타나는 가르침은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cattaro satipat.t.ha-na-)’이다. 먼저 필자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초기불전 한 구절부터 소개한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대반열반경>(D22) §5.9)

 

여기서마음챙김의 확립으로 옮긴 원어는 사띠빳타나(sati-pat.t.ha-na)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 술어는 두 가지로 분석되어 해석된다. 첫째는 사띠+우빳타나(sati+upat.t.ha-na)이고 둘째는 사띠+빳타나(sati+pat.t.ha-na). 전자는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후자는 마음챙김의 토대로 옮겨진다. 전자는 마음챙김을 일으키는 행위를, 후자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강조한다. 이 둘 가운데 전자의 의미가 더 원래적이라 할 수 있다. 사띠+우빳타나(sati+upat.t.ha-na)로 이해한 것이 이미 초기불전(S54:1, S54:13 )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마음챙김인가, 불교신문 2010.07.24 )

 

 

불교신문에 연재된 각묵스님의 컬럼이다.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D22)의 한 구절을 예로 들었다.

 

인용된 문구는 각묵스님이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라 한다. 여인과 마추쳤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요약하면 쳐다보지 말라 말하지 말라”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단계적 대응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쳐다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말하지 않는 것이 차선책이고,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챙김해야 된다고 말한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적절하게 잘 설명하기 위하여 여인이 들어간 문구를 등장시킨 것으로 본다.

 

어머니로서, 자매로서, 딸로서

 

그렇다면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어떤 것일까. 전재성 박사의 디가니까야를 참고 하였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보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말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비구들은 탁발에 의존하였다. 이때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데, 될 수 있으면 눈을 맞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 두타행에 따르면 비구는 눈을 항상 아래로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만 바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탁발하는 과정에서 여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친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말로 인하여 친교가 생기면, 정이 깊어지고, 번민하고, 계행을 파괴하고 괴로운 곳을 채우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때 사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띠해야 할까? 각주에 따르면 어머니의 연배의 여성이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고, 자매 연배의 여성에게는 자매의 마음을, 딸의 연배에게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것이 주석서에 있는 대처방법이다.

 

마음챙김을  찰라생 찰라멸하는 궁극적 실재로 보았을 때

 

여기서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빠알리어로 “Sati, ānanda, upaṭṭhāpetabbā”이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독으로 쓰였을 때 각묵스님은 운나바바라문경(S48:42)의 예를 들어 마음챙김(화두)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사띠는 기억의 의미로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로 보았을 때 각묵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하나의 기능으로 본 것 같다. 이는 아마도 사띠에 대하여 하나의 마음부수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의 경우 빠알리 니까야 번역에 임함에 있어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바탕을 둔 번역을 하였음을 밝혔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띠는 52가지 마음부수(심소) 중의 하나이다.

 

아비담마 이론에 따르면 52가지 마음부수는 82법을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 실재(paramatta dhamma)라 한다. 따라서 사띠 역시 궁극적 실재이다. 그런 궁극적 실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각묵스님의 책이나 동영상 강의에 따르면 공상과 자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찰나생 찰나멸한다고 설명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사띠는 절대 기억의 요소가 있으면 안된다. 그래서 초기불전에서 사띠(sati)는 거의 대부분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는다라고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새김을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뜻으로 보았을 때

 

이와 같이 아비담마적 분석에 기초한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기억의 기능이 빠져 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해제 용어설명에서 정의한 바 있다. 이는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 된다 (S46:3)”라는 문구에 근거 하고 있다. 사띠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뜻으로 사띠에 대하여 정의 내려 놓았을 때, 이를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에 대입하면 어떨까?  여인을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인을 보았을 때, 여인과 말을 하였을 때, 주석에서는 어머니로, 자매로, 딸로 마음을 두는 것이 사띠라고 하였으나,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본다. 대표적으로 부정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을 승원에서 본 방기사

 

상윳따니까야에 방기사상윳따(Vagīsa Thera Sayutta)가 있다. 여덟 번째 모음으로서 방기싸의 모음이라 번역되었다. 해제에 따르면 방기사 비구가 명상수행 도중에 마주치는 시련과 유혹에 관한 것들이라 한다.

 

새내기 비구 방기사는 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격 이었고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안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방기사가 탁발하는 과정에서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괴로움을 겪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때 존자 방기싸는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 수행승으로서 승원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많은 여인들이 잘 차려 입고 승원을 보기 위해 승원이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바로 그 여인들을 보고 나서 존자 방기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닉칸따경-Nikkhantasutta-출가의 경, 상윳따니까야 S8:1(1-1),전재성님역)

 

 

방기사는 출가한지 얼마 안되는 새내기 비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주로 승원에서 생활하였는데, 어느 날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를 보고 좋지 않은 생각, 즉 욕정이 발동한 것이다. 이런 욕정이 결국 마음을 괴롭히게 되었는데, 방기사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된다.

 

꿈에서 그 여자를 안아버렸어요

 

이와 같은 고민은 부처님 당시나 현재나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김나미기자의 책 신앙지옥 불신천국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중반 송광사에 장기 체류할 때 조계산을 타고 선암사로 향하다가 만난 젊은 스님의 이야기이다. 막 비구계를 받은 얼굴이 해맑고 순진무구한 그는 행자 때부터 공양간 일을 맡아 서로 얼굴을 알아 합장 인사를 하고 지낸다.

 

스님, 행자 마치고 정식 비구스님이 되셨으니 기쁘실 텐데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요,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스님, 행자 때 공양간에서 졸 만큼 그렇게 잠이 많더니 못 주무시다니요?”

 

보살님,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보살님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말할게요.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꿔요.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꿈에서 그 여자를 안아버렸어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건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욕수행자라면 이런 꿈을 꽤 꾼다고 한다. 성 문제는 진정 수행자에게 가장 괴로움을 주는 것 같다. 부처 자신은 결혼도 했었고 자식도 가져보았고 온갖 쾌락을 다 누려보았으니 세상을 쉽게 등질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이야기 전개 과정이 방기사의 경우와 비슷하다. 사찰에 찾아 온 여인을 보고 감각적 욕망에 시달리는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고민에 대하여 위로의 말 밖에 해 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과 다른 케이스인 젊은 비구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이와 같이 경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와 같은 주제로 다른 영화도 만들어졌다. 영화 삼사라(samsara, 2001)가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글을 올린 바(삼사라 (samsara),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있다.

 

영화 삼사라 스토리의 전반부에서 여인을 보고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은 경이나 송광사의 젊은 비구와 비슷하다. 티벳에서 다섯살 때 절에 맡져져 자란 청년비구가 어느 날 사원을 방문한 여인을 보고 갈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밤마다 몽정을 하며 여인을 잊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국 여인을 찾아떠나게 되어 환속하고 만다. 이유 중의 하나는 부처님을 들고 있다.

 

김나미 기자가 말했듯이 부처님은 세속에서 온갖것을 다 즐기다가 출가 하였기 때문에 갈애에 대한 괴로움이 적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라고 말하면서 부처님도 깨우치기 전에 처자식을 가졌음을 은사스님에게 상기 시키면서 절을 떠나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인공은 환속하여 깨닫기 전의 부처님 처럼 처와 아들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처와 자식을 남겨 두고 재출가한다. 마치 부처님 했던 것처럼 하였으나 남겨진 자와 떠나는 자 사이의 이별로 인한 괴로움을 겪는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가 되버림에 따라 절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와 같이 젊은 비구가 여인들과 마주침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게 되었을 때 부처님은 쳐다 보지 말라” “말하지 말라” “사띠를 확립하라고 하였다. 이 때 사띠라는 것이 단지 여인을 어머니로서, 자매로서, 딸로서 생각하는 것은 근원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욕망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신념처의 32가지 부정관을 닦으면

 

사띠에 대하여 단지 아비담마 이론에 따른 마음부수로 파악하여 마음챙김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기능적 접근이라 보여진다. 이 때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본다면, 마음챙김의 정의대로 사띠라는 것이 마음과 해탈을 연결시켜 주는 기능으로 된다. 또 찰라생 찰라멸 하는 궁극적 실재로서 마음부수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띠에 대하여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인을 보았을 때 마음에 혼란이 왔다면 사띠 해야 하는데,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겨 본다라고 접근 하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 중에 부정관을 기억해 내고 되새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방기사에게 다음과 같이 시로서 말한다.

 

 

[아난다]

부정관을 닦고

마음을 통일하고 잘 삼매에 들어라.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고

싫어하여 떠남에 전념하라.

 

(아난다경-Ānandasutt, 상윳따니까야 S8:4(1-4),전재성님역)

 

 

아난다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들은 바 있다. 여인을 보았을 때 사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새내기 비구에게 여인으로 인한 근본적인 괴로움을 뿌리 뽑기 위하여 부정관을 닦을 것을 말한다. 이 부정관이 바로 마하사띠빳타나경(대념처경, D22)의 신념처에 있다.

 

부정관(不淨觀)이란 침, 가래, 담즙 등 32가지 부정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을 함으로서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역할을 말한다. 따라서 여인에 대하여 사띠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해 내서 사유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띠에 대하여 단지 찰라생 찰라멸하는 아비담마적 시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녹음기도 없고 책도 없던 시절에 비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해 내서 사유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수행이었다고 본다. 여인과 마주치거든 사띠하라는 것이 32가지 부정물로 관찰수행한 것을 사띠하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여인의 하얀 이빨을 보고 아라한이 된 비구

 

신념처에는 32가지 부정물 뿐만 아니라 아홉가지 묘지의 시체의 분류에 대한 것도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정관 수행을 닦았을 경우 여인과 맞닥뜨렸을 때 어떤 효과를 보게 될까. 청정도론에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장로는 쩨띠야(Cetiya) 산으로부터 출발하여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로 탁발을 가고 있었다. 어떤 집안의 며느리가 자기 남편과 말다툼을 한 뒤 천녀(天女)처럼 단장을 하고 꾸민 뒤 그 시간에 아누라다뿌라에서 나와 친정집에 가더 도중 길에서 장로를 보고 음란한 마음이 생겨 활짝 웃었다.

 

장로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빨에서 부정상(不淨想, asubha-saññā)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녀의 이빨을 보고 이전의 상()을 기억했나니

그 자리에서 서서 장로는 아라한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를 뒤따라오던 남편도 장로를 보고 ‘존자시여, 혹시 어떤 여인을 못 보셨습니까?’ 라고 여쭈었다. 장로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곳을 지나간 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노라

단지 뼈 무더기가 이 신작로를 지나가는 것만 보았도다.

 

 (청정도론, 1장 계 54)

 

 

 

 

不淨觀

 

 

 

부정상을 닦았을 경우 여인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은 비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꽃단장을 한 여인이 남편과 싸우고 집에서 나왔다. 그 여인이 길을 걷다가 마침 비구와 마주쳤다. 이 때 여인은 비구을 꼬셔 보려고 씨익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평소 부정상을 닦았던 비구에게 그 하얀 이빨은 유혹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의 대상이었다. 여인의 하얀 이빨을 보는 순간 여인이 해골로 변한 것이다. 비구는 여인의 웃는 하얀 이빨로 인하여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한 결과라 보여진다. 따라서 사띠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뜻이 더 가깝다고  보여진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닦았을 때

 

보건소 비뇨기과에 노인들이 급증한다고 한다. 예전의 노인과 달리 현대의 노인들은 매우 건강하고 원기 왕성하고 오래 살기 때문에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추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  나이 들어 탐욕을 부린다든가 색을 밝히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젊어서 버릇이 죽을 때 까지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쳐다보지 말라  말하지 말라” “사띠하라라고 하였다. 이 때 사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띠에 대하여 아비담마적으로 해석하여 하나의 마음부수로 보고 찰라생 찰라멸 하는 궁극적 실재로 본다면 이는 기능적 접근이다. 그런 마음챙김은 기억의 기능이 없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사띠에 대하여 아비담마적 해석이 아나라 사띠에 대하여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쉽게 이해 된다. 그런 가르침이 신념처에서 32가지 부정물과 9가지 부정상에 대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닦았을 때 어떤 경우에서라도 흔들림 없을 것이라 본다. 

 

 

 

2013-01-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