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애경(Sn1.8)번역 비교분석, 한글역과 일역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26. 16:57

자애경(Sn1.8)번역 비교분석, 한글역과 일역 어떻게 다른가

 

 

 

세상을 부드럽게 하는 것

 

연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있다. 실내에 있으면 잘 모르지만 밖에 나오면 모자달린 옷의 모자를 쓰지 않고는 돌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차갑다. 이런때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마음까지 썰렁할지 모른다. 더구나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갖가지 끔찍한 사건과 사고가 끊임없이 들린다. 그래서일까 거리나 버스, 전철에서 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이다. 이럴 때 누군가 부드러운 표정과 미소를 날려 준다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구로부터 사랑받는 다면 그 마음은 어떨까. 아마도 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거나 사랑을 하면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모든 종교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자애(慈愛)’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간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으나 자애라는 말은 이성간의 사랑은 배제한 순수한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애를 빠알리어로 멧따(metta)’라 한다.

 

멧따경 인연담

 

빠알리니까야에 멧따경(Sn1.8)이 있다. 쿳다까니까야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다. 멧따경은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잘 담겨 있는데,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의 원형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멧따경을 설한 동기는 무엇일까. 전재성박사의 숫따니따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세존께서는 우안거가 다가왔을 때에 사왓티에 계셨다. 수행승들에게 탐욕스런 자에게는 부정(不淨)에 대한 명상수행과, 분노하는 자에게는 자애(慈愛) 등에 대한 명상과, 어리석은 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사유하는 자에게는 호흡마음챙김이나 땅 등의 두루채움의 수행을, 믿음있는 자에게는 염불 수행을, 이해가 있는 자에게는 세계에 대한 분석적 관찰의 명상을 가르쳤다.

 

오백명의 수행승들이 이러한 명상수행을 배워서 히말라야 산록의 바위가 있고, 청량한 녹음이 짙고, 진주 그물과 같은 모래가 있고, 시원한 물이 있는 지역을 찾았다. 거기서 그들은 인근 마을로 탁발을 하러 갔다. 청정한 수행승들을 반겨 맞은 1000가구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우기에 그곳에 머물러 주기를 요청하고 500채의 정진을 위한 초암을 지어 제공하고는 모든 생필품을 제공했다.

 

그들은 탁발하며 수행 정진 했는데, 그런데 수행정진하는 수행승들의 위광 때문에 자신의 위광을 손실한 나무의 하늘사람(樹神)들이 ‘언젠가 존자들은 갈 것이다’고 궁전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삼개월 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수행승들을 방해하기 위해 야차의 모습을 보여주고 공포의 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수행승들은 심장이 뛰고 안색이 창백하여 새김을 잃었는데, 거기에 악한 냄새를 피워 두통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행승들은 그곳에서 안거를 포기하고 사왓티의 세존을 찾아뵈었다. 그러자 세존은 ‘안거중에 유해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제정하고 이 경을 ‘수호를 위하여, 명상을 위하여’ 수행승들에게 설한 것이다.

 

세존은 생노병사와 세계의 고통과, 과거의 윤회의 고통과, 미래의 윤회의 고통과, 현재의 음식을 구하는 고통을 생각하여 자신을 수호하고,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고 부정관을 닦고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을 것을 권한다.

 

이 경은 초기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수호경(護呪)에 포함되고 남방 예불문에는 항상 이 경전이 등장한다.

 

(자애경 해제, 전재성박사)

 

 

멧따경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멧따경은 출가수행자들을 위한 경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자신을 해치려는 존재에 대해서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내어 해탈하는 것에 대하여 자심해탈(慈心解脫)이라 한다.

 

자심해탈(慈心解脫)

 

자심해탈은 자애수행을 통하여 해탈이 가능함을 알려 준다. 그런데 해탈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열반과 동의어로 본다. 따라서 자애수행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해탈이 가능함을 보여 주는 것이 멧따경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아홉 가지 게송으로서 그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멧따경에 대하여 번역비교를 하여 보았다. 빠알리 원어와 영어와 일어, 그리고 우리나라 번역서를 비교하였다. 이렇게 비교하는 이유는 빠알리 원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번역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 하였다.

 

 

1)빠일리어 :  Mettasutta

2)영역; Loving kindness.

3)일역: 中村元(나까무라 하지메)

4)각묵스님역:

5)석지현스님역: 자비경

6)법정스님역 수타니파타

7)전재성박사역 숫타니파타

 

  

 

게송1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1

비고

빠알리

Karaīyamatthakusalena ya ta santa pada abhisamecca,
Sakko ujū ca sūjū ca suvacocassa mudu anatimānī.

 

전재성박사역

널리 이로운 일에 능숙하여서  평정의 경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님은 유능하고 정직하고 고결하고 상냥하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말지이다.

 

법정스님역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능력있고, 정직하고 바르며,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도닦음에 능숙한 자, 고요한 경지를 체험하면서 이처럼 행할지라. 유능하고 정직하고 진솔하며 고운 말에 온화하고 겸손하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究極理想じたがこの平安境地してなすべきことはのとおりである.能力ありなおくしく言葉やさしく柔和がることのないであらねばならぬ.

 

석지현스님역

니르바나에 이른 사람이 이 편안한 경지에서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공명하고 성실하며 말은 부드럽고 점잖아야 하며,잘난 체 뽐내지 않는 것이다.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What profitable things should be done to attain that appeased state. .

Be able, straight forward, quite straight forward, suave, gentle, and not conceited.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오역

 

전재성박사의 해제에 따르면 숫따니빠따 143번 게송(멧따경 1번 게송)의 경우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오역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역(1958)을 판에 박은 듯 중역한 번역본을 보면 오역마저 그대로 답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오역이 있을까.

 

첫 번째 문장을 보면 전재성박사는 널리 이로운 일에 능숙하여서  평정의 경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님라고 하였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라 하여 완료 형으로 하였다. 이는 나까무라 하지메의 究極理想じた(궁극의 이상에 도달한 사람)’의 번역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역이라 한다. 각주에 따르면, 빠알리어 아비사멧짜(abhisamecca)가 절대사로 취급되고 있으나, 의미상 부정사 abhisametave와 동일한 형식이라 한다. 따라서 종래의 번역인 도달하고 나서이해 하고 나서가 아니라 도달하기 위하여또는 이해 하기 위하여라고 번역해야 맞다는 것이다.

 

실제로 abhisamecca 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면 ‘having understood thoroughly’라고 되어 있다.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인 것이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의 중역판을 보면 모조리 완료형으로 되어 도달한 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도닦음에 능숙한 자라고 하였다. 이는 앗따꾸살레나(atthakusalena)의 번역에 따른 것이라 보여진다. 각주에 따르면 실천도(patipada) 를 뜻한다고 하였다.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가까이 섬겨야 하기 때문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은 유익한 실천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큰 무리 없는 번역이라 보여 진다.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인 이유

 

그렇다면 첫 번째 게송에서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번역해야 할까. 이는 멧따경의 구성과 관계가 있다. 모든 수행이 단계가 있듯이 자애수행 역시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 게송은 일종의 예비도의 단계라 볼 수 있다. 이는 팔정도에서 정견에 대한 것과 유사하다.

 

팔정도는 계--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판단 하였을 때 계부터 닦고, 그 다음에 정을 닦고 마지막으로 혜를 닦아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팔정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정견(正見)’이다. 지혜에 대한 것이 가장 앞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그 다음 단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바른 견해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에 대한 이해 없이 그 다음 단계로 가 보았자 제대로 수행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수행에 대한 방향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길을 잃지 않고 곧바로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견을 확립한 다음에 비로소 다음 단계인 계온(정어, 정업)을 닦고, 이어서 정온(정정진, 정념, 정정)을 닦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온(정견, 정사유)를 닦는다. 그래서 혜온에 대한 것은 두 번 닦는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닦는 혜온은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볼 수 있고, 마지막으로 닦는 혜온은 지혜의 완성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멧따경에서도 첫 번째 게송은 팔정도에서 정견과 같은 역할이다. 일종의 자애수행에 대한 이해의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게송은 자애수행의 완성단계이다. 이는 게송에서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자애수행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이 실현된 것이다.

 

오역을 답습하다 보니

 

따라서 첫 번째 게송에서는 완료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까무라 하지메의 경우 じた(도달한 자)   平安境地して(평안의 경지에 도달하여)라고 완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이다. 이런 오역을 나까지마 하지메역을 중역한 번역서들이 그대로 답습하였다는 사실이다.

 

법정스님의 경우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라고 번역하였고, 운학스님은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라고 하여 법정스님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기경박사는 구극적인 이상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라고 번역하였고, 김영길 교수는 만사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의 경우 じた(도달한 자)   平安境地して(평안의 경지에 도달하여)라고 완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것이 오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Karaīyamatthakusalena ya ta santa pada abhisamecca(까라니야앗따꾸살레나 양땅 산땅 빠당 아비사멧짜)’에 대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님평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번역해야 된다는 것이다.

 

단어정리

 

Santa: calmed; peaceful

Pada: foot; foot-step; a word; position

Uju: : [adj.] straight; up-right.

sūju : [adj.] upright.

suvaca : [adj.] obedient; meek; compliant.

cassa,: (ca+assa)可能是

mudu : [adj.] soft; mild; tender.

Atimānin: :a. 有過慢的.

 

 

게송2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2

비고

빠알리

Santussako ca subharo ca appakicco ca sallahukavuttī,
Santindriyo ca nipako ca appagabbho kulesu ananugiddho.

 

전재성박사역

만족할 줄 알아서 남이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몸과 마음 고요하고 슬기로우니, 가정에서 무모하거나 집착하지 말지이다.

 

법정스님역

만족할 줄을 알고, 기르기 쉽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도 또한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관이 안정되고 총명하여 마음이 성내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만족하고 공양하기 쉽고 일 없고 검소하며 감관은 고요하여 슬기롭고 거만 떨지 않고 신도 집에 집착하지 않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ることをり、わずかの食物らし、務少なく、感官まり、で、ぶることなくることがない.

 

석지현스님역

만족할 줄 알며,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생활하라.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되도록이면 간소하게 하라, 모든 감관을 편안하게 하고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Satisfied, easily supported, have few things to do and a light living,

Mental faculties calmed become clever, not daring, and not greedily attached to families.

 

 

 

 

 

 

 

 

 

 

subharo(수바로)에 대하여

 

subharo(수바로)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공양하기 쉬워야 하며라고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わずかの食物らし라 하였다.  약간의 음식으로  살아 가는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기르기 쉽고라고 하였다.

subhara 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보면  ‘easily supported of food’라고 되어 있다. ‘음식이 수월하게 지원되는이라는 뜻이다. 이는 출가자가 탁발하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가 재가의 집에서 공양받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는 わずかの食物らし(약간의 음식으로  살아 가는)’으로 되어 있어 탁발받는 공양에 대하여 정확하게 표현을 못하고 있다. 이를 답습한 법정스님은 기르기 쉽고라고 하였는데 공양받는 것과 동떨어진 번역이라 보여지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일역를 중역함으로 인한 발생되는 문제

 

이와 같은 번역은 나까무라 하지메의 번역도 잘못 되었지만 빠알리 원전을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는 현상이라 보여진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처럼 번역에 있어서 중역의 한계는 원어의 해석학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고 중역된 원문의 한도 내에서 지시하는 바를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 선택이나 원의가 지시하는 내용의 선택에서 강한 경직성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중역된 한글역은 모두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토씨만 갈아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숫따니빠따 해제, 전재성박사)

 

 

그렇다면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다른 번역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해제에 따르면 운학스님은 욕심을 기르지 말고라고 번역하였고, 이기영박사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라고 번역하였고, 김영길 교수는 검소하게 지내고라고 번역하였다.  운학스님은 법정스님의 번역과 비슷하고, 이기영 박사와 김영길 교수는 나까무라 하지메의 번역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번역은 모두 원뜻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는 나까무라 하지메의 번역을 그대로 중역한 결과라 보여진다.

 

Santindriyo(산띠드리요) Appagabbho(압빠갑보)

 

Santindriyo(산띠드리요)감관이 고요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까무라 하지메는 感官まり(감관이 고요하고)’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주석 Prj.I.242에 따라서 탐욕등에 의해서 감각능력이 흥분되지 않는 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고라고 번역하였다.

 

Appagabbho(압빠갑보) Prj.I.242-243에 따르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무모함이 없는 신중한 행동을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주석을 중시하여 무모하거나라고 번역하였는데, 나까무라 하지메는 ぶることなく라 하였다. ‘ぶる흥분하다’ ‘뽐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성내지 않으며라고 중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어로는 ‘not daring’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담한’ ‘과감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영역은무모한과 가까운 표현이다.

 

탁발공양에 대한 삶의 태도

 

두 번째 게송은 출가자의 탁발공양에 대한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탁발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는 출가자에게 있어서 재가로부터 공양받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공양에 대하여 만족할 줄 알고, 공양하기 쉽도록 해야 하고, 항상 눈을 아래로 뜨며 사띠를 유지해야 하고, 재가자의 가정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단어정리

 

subhara : [adj.] easily supported of food.

appakicca : [adj.] having few duties.

salla: [m.] a dart; spike; stake; quill of a porcupine; surgical instrument.

Hukku,the sound uttered by a jackal J.III,113. (Page 732)

nipaka : [adj.] clever; prudent; wise.

ananugiddha :a. [an-anugiddha] 貪欲なき, なき.

 

 

 

게송3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3

비고

빠알리

Na ca khudda samācare kiñci yena viññū pare upavadeyyu
Sukhino vā khemino hontu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전재성박사역

다른 양식있는 님들의 비난을 살만한 어떠한 사소한 행동이라도 삼가 하오니, 안락하고 평화로워서,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법정스님역

다른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물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현자가 나무랄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니 원컨데 모든 중생 즐겁고 안녕하여 부디 행복할지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識者非難けるような下劣いを、してしてはならない. 一切きとしけるどもは、幸福であれ、であれ、であれ.

 

석지현스님역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그런 비열한 짓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살아 있는 것들아, 부디 행복하고 편안하여라.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The slightest thing looked down by other wise ones should not be done,

May mental happiness and appeasement be , may all come to well being.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세 번째 게송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이다. 부처님의 자애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 안에 자애사상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일반적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는 ‘一切きとしけるどもは、幸福であれ、であれ、であれ’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 일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모든 생물)은 행복하기를! 안은하기를! 안락하기를!’이라는 뜻이다. 모두 세 번에 걸쳐서 말하고 있다.

 

‘행복하기를!’바라는 뜻의 빠알리어는 ‘수키땃따(sukhitattā)’ 이다. 이는 수카(sukha, 행복)와 땃따(tatta, 진실로) 의 결합어이다.  따라서 진실로 행복하기를바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까무라 하지메는행복안은안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세 번 반복하였다. 법정스님은 이를 그대로 옮겨서 모든 생물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고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역을 한역한 다른 번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애의 대상이 아닌 경우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처님의 자애사상이다. 그러나 자애의 대상에서 예외가 있다. 그것은 연인이나 부부 그리고 죽은자에 대해서는 자애의 마음을 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부사이에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경우 갈애로 발전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또 미얀마의 사야도의 글을 보면 죽은자에게 자애를 보내도 소용 없을 것이라 한다. 이는 영혼이나 영가를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사람이 죽으면 업력에 따라 곧바로 재생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어정리

 

khudda: [adj.] small; inferior; insignificant. :a. [Sk. kudra. cf. cūa, culla] なる, れる, 微細. -ānukhuddaka 小小, , 微細.

samācāra : [m.] conduct; behaviour.

kiñci : [ind.] something.

yena : [adv.] because of; where.

viññū : [adj.] wise. (m.) a wise man.

para : [adj.] other; another; foreign; alien; outsider.

upavadi : [aor. of upavadati] blamed; insulted.

Khemin :,(adj.) one who enjoys security or peace S.III,13; Sn.145 (=abhaya KhA 244); Dh.258. (Page 239) :a. [khema-in] 安穩的, 享受平和的樂趣的.

khema : [adj.] safe; calm; full of peace.

honta : [pr.p. of hoti] existing.

Bhavantu : (‹bhavati)【3.】,愿他希望他

tatta : [nt.] the real nature; reality. (pp. of tapati), heat; hot; glowing.

 

 

 

게송4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4

비고

빠알리

Ye keci pāa bhūtatthi tasā vā thāvarā vā anavasesā
Dīghā vā ye mahantā vā majjhamā rassakā
ukathūlā

 

전재성박사역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친 것이거나,

 

법정스님역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 짧고 가는 것이건, 또는 조잡하고 거대한 것이건.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약하거나 강하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치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통통하거나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いかなる生物生類であっても、えているものでもなものでも、ことごとく、いものでも、きなものでも、くらいなものでも、いものでも、微細なもの、粗大なものでも、

 

석지현스님역

어떠한 생명체라도 약한 것이건, 강한 것이건큰 것이건, 중간 것이건, 제아무리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것일지라도.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Who ever living thing be infirm or firm or otherwise,

Long or huge, middle sized, short or very small

 

 

 

 

 

 

 

 

 

 

움직이지 않는 것(thāvarā)에 대하여

 

tasā vā thāvarā vā(따사 와 타와라 와)는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라는 뜻이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동물이건 식물이건’이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살아 있는 생명이면 모두 다’라고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いかなる生物生類’라 하여 ‘어떠한 생물생류’라고 번역하였다.  법정스님도 이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멧따경에 따르면 자애의 대상은 모든 중생(sabbe sattā)’ 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생이라고 하면 유정중생을 말한다. 정신현상이 있는 생명체를 말한다. 태생, 습행, 난생, 화생을 말한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뜻의 ‘tasā vā thāvarā vā(따사 와 타와라 와)’라 하였다. 매우 광범위한 뜻을 내포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움직이는 것은 동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식물로 번역하였다. 나까무라 하지메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애의 대상은 정신현상을 가진 유정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식물이 자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리한 확장이라 보여 진다. 식물은 베어도 또 자란다. 또 씨가 있어서 다음해 심으면 곡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축생들은 식물을 먹고 자란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야수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의 먹이가 되고, 더 강한 것이 또 잡아 먹는 먹이 사슬이 형성되어 있다. 인간의 세계 이와 못지 않다. 마치 야수의 세계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생존경쟁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할 대상은 정신현상이 있는 유정물이지 정신현상이 없는 무정물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는 유정물임(tasā) 에 틀림 없다는 것이다. 인간 뿐만 아니라 축생, 지옥, 아수라, 아귀, 욕계천상, 색계천상에 사는 중생이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는 것(thāvarā)은 식물이나 초목등의 생류가 아니라 무색계천상의 존재와 무상유정천의 존재로 본다.

 

무색계의 경우 정신현상만 있고 물질로 이루진 것이 없어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또 색계 4선천에 사는 무상유정천의 중생은 몸은 있지만 마음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죽은 듯이 사는 중생을 말한다. 그런 중생이 움직일리 없다.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색계와 무상유정천에 사는 중생에 해당된다고 본다.

 

Dīghā(디가)의 뜻

 

Dīghā vā ye mahantā(디가 와 예 마한따)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Dīghā(디가)가 길다는 뜻이고, mahantā(마한따)는 큰(great)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는 えているものでもなものでも로 번역 하였다. 직역하면 무서운 것이어도, 강한 것이어도라는 뜻이다.

 

거친 것과 미세한 것

 

네 번째 게송은 갖가지 중생에 대한 묘사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등을 대비하여 묘사하였다. 이는 불교의 세계관이라 볼 수 있는 삼계에 사는 중생에 대한 것이다. 크기에 대한 묘사로서 긴 것, 큰 것, 중간 것, 짧은 것이 있다. 또 크기가 아닌 것으로 표현된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있는데, 이는 욕계중생과 색계-무색계 중생을 표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단어정리

 

tasa : [adj.] movable; trembling.

thāvara : [adj.] immovable; long-lasting.

anavasesa : [adj.] without any remainder; complete.

mahanta : [adj.] great; big; extensive.

rassa: [adj.] short; dwarfish; stunted.

akaa:a. [a-kaa] 籾皮のない, 精米したる.

 

 

 

게송5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5

비고

빠알리

Diṭṭ vā yeva addiṭṭhā ye c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ā sambhavesī vā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전재성박사역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

 

법정스님역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그 모든 중생 부디 행복할지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えるものでも、えないものでも、くにむものでも、くにむものでも、すでにまれたものでも、これからまれようとするものでも 一切きとしけるものはせであれ.

 

석지현스님역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는 것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아, 부디 행복해져라.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Seen and not seen, living far and near,

Born and to be born, - may all beings be well and happy.

 

 

 

 

 

 

 

 

 

 

다섯 번째 게송은 네 번째 게송에 연이어 중생들의 형태를 표현 하고 있다. 보이는 것(Diṭṭhā) 과 보이지 않는 것(addiṭṭhā)의 경우, 이는 무색계중생과 비무색계중생으로 볼 수 있다. 무색계 중생의 경우 정신현상만 있으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생겨날 것에 대해서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자애의 대상은 죽은 자, 즉 영혼이나 영가가 아니라 죽어서 재생하는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유정중생들(Sabbe sattā)

 

이와 같이 네 번째 게송과 다섯 번째 게송에서 자애의 대상은 삼계의 모든 유정중생을 뜻한다. 이에 대한 좋은 노래가 있다.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자비송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애송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자애송에 따르면 삼계의 유정중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 하여 놓았다.

 

 

Sabbe sattā                      삽베 삿따-

sabbe pāā                       삽베 빠-나-

sabbe bhūtā                      삽베 부-따-

sabbe puggalā                    삽베 뿍갈라-

sabbe attabhāva - pariyāpannā    삽베 앗따바-와 빠리야-빤나-

sabbe itthoiyo                   삽베 잇토이요

sabbe purisā                     삽베 뿌리사-

sabbe ariyā                      삽베 아리야-

sabbe anariyā                    삽베 아나리야-

sabbe devā                       삽베 데와-

sabbe mānussā                    삽베 마-눗사-

sabbe vinipātikā                 삽베 위니빠-띠까-

 

모든 유정중생들

모든 숨쉬는 것

모든 생명체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

‘나’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

모든 암컷

모든 수컷

모든 성인

모든 범부

모든 신

모든 악처 중생들이

 

(자애송)

 

 

단어정리

 

yeva : [ind.] (emphatic particle), even; just; also.

ye : [ya の m. pl. nom. acc.] 彼等は, 彼等を.

vasanta : [pr.p. of vasati] living; abiding; dwelling; staying. (m.), the spring.

Dūre-nidāna :n. 物語 [Jātaka の].

sambhavesī : [m.] one who is seeking birth.

 

 

 

게송6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6

비고

빠알리

Na paro para nikubbetha nātimaññetha katthaci na kañci
Byārosanā pa
ighasaññā nāññamaññassa dukkhamiccheyya

 

전재성박사역

서로가 서로를 헐뜯지도 말지니,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분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서로에게 고통을 바라지 않나이다.

 

법정스님역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도 안된다. 남을 골려 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된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남을 속이지 않고, 어떤 곳에서 어떤 이라도 경멸하지 않으며 성냄과 적개심으로 남의 불행을 바라지 않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何人他人いてはならない. たといどこにあっても他人んじてはならない.
まそうとしてりのいをいて、たがいに他人苦痛えることをんではならない.

 

석지현스님역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더욱 안 된다.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ay one not talk belittling another, and for no reason think another as inferior,

May one not desire unpleasantness to another with an angry repulsive mind.

 

 

 

 

 

 

 

 

 

Nikubbetha(니꿉베타)

 

Nikubbetha(니꿉베타)가 들어간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헐뜯지도 말지니’라 하였다. 이는 Nikaroti가 ‘창피를 주다 (humiliate)’ 또는 ‘모욕을 주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영역에서는 ‘belittling’으로 표현 되었다.  그런데 Nikaroti 가 ‘속이다(cheat)’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나까무라 하지메는 ‘いてはならない (속여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각묵스님도 ‘속이지 않고’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음 문장을 보면 분노(rosanā)와 증오(paigha)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앞 문장의 ‘속이다’라는 말과 매칭이 되지 않는다. 분노와 증오 때문이라면 ‘다투다’는 뜻의 번역이 더 와 닿는다.

 

자기 자신이 적()인자와 친구인자

 

여섯 번째 게송에서는 서로 헐뜯지 말자고 한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것은 다름 아닌 분노(rosanā)와 증오(paigha) 때문이라 한다.

 

자애의 반대어는 분노와 증오이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내면 자연럽게 분노와 증오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와 증오를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남들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신--의 삼업으로 악업을 짓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의 삼업으로 선업을 짓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친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애송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표현 되고 있다.

 

 

Aha avero homi                 아항 아웨로 호미

avyāpajjho homi                  아뱌-빳죠 호미

anīgho homi                      아니-고 호미

sukhī - attāna pariharāmi      수키- 앗따-남 빠리하라-미

 

제가 증오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성냄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격정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행복하게 지내게 하여지이다!

 

(자애송)

 

 

이렇게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사라지는데, 다음 단계는 가장 가까운 대상부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Mama mātāpitu), 스승들과 친척(ācariya ca ñāti), 친구(mitta) , 거룩한 삶을 닦는 이(sabrahma-cārino) 순이다. 그들이 증오와 분노를 여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단어정리

 

paro : [ind.] beyond; further; above; upward; more than.

para: [adj.] other; another; foreign; alien; outsider.

nikubbetha :nikaroti の opt.

Nikaroti :[Sk. nikaroti, ni+karoti] to bring down, humiliate(창피를 주다, 모욕을 주다), to deceive, cheat Sn.138 (nikubbetha Pot.=vañceyya KhA 247). pp. nikata (q. v.). (Page 352)

maññe : [ind.] methinks; I imagine. , 【我想我想像。(p248)

katthaci : [ind.] somewhere.

na :① ta [それ] の n. sg. nom. acc.; m. sg. acc. ② adv. [nu のり=cana] katha na=katha nu. :① ta [, ] n. sg. nom. acc.; m. sg. acc. ② adv. [代替 nu = cana] katha na = katha nu [= katha nu kho 到底(究竟)()].

kañci :, kañcina, koci(か)の sg. acc. :, kañcina koci(※) sg. acc. [※koci 無論誰(不管誰,whoever), 任何人(anybody) cf. ka koci].

rosanā: [f.] making angry; causing anger; being angry.

paigha: [m.] anger; repulsion; collision.

micchā: [ind.] untruth; falsehood; false; wrongly; wrong.

 

 

 

게송7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7

비고

빠알리

Mātā yathā niya putta āyusā ekaputtamanurakkhe
Evampi sabbabhūtesū mānasa
bhāvaye aparimāna

 

전재성박사역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법정스님역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호하듯 살아 있는 이 모든 생명체에서 한없는 연민의 마음(자비심) 일으켜야 한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あたかもがひとりごををかけてもるように、一切きとしいけるものどもにしても無量しみのこすべし.

 

석지현스님역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호하듯 살아 있는 이 모든 생명체에서 한없는 연민의 마음(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Like a mother protecting her only son's life would think,

Develop that same thought towards all beings limitlessly.

 

 

 

 

 

 

 

 

 

 

 

법정스님의 무소유책에서도

 

일곱 번째 게송에 표현되어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이라는 표현은 매우 유명하다. 부처님의 자애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법문에서 인용되고 있다. 법정스님도 무소유책에서 어머니가 자기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라고 인용한 바 있다.

  

이런 자애의 마음은 분노와 증오가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들어 앉은 것으로서 항상 지혜와 함께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남는 것은 반대 개념인 자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성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얼마나 자애로운가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aparimāna(아빠리마낭)

 

게송에서는 어머니가 하나 뿐인 외아들을 보호 하듯이 한량 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이때 한량없는 마음이라는 뜻이 ‘aparimāna(아빠리마낭)’이다. 이와 같은 마음이 불교적 명상에서 매우 중요한 청정한 삶을 뜻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짜따로 브라흐마위하라(cataro brahmanavihara)’라 한다. 사범주(四梵住)라고 한역된다.

 

자애와 연민은 다르다

 

게송에서는 사무량심 중에 멧따(자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의 번역을 보면 しみの라고 되어 있다. ‘しみ에 대한 일어 사전을 보면 사랑, 자애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법정스님의 경우 자비심이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번역자들은 어떨까. 대부분 자비심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각묵스님도 연민의 마음(자비심)’로 표현 하였다. 이는 법정스님이 일역을 번역할 당시 자애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대부분 자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비라는 말은 자애와 연민의 합성어라고 볼 수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자애( mettā)연민( karuā)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어정리

 

yathā : [adv.] as; like; in relation to; according to; in whatever way; just as.

niya: [adj.] one's own. :a. [Sk. nija] 自己の, 自身の.

āyusakhaya : [m.] exhaustion of life.

eka: [adj.] same; certain; unknown. (used for the indefinite article). one, (only in the sing.). in plural it gives the meaning "some".

anurakkhaka: [adj.] protecting; protector.

Manasa : [nt.] mind; intention. (adj.), (in cpds.) having the intention of.

parimāa: [nt.] measure; extent; limit. (adj.) (in cpds.)measuring; comprising; extending over.

bhava : [m.] the state of existence.

 

 

게송8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8

비고

빠알리

Metta ca sabbalokasmi mānasa bhāvaye aparimāna
Uddha
adho ca tiriyañca asambādha avera asapatta

 

전재성박사역

그리하여 일체의 세계에 대하여,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장애 없이, 원한 없이, 적의 없이,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법정스님역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비를 행하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온 세상 위, 아래,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증오를 넘어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개발할지라.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また全世界しても無量の(しみ)のこすべし. に、に、またに、障害なく、みなく、敵意なき(しみをうべし).

 

석지현스님역

그 자비심이 골고루 스미게 하라. 위로,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도 없고, 적의도 없고, 척짓는 일도 없이 이 누리에 두루두루 스미게 하라.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Develop loving kindness too towards all beings limitlessly

Above, below, across, without an obstacle, anger or enmity.

 

 

 

 

 

 

 

 

 

 

자애의 방사 범위

 

이 게송은 자애가 방사 되는 범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상하좌우 등 사방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는데, 이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Uddha(우당)은 Prj.I.249에 따르면 비물질적 세계(무색계)를 말한다. Adho(아도)는 감각적 쾌락의 세계를 말하는데 아비지옥에 까지 이르는 존재를 말한다. Tiriyan(띠리얀)은 미세한 물질의 세계(색계)를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높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나까무라 하지메는 また(위로, 아래로, 또 옆우로)라고 번역하여 단지 방향만 가리키고 있다. 이런 패턴의 번역은 법정스님이나 각묵스님이나 영역 모두 공통적이다.

 

열 가지 방향으로

 

자애가 방사 되는 범위에 대하여 자애송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Puratthimāya disāya              뿌랏티마-야 디사-

pacchimāya disāya                빳치마-야 디사-야

uttarāya disāya                  웃따라-야 디사-야

dakkhiāya disāya                닥킨나-야 디사-야

puratthimāya anudisāya           뿌랏티마-야 아누디사-야

pacchimāya anudisāya             빳치마-야 아누디사-야

uttarāya anudisāya               웃따라-야 아누디사-야

dakkhiāya anudisāya             닥키나-야 아누디사-야

heṭṭhimāya disāya                 헷티마-야 디사-야

uparimāya disāya                 우빠리마-야 디사-야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이나 간에.

남동쪽이나

북서쪽이나

북동쪽이나

남서쪽이나 간에.

가장 낮은 곳이든

가장 높은 곳이나

 

(자애송)

 

 

나를 중심으로 열가지 방향으로 가득 채워 자애의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위의 방향(Uddha, 우당)의 끝은 가장 높은 천상에 해당될 것이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높은 곳이라고 번역하였다. 또 아래(Adho, 아도) 끝은 아비지옥이 될 것이다. 이를 전재성 박사는 깊은 곳이라고 번역하였다.

 

단어정리

 

tiriya,(adj.) [from tīra] dwelling on the banks of . . . Vin.II,287. (Page 304) :f. 蔓草一種.

Asambādha,:(adj.) [a + sambādha] unobstructed Sn.150 (= sambādha-virahita KhA 248); J.I,80; ThA.293. (Page 88) : [a-sambādha] 無障碍, 家縛なき.

asapatta: [nt.] without enmity; peaceful.

avera: [adj.] friendly. (nt.) kindness.

 

 

게송9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9

비고

빠알리

Tiṭṭha cara nisinno vā sayāno vā yāvatassa vigatamiddho
Eta
sati adhiṭṭheyya brahmameta vihāra idhamāhu

 

전재성박사역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마음이 굳게 새겨지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청정한 삶이옵니다.

 

법정스님역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숭고한 경지라 부른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섰거나 걷거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깨어있을 때는 언제나 이 자애의 마음챙김을 개발할지니,

이를 일러 거룩한 삶(梵住)이라 하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ちつつも、みつつも、しつつも、しつつも、らないでいるりはしみの心遣いをしっかりとて. このではこの崇高境地ぶ.

 

석지현스님역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이 연민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Standing, sitting, or walking or even when lying as long as awake

Intend this mental attitude, it is called the divine abiding. .

 

 

 

 

 

 

 

 

 

이 게송은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마음의 해탈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이를 한자용어로 자심해탈(慈心解脫)이라 한다.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

 

청정한 삶을 빠알리어로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라 한다. 즉 범천의 삶을 말한다. 이를 전재성 박사는 니까야에서 하느님의 삶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최상의 삶을 말한다.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崇高境地(숭고한 경지)’라 하였다. 일역을 중역한 번역자들 모두 숭고한 경지라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이는 빠알리어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으로 본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에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는 아라한송에서 알 수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을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을 아라한의 오도송이라는 의미로서 아라한송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마음의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이 완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청정한 삶으로 번역한다. 게송에서 청정한 삶에 대한 부분이 brahmameta vihāra(브라흐마땅 위하랑)’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게송에서 사띠(sati)에 대한 내용이 있다. ‘Eta sati adhiṭṭheyya(에땅 사띵 아딧테이야)’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굳게 새겨지이다라고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을 개발할지니라고 하였다. 사띠 번역어 대한 새김마음챙김에 대한 것이다.

 

게송을 보면 사띠빳타나경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

 

(사띠빳타나경-새김의 토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10, 전재성님역)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대한 것이다. 항상 사띠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대한 것이  아홉 번 째 게송에 표현 되어 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중에도 자애의 마음을 항상 굳게 새기라는 것이다.

 

사띠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굳게 새긴다는 의미의 sati adhiṭṭheyya(에땅 사띵 아딧테이야)는 사띠의 본래 의미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띠의 뜻이 있지만 1958년도에 일역된 나까무라 하지메의 번역을 보면 しっかりと(굳게 지켜서)’라고 번역 되어 있다. ‘지킨다는 의미가 강하다. 사띠의 의미 중에 지킨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타당하다.

 

그런데 이 문구를 중역한 법정스님은 굳게 가지라라고 하였다. ‘가지라라는 말은 사띠의 의미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이는 빠알리 원어를 모르고 일역에 의존하였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다른 번역서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어정리

 

cara: one who walks or frequents; 2. a spy.

nisinno : 就座的

sayana : [nt.] a bed; sleeping.

yava : [m.] barley. , (ind.), up to; as far as; so far that.

tassa:, tassā, ta (so, tad, sā) の dat. gen.代名第三人指示代名ta(he / it/ she;that远称m.单数s.

vigata : [pp. of vigacchati] gone away; ceased; deprived of; being without.

adhiṭṭhahi : [aor. of adhiṭṭhahati] stood firmly; determined; fixed one's attention.

idha : [adv.] here; in this world or existence.

 

 

 

게송10

번역자

숫따니빠따 멧따경 게송10

비고

빠알리

Diṭṭhiñca anupagamma sīlavā dassanena sampanno
Kāmesu vineyya gedha
nahi jātu gabbhaseyya punaretīti.

 

전재성박사역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법정스님역

온갖 삿된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를 지키고 지견(知見)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람은 결코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중역

각묵스님역

계행을 지닌 자, 사견을 따르지 않고 바른 견을 구족하여 감각적 욕망에 집착을 버려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으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まな見解にとらわれず、めをち、るはたらきをえてりにする欲望いたは、して母胎宿ることがないであろう.

 

석지현스님역

사악한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사리를 잘 판단하며, 욕망의 늪을 이미 나온 사람, 이런 사람은 결코 두 번 다시 이 윤회 속에 태어나지 않는다.

영역을 토대로 한 중역

영역

Not tarrying in any view, become virtuous and come to righteousness of view

Greed for sensuality appeased, is not born again in a womb.

 

 

 

 

 

 

 

 

마지막 열 번째 게송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해탈을 이루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첫 번째 개송에서는 자애수행에 대하여 예비단계 내지 이해단계 이었다면, 열번째 게송에서는 완성단계에 대한 것을 말한다.    

 

결코 윤회하지 않을 것

 

dassanena sampanno(닷세나 삼빤노)에서 dassana(닷사나)는 각주에 따르면 봄, 내관, 통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Prj.I.251에 따르면 진리의 흐름으로 향한 님의 올바른 견해에 의해 조건 지어진 통찰을 갖춘 것이라 한다. 이렇게 통찰을 갖추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nahi jātu gabbhaseyya punaretīti(나히 자뚜 갑바세이양 뿌나레띠띠)’이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母胎宿ることがないであろう(다시 모태에 머무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라서 법정스님도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으리라고 번역하였다. 영문에서도 not born again in a womb’이라 하였다. 다른 번역자들도 모두 모태에 들지 않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윤회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도 빠알리어 punarutti(뿌나레띠) 때문일 것이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반복(repetition)으로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번 째 게송에서는 자애수행으로 해탈을 이루어 윤회를 종식 시키는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단어정리

 

gedha: [m.] greed.

nāhi :na [taそれ] の f. pl. instr.

gabbhaseyyā: [f.] conception in a womb.

punarutti : [f.] repetition.

 

 

 

 

멧따경(Imee Ooi창송)

 

 

 

법정스님의 수타니파타

 

고교시절 방학때 학원에 다녔다. 한 번도 과외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주로 학원에 의지하였다. 그 때 당시 종로2가에 몰려 있는 학원에 다녔는데 종종 종로서적을 찾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때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서점이었다. 4개층으로 구성되어 서점에서 포스터 광고형식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법정스님의 수타니파타이었다.

 

수타니파타를 읽게 된 것은 몇 년전의 일이다. 더구나 빠알리원전을 찾아 가며 접한 것은 최근의 일로서 글쓰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빠알리 원전을 번역한 전재성박사의 ‘숫타니파타’를 통해서이다.

 

이번에 멧따경에 대하여 글쓰기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법정스님의 번역이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의 일역을 중역하였다는 것이다. 이전 까지만 해도 막연히 일본의 번역서를 중역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까무라 하지메의 일역을 참고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번역어 비교를 해 보니 빠알리 원전과 차이가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오역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든가 사띠에 대하여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것 등이다. 이는 그 때 당시 번역환경 때문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번역한 수타니파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접한 부처님의 생생한 원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스님은 그 시대의 환경에서 시대적 소명을 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세계가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글로벌화 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빠알리 원전을 직접 번역한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 번역물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행운이라 본다. 더구나 인터넷으로 빠알리어 뿐만 아니라 일역, 영역 등 각종 번역을 접할 수 있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또한 부처님의 원음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미천한 자들에게도 부처님의 원음을 직접 접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번 글쓰기로 알게 된 사실은 법정스님의 번역이 일역을 중역함으로 인하여 번역의 한계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글쓰기로 밝힌다는 것이 스님의 성과물에 먹칠을 한 것 같아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한 이 글로 인하여 불편함을 느낀 분들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사죄 드린다.

 

하트를 날리듯이 멧따(자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가까운데서부터 먼곳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삼계의 중생과 십방으로 무량한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한다고 한다. 마치 하트를 날리듯이 멧따를 날리는 것이다.

 

 

 

 

world-of-the-heart-the_full

 

 

 

그런데 자애가 갈애로 발전되거나 무언가를 갈구한다거나 근심과 걱정을 수반하면 실패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서 분노와 증오를 소멸하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마음의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부모, 자식들에게 먼저 날리는 것이다. 방법은 멧따경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이다. 그래서어머니가 행복하기를!” “우리 아들이 안은하기를!” 우리 딸이 안락하기를!”하고 자애의 마음을 날리는 것이다.

 

 

 

2013-01-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