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온과 오취온, 무더기인가 존재의 다발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31. 15:05

오온과 오취온, 무더기인가 존재의 다발인가

 

 

 

일하면서 듣는 법문

 

일하면서 인터넷을 듣는다. 일은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의 일이 끝나면 나머지 단계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일을 해도 될 정도로 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단순작업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자공장에서 콘베이어 벨트 라인 앞에 앉아 있는 작업자처럼, 밭에서 호미를 들고 밭을 매는 것 처럼 일따로 듣는 것 따로가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세 번째 단계의 작업에서 인터넷의 불교TV사이트에서 제공되는 법문을 듣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게송이

 

작업중에 마치 라디오 듣듯이 불교TV사이트에서 제공된 법문을 들은 것 중에 월호스님의 법화경 강의가 있다. 강의 도중에 호탕한 웃음을 특징으로 하는 월호스님은 경전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 하였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게송이다. 그러나 스님은 경전적 근거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경전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막연하게 법구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재성박사와 거해스님의 법구경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위 게송과 똑 같은 내용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유사한 게송을 발견하였다. 법구경 113번 게송이다. 나중에 행불카페에서 확인해 보니 113번 게송으로 되어 있다.

 

전재성박사와 거해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법구경, Dhp113, 전재성님역)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깨닫는 것이 훨씬 낫다.

 

(법구경, Dhp113, 거해스님역)

 

 

첫 번째 구문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월호스님은 몸과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라고 하였고, 전재성박사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번역항였고, 거해스님은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모르고라고 번역하였다.

 

월호스님의 독특한 해석

 

이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월호스님은 이 게송에 대하여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몸과 마음을 관찰한다는 것은 본마음자리에 돌아가는 연습이에요. 본마음자리에 있으니까 자기 몸과 마음을 보게 되는 거죠. 성품자리로 가는 연습이라고. 성품과 친해지는 거. 그러니까 맨날 아바타로 백년 살아봐야 이 본체자리는 알 수 없거든. 본체자리에 가까이 가야 영원한 생명,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여래수량품,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이죠.

 

(월호스님, 월호스님의 경전교실-법화경 제25회 제16. 여래수량품 1. 여래의 방편설법, 불교TV 2013-01-14)

 

 

불교TV에서 법화경 강의를 하고 있는 월호스님은 예전과 달리 종종 초기불교 경전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법구경 등과 같이 짤막한 게송을 소개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을 보면 선불교적 시각임을 알 수 있다.

 

스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본마음 자리를 찾는 것이라 하였다. 흔히 말하는 본마음, 참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성품자리찾아 가는 연습이라 한다. 또 강의에서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이 본마음-참나라고 한다. 이런 류의 법문을 선사로부터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도 라디오 법문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참나라고 수 없이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싱겁고 허망한 것이라고

 

이와 같이 선사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본마음, 참나라고 이구동성으로 법문한다. 그런데 어느 스님은 불교TV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허! 부처님이 너무 싱거운 거야. 허망한 거야. . 내가 이렇게 그 화려한 왕궁에서 그 생노병사에 고통을 짊어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셨잖아요. 그리고 설산에서 6년 고행하셨잖아요.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깨닫기 전이나 (깨닫고 난후나) 아무차이가 없는 거야.

 

(일선스님, 수행의 올바른 길 수심결(일선스님), 제1회 밖에서 찾지 말라 , 불교TV 2013-01-22)

 

 

스님이 강조한 것은 불성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 부처가 있는데 깨닫고 나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 하고 난 순간 싱겁고 허망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사들의 법문은 한결같다. 내 마음속에 있는 본래부처, 본마음, 성품, 참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본래 부처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 확인 작업이 수행이라 한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월호스님이 법화경 강의에서 인용한 법구경 113번 게송에 대하여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이를 각 번역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법구경 게송 113

알리

Yo ce vassasata jīve

apassa udayavyaya,
Ekāha
jīvita seyyo

passato udayavyaya.

전재성박사역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거해스님역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깨닫는 것이 훨씬 낫다.

월호스님역

몸과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훨씬 더 값지다.

영역

Better it is to live one day

seeing the rise and fall of things than to live

as hundred years without ever

seeing the rise and fall of things.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vassasata에서 왓사(vassa)는 일년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sata가 붙어 vassasata(왓사사따)가 되면 백년이라는 뜻이 된다. 참고로 10년은 vassadasa이다. Jīva는 삶(the life)이라는 뜻이고, ce는 만일(if)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Yo ce vassasata jīve(요 쩨 왓사땅 지웨)’는 ‘백년을 사는 것 보다’라고 번역된다.

 

중요한 말은 ‘apassa udayavyaya(아빳상 우다야위야양)’이다. 복합어 udayavyaya는 udaya(rise) 와 vyaya (decay)로 이루져 있는데 ‘생겨나고 사라지는’이라고 번역된다. apassa은 ‘보지 못하고(ないで)’ 라는 뜻이다.  따라서 ‘apassa udayavyaya’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apassa udayavyaya(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과 관련하여 각주를 보면, 스물 다섯가지의 방식으로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섯 가지가 무명(avijja), 갈애(tanha), 행위(kamma), 자양분(ahara), 접촉(phassa)의 다섯가지를 통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다섯에 다섯을 곱하면 스물 다섯이 된다.

 

게송에서는 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짐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 할 수 있다면 단 하루를 살아도 만족하다고 한다. 이는 열반을 성취하였기 하였기 때문이다. 열반을 성취한 자는 궁극적으로 불사(不死, atama)의 경지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무더기와 존재의 다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오온이다. 이 오온에서 한자어 ()’무더기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오온에 대하여 다섯가지 무더기라고 번역하였다. 단지 한자어 오온에 대하여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는 이와 달리 오온에 대하여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번역하였다. 왜 그렇게 번역하였을까.

 

더미를 뜻하는 한자어 온()은 빠알리어 칸다(khanda)’를 번역한 것이다. 칸다의 의미는 PTS 사전에 따르면 천연적 의미응용적 의미가 있다. 천연적 의미로는 큰 것, 작은 것 등으로 하나의 단위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응용적 의미는 집합적 의미로서 다발, 덩어리, 구성요소 등을 뜻한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칸다에 대하여 더미(rasi)’라고 보았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근거한 번역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칸다에 대하여 무더기로 번역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보여진다.

 

존재의 다발이라 하였을까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칸다는 천연적 의미라기 보다 응용적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존재의 다발은 의식이 있는 존재의 구성물들이고 살아있는 존재의 체험의 작용적 요소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을 인간의 정체성을 분석하고 인간의 체험의 구조를 드러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까야에서 사용되는 존재의 다발은 생리학이나 심리학이 추구하는 동일선상에서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현대의 자연과학의 원리와 비교하는 것은 유사과학적인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부처님에 의한 개인적인 존재의 탐구는 존재의 해탈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다발은 해탈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인간의 존재의 현상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쌍윳따니까야 3권 해제)

 

 

칸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유정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칸다에 대하여 단지 무더기라고 번역한다면 이는 무정물과 유정물 모두에게 해당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칸다에 대하여 유정물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존재의 다발로 번역한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무더기와 다발은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칸다는 어깨의 근육이 뭉쳐진 다발 같은 것이라 본다. 칸다가 흙을 쌓아 놓은 것 같이 단순한 무더기가 아니라 여러가지 끈이 묶여져 있는 노끈 다발같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The Rope

 

 

 

이렇게 어깨 근육이나 수십가닥의 노끈 가닥 같은 것으로 보는 이유는 칸다가 연기적인 의존관계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물질은 물질다발이고, 정신은 정신다발로 보는 것이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의 섬유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바로 존재의 다발 같은 것이라 본다. 영원히 지속되는 한 가닥의 정신적 섬유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이 존재의 다발이 무상하게 겹쳐지고 꼬이면서 상호의존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오온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칸다에 대하여 단순한 무더기가 아닌 유정물로 한정하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단지 오온에 대하여 단지 몸과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이를 더 세분화 하여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로 분류한 것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칸다경(S22:48)에서 칸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에 관해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 한다.

 

(칸다경-Khandhasutta-존재의 다발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22:48(5-6),전재성님역)

 

 

칸다경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 Pañcakkhanda)’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 pañcupādānakkhandha)’에 관한 경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시하면 五蘊(오온)五取蘊(오취온)이다 

 

먼저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존재의 다발의 정의를 보면,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물질로 이루어진 나의 몸에 대하여 물질의 다발(색온)이라 한다.  이는 단순한 물질의 무더기가 아니라 윤회하는 존재로서의 다발을 말한다. 이런 다발은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오취온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경에서는 오취온에 대해서도 정의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번뇌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물질의 집착다발이라고 한다.

 

(칸다경-Khandhasutta-존재의 다발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22:48(5-6),전재성님역)

 

 

오온과 오취온이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오취온은 오온이 번뇌와 집착이 대상인 것이라 한다.

 

불자들은 오온이 무언지 잘 모른다. 그런데 오취온 이야기가 나오면 불교가 더 어려워 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취온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드는 불자들도 있다. 이렇게 오온과 오취온에 대하여 잘 모르다 보니 오취온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 마치 대단한 불교적 지식을 아는 것처럼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항상 오취온을 입에 달고 다닌다. 마치 업타령이나 마음타령하듯이 오취온 타령을 하는 것이다.

 

아라한과 범부

 

각주에 따르면, 집착다발(취온)은 다발이 번뇌를 수반하고 집착을 수반하면 집착다발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다발(온)은 경에서 표현 되어 있는 것과 같이 번뇌와 집착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다발이라 하는 것이다. 이를 아라한과 범부로 설명할 수 있다.

 

아라한에 있어서 오온이란 무엇일까. 아라한의 오온은 번뇌와 집착이 없는 순수한 칸다를 말한다. 칸다에 대한 번뇌와 집착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나 범부에게 있어서 오온은 번뇌와 집착이 달라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물질, 느낌 등 오온이라는 대상에 번뇌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에게 있어서 오온이나 오취온은 같은 말이다.

 

입만 열면 어긋난다

 

일하면서 법문을 듣는다.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불교TV 사이트의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있는데, 대부분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감동하기 보다 깊은 회의감이 앞선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장래가 깜깜하다고 밖에 표현 할 수밖에 없다. 교리에 대하여, 경전에 대하여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법문은 금강경, 반야심경 등 불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설령 새로운 법문을 하더라도 요즘 불자들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말하는 경우 심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심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개구즉착(開口卽着)’이라는 말이 있다. 선가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입만 열면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법담을 나누는 것조차 금기시 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교학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이나 경전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오늘날 불교TV 사이트에서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그대로 알 수 있다. 교외별전, 불립문자의 전통에 따라 교학과 경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법문에서 입만 열면 어긋나는 개구즉착의 현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법문을 하는 선사들도 힘들 것이지만, 그런 법문을 듣는 불자들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이다.

 

 

2013-01-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