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유일한 길인가 하나의 길인가, 대념처경 에까야나(ekayana) 번역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4. 14:33

 

유일한 길인가 하나의 길인가, 대념처경 에까야나(ekayana) 번역어

 

 

 

집단지성의 힘을 느낀다. 비록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지만 불자들은 댓글(“어떻게 여인을 대처해야 합니까?”어떻게 사띠(sati)할 것인가)을 통하여 하나의  요약된 결론을 도출한다.

 

마치 안개가 걷힌듯이

 

최근 사띠에 대한 글을 여럿 올렸다. 경전상에서 보는 사띠의 해석에 대한 것이다. 최초의 발단은 초기불전연구원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하나의 글을 보고 시작 되었다. 그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기억(sati)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기억하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기억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전에 행하고 오래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 낸다.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문다. ...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바르게 알고 기억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기억의 기능이라 한다.” (S48:10*6, M53*16 )

 

(도도도, 부처님의 수행법 : ‘8정도’ 쓰고 ‘위빳사나’ 읽는다.)

 

부처님의 수행법-8정도라 쓰고 위빳사나라 읽는다.docx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간행된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 대신 기억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 다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대신 사띠의 기본적인 의미인 기억을 집어 넣었을 때 모든 것이 명확해짐을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치 안개가 걷힌듯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마음챙김이라는 애매하고 모호한 용어 대신 기억이라는 확실한 용어를 사용한 결과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이 게시물은 초기불전연구원 사이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성스런 제자가 기억해야 하는 것

 

위 구절과 유사한 경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 vuccati bhikkhave, satindriya.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능력이라 한다.

 

(빳타마위방가경- Pathama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8:9(1-9),전재성님역)

 

 

전재성 박사는 사띠(sati)에 대하여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6:3)”라는 경전적 근거를 들었다. 반면 각묵스님의 경우 운나바 바라문경(S48:2)의 문구를 들어 마음챙김이 마음과 해탈을 연결시켜 주는 기능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 기억의 기능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두 번역자의 상반된 주장에 따라 경전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독자들은 새김마음챙김두 개의 용어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문구를 놓고 한편에서는 기억의 기능이 들어간 새김이라 하고, 또 한 편에서는 기억의 기능이 빠진 마음챙김이라 한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사띠가 기억의 기능이 있는 것임에 확실하다. 마음챙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곳에 기억이라는 용어를 대체 하여 넣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빳타마위방가경에서도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번역하였다. 사띤드리야(satindriya)에 대하여 새김의 능력으로 번역한 것이다. 더구나 이를 설명하는 문구 역시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성스런 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사띠는 기억의 기능이 빠지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보면 사띠에 대하여 초지일관 마음챙김으로 번역해 놓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배제된 MBSR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사용하고 있고 명상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이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 예는 불교적 명상기법을 심리학에 적용하여 하나의 새로운 심리프로그램을 만든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에서도 볼 수 있다.

 

존 카밧진(Jon Kabat-Zinn)교수에 의하여 개발되었다는 MBSR에 대한 소개가 지난 2011 KBS에서 특집으로 방영되었다. ‘다르마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프로에서 제2치유편을 보면 MBSR이 소개 되어 있는데, 미국의 어느 수업참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MBSR수업이 좋은 점은 종교를 배제시킨 거예요. 불교에서 비롯된 게 명확하지만 모든 종교인들이 MBSR수업에 참여할 수 있으니까요.”

 

(MBSR수업참여자 A)

 

 

 

 

 

KBS특집 다큐 다르마 제2치유

 

 

 

전국민을 대상으로 방영된 KBS 특집프로에서 미국의 어느 MBSR수업 참가자는 놀랍게도 종교성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참가한 것이라 하였다. 참가자는 또 “여기선 불교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존 카밧진 교수가 개발한 MBSR프로그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배제 되어 있고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을 강조하는 명상기법만을 가져 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배제된 명상기법인 MBSR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MACT라는 프로그램도 개발되어 심리치료에 사용되고 있다.

 

이들 서구에서 개발된 심리치료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핵심용어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이다. 이를 MBSR MACT에서는 공통적으로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학술지나 기사에 마인드풀니스라는 용어는 항상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챙김에는 놀랍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배제 되어 있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려 갈등이나 감정을 수용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띠의 본래 의미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말이 현대 명상프로그램이나 심리리프로그램에서 배제 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어라고

 

이처럼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말이 불교계 밖 명상센터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기능이 배제된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물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김재성교수라 한다. 지난 2009년 당시 법보신문에서 사띠 번역어 논쟁이 벌어졌을 때 김재성 교수는 수 차례 반론을 펼쳤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띠는 기억과 그대로 현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를 의미하며, 따라서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사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법보신문 2009-12-24)

 

 

수 차례의 반론을 펼친 김재성 교수는 마지막으로 반론에서 결론적으로 던진 말이다. 마음챙김은 영역인 마인드풀니스의 적절한 번역어라고 한다.

 

글에서 김재성 교수는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정의 하였다. 김재성 교수는 먼저 사띠가 기억의 의미가 있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각묵스님이 단정적으로 부정한 것과 대조적이다. 기억의 의미로 쓰인 예로서 아난이 사띠를 지닌 자 가운데 으뜸’(AN i, 24)”서있거나 가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깨어있는 한 (자애의) ‘이 사띠를 굳게 지녀야 한다.(Sn 151)”를 들고 있다.

 

다음으로 사띠-삼빠잔나(sati-sampajañña)’로서의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기는 알아차림(mindful awareness)’이라 하였다.사띠빳타나(염처경)에서 “몸에서 몸을 거듭 관찰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또는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문구의 예를 들었다.

 

여기에서 마음챙김을 지니고’라는 문구에 대하여  마음챙김을 지니고는 관찰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상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 포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김재성 교수의 글에 사띠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라는 말은 강조 되지 않는다. 그 대신 마음챙김이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적절한 번역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존 카밧진 교수가 말하는 마인드풀니스와도 같은 개념이라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 붙인다.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말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찰 대상, 마음챙김의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태도를 말한다. 이 구절은 ‘비판단적인’, ‘수용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존 카밧진과 심리학자들은 사띠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김재성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챙김, 상업주의 용어 단정은 억지”, 법보신문 2009-12-24)

 

 

글에서 김재성 교수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여 20년 가까이 명상수행을 지도했다고 한다. 90년대 미얀마에서 명상수행을 경험한 바 있는 김재성 교수는 위빠사나 수행 일세대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수행지도 해 왔어도 수행자들이 이를 이해 하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런 그가 글에서 일관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사띠의 영역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이다. 마음챙김이 사띠라는 빠알리어 뿐만 아니라 영역인 마인드풀니스와도 잘 매칭되는 단어라고 하였다. 더구나 존 카밧진 교수가 개발한 MBSR에서 마인드풀니스와도 같은 개념이라 한다. 

 

영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번역

 

김재성교수는 빠알리니까야 경전 번역자가 아니다. 다만 미얀마에서 수행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명상 수행 지도를 하고 있는데, 그가 김재성교수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고 이를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하였다. 그라나 그 마음챙김에는 기억이라는 기능이 없다. 마치 화두 챙기듯이 마음챙김 하는 것 같이 보인다.

 

화두챙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사유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책도 보지 못하게 하고 이치로 따져 아는 것을 경계한다. 다만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라고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며 화두를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영역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재역에서 시작 되었다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는 사띠 논쟁의 종결판이라 볼 수 있는 권오민 교수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따라서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

 

(권오민 교수, 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 법보신문 2010-03-04)

 

 

인경스님에 의하여 촉발된 사띠 논쟁은 이 땅에서 내로라 하는 학자, 교수, 스님들의 글이 법보신문에 실렸다. 마지막으로 실린 아비달마를 전공한 권오민 교수의 글이다.

 

권오민 교수는 우리 또한 끊임없이 아비달마(불타교법에 대한 논의)를 산출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경우 그에 관해 이미 아비달마 논장에서 논의하였음에도 논의하였는지도 모른 채. 어떻게 논의하였는지, 왜 그렇게 논의하였는지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거칠게. 그러면서 도리어 아비달마를치심의 번뇌만을 증장시키는 난삽한 교학(공리공론의 희론)’으로 치부하는 만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라고 일갈하며 마무리 지었다. 이미 아비달마 불교 시대에 논의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재론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것 중에 중심에 있는 것이 번역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번역에 대하여 따끔한 일침을 가하였다. 사띠의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이 마음챙김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사념처는 열반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이렇게 영역을 중역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있어서 그렇다. 빠알리 원어를 직역하거나 문맥에 맞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역을 그대로 번역한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런 예로서 권오민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4념처를 『대념처경』의 ‘eka yāno maggo’에 따라 ‘[열반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에 대해 이토록 갑론을박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면 차후의 4정근 내지 7각지 8정도와 같은 보리분법(깨달음의 길)은 무엇인가? 이는 한역 아함에서 일승도(一乘道: 잡아함 제535, 607, 1189), 일도(一道: 중아함 제98 『염처경』), 일취도(一趣道: 『대비바사론』『순정리론』 등에서의 『염처경』 인용문) 등으로 번역되는데, 과거에는 이 말을 대승의 일승보살도의 연원으로 간주하더니 오늘날에는 유일한 길로 간주한다.

 

하나유일은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대비바사론』에는 이에 관한 대단히 다양한 해석이 논설되고 있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열반에 이르는하나의 길이다. 그런데 중현(衆賢)은 흥미롭게도 여기서하나를 독존(獨尊)의 뜻으로 해석하고, 이는 다름 아닌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중에서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일취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권오민 교수, 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 법보신문 2010-03-04)

 

 

권오민 교수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을 하였다. 영역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오역이 발생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예로서 사띠빳타나경(염처경, M10)에서 ‘eka yāno maggo’라는 용어이다. 이를 유일한 길로 번역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을 실현하고 열반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사념처 수행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사념처 뿐만 아니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 여러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길인가 하나의 길인가

 

그렇다면‘eka yāno maggo’에 대하여 우리나라 빠알리 니까야 번역자들은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초불연과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비교해 보았다.

 

 

 

  

   

  

빠알리

Ekāyano aya bhikkhave maggo sattāna visuddhiyā sokapariddavāna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 attha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 yadida cattāro satipaṭṭhānā. Katame cattāro?

Ekāyano maggo

전재성박사역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하나의 길

초불연역

(대림스님,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니, 그것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유일한 길

영역

“Bhikkhus, there is only one way for the purification of beings, for ending grief and lament, to overcome unpleasantness and displeasure and to realize extinction and that is this fourfold establishment of mindfulness. What four?

only one way

 

 

출처: 사띠빳타경(Satipaṭṭhānasutta, 염처경, M16)

 

 

 

 

권오민 교수가 지적한 문구가 “Ekāyano aya bhikkhave maggo”이다. 이를 줄이면 ‘Ekāyano  maggo’가 되는데,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하나의 행선지로 통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반면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길인 이유

 

하나의 길과 유일한 길의 차이는 크다. 완전히 다른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빠알리어 ‘Ekāyano  maggo’라는 똑 같은 단어에 대하여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것일까. 이는 각주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먼저 전재성박사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ekāyano aya maggo: ekāyano maggo란 하나의 행선지로 통하는 길을 말하는데 한역에서는 일승도(一乘道)라고 한다. MN.I.55의 ekāyano aya maggo도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영역할 때에 Soma는 ‘This is the only way’로, Nyanaponika는 ‘‘This is the sole way’로 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독립적인 길이라는 인상을 준다. Srp.III.177도 그 첫 번째 방식만을 따르고 있다.: ‘수행승이여, 이것은 하나의 길인데, 이 길은 갈림길이 아니다.(ekamaggo ayam bhikkhave maggo na dvedhapathabhuto)’MN.I.174에 나오는 ekāyano maggo란 곧바로 행선지에 이르는 길, 지름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 특히 묘법연화경에서 말하는 일승(ekayana)이라는 것과 다르다.

 

(ekāyano aya maggo 각주,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빠알리어 에까야노 막고(ekāyano maggo)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라 한다. 이는 주석서에서 수행승이여, 이것은 하나의 길인데, 이 길은 갈림길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나의 길, 지름길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주석을 보면 정반대로 되어 있다.

 

유일한 길인 이유

 

초불연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ekāyana(유일한 길)ekāyano magga(유일한 길)를 말한다. Magga()는 빤따(pantha), 빠따(patha), 빳자(pajja), 안자사(anjasa) 등 여러가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아야나(ayana)라는 이름으로 말했다. 유일한 길(ekāyana)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ekāyana 각주, 초불연 대림스님과 각묵스님)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ekāyana(에까야나)에 대하여 유일한 길로 해석하였다. 그 이유로 다섯 가지 예를 제시 하였다.  첫째가 비구들이여, 유일한 길이어서'라는 경전적 근거를 들었고, 둘째가 혼자서 하기 때문에유일한 길이라 하였고, 셋째가 한사람의 길이 유일한 길이라는 말인데 이는 세존의 길이기 때문이라 하였고, 넷째가 간다고 해서 길이라 하여 팔정도를 언급하였고, 다섯번째로 하나를 향해서 가기 때문에 유일한 길이라 하였다.

 

유일한 길과 일승(一乘)

 

그런데 대승경전인 법화경에서도 ekāyana(에까야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승은 방편이고 일불승만이 진실이라고 표현할 때 일승이라 하는데, 이 일승이 바로 ekāyana(에까야나), 즉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ekāyana라는 말이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경(M12)’에서도 나온다. 이 때 초불연에서는 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M12)’라고 하여 외길이라 번역하였다. 같은 단어를 두고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문맥에 따라 번역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 하여 전재성 박사는 한 사람이 오로지 한 길을 따라(M12)’라고 오로지 한 길이라고 번역하였다.

 

외길오로지 한 길이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리고 유일한 길하나의 길도 다르다. 이렇게 정반대의 번역을 볼 수 있다.

 

 

에까야나

전재성박사

초불연

영역

법화경

ekāyana

(염처경 M10)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하나의 )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니

(유일한 )

there is only one way

일승(一乘)

Ekāyana

(사자후에 대한 큰 경, M12)

목이 타고 갈증에 시달리는 한 사람이 오로지 한 길을 따라

(오로지 )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외길)

He follows the path exhausted overcome by the heat and thirst.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서 부처님은 다섯 가지 세계, 즉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그런 세상에 가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ekāyan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오로지 한길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영역은 ‘the  path’ 이다. 초불연에서는 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는 말대신 문맥에 따라 외길이라고 번역하였다고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마응챙김의 확립과 새김의 토대

 

마응챙김의 확립의 경새김의 토대의 경이 있다. 모두 빠알리어 사띠빳타나경(Satipaṭṭhānasutta)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된 경의 제목을 보면 전혀 다른 경처럼 보인다. 이는 사띠와 빳타나의 번역을 달리 하였기 때문이다.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사띠+우빳타나(sati+upatthana)이고 둘째는 사띠+빳타나(sati+patthana)라 한다. 전재성박사는 두 번째의 사띠+빳타나(sati+patthana)를 적용하여 ‘새김의 토대’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행위의 의미가 담겨 있는 첫 번째의 사띠+우빳타나(sati+upatthana)를 적용하여 ‘마음챙김의 확립’이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전재성박사가 새김의 토대라고 번역한 것은 기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사띠와 사띠의 대상이라 볼 수 있는 토대라는 말을 이용하여 ‘새김의 토대’라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기억을 통한 새김 없이는 사띠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아는 토대의 경’이라  볼 수 있다.

 

반론을 기대하며

 

이렇게 두 번역서는 제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럼에 따라 내용 또한 차이가 많다. 가장 큰 차이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과 새김이다. 그리고 ekāyana에 대한 번역어 유일한 길과 하나의 길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되었을까.

  

이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김재성 교수의 글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김교수는 글에서 마음챙김이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권오민 교수가 지적한 사항이다. 또 권오민 교수는 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한 것은 영역을 재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글에서 밝히고 있다. 실제로 영역을 보면 ‘only one way’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반으로 이르게 하는 길이 사념처 외에도 칠각지나 팔정도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히 오역이라 번역된다. 더구나 영역에서  only one way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역을 재역하였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론이 있기 바란다.

 

집단지성의 힘을 느끼며

 

사띠에 글을 올리면서 법우님들이 댓글을 많이 달아 주셨다. 댓글을 통하여 집단지성의 힘을 보았다. 스님들이나 학자 등 주류 측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노(mano)의 기능은 2가지인데, 안이비설신으로 색성향미촉을 작의(마음작용)해서 안식 등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과, 이미 형성되어 있던 과거지식인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입니다. 사띠 역시 2가지 기능이 있는데, 마노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기능과, 4념처를 확립하는 기능입니다. 마노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기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고 4념처를 확립하는 기능은 신수심법의 현재 상황과 마음을 사유해서 알아차리고 챙기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사띠라고 하는 것입니다.

(D법우님)

 

 

기억하고, 챙기고, 알아차림 하려면 우선적으로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없이, 연습없이 어떻게 문득 알아차립니까. 그러므로 새김은 즉 '주의기울이고 기억하고 사유하며 관찰하여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가 종합적으로 함축되어 가르침으로서의 경구로는 [새김]으로 선택 함이 부처님의 원음을 전승하는 경전으로 [새김]의 경구는 교학적으로 정확히 무게를 실은게 아닐까 합니다.  

 

(T법우님)

 

 

 

2013-02-02

진흙속의연꽃

부처님의 수행법-8정도라 쓰고 위빳사나라 읽는다.docx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