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반에 이르는 길, 사념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지름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7. 15:08

 

열반에 이르는 길, 사념처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지름길

 

 

 

온갖 것들이 올려져 있는 유튜브

 

유튜브를 보면 모든 것들이 다 올려져 있다. 온갖 잡것들도 보이지만 불교에 대한 것도 적지 않다. 그 중에 교리나 수행에 대한 것도 종종 보인다. 그런데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불교관련 동영상 중에는 스님들 것도 있지만 재가자들도 다수 있다. 공통적으로 들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일방적인 전달이고 자신들 이야기 위주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는 매우 드믈다. 아마도 모두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깨달은 자가 말하면 모두 불설(佛說)이 된다. 그래서 스님들의 법문을 대부분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것들도 대부분 자신들의 이야기로서 일방적 전달이다. 누구나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번역된 것을 참고한 결과

 

그런 강사 들 중에 어느 재가법사의 강의를 보았다. 주로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진행된 강의에서 사념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사념처가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염처경이나 대념처경에서 에까야나 (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것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2012년 따타가타를 출간한 장선우 감독은 후기에서 비구들이여,  이 길은 유일한 길이니라고 시작 되는 대념처경의 문구를 인용하였다.  이는 에까야나 (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한 빠일리니까야 번역서를 참고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눈먼 봉사가 인도하는 길을 역시 눈먼 봉사들이 줄을 잡고 따라 가는 형국이라 볼 수 있다.

 

각국 번역어를 보면

 

이처럼 잘못 번역된 용어가 유통됨에 따라 빠알리 원어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역된 채 인용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오역이 우리나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넷검색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비 고

빠알리

 

Ekāyano aya bhikkhave maggo sattāna visuddhiyā sokapariddavāna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 attha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 yadida cattāro satipaṭṭhānā. Katame cattāro?

Ekāyano maggo

영역

 

Bhikkhus, there is only one way for the purification of beings, for ending grief and lament, to overcome unpleasantness and displeasure and to realize extinction and that is this fourfold establishment of mindfulness. What four?

only one way

한역

諸比丘!此是使眾生淨,超越愁悲,

滅除苦憂,成就正道,體證涅槃之唯一道路,

此即四念處。四者何耶?

唯一道

일역

比丘衆よ、涅槃に至る、一の道がある。
その道は、四つの念じる
、四念処観である。
そして、この四つの念
とは、如何なるものか

の道

한역염처경(念處經)

 

비구들아, 존재를 정화하고, 슬픔과 한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재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고, 열반에 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나니,

곧 올바른 관찰의 네 가지 형태인 사념처(四念處)가 그것이니라.

그러면 사념처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방법

초기불전연구원

(대림스님,

각묵스님)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니, 그것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유일한 길

한국빠알리성전협

(전재성박사)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하나의 길

 

 

표를 보면 전재성박사의 번역하나만 빼고 모두 유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는 길이 오로지 사념처 하나만이 유일한 길일까?

 

열반에 이르는 길이 오로지 사념처 하나라고?

 

37조도품에 따르면 사념처 하나만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37조도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4정근, 4신통, 5, 5, 7각지, 8정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팔정도의 경우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내용이다. 그래서 팔지성도라고도 한다. 다른 수단과 달리 성스런 팔정도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팔정도는 열반으로 이끈다라고 하였다. 그런 팔정도는 다른 조도품과 달리 특별히 성스러운 팔정도로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할 때도 팔정도를 언급하였고, 또 최후로 설법할 때도 팔정도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사념처가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면 팔정도는 무어란 말인가? 이는 팔정도 뿐만이 아니다. 사신통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 가장 혐오스런 자들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가장 혐오스런 자들이 단멸론자들이다. 주로 인터넷 카페나 토론 사이트에서 활약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로지 현실의 가르침만 펼쳤다고 말하며 윤회와 전쟁, 내생, 업설 등을 부정한다.

 

인터넷 단멸론자들이 크게 의지하는 경이 염처경이다. 그래서 수행과 관련된 사념처 외의 다른 경들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천신이 나오고 신통이 등장하는 경들은 모두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이 사념처에 의지하는 것은 아마도 사념처만이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문구에 자극받아서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언급한 사신통마저 부정 되는 것이다. 자신의 여섯가지 감각능력(깜냥)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은 모조리 부정되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신통이다.

 

사념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넌센스

 

그러나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사신통을 포함하여 37조도품 모두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 하였다. 이는 초기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과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네가지 새김의 토대, 네가지 올바른 노력, 네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가지 능력, 다섯가지 힘,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 여덟가지 고귀한 길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신통 등 모든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단을 나열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초월적 지혜에서 성취되고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사념처 하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자들이 에까야나에 대하여 왜 유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을까?

 

사념처는 지름길이다

 

빠알리어 에까야나(ekāyan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ekāyana : [m.] the only way or means. 唯一的方法

 

 

아는  하나(one)를 뜻하는 에까(ekā)와 가는 것(going) 또는 운반(a carriage)을 뜻하는 야나(yāna)의 결합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까야나에 대하여 법화경에서는 일승(一乘)이라 하고, 한역경전에서는 일승도(一乘道)’라고도 번역된다. 이는 오로지 하나라는  뜻으로 유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사띠빳타나경에 적용된 에까야나 막가(Ekāyana magga)에 대하여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면 다른 길은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는 모순이 발생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념처 외에도 6종의 수단이 있고 각 수단에는 고유한 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념처 하나로만 한정해 버린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념처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여러가지 수단 중의 하나이고 다만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보아야 옳다.

 

영원주의자들의 도그마

 

 

중학교 시절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 항상 보던 건물이 있다. 혜화동성당이다. 지금은 사라진 혜화동 로타리에 혜화동 성당이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필리핀 공동체의 주말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혜화동성당은 필리핀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요일 늘 필리핀 공동체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이다.

 

시내로 진입하기 위하여 늘 보던 혜화동 성당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늘 보던 것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라고 커다란 돌벽에 새겨진 문구 이었다.

 

 

 

 

 

 

 

혜화동 성당에 새겨진 문구는 기독교의 유일신교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다.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자 유일신이 길이고 진리 그 자체임을 선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기경에 따르면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그마이다.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와 세계는 유일성에 대한 지각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

 

(빤짯따야경-Pañcattaya sutta-다섯과 셋의 경, 맛지마니까야 M102, 전재성님역)

 

 

이는 영원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이에 대하여 유일성에 대한 지각(ekattasaññi)’이라 하였다. 이처럼 유일이나 절대를 주장하는 자들이 영원론자들이다. 하지만 이는 삿된 견해에 속한다. 62가지 견해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잘못된 견해라고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유일과 절대를 말하는 자들은 이것이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법은 오늘날 유일신교에서도 볼 수 있다.

 

유일과 절대는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사념처만이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 한다면 이는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이길 외는 다른 길이 없고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유일과 절대라는 말은 유일신교에서나 사용되는 적합한 표현이다. 그래서 유일신교에서는 유일신과 절대자는 동의어이다.

 

열반을 향한 하나의 길

 

그런 유일의 개념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적용한다면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에까(eka )가 들어 가는 말에 대하여 유일이라는 말의 사용을 자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그 하나는 무엇인가? 좋은 벗과 사귀는 것이다.

 

(깔랴나미따경-Kalyāamittasutta-좋은 벗의 경, 상윳따니까야 45:63(7-1), 전재성님역)

 

 

경에서 하나의 원리라는 말이 있다. 이는 빠알리어 ‘ekadhamma’이다. 이를 유일의 법또는 유일의 원리라고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ekadhamma’는 유일법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ekāyana  magga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행선지로 통하는 길, 열반이라는 유일한 목표로 가는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역에서는 이를 일승도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유일한 목표는 오로지 열반

 

열반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은 많이 있을 것이다. 경에 따르면, 좋은 벗과 사귀는 것도 하나의 원리(S45:53)이고, 계행을 지키는 것도 하나의 원리(45:64)이고, 의욕(45:65), 자기를 성취하는 것(45:66) 등 여러가지 '하나의 원리(ekadhamma)'가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열반이라는 유일한 목표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사념처 하나 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열반이라는 유일한 목표에 이르는 길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사정근, 사신통,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 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열반에 적용될 뿐이다. 유일한 목표인 열반에 이르게 하는 데 있어서 사념처 자체가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3-02-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