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 빠알리 니까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12. 14:54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 빠알리 니까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해야

 

 

 

니까야를 접하다 보면 대승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구나 게송을 종종 보게 된다.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여몽환포영으로 시작되는 사구게가 대표적이다.

 

이런 문구를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대승경전의 뿌리가 초기경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불교경전의 근본은 초기불교 경전, 즉 빠알리 니까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때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왜 대승경전이 만들어졌을까에 대한 것이고, 뿌리가 같은 것이라면 굳이 대승경전을 볼 필요가 있겠느냐에 대한 것이다.

 

비교하면 드러난다

 

빠알리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부처님 당시 생생한 부처님의 설법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경을 읽다 보면 부처님이 면전에 있는 것 같고, 바로 옆에서 부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초기경전을 접하게 되면 다른 것은 시들해진다.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선거 때 맞장토론이 있다. 후보 두 명을 불러 놓고 토론을 시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열이 금방 드러난다. 후보간의 역량의 차이가 비교를 함으로서 드러나기 때문에 맞장토론은 반드시 승패가 갈리게 되어 있다. 설령 막상막하로 보일지라도 작은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무엇이든지 비교하면 드러난다. 그래서 자료를 만들 때 비교표를 만들어 이전(before)과 이후(after)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한 것이 좋은 예이다. 불교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직까지 스님들과 불자들 중에는 빠알리 니까야에 대하여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니까야가 뭐꼬?”라고 묻는 노비구니 스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느 스님의 블로그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가르침을 아직 접하지 못한 불자들은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같은 대승경전만 있는 것으로 안다.

 

시대의 역할을 다한 반야심경과 금강경

 

그러나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글로벌화 됨에 따라 수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반드시 대승경전만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먹혀 들어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H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금강경과 니까야의 공통점을 보면 금강경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교리와 비유를 인용하고 있다. 금강경에는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보살마하살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금강경이 대승경전중에서도 니까야와 가장 가까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과 니까야의 차이점을 보면 금강경은 불멸후 500년경에 산스끄리뜨로 편집된 경이라는 것을 드러난다. 베껴쓰라는 표현, 금강경을 독송하면 천대를 받는다는 표현, 대승과 소승법이라는 표현등이 그것이다. 불멸후 500년경에 부처님의 법과 자신이 증득한 경지에 집착하는 병에 걸린 대중들에게 그 법에 대한 집착을 씻어내기 위하여 금강경은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등의 반복 부정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금강경은 이러한 표현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그 시대의 소명을 다했다. 2013년 지금, 불교를 배우려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표현법으로 불교를 배우라고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불멸후 500년경에 나타난 병(법집)을 타파하기 위하여 등장했던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표현법은 이제 놓아버리자.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불교역사를 배우는데 참고용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대신에 부처님 당시의 소박한 언어로 돌아가서 불교를 배우자. 현대인들은 그럴 권리가 있고 그럴 만한 이해가 있다.

 

(H, 금강경과 니까야 비교)

 

 

H님의 글에 따르면 이제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 대승경전은 시대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한다. 불멸후 500년이 지나 편찬되기 시작한 대승경전은 그 때 당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경전을 이천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되새긴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맞는 경전을 읽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원음이 비교적 잘 보전 되어 있는 빠알리 니까야라는 것이다. 그런 빠알리 니까야를 누구나 볼 수 있고 또한 이해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도 큰 이유라고 한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인식되는 세계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빠알리 니까야의 한 문장을 소개하고 있다.

 

 

 ......"말룽끼야뿟따여,

여기 그대가 사물을 보고 듣고 감각하고 인식한다면,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말룽끼야뿟따여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계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끝이다." (S35:95)

 

(H, 금강경과 니까야 비교)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경에 있는 내용이다. 주관적 인식세계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객관적 세계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는 나와 비교된다.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는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있을 세계이기 때문에 대승경전 속에서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객관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이 돌아 간다. 그래서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역과 신역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개정판을 보니 각주에 오역이라 되어 있다. 구역에 대하여 오역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Ettha ca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i.: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는 구절은 역자의 구역에서는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했다. 그것은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였으나 비구 보디의 신역을 통해 오역임을 알았다.

 

Srp.II.383에 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의식 가운데도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 보여진 것 가운데 보여진 것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형상을 형상속에서 인식하는 시각의식이다. ‘이라는 말은 한계를 말한다. 단지 보여진 것뿐이다. 마음의 속성으로 단지 보여진 것뿐이다. 그 의미는 나의 마음은 지금 단지 시각의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각의식이 시야에 들어온 형상에 관한 탐욕이나 증오나 어리석음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순간적인 포착(javana)은 탐욕 등이 없는 단지 시각의식 뿐이고, 이 경계를 지나치지 않고 탐욕 등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의 쌍윳따니까야는 1989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빠알리 니까야 번역물이다. 이렇게 처음 출간된 번역물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스스로 구역이라 하였다. 구역이 있다면 신역이 있을 것이다. 신역은 다름아닌 개정판이다. 개정판 해제에 따르면 11권에 달하는 초판본이 완간되고 난 4년후에 대대적인 개정작업에 들어 갔다고 한다. 2년간에 걸친 교정과정을 거쳐 모두 7권에 달하는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2006년의 일이다.

 

그런데 구역에서 오류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구역에서는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에 대하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고 하였는데 잘못된 번역이라 한다. 이는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보인 것이라고 수동적으로 번역한 것인 내가 객관적 존재라는 뜻이라 본다. 세상이 있고 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있을 뿐이며라고 자를 넣어 번역한 것은 세상을 주관적으로 본 것에 해당된다. 이렇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를 만족한 번역을 한다 보니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고 번역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신역에서는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하여 주관적 세계가 반영된 번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여섯가지 외부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세상이 발생된다고 초기경 도처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접촉, 청각접촉에 따른 세상이 발생되므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 가는 세상이다.

 

탐욕이 탐욕인 줄 알고

 

신역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감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감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라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말룽끼야뿟따경-Mālukyaputtasutta, 상윳따니까야 S35:95(5-2), 전재성님역)

 

 

 

 

발(托鉢)

 

 

 

부처님은 괴로움의 종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보고 듣고 인식함에 따른 접촉으로 갈애가 발생되는데 이는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접촉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여지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접촉은 시각의식, 청각의식으로 불리는데, 이런 의식단계에서 좋고 싫음의 느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접촉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느낌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무덤덤한 느낌이다. 좋아하는 것은 거머쥐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탐욕이고, 싫어하는 것은 밀쳐내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성냄이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은 중립으로서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음이다. 이 느낌의 단계에서 탐욕이 탐욕인 줄 알고, 성냄이 성냄인 줄 안다면 괴로움이 발생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보물창고와 같은 빠알리 니까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는 어떤 성격일까. 아직 까지 니까야가 뭐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빠알리 니까야에 대하여 많이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니까야를 접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빠알리 니까야는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다.

 

어떤 이가 “2500년전 석가모니가 남겨 놓은 똥을 소화도 시키지 못하면서 먹으려 애쓰려 하는가라는 취지로 글을 남겼다. 처음 방문한 사람으로 경전을 이용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글쓰기에 대하여 인정하고 싶지 않고 글 같잖게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소위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답글을 해도 트집 잡고, 답글을 하지 않아도 트집잡는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똥에 비유하여 똥을 싼 듯한 글을 보고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즉각 삭제하였다. 그 다음 수순은 뻔한 것이었다. 원색적인 욕설과 비난, 비방의 글이 곧바로 올라왔다. 2500년전의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연 똥과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오래 전 가르침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주로 읽어 보지 않은 자들이다. 자신의 깜냥으로 판단하여 과학의 시대에 맞지 않고 뒤떨어진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 보물을 얻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까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2500년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였을까에 대한 경외감이다. 그런 가르침에 대한 것은 2500년전이나 지금이나 통용되고,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일지라도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이는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나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는 법화경 의주유(衣珠喩)처럼 옷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옷속에 그런 보물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가난하게 살듯이, 불자들은 니까야의 가치에 대하여 모르고 있어서 니까야가 뭐꼬?”라고 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알리 니까야는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다.

 

컴퓨터 같은 빠알리 니까야

 

둘째, 빠알리 니까야는 컴퓨터와 같은 것이다.

 

인터넷시대에 볼 수 있는 현상중의 하나가 단멸론자들이다. 단멸론자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데, 그들의 주장을 보면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교묘한 논리로 윤회를 부정한다. ‘윤회가 있다라고 하면 상주론에 빠진다고 말하고, ‘윤회가 없다라고 말하면 단멸론에 빠진다고 말하며 교묘한 논리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법에 대하여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다와 같은 상호의존적 연기를 언급함으로서 교묘하게 단멸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취급되는 경은 매우 제한적이고 매번 오취온 타령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극히 일부만 수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마치 컴퓨터에서 극히 일부분의 기능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컴퓨터는 일상화 되었다. 그리고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현실과 가상공간을 들락 거리며 컴퓨터를 이용하여 일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의 일부와 같은 컴퓨터에 대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컴퓨터에 수 많은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일반사용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능은 극히 제한적이다. 단지 컴퓨터를 이용하여 보는 용도로만 활용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제한적이다. 설령 컴퓨터를 이용하여 일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많은 기능을 다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극히 일부분의 기능을 사용할 뿐이다. 그런 기능 중에 카피 기능이 있다.

 

컴퓨터의 기능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아마도 카피 기능일 것이다. 대상을 긁어서 복사한 후 갖다 붙이면 된다. 그런 카피 기능 중에 핫키(hotkey)를 이용한 방법도 있다는 사실이다. 자판을 이용한 단축키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콘트롤씨(control c)와 콘트롤브이(control v)를 말한다.

 

콘트롤씨(control c)와 콘트롤브이(control v) 기능은 자판의 콘트롤과 c키를 눌로서 카피 한 후, 콘트롤과 c키를 이용하여 갖다 붙이는 기능이다. 이런 기능을 사용하면 매우 편리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그래서 핫키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디자인하는 CAD작업자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이와 같이 컴퓨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기능이 있듯이, 빠알리 니까야 속에는 불자들이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수 많은 가르침이 있다. 그런 가르침을 활용하는 것은 마치 단축키를 사용하는 것처럼 효율적이다. 이와 같이 빠알리 니까야에는 컴퓨터와 같이 아직 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수 많은 기능이 있듯이 수 많은 가르침이 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는 컴퓨터와 같은 것이라 본다.

 

빠알리 니까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해야

 

초기불교가 대승불교의 뿌리이어서일까 대승불교 경전을 보면 초기불교 경전에서 보던 비유나 게송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장도 볼 수 있다. 베껴쓰라는 표현, 금강경을 독송하면 천대를 받는다는 표현, 대승과 소승법이라는 표현등이라 한다. 이런 표현은 불멸후 5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시대가 반영된 것이라 한다. 그런 대승경전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금강경을 독송하면 천대를 받는다는 표현(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은 오늘날 시대상황과 맞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갈 필요가 있다.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이 한 시대의 역할을 다 했다면 그 것으로 족하다.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승경전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대의 사명을 다한 대승경전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방대한 빠알리 니까야에는 불교의 교리와 심오한 가르침과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수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에 숨겨진 보물창고와 같다. 또 배워야 할 내용이 많기 때문에 컴퓨터의 숨겨진 기능과 같다. 그런 빠알리 니까야와 다른 경전과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니까야를 접하면 다른 경전은 시들한 것이다.

 

이제 경전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역할을 다한 금강경에서 빠알리니까야로 환지본처(還至本處)’할 때가 되었다.

 

 

 

 

2013-02-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