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가수행자와 열반의 보편성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6. 18:08

 

 

재가수행자와 열반의 보편성

 

 

 

“니까야가 뭐꼬?”

 

마성스님의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다. 어떤 스님이 노비구니 스님으로부터 “니까야가 뭐꼬?”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런 말을 듣고 “출가자가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있는 니까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 한국의 스님들은 얼마나 많을까?(어느 스님의 죽음을 접하고)”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몸은 출가하여 절에 살지만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을지 모르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스님들이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신도들 역시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절에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다녔어도 스님들이 니까야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는다면 “니까야가 뭐꼬?”라고 질문을 할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는 재가불자들

 

우리나라에서 재가자들에 대하여 절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스님과 신도로 이원화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수행자로서의 스님에 대하여 재가자들이  믿고 따르는 승보로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재가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참선과 같은 수행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개신교나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유일신교에서는 신자라 부른다. 그러고 보면 기도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유일신교의 신자나 불교신도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고 테라와다 불교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널리 퍼진 요즘 재가불자들은 더 이상 신도라 부를 수 없다. 재가불자가 수행을 하는 한 수행자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2011년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약 1년간 ‘십이연기와 위빠사나’를 진행하였던 묘원법사는 반드시 “수행자 여러분”하고 불렀다.

 

재가불자들도 사념처 수행을 하였다!

 

재가불자도 수행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깐다라까경(M51)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빳싸]

세존이시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들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뭇 삶들의 청정을 위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참다운 길로 나아가게 하고 열반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설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재가의 흰옷을 입은 저희들도 때때로 이 네 가지 새김의 토대에 관하여 마음을 잘 정립하고 있습니다.

 

(깐다라까경-Kandaraka sutta, 맛지마니까야 M51, 전재성님역)

 

 

 

 

디사(2006 삭)

 

 

 

꼬끼리 조련사 빳싸의 말에 따르면 재가자들도 사념처 수행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유행자인 깐다라까에게 “이 수행승의 무리 가운데 학승으로서 계행을 항상 지키고 일관되게 행동하고 현자로서 슬기롭게 행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에 잘 마음을 정립시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꼬끼리 조련사라면 재가불자중에서도 그다지 높은 지위는 아니라 볼 수 있는데, 꼬끼리 조련사가 재가자들도 사념처 수행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부처님당시에는 재가자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흰 옷을 입은 불환자의 숫자는?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와 존자 고따마의 수행승 제자와 존자 고따마의 수행녀 제자 이외에,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고, 홀연히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들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있습니까?”

 

[세존]

 “밧차여, 나의 제자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고, 홀연히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들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밧차곳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3, 전재성님역)

 

 

마하왓차곳따경에 따르면 재가자로서 아나함(amagami)이 된자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다섯 가지의 낮은 단계의 결박이란 오하분결로서 유신견(sakkāya-diṭṭhi), 회의적 의심(sakkāya-diṭṭhi),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 감각적 욕망(kāma-rāga), 적의(paigha)를 말한다. 이렇게 낮은 단계의 결박을 끊으면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 자, 즉 불환자가 되어 색계 사선천인 정거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열반에 든다고 한다.

 

이렇게 재가자로서 불환자가 되면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었으므로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는 수행을 한다고 한다. 출가하지 않고 재가에 머무는 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소멸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순결을 지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재가의 남자나 여자 어느 누구라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단 아나함까지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출가하여 상가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검증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빅쿠(비구)나 빅쿠니(비구니), 우빠사까(남자신도)나 우빠시까 (여자신도) 모두가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만약에 이러한 것들은 존자 고따마만이 성취했고 수행승들은 아무도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 점 때문에 이러한 청정한 삶은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존자 고따마여, 이러한 것들을 존자 고따마께서도 성취했고 수행승들도 성취했으므로, 이러한 청정한 삶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밧차곳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3, 전재성님역)

 

 

가르침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가 부처님 혼자서 성취한 것으로 그쳤다면 이는 특수한 경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 즉 열반을 실현한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경험하게 하여 똑 같은 결과를 얻어 내었다면 이는 검증된 것과 다름 없다. 마치 의사가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여 임상 실험을 하여 성공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똑 같은 성공을 거두게 한 것과 같다. 따라서 똑 같은 결과를 얻었다면 검증된 것이고 보편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열반의 보편성

 

그런 깨달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출가한 빅쿠나 빅쿠니에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 즉 재가의 남자나 여자 불자에게도 똑같이 적용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유행자 왓차곳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자 고따마여, 만약에 이러한 것들은 존자 고따마께서도 성취했고 수행승들도 성취했고, 수행녀들도 성취했고,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고,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으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여자신도가 아무도 성취하지 못했다면, 그 점 때문에 이러한 청정한 삶은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존자 고따마여, 이러한 것들을 존자 고따마께서도 성취했고 수행승들도 성취했고, 수행녀들도 성취했고,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고,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는 재가의 남자신도도 성취했고,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여자신도도 성취했으므로 이러한 청정한 삶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하왓차곳따경-Mahāvacchagotta sutta-밧차곳따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73, 전재성님역)

 

 

열반의 보편성에 대한 것이다. 열반이라는 것이 반드시 출가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성취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왓차곳따는 “존자 고따마여, 마치 갠지스 강이 바다로 향하고, 바다로 기울고, 바다로 흐르고, 바다로 임하듯이, 이와 같이 존자 고따마의 재가나 출가나 대중들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흐르고, 열반으로 임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열반은 어떤 상태일까.

 

열반이란 어떤 상태인가

 

열반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수 없이 설명이 따른다. 그 중에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 숫따니빠따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본다.

 

 

 [존자 아지따]

Paññā ceva sati ceva (iccāyasmā ajito)
nāmñarūpañ ca mārisa,
Eta
me puṭṭho pabrūhi kattheta uparujjhati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와 같이 여쭈니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

Yameta pañha apucchi ajita ta vadāmi te,
Yattha n
āmñaca rūpañ ca asesa uparujjhati,
Viññ
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i.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아지따경-Ajita sutta-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2, 전재성님역)

 

 

학인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열반은 어떤 상태인지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의식이 없어지는 것(Viññāassa nirodhena)’이라 한다. 경에서 소멸되는 것은 명색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각주에 따르면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도 소멸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지혜와 새김이라는 것은 명색 즉 정신-신체적인 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의식(Viññāa)이 소멸 되면 더 이상 명색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상태인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열반은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사념처 수행 등을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열반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본다.

 

부처님의 우다나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하여 노래한 게송을 빠알리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이를 우다나(udana)라 한다. 한자어로 감흥어라 한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하여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흥어린 신성한 발언 또는 환희로운 앎에 기초한 시구를 뜻한다.

 

이런 우다나에는 부처님의 우다나, 연각불의 우다나, 제자의 우다나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숫따니빠따의 코뿔소의 외뿔의 경에 나오는 게송은 연각불의 우다나이고,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은 제자의 우다나에 속한다.

 

부처님의 우다나는 별도로 80개의 경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 중에 고통받는 뭇삶을 보고 읊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린 시구가 있다.

 

 

고통 속에 태어나 접촉에 시달리니

이 세상은 질병을 자기라고 부른다.

아무리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그것과 다른 것이다.

 

세상은 존재에 집착하여

다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존재에 패배당하여

존재라고 즐거워한다.

 

존재를 즐기는 것은 두려운 것이고

두려워하면, 그것이 괴로움이다.

존재를 버리기 위해

사는 것이 청정한 삶이다.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이든

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면,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든지 어떤 수행자이든 성직자이든

비존재를 통해서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여읨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는 존재로부터 완전한 여읨을

이루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이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든 집착을 부수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 세상을 널리 보라.

무명에 패배하여 존재가 되어

존재에 즐거워하고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곳에서든 어떠한 경우이든

어떠한 존재이든

그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면,

존재의 갈애는 버려지고

비존재에도 환희하지 않는다.

일체의 갈애가 부수어진 곳에

남김없는 사라짐, 소멸, 열반이 있다.

 

수행승이 열반에 들면,

집착을 여의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악마는 정복되고 전투는 승리하고

여여한 님은 모든 존재를 뛰어 넘는다.

 

(3-10세상의 관찰에 대한 경, 우다나, 전재성님역)

 

 

여기서 존재는 오온을 말한다.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는 괴로움을 끝낼 수 없음을 말한다. 이때 존재에 대한 갈애는 ‘영원주의’를 말하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의 여읨에 의해서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다시는 나고 죽는 일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노래 한 것이다.

 

신도가 아니라 수행자

 

빠알리 니까야에 부처님이 부르시는 용어가 빅카(bhikkhave)이다. 빠알리어로는 문법적으로는 빅카워(bhikkhavo)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어서일까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부처님 당시 마가다에서 불리웠던 빅카(bhikkhave)만큼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빅카웨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비구들이여” 라고 종래의 관습대로 번역하였고, 반면 전재성박사는 “수행들이여”라고 수행과 비구를 뜻하는 결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사만냐(sāmañña)에 대하여 사문수행자, 브라흐마나(brahmana)에 대하여 브라만성직자로 각각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재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재가자에 대한 명칭으로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와 우빠시까(upāsikā, 優婆夷)가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신도와 여자신도를 칭한다. 이를 다른 말로 청신사청신녀라 한다. 그러나 이는 신자 또는 신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치 기도를 열심히 하는 유일신교의 신자와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재가의 불자들은 신도라기 보다 수행자에 가깝다. 코끼리 조련사 빳사가 저희들도 때때로 이 네 가지 새김의 토대에 관하여 마음을 잘 정립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가 된 이들이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경험한 열반이라는 것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소똥에서 생겨난 불꽃이나 전단향 나무에서 생겨난 불꽃이나 그 화염과 광채가 모두 똑같듯이, 고귀한 자나 미천한 자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빠알리 니까야를 공부하는 초기불교수행자라면 누구나 수행자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을 비롯하여 재가불자들에 이르기 까지 빠알리 니까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가 뭐꼬?”라고 묻는다고 한다.

 

 

 

2013-02-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