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곡차와 심념처(心念處)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15. 12:07

 

 

곡차와 심념처(心念處)

 

 

 

남의 입속을 들여다 보는 직업

 

이빨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여러 차례 받았는데, 그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직업에 대한 생각이다. 남의 입속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까에 대해서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동안 남의 입속을 들여다 보고 산다고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냄새 나는 입속을 들여다 보는 일에 대하여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물론 사명감으로 봉사정신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냄새 나는 남의 입속을 들여다 보는 것을 평생동안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일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일까 치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이 끝난 다음에 호프집에서 호프잔을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 지킬 수 있어도 불음주항목만큼은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한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호사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 없으면 남들이 하기 싫어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일을 하기 싫어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고된 육체노동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있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받는 월급의 반은 자신의 자존심을 굽힌 댓가라는 말이 있다.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 하는 것 역시 이다.

 

불교의 오계 중에 불음주계가 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와 함께 불음주계는 불자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 덕목이다. 강제성을 띠는 것은 아니지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다른 덕목은 다 지킬 수 있어도 불음주항목만은 자신 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냄새 나는 남의 입속을 들여다 보았다면 호프 한잔으로 날려 버릴 수 있고, 막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 사람이라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 잊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갖은 수모를 당한 월급생활자가 퇴근 길에 포장마차에서 한 잔 술로 시름을 달랠 수 있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majjapānā ca saññamo)”

 

음주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로 인하여 음주를 하는 것에 대하여 예외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불음주라 하여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라는 한문식 문구보다, ‘방일의 원인이 되는 술이나 약물들을 멀리하는 계 받아 지키겠습니다라는 테라와다 의 오계 준수에 더 공감한다. 이는 망갈라경(행복경, Sn2.4)에서 음주에 대한 것을 보면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majjapānā ca saññamo)’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맛자빠나 (majjapānā)는 술마시는 것(drinking of liquors)을 말하고, 상야마(sayama)는 자제(restraint) 또는 자기조절(self-control)을 말하기 때문에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고라고 번역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재가자의 최상의 행복 중의 하나가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가급적 마시지 않는 것이 좋고 설령 마시더라도 적절하게 마시라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일을 하지 않는 출가자와 달리 재가자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부득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상심리가 발동하여

 

술을 마셨다. 연휴 동안 밀려던 일을 한 꺼번에 처리 하는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영업자에게 있어서 일이 많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만 그 만큼 위험 요인도 늘 상존해 있다. 실수를 하면 곧바로 손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액수가 큰 일일수록 더욱더 위험성이 커진다.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 나니 허탈하였다. 무언가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술이다.

 

막걸리를 마셨다. 거의 빈속에 마셔서일까 다음날 아침 힘들었다. 머리가 찡하고 동공이 아픈 것이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글도 쓰고 싶고 일도 마무리 해야 하는데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더구나 춥고 한기가 들어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철수 하기로 하였다. 집에서 편안하게 누운 채 아픈 부위에 마음을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되는 것

 

왼쪽 눈 부위의 동공이 아팠다. 동공의 어디라고 딱히 꼬집을 수 없지만 동공통이 계속되자 안절부절한 것이다. 이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픈 부위에 대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라는 말이 있듯이 통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부위에 마음을 둔 것이다.

 

모든 통증이 그렇듯이 계속 되지는 않는다. 통증이 있긴 있지만 강약과 고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통증은 강한 대상이다. 이렇게 대상이 강하다 보니 다른 것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통증과 같은 강한 대상이 없다면 호흡이 가장 강한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 호흡은 언제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항상 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동공통과 같은 통증은 매우 강한 대상이다. 통증이 시작 되면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과 걱정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통증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다.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안고 마치 동반자처럼 일생을 함께 살아간다.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되는 것을 알기에 크게 염려 하지 않았다. 모든 현상은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띠 일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현상이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것을 관찰 하는 것이다.

 

동공통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통증이 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알아채려고 노력하였다. 통증을 통증이라고 느끼는 그 마음을 또 알려고도 노력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심념처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념처 중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그런 심념처는 어떤 것일까. 

 

노팅(noting)과 왓칭(watching)

 

심념처 수행은 아는 것을 아는 마음이라 한다. 묘원법사에 따르면 이를 노팅(noting)과 왓칭(watching)으로 설명한다.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허리를 펴고 고개를 당기고 하는 자세는 법회할 때 하는 입정과 다를 바 없었다. 허리가 불편 하거나 아픈 사람은 준비 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해도 된다. 더 불편한 사람을 위해서 뒤가 젖혀지는 의자도 준비 되어 있었다.

 

눈은 감으라고 한다. 법사의 지시에 따라 마음을 놓는 곳을 가리키면 그 쪽으로 마음을 놓는다. 어떤 화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보라고 한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있는 대로 보라고 한다.

 

온갖 생각이 난무 하지만 그저 바라 보라고 한다. 이것을 '노팅(Noting)' 즉 '알아차림'이라고 한다. 노팅 하는 마음을 또 바라보라고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와칭(Watching)' 즉 '마음바라보기' 라고 한다. 이렇게 40분정도를 보낸다.

 

([위빠사나 수행기1] 나도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 2008-12-28)

 

 

2008년도 처음으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보고 느낀 것을 쓴 글이다. 첫날 참가하여 쓴 글인데 법사는 노팅과 왓칭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 때 당시에는 이말의 의미를 알아 듣기 어려웠다.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한다. 이 아는 것을 아는 마음이 심념처라 한다. 그래서 심념처는 화두수행과 유사한 것이라 한다.

 

혜민스님의 아는 놈

 

아는 것을 아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혜민스님의 동영상 법문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텅빈 이놈이 아는 거에요. 그리고 위치가 없습니다. 형태도 없습니다. 그게 어떤 거다 텅빈 그놈이 알아요. 텅빈 것이 살아 있는 거 이었어요. 그 텅빈 것이 아는 것이었어요. 전체가 다 안다는 거에요. 텅빈채로 아는 앎이에요. 그런데 이게 살았다는 거 이게 키입니다. 이것을 어른 들은 진공묘유다 텅빈채로 오묘하게도 살아 있다라고...

 

(혜민스님, 혜민스님 특별법문 2012-08-13)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혜민스님의 특별동영상 법문이다. 혜민스님의 블로그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아는 놈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아는 놈이 있다고 한다. 그 아는 놈은 살아 있다고 한다. 그놈은 자기 밖에 볼 수 없고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라는 한자가 볼 시(示)홀로 단(單)인데, 정말로 혼자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관자재보살할 때 관하는 놈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방하착 하는 이유가 뭘 하겠다는 것이 그 자리를 가리기 때문이라 한다. 가려 버리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선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 자리를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그 자리라 한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한테 법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스승으로부터 제자가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제자가 알기 때문에 스승이 법을 주는 것이라 한다.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린다는 것

 

이와 같이 선불교에서는 아는 것을 아는 마음에 대하여 본마음 자리, 살아 있는 그 놈, 모든 것을 아는 놈 등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아는 것을 아는 마음이 화두에서 진여, 불성, 참나 등 과 같이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로 말하고 있으나 이와 유사한 심념처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마음을 아는 마음’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4.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기 : 노팅noting을 워칭watching 하기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아는 마음[노팅noting]을 알아차리는 것[워칭watching]은 현재 알고 있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 노팅noting은 아는 마음이고, 워칭watching은 아는 마음을 다시 지켜보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심념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현재의 마음을 보려는 새로운 의도를 내야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일어난 마음이 현재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이 문장은 수행자를 항상 현재로 돌아오게 해서 알아차림을 놓쳤다가도 알아차림을 다시 시작하게 해주며, 알아차림을 이어주고 더욱 밀밀하게 해 주는 이익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릴 수 있는 집중력이 생기면 한 시간 또는 하루 종일도 노팅noting을 워칭watching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수행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되며 알아차림과 집중의 힘은 더욱 좋아집니다.

 

또한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찰나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지며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찰나집중입니다. 이런 찰나집중에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14. 마음을 알아차리는 네 가지 방법, 2012-07-07)

 

 

noting은 아는 마음이고, 워칭watching은 아는 마음을 다시 지켜보는 마음이라 한다. 이를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심념처’라 한다.

 

이런 심념처 수행에서 혜민스님이 말하는 살아 있는 그놈, 모든 것을 아는 그놈, 내가 있기도 전에 언제나 있는 그 놈이라는 말은 없다. 그 대신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은 나중에 일어나는 마음이 바로 이전의 마음을 보는 것이라 한다. 마음은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민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아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전체적이고 동시적 마음이라 힌다. 그러나 이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관념이나 개념은 실재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놈과 같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사념처 수행이라 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를 통찰 하는 것이다. 

 

즉 통증이 일어 났을 때 이는 실재라 볼 수 있는데, 그 통증을 느끼면서 그 통증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 어디에도 실재 하지 않은 관념은 알아 차릴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는 심념처(心念處)

 

그렇다면 초기경에서는 심념처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사띠빳타나경에 따르면 심념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1)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2)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3)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4) 긴장된 마음을 긴장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5)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6) 고귀한 마음을 고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고귀하지 않은 마음을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7)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8)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마음에 대해 마음을 안으로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마음을 밖으로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마음을 안팎으로 관찰한다. 또는 마음에 대해 생성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소멸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마음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주의 깊음이 있는 정도만큼 ‘마음이 있다.’라고 하는 새김이 이루어진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와 같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사띠빳타나경-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 심념처임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관찰하면 그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혜민스님이 말하는 ‘그 놈’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승가의 공공연한 비밀 곡차

 

동통을 느끼면서 음주는 해서는 안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되었을 경우 가급적 억제하며 자기 조절하는 능력을 길러야 함을 알 수 있다. 재가자의 행복의 조건 중의 하나인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majjapānā ca saññamo Sn2.4)’  구절을 상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가자들이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또는 일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하여 마시는 것은 일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는 출가자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네티즌들이 많이 보는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26)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막 잠이 들었던 터라 눈을 뜨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문을 여니 다른 방에서 묵고 있는 스님이다. 스님의 손엔 캔맥주 한박스가 들려 있다.

 

"스님 이 새벽에 어쩐 일이세요?"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아침 인사 드리고 왔지. 아침에 떠나는데 아무래도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들렀어."

"맥주는 뭔가요?"

"글 안 될 때 마셔."

 

스님이 들고온 맥주는 스님이 차처럼 드시는 곡차였다. 하루 한 끼도 공양을 하지 않던 스님. 그의 하루는 곡차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어젯밤에도 스님의 손에서 술잔이 떠나질 않았었다. 스님은 방에 앉자 가지고 온 캔맥주 하나를 땄다.

 

"곡차 하기엔 이른 시간 아닌가요?"

"새벽에 마시는 곡차가 보약인 것이여."

"오늘 떠나신다고요?"

"눈이 녹았다니까 이젠 돌아가야지."

 

( 캔맥주 권하는 스님, "새벽 곡차가 보약이여" , 오마이뉴스 2008-12-27)

 

 

스님과 곡차이야기이다. 승가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는 곡차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기사를 보면 스님은 곡차를 보약으로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곡차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여 곡차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참선하며 수행정진하는 스님들이 왜 곡차가 필요할까? 참선을 하면 희열과 행복과 평정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런 행복은 세속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행복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 한다. 그런데 세속에서 고된 노동과 스트레스에 지친 세속 사람들이나 마시는 술을 스님들이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마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곡차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조계종에서 직접 운영하는발우공양에서도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도 확인 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맞은편 템플스테이 건물 5층에 있는 ‘발우공양’.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직접 운영하는 정통 사찰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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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와 곁들이는 반주도 이곳에서는 조금 더 특별하다. 일반 주류가 아닌 곡차다. 경남 산청 금수암에서 솔잎을 숙성시켜 만든 송차는 특유의 깔끔한 맛으로 인기가 좋다. 저녁 시간엔 송차를 한두 잔 나누며 사찰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절집 밥상… 곡차 한잔… 오묘한 法華 깨달음, 이코노미리뷰 2011, 5.13)

 

 

 

 

 

 

 

 

 

 

 

신문에 난 기사이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사업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발우공양이라는 사찰음식 전문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곡차도 팔고 있다고 한다. 모든 재료와 음식은 사찰음식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스님이 소속된 곳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왜 스님들은 곡차를 즐기는 것일까?

 

무엇이든지 자주 하게 되면 습관이 들여진다. 음주도 마찬가지이다. 자주 마시게 되면 중독이 된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것이 실수이다. 술이 들어 감으로 인하여 각종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탐욕이 생겨서 도둑질을 할 수 있고, 음심이 생겨서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고, 술의 힘에 의하여 떠벌림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술로 인하여 오계를 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은 가급적 마시지 않되 마실 수 밖에 없는 경우라면 어떤 이는 술 마시는 순간에도 알아차리면서 마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가에서 곡차라는 이름으로 술을 마시는 행위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 스님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닌데 곡차를 즐기는 행위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재가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승가에서 만큼은 불음주계를 지켜 주기 바라는 것이다.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majjapānā ca saññamo Sn2.4)’라는 문구는 재가에 적용되는 것이라 본다. 승가에서는 여전히 불음주계가 지켜 져야 한다.

 

일하지 않고 참선만을 하는 스님들이 느끼는 행복이 오욕락을 추구하는 세속의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데, 왜 스님들은 곡차를 즐기는 것일까.

 

 

 

2013-02-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