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라따나경(보배경)2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19. 12:11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 라따나경(보배경)2

 

 

종교시사방송이 있다. 두 남자의 종교톺아보기라는 일종의 팝케스트이다. 종교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는데, 진행자는 불교측에서는 우희종교수이고, 기독교측에서는 최요한평론가이다. 불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주로 비판적 시각으로 다룬다.

 

하느님과 사탄의 관계는?

 

이 프로에 대하여 유튜브로 본 동영상이 있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진행자인 최요한 평론가가 출연자인 이찬수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제가 요즘 글을 쓰다가 막힌 부분이 있어요. 글의 제목은 ‘모든 종교에 깃든 하느님 그리고 모든 종교에 스며든 사탄’.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어디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올 이즈 인 갓(All is in God)’, 모든 존재 안에 들어가 있는 하느님인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존재에게 어떤 모순이 나타나느냐 하면,  ‘올 이즈 인 사탄(All is in satan)’, 사탄이 스며들어가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이 부분에서 글 쓰다 멈췄어요. 벌써 3주 됐습니다.

 

(최요한 평론가, 두 남자의 종교톺아보기 46회-종교다원주의)

 

 

진행자 최요한평론가는 글을 쓰다가 멈추었다고 한다. 자신의 앎으로는 도저히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과 사탄의 관계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출연자인 이찬수 교수에게 답을 묻는다.

 

이찬수 교수의 범재신론 (汎在新論, panentheism)

 

이에 대하여 이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가 ‘범재신론’에 대한 논문을 하나 썼습니다. 말 그대로 범재신론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다는 것이고, 기독교에서 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감싸는 전체라는 의미이지요. 그것이 다른 종교에서 ‘불성’이라고 해도 좋고, 인도에서 ‘브라만’이라 해도 상관없는 거에요. 기독교에서는 영어로 갓(God)이라고 표현하고, 우리말로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그거야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근원이다라는 것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정리한 것인데요, 말 그대로 ‘무소부재’하다고 신이 모든 곳에 계시죠.

 

그런데 모든 것 안에 계시는데 악의 문제가 발생하고 하는가? 인식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신이다, 사탄 또는 악이다 할 때, 신이 있어서 사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의 근원 또는 목표에 대해서 붙여진 이름이 신이기도 합니다. 이상적 가치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해요. 내 삶의 동력, 나를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람을 포용하게 하고, 그러면서 기쁨을 주게 하는 근원에 붙여진 이름이 신이거든요.

 

그런데 그 이면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잘 됐으면 좋겠고, 내가 남들보다 우월했으면 좋겠고, 내가 더 많이 소유했으면 좋겠고 하는 자기 중심성이 있죠. 자기 중심성을 강화시키는 욕망은 사실 생물학적 욕망이기도 해요. 종교의 위대함은 생물학적 욕망을 담아 내면서도 극복 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힘이거든요. 바로 자신만을 내세우게 하는 욕망에 붙여진 이름이 악이고 사탄이에요. 사탄이 있어서 외부에서 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요구만 부각 될 때 사탄이라고 악이라고 이름을 붙이지요.

 

(이찬수 목사, 남자의 종교톺아보기 46회-종교다원주의)

 

 

이찬수 목사는 강남대 교수이었다. 불상에 절하였다는 이유로 해직 된 교수이다. 진보적 신학자라 볼 수 있는 이찬수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정상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으로 올라 가는 길은 달라도 모두 정상에서 만난다는 논리이다.

 

그 정상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 한다. 그런 하느님이 불성, 브라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이름에서 열반은 거론 되지 않는다. 이는 길희성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다양한 이름 속에 열반은 포함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초기불교에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존재의 근원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니 존재의 근원이니 궁극적 실재이니 하는 따위의 절대유(絶對有)’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대승제외)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사탄 문제에 대하여 이찬수 교수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들고 있다. 이를 생물학적 욕망에 따른 부정적인 갈망을 뜻한다. 그래서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해로운 마음에 대한 것이 악 또는 사탄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기준에 따른 것이다. 선이면 하느님이고, 악이면 사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절대선이다. 그리고 절대진이고, 절대미이다. 이와 같이 절대가 들어 가는 것이 기독교의 하느님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는 진선미 그 자체라 한다. 그래서 피조물인 불완전한 인간이 진선미 그 자체인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한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아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복사본이 원본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선이 있으면 악이 있듯이, 진선미가 있다면 그 반대 개념인 ‘위악추(僞惡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위악추를 철저하게 배제한다. 위악추는 사탄과 같은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찬수 교수는 사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사탄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사악한 행동을 하면 사탄이 스며든 것이라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하느님이 스며든 것이라 보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어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씀에 따라 하느님이 되기도 하고 사탄이 되기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곳에 모든 것에 하느님이 스며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범재신론(汎在新論, panentheism)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찬수교수의 범재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대승불교와 유사함을 느낀다. 실제로 이찬수 교수는 대학원 시절 석사논문을 쓸 때 불교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화엄경을 읽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기둥이 없으면 집도 없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승불교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 졌기 때문이라 한다. 만일 이찬수 교수가 대승불교를 접하지 않고 초기불교를 접하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라따나경 3번 게송

 

부처님의 가르침은 독특한 것이다. 이제까지 지구상에 출현하였던 종교와 차별된 것이다. 이는 불교가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발달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유일신교에서 무신론으로 발전하는 것이 종교의 진화단계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이미 2500년전에 유일신교를 극복하였기 때문에 으뜸 가는 가르침종교(宗敎)’가 된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의 라따나경(Sn2.1, 보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라따나경(Sn2.1) 게송3

  

빠알리

Ya kiñci vitta idha vā hura
Saggesu vā ya
ratana paīta,
Na no sama
atthi tathāgatena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양낀찌 윗땅 이다 와- 후랑 와-

삭게수 와- 양 라따낭 빠니-

나 노 사망 앗티 따타-가떼나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전재성님역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법정스님역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부()라 할지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완전한 사람 (如來)에게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이 훌륭한 보배는 눈 뜬 사람(부처님)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中村元

このまたにおけるいかなるであろうとも、天界における(すぐ)れたであろうとも、われらの)にしいものは存在しない。このれたは、ざめた)のうちにする。このによってせであれ。

 

영역

Whatever wealth in this, the other world, or some pleasantness in heaven

Is not comparable to the Thus Gone one,

This is precious in the Enlightened jewel by this truth may there be mental happiness.

 

 

 

 

 

 

 

단어 정리

 

kiñci : [ind.] something. :pron. [kin-cid] ものか, でも [そのは kiず] . kiñcāpi hi…pana たとい…であってもしかも.

vitta : [nt.] wealth; property. :m. a. [<vindati] 財産, ; べる, 幸福なる.

idha : [adv.] here; in this world or existence.

hura : [adj.] in the other world; in another existence. :adv.往生他界, 他世. idha vā hura vā 生生輪迴, 今世後世

Sagga: 하늘, 천계

ratana: [nt.] 1. a gem; precious thing; 2. a cubit. ,

paīta : [adj.] excellent; delicious.

Na: ind. 없다. 아니다.

No: 1) Ind.=n, api no=api nu 아마도~인지 아닌지  2) Adj. 확실히(강조의 말)

sama : [adv.] evenly; equally.

Tathāgata: [adj.] one who has gone so; the Enlighten one.

sacca: [nt.] truth. adj. true; real. 【:

suvatthi : [su + atthi] hail! suvammita : [pp.] well harnessed or armoured. 吉祥地, 安全

hoti : [hū + a] to be; exists.

 

 

라따나경의 세 번째 게송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송에서 아귀계로 떨어진 조상신과도 같은 부따(비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바라고, 공물을 바치는 인간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고 수호할 것을 말하였다. 이어서 세 번째 게송 부터는 대중을 향한 본격적인 설법이 시작 된다.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은 베살리의 주민 뿐만 아니라 제석천과 그 권속들에 대하여 법을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천신과 인간 등 모든 중생들에  대한 설법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표적인 가르침이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원리(, dhamma)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들어 낸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a uppādā vā tathāgatāna anuppādā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빳짜야경-Paccaya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2-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발견한 원리(법, dhamma)라 한다. 부처님이 발견하기 이전에도 있었고,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라져도 그 원리는 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과거 부처님들도 모두 이 연기법을 발견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그 세계는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불교가 결정론도 아닌데 정해져 있다니 어떤 의미일까. 각주에 따르면, ‘그 세계가 정해진 것(hitāva sā dhātu)’이라는 뜻은 ‘그 조건의 속성이 정해져 있으며 조건 없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결코 없다’는 뜻이라 한다.

 

다음으로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dhammaṭṭhitatā)’이라는 뜻은, ‘조건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 존속한다’라는 뜻이라 한다.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dhammaniyāmatā)’라는 뜻은, ‘조건이 사실을 결정한다’라는 뜻이라 한다.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idapaccayatā)’라는 뜻은, ‘이와 같은 늙음과 죽음 등의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조건에 따른 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건 없이 성립된 현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원인 없이 성립 되었다든가, 무한소급하여 제1의 원인을 가정하는 것은 모두 연기법에 어긋난다. 연기법에 어긋 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개념에 불과 한 것이다.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 vā)

 

게송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는 물론 다음 세상에서도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게송이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 vā)’이다. 여기서 이 세상에 대한 것이 이다(idha)’ 이고, 내세  에 대한 것이 후랑(hura)’이다.

 

일본어판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idha vā hura vā에 대하여  生生輪迴(생생윤회), 今世後世(금세후세)라고 풀이 해 놓았다. 이번 생 뿐만이 아니라 다음생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 vā)’에 대하여 공간개념이 아닌 시간개념으로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간개념으로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다. 숫따니빠따 뱀의 경(Uragasutta, Sn1.1)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느다.”라는 게송이 있디. 이 때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것이 합성어오라빠라(orapāra)’이다. 원래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뜻하는 말이나 뱀의 경에서는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인간을 포함한 욕계라 볼 수 있고, 저 세상은 색계와 무색계의 세상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뱀의 경에서의 이 세상과 저 세상(orapāra)’은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적 의미로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하여 설명한 경이 있다. 견해상윳따에서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S24:5)”라는 허무주의자들의 주장이 있다. 여기서 이 세상도 없고에 해당되는 말이 ‘natthi aya loko’이고, ‘저 세상도 없고라는 말이 ‘natthi paroloko’이다. paroloka라는 말이 저 세상이라는 뜻인데, 문맥상  내생이라는 뜻이다. 유물론적 허무주의자들은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때 사용된 paroloka라는 말은 내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에는 수 없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언급되어 있다. 저 세상에 대하여 공간적 개념의 다른 세계일 수도 있고, 시간적 개념의 내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게송에서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 vā)’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나 나까무라 하지메 모두 현세와 내세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시간개념으로 접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하나의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서 누구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앙을 버린 기독교인

 

부처님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있다. 그런 가르침을 접하지 못하여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인연이 되어 가르침을 접하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견줄만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대승불교를 신봉하다가 초기불교를 접한 사람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타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불교인은 천주교에서 개종하였다. 불교수행법을 접하고 나서 부터이다. 미얀마로 수행법을 배우기 위하여 떠났는데, 그곳에서 사야도로부터 수행법과 초기불교 교리를 접하고 나서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불교 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이 나타나면 불교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러 가지 종교와 사상을 편력하였으나 불교와 견줄만한 가르침을 접해 보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면 다른 가르침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Sn2.1)”라고 말씀 한 것이다.

 

 

 

2013-02-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