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1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23. 13:22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1

 

 

 

10억만 모아 놓으면

 

불교를 접하고 나서 행복의 개념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이었다. 평생먹고 살 돈을 마련해 놓아야 행복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안심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계산해 보니 10억이 필요하였다. 10억만 모아 놓으면 노후에 임대소득이나 이자소득으로 늙어 죽을 때 까지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계산법은 현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나 탈법인줄 알면서도 부동산 투기를 한다. 주소를 이전하고, 다운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눈이 있는 자, 귀 있는 자 누구나 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10억만 마련해 놓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백만장자가 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듯이 합법적으로 노후 대책을 세워 놓은 자들도 있다. 법을 만드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자들이 법을 만들어 완벽한 노후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공무원연금 제도이다. 그런 복지시스템은 사실상 백만장자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 하여 재물이나 재산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믿음직한 의지처는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지수공식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특히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서 그런 기대는 무너졌다.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불교TV에서 김송호 박사의 행복특강(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을 듣고 나서 부터이다.

 

김송호박사는 행복지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행복은 행복지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행복지수 공식은 원하는 것분의 가진 것으로 표현 되는데, 이때 분자에 해당되는 가진 것을 추구하는 삶 보다, 분모에 해당하는 원하는 것을 낮추는 삶이 행복지수가 더 높아진다고 하였다.

 

행복지수를 극대화 하려면 분모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이때 분자는 뭐가 되든 상관 없다. 지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이든, 1억을 가진 이든, 10억을 가진 자이든 상관 없다. 문제는 분모에 해당되는 욕구이다. 욕구를 최소화 하면 행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무욕이 되면 최상의 행복상태에 도달 될 것이다. 그래서 소욕지족의 삶을 말한다. 현재 조건에 만족한 삶이다.

 

법구경판 행복경, 수카왁가(Sukhavagga)

 

부처님은 행복에 대하여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뭇삶들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런 행복에 대한 것이 숫따니빠따 망갈라경(행복경, Sn2.4)에 잘 표현되어 있다.

 

행복경은 현재 테라와다 불교에 있어서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법구경에도 있다는 것이다. 법구경 15번째 품이 바로 그것이다. ‘수카왁가(Sukhavagga)’로 되어 있다. 법구경판 행복경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안락의 품’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한역으로 ‘안녕품(安寧品)’이라 한다.

 

숫따니빠따에서 행복경의 내용이 일상적 행복과 궁극적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법구경에서의 수카왁가에서도 역시 일상적 행복과 열반으로 표현되는 궁극적 행복에 대해서 설명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재물이나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구경판 행복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1번부터 4번 까지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Susukha vata jīvā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verinesu averino              웨리네수 아웨리노

Verinesu manussesu            웨니네수 마눗세수

viharāma averino              위하라마 아웨리노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서 산다.(Dhp 197)

 

 

2.

Susukha vata jīvā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āturesu anāturā               아뚜레수 아나뚜라

Āturesu manussesu             아뚜레수 마눗세수

viharāma anāturā              위하라마 아나뚜라.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 속에서 고통을 여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고통을 여읜 자로서 산다. (Dhp 198)

 

 

3.

Susukha vata jīvā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Ussukesu  anussukā            웃수께수 아눗수까

Ussukesu manussesu            웃수께수 마눗세수

viharāma anussukā             위하라마 아누쑤까.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열망하는 자들 속에서 열망을 여의고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열망을 여읜 자로서 지낸다. (Dhp 199)

 

 

4.

Susukha vata jīvāma         수수깡 와따 지와마

yesa no natthi kiñcana    예상 노 낫티 낀짜낭

pītibhakkhā bhavissāma        삐띠박카 바윗사마

devā ābhassarā yathā.         데와 아밧사라 야타.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 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 (Dhp 200)

 

 

 

수수깡(Susukha)

 

1번부터 4번 게송까지 한 묶음이다. 네 개의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빠알리 문장이 수수깡 와따 지와마 (Susukha vata jīvāma)’이다.

 

인터넷 빠알리 사전 (http://www.palidictionary.appspot.com/)에 따르면, 와따(vata)정말로(surely, indeed)’라는 의미이고, 지와마(jīvāma)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수수깡(Susukha)’은 무슨 뜻일까.

 

수수깡에 대하여 인터넷 빠알리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전재성박사가 편찬한 빠알리-한글사전(개정판)을 열어 보았다. 역시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수카(Susukha)라는 말이 행복, 편안, 안락, 지복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카라는 말에 접두사가 (Su)’인데 이에 대하여 찾아 보니 전치사(prep.) 로서 좋은, 착한, 행복한, 극히, 매우라는 뜻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수수깡(Susukha)은 극히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다섯가지 원한을 여읜 자

 

부처님은 우리들은 극히 행보한 상태에서 산다고 하였다. 이는 원한고통열망을 여의었기 때문이라 한다. 평생 먹고 살 돈이 있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연금이 보장 되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원한과 고통과 열망을 여읜 그 상태가 지극히 행복한 상태라 한다.

 

첫번째 게송에서 원한을 여의었다는 것은 무슨말일까. 각주에 따르면 다섯가지 원한을 여읜 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SN.II.68의 내용을 실어 놓았다.

 

SN.II.68은 무슨 뜻일까. SN 은 상윳따니까야를 의미하고, II PTS본의 볼륨2를 의미하기 때문에 두 번째 권이라는 뜻이다. 68 PTS본 페이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어림 짐작으로 찾아 본 결과 12번째 상윳따인 아미사마야상윳따(Abhisamaya Sayutta)에서 다섯 번째인 장자품( Gahapativaggo)에 있는 것을 알았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장자의 품’에 있는 ‘다섯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S12:4)’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장자여, 고귀한 제자가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여 네 가지 흐름에 듦의 고리를 갖추고 고귀한 이치를 지혜로 잘 관찰하고 잘 꿰뚫어 위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지옥은 사라졌고, 축생도 사라졌고, 아귀의 세계도 사라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은 사라졌다. 나는 흐름에 든 님으로 비참한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분명히 깨달음을 구경처로 삼는다’ 라고 스스로에게 자명해질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다섯 가지 두려운 원한을 극복합니까?

 

1) 장자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감으로써 그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2) 장자여,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감으로써 그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3) 장자여,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그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4) 장자여,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그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5) 장자여,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자는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심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것을 삼감으로써 그 두려운 원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섯가지 두려운 원한을 그는 극복하는 것입니다.

 

 (빳타마빤짜웨라바야경-Pathamapañcaverabhayasutta- 다섯가지 두려운 원한의 경1, 상윳따니까야-S12:4, 전재성님역)

 

 

아주 안락하게 사는 자들은 오계를 지키는 자라 한다.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원한 없이 살 것이라 한다.

 

만일 살생하는 죄를 지었다면, 그것이 비록 완전범죄일지라도 자기자신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아 갈 것이다. 그런 삶자체가 고통스런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그런 죄의식에 떨며 살아가기 때문에 저 세상에 가서도 고통받을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오계를 어기고 살았을  때 결국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에 양 세상에서도 고통받는다. 그러나 오계를 준수하는 생활을 하였을 때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 세상에서도 행복하기 때문에 극히 안락한 자라 하였다.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사는 자들

 

두 번째 게송에서 고통을 여읜 자들이 극히 안락한 자들이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번뇌에서 벗어 났기 때문이라 한다.

 

세 번째 게송에서 열망을 여윈 자들이 극히 안락한 자들이라 하였다. 이때 열망은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여윈 자들이라 한다. 다른 말로 오욕락을 여읜 자들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오욕락은 형상(rupa), 소리(sadda), 냄새(gandha),(rasa), 감촉(photthabba)를 여읜 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자들은 두려움과 원한 없이 사는 자들이다. 더구나 번뇌와 오욕락을 여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 가는 자들은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사는 자들이다. 세상의 흐름은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오욕락을 추구하지만 이런 삶과 정반대로 살아 가는 자들에게 있어서 가진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 가는 자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네 번째 게송에서는 기쁨(pīti)을 먹고 사는 자들이라 하였다. 기쁨도 음식이 될 수 있을까.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비록 지금 굶어 죽을 지라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 지금 죽어도 좋은 것이다. 특히 수행하다 죽으면 축복이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있어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

 

네 번째 게송에서는 가진 것이 없지만 지금 매우 안락하게 사는 자에 대하여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에 사는 자와 같다고 하였다. 지금 먹을 것이 없더라도 천상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는 극광천(極光天)을 말한다. 색계 2선천으로서 아밧사라(abhassara)라 하며 수명은 8겁이다. 이 극광천은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세존]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 세계가 괴멸하는 시기가 있다. 세상이 괴멸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이 세상이 생겨 나기 전 마치 이상향과도 같은 세계가 있었는데, 경에서는 극광천으로 묘사 되고 있다. 그런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들로서 스스로 빛이 나는 존재이고, 허공을 나는 존재로서 안락과 행복으로 가득찬 존재라 한다. 그래서 항상 기쁨과 희열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라 하였다.

 

을 알고 나서 부터

 

인간들이 배고픔을 느낀 것은 을 알고 나서 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아간냐경에 따르면 맛의 갈애로 인한 인간의 타락이 일어 났음을 밝히고 있다. 맛을 알게 되자 식량을 축적하게 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행위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 맛으로부터 시작 된 것이다.

 

그런데 맛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점점 더 타락해 간다는 것이다. 그런 맛은 혀로 느끼는 맛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형상에 대한 갈애, 귀로 듣는 소리, 몸으로 느끼는 감촉 모두가 맛에 포함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오욕락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맛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 볼 수 있다. 맛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에 물욕과 성욕을 추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인 식욕와  성욕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물욕이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생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가급적 많이 쌓아 놓으려 한다. 많이 축적되면 될수록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을 뿐더러 노후에 안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억을 만들어야 된다고 말하고, 힘을 가진자 들은 법으로 완벽한 노후보장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살아 있는 이 생에서 천상과 같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노후대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노인들은 굶어 죽어야 할까?

 

형벌처럼 삶을 사는 사람들

 

중산층이 무너진 우리나라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소득이 없는 노인들이 힘겹게 살아 가고 있는 모습을 길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유모차나 리어카에 폐지나 공병 등을 가득 싣고서 비탈길을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들을 보면, 삶이라는 것이 고통스런 것이고, 죽지 못해 사는 삶처럼 보이고, 그런 삶 자체가 마치 형벌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카

 

 

 

그런데 이런 모습이 모두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사대보험도 되지 않아 비정규직으로 살아 가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렇고, 비정규직 보다 못한 수입으로 살아 가는 천만에 가까운 자영업자들이 그렇다. 이와 같이 사대보험도 들지 못하고 내기가 힘겨운 이들에게 있어서 사실상 미래는 없다. 월급생활자들이 국민연금을 낸다고 하지만 언제 해고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현실이 어렵다고 하여 아직까지 굶어 죽었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굶어 죽도록 이웃이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이 남아 있는 한 도우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주변에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나온다면 수치스런 일이다. 또 국가 망신이다. 그래서일까 나라에서는 65세 이상 되는 노인에게 노령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있게 한 노고를 생각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노후대책을 세워 놓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고 15만원 가량 지급 된다

 

 정부에서는 굶어 죽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놓고 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비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천상과 지옥의 차이 만틈 벌어진다. 공무원 연금 월 평균 수령액 273만원 과 노령연금 최대 15만원의 차이를 말한다.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

 

이렇게 사회는 굶어 죽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심지어 외국에서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리면 NGO단체들의 구호활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북한에서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남한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법륜스님이 북한 돕기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유라 본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 2009 1년 동안 강남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처에 약 1년간 다녔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 3시간 30분 가량 법문을 듣고 경행과 좌선을 하고 인터뷰 지도를 들었는데,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수행처에는 누군가 김밥과 빵과 우유등 먹을 것을 갖다 놓았다. 누군가 자율 보시를 한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가 굶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들이 밥을 굶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노후 걱정을 하는 스님들

 

최근 불교계 인터넷 뉴스에 따르면 우리나라 스님들이 노후에 대하여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한다. 불교신문 (2463/ 2008 101일자)에 따르면 스님들 중 65.4%가 노후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불교미래사회연구소(소장 법안스님)에 따르면 560명의 스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이 중 65.4%가 노후불안에 시달리고 있고, 이 가운데 23.8%는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하였다. 이런 노후불안은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 내었는데, 미래가 불투명함으로 인하여 수행에 전념하기 어렵고(29.8%), 그에 따라 개인재산축적(26.1%)과 사설사암증가(14.1%)로 이이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노후 걱정을 하고, 더구나 노후를 대비하여 사유재산을 축적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수행과 포교를 열심히 한다면 전혀 노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도와 주어도 도와 주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정진 하는 스님이 있다면 어떻게 알았는지 쌀을 짊어 지고 와 보시한다는 말이 있듯이 스님이 굵어 죽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노후가 걱정되어 사유재산을 축적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만일 스님이 수행하다 굶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불교망신일 것이다. 어디 불자라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닐 것이다. 그런 불교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름 없다. 사회에서도 주변에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없는데, 스님이 굶어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자들은 미래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열심히 수행하고 포교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수행자로 본분을 다 하지 못하기 때문에 노후걱정을 하고 노후 대책을 세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설령 수행하다 굶어 죽었다면 영광으로 본다. 수행하다 죽은 것 만큼 큰 영광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머리에 불난 것처럼 수행해야 하고,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n3.2)”라고 말씀 하셨다.

 

오지 않은 미래에 애태우지 않는다

 

부처님은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았자 불건전한 일만 떠오를 뿐이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대부분 후회스런 것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걱정만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S1:10)”이라 하였다.

 

또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슬퍼하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애태우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늘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은 항상 수심에 가득하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낫에 잘리 푸른 갈대((S1:10)”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미래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굶어 죽지 않는 것이다. 주변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지언정 오계를 지키고 오욕락을 여읜 자가 가장 행복한 자라 하였다.

 

그러나 각종 탈법과 불법으로 인한 불로소득으로 먹고 사는 자들은 두려움과 원한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 자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S12:4)

 

 

 

2013-02-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