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미래의 노후수행공동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21. 15:14

 

미래의 노후수행공동체

 

 

 

먼저 가진 놈이 임자다

 

어느 스님의 법문에 절돈은 먼저 본 놈이 임자다라는 말을 하였다. 우스개소리로 한 말이다. 절돈은 주인이 없는 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절에 있는 문화재나 값어치 있는 물건 등을 먼저 본 사람들이 가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계 인터넷신문을 보면 종종 공찰에서의 먹튀사건을 접할 수 있다. 사찰의 주지스님이 사찰소유의 땅을 팔아 먹고 잠적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접할 때 마다 절돈은 먼저 본놈이 임자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먼저 본 놈이 임자다라는 말은 공무원사회에서도 들을 수 있다. 종종 뉴스에 공무원비리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거의 십년전 인천의 세도사건을 비롯하여, 남쪽지방의 어느 말단 공무원이 수십원을 횡령한 사건이라든가, 보훈처 직원들에게 유독 많았던 가짜국가유공자 사건 등 심심치 않게 공무원비리 소식을 접한다. 또 예산을 타 내기 위하여 로비를 한다든가, 남은 예산을 그 해에 모두 소진하기 위하여 보도 블록을 교체한다든가 식의 이야기도 접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랏돈은 먼저 가진 놈이 임자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랏돈을 마음대로 쓰는 자들

 

최근 공무원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두 차례 올렸다. 글을 올리자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네티즌도 있었다. 한결같이 나랏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었다. 공무원사회에서 도덕 불감증이 절정에 달한 듯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그 이전에 임용된 공무원들 특히 60~70년대에 임용되어 퇴직한 특히 사무관 이상으로 퇴직하여 월 수백만원씩 받는 고위직 퇴직자들에 지급하는 연금들일 것입니다. 비단 일반 공무원뿐만아니라 선생님들 군인 경찰들도 해당되겠지요. 이걸 개혁하여 지급액을 줄여야 하는데 이걸 하자면 소급입법을 해야 할 것이고 지금도 떵떵거리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그사람들, 사회법을 기가막히게 잘아시는 분들인 이들이 가만히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M법우님)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만들어 졌던 법과 제도에 따라 공무원연금 혜택을 누리는자들이 수 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대열에 교사와 교수들, 군인들, 경찰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삼중복지시스템에 무임승차한 모든 공무원들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현직에서 뿐만 아니라 퇴직후까지 걱정없이 살 수 있게 하였고, 심지어 죽어서 까지 상속할 수 있는 완벽한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 모두가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나온다.  

 

끝까지 추적하는 세금

 

누구나 세금을 내고 있다. 각종 명목의 수 없이 많은 세금이 있다. 그 중에 부가세가 있다.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세금계산서를 작성하게 되어 있다. 요즘은 모두 전산화 되어서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세금계산서를 작성한다. 그래다 보니 국세청전산망에 모든 자료가 축적된다. 이렇게 데이터베이스가 구축 되어 있다 보니 정확하게 고지서가 발부 된다. 매출에서 매입을 뺀 총액에 대한 10%를 부가세로 내야한다.

 

세금을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런 세금은 떼어 먹을 수 없다. 이 나라에 존속하는 한 죽을 때까지 추적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만 되면 꼬박꼬박 징수해 간다. 만일 단 하루라도 어긴다면 엄청난  벌금폭탄을 각오 해야 한다. 일종의 징벌적 조치이다. 이 모두가 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부가세는 기업활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거래에 부가세에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물건을 살 때 역시 부가세를 지불한다. 이는 술이나 담배를 살 때도 적용된다. 주세나 담배세라는 명목으로 비율이 매우 높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시름을 달래려고 소주한 병을 마셔도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고, 노동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담배 한모금 빨아도 세금을 내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돈이 없어서 세금을 내지 않거나 적게 낸다고 하지만,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세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금이 모이고 모여서 국가예산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나랏돈은 주인 없는 돈?

 

각종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국가예산은 얼마나 될까. 인터넷검색으로 확인한 결과 2013년도 국가예산은 342조원에 달했다. 보건복지노동, 일반공공행정, 교육, 국방, 사회간접자본, 농림수산유통식품, 공공안전, 환경 등 각종 사업을 집행하기 위한 예산으로 사용된다. 이런 방대한 예산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무원들이다.

 

공무원들은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방대한 예산을 다루고 있는 공무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대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랏돈을 이용하여 정년까지 보장할 수 있도록 하고, 정년후 늙어 죽을 때 까지 연금을 지급하고, 본인 사망후 연금을 상속하게 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돈을 타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모두가 법과 제도에 따른 합법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이나 이는 공무원의 집단이기기주의 발로로 보인다. 나랏돈이 마치 주인이 없는 돈처럼 보이기 때문에 먼저 본 놈이 임자다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서슴없이 공무원 삼중특혜를 스스로 만든 것이라 본다. 이와 같은 조치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와 심심치 않게 들려 오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공금 횡령사건을 떠 올리게 한다.

 

공무원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카스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중의 하나가 공무원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카스트제도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수신문인 조선일보 송희영 논설위원을 글 직장이 신분 서열 되는 사회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공무원이 가장 상층에 있고 그 다음에 국영기업체 임직원들이다. 이들 최상위 계층은 약 150만명 정도로 한다. 다음으로 사대보험혜택을 받는 정규직임금근로자가 900여만명으로 두 번째 계층을 형성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사대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575만명으로서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계층구조에서 600백만명에 달하는 자영업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집단인가보다. 이와 같은 계층구조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순위

구 분

숫자

복지

월급여

1

공무원과 공기업 임직원

(지방 공기업-출연기업까지 포함)

150여만명

-신분 보장

-정년 보장

-소득 보장

-공무원의 경우 퇴직 후 죽는 날까지 연금 보장.

-본인사망하면 유족연금 보장

2

정규직 임금근로자

900여만명

4대 보험 혜택 받음

260여만원

3

비정규직

575만여명

4대 보험 혜택 못받음

123만원 안팎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4/2010051402153.html

 

  

이와 같은 구분은 노후 대책에 있어서 극명하게 갈린다. 완벽한 노후 대책이 세워져 있는 공무원이 최상위 카스트이고, 사대보험 혜택조차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하위 카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21세기에 보는 한국사회는 공무원의, 공무원에 의한, 공무원을 위한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브라만을 정점으로 한 카스트

 

오늘날 인도에서 카스트제도가 남아 있다. 그런 카스트 제도는 뿌리가 깊다. 부처님 당시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만을 최정점으로 하는 카스트제도는 다음 표와 같다.

  

 

계층 명칭

종사 직업

사회적 업무

브라만

성직자,학자 등

사회인의 교육과 힌두교의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일

크샤트리아

왕족,귀족,무사,장교,경찰관 등

사회 제도와 안보를 유지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일

바이샤

농민,상인,수공업자,연예인 등

생산 활동과 관련된 일

수드라

잡역,하인,청소부 등

육체 노동과 관련된 일

 

 

이와 같은 카스트 제도는 부처님 당시나 현대 인도에서나 큰 변화가 없다. 그런데 이런 계급에도 속하지 않은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 한다. 전통적인 인도 카스트에서 가장 낮은체계에 속하거나 그런 체계에도 속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행위는 1949년 인도의 제정헌법에서 불법으로 규정되었지만 여전히 현대에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계급과 신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지배자가 생겨난 원리

 

디가니까야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에 따르면, 세상이 발생된 원리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계층이 생겨난 원리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바쎗타여, 어떤 뭇삶이 탐욕을 내어 자신의 몫을 잘 챙겨두고 타자의 몫은 주지 않은데도 빼았아 먹었다. 뭇삶들은 그 뭇삶을 붙잡았다. 붙잡아서 이와 같이 이보시오, 참으로 나쁜 일을 저질렀소. 자신의 몫은 잘 챙겨 두고 타자의 몫은 주지 않은데도 빼앗아 먹다니. 이보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바쎗타여, 그 뭇삶은 존자들이여, 알겠소.’라고 그 뭇삶들에게 대답했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아간냐경에 따르면 계급이 구별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도둑질로 보았다. 쌀을 재배하기 시작함에 따라 쌀을 축적 하기 시작 하였는데, 남의 것을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이는 힘에 의한 탈취를 말한다.

 

도적질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도적질을 하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대표를 뽑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권한을 부여 한다. 이것이 왕족계급인 크샤트리야가 탄생하게된 요인이라 한다. 법을 만들어 질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 크샤트리야 역시 뭇삶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태생적으로 또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카스트의 최정점에 있는 브라만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정통바라문이 성립된 배경

 

고대인도의 바라문 계급을 보면 두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타락한 바라문이고, 또 하나는 정통바라문이다. 타락한 바라문에 대한 이야기는 숫따니빠따 브라흐마나담미까경(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Sn2.7)에 잘 설명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동물희생제를 들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주관함으로서 부를 축적하는 바라문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바라문의 타락을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래의 바라문, 정통바라문은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아간냐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존]

바쎗타여, 그들 뭇삶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이와 같이 생각했다.

 

[뭇삶들]

존자들이여, 악한 것들이 뭇삶들에게 나타나서, 주지 않는 것을 빼았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비난하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이 나타날 것이고, 처벌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제거하면 어떨까? 그들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제거했다. 바쎗타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없앤다.’고 해서 바라문, 바라문이라는 첫 번째 칭호가 나타났다. 그들은 한적한 숲속에서 초막을 짓고 초막에서 명상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숯불을 피우지 않고 연기를 내지 않고 절구공이를 내려 놓았고 저녁에는 저녁식사를 위해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위해 탁발을 하여 마을과 도시와 수도로 내려와서 음식을 얻은 뒤에 다시 한적한 숲 속 초막에서 명상을 했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아간냐경에 따르면 정통바라문이 성립한 배경으로서 인간들이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자 이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법과 제도에 따라 오계를 어기는 자들을 없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하여 청정범행을 실현함으로써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뿌리 뽑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바라문들은 매우 건전하였다. 살생, 도둑질, 거짓말, 사음 등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과 명상을 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청정범행을 완성한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라한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법구경의 가장 마지막 품인 ‘바라문의 품(Brahmanavagga)’에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고 부른다”라는 정형구로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타락한 바라문 성직자에 대하여 초창기의 바라문으로 되돌아 갈 것을 역설 하였다. 그런 초창기의 정통바라문의 생활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아간냐경에 따르면 탁발수행인 것을 알 수 있다. 수행과 명상을 하며 숲에서 살며 탁발에 의존하여 무소유와 청정을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바라문 인생4기에서 유행기(遊行期)에 해당 될 것이다.

 

정통바라문에서는 범행기(梵行期)와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遊行期) 이렇게 인생4기가 있었다. 그런데 손자가 태어나고 할 일을 다한 바라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유행하며 보냈다. 집을 떠나 탁발에 의존하고 숲에서 명상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전통이 사라지고 제관으로서 부를 축적만 하는 타락한 바라문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의 타락에 반발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이를 수행자라고 한다.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을 사만냐(Sāmañña)’라 불렀다. 한자어로는 사문(沙門)’이라 한다. 이는 브라만교 성직자를 뜻하는 브라흐마나(Brahmana, 바라문)와 비교 되는 말이다. 그런 수행자(사문)들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아간냐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세존]

바쎗타여, 왕족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바라문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평민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노예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이러한 네 가지 집단에 의해서 수행자의 집단이 생겨났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제자를 뜻하는 빅쿠(Bhikkhu)라 불리우는 수행자 집단이 출현 하기 이전에 생겨난 수행자 그룹을 ‘사만냐(사문, 수행자)’라 하였다. 그런 공통적으로 자신의 출신에 대한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이라 한다. 왜 자신의 태생을 경멸하였을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된 이유는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쎗타여, 이와 같이 수행자 집단의 기원은 이러한 태고의 칭호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들의 기원은 우리와 같은 뭇삶들로부터 생겨난 것이이지 다른 자들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동등한 자들에게서 생겨난 것이지 동등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원칙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 무원칙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D27)”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브라만 계급, 왕조계급, 평민계급, 노예계급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모두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두 똑 같은 중생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두 어느 계급이든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생의 원리를 알기에 현재의 계급에 대한 속성을 경멸하면서 사문(수행자)이 된 것이다.

 

자신의 속한 계급을 경멸하면서 사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부처님은 바쎗타여, 노예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27)”라고 하였다. 노예를 포함하여, 평민, 왕족, 바라문 등 어느 계급도 수행을 하면 현세에서 열반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 계급을 경멸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사문들이 그 보다 더 수승한 단계의 궁극적 목적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네 가지 계급가운데 수행승으로서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짐을 내려 놓고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궁극적 앎으로 해탈한 거룩한 님이 있다면, 그가 그들 가운데 최상자라고 불린다.(D27)”라고 말씀 하였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부처님의 제자가 궁극적 목표인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행복의 시기

 

고령화가 가속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후대책이다. 평균수명이 늘어 남에 따라 100세 시대를 바라 보게 되었는데, 이제까지 세워 놓은 노후대책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은퇴후 10-15년 후 까지 살것을 대비하여 노후 자금을 마련하였으나 그 보다 배이상 되는 20-30년을 더 살게 됨에 따라 노후자금이 바닥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송호 박사는 불교TV에서 인생4단계를 주장하였다. 다음의 표와 같다.

 

 

인생 4단계

단계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연령

0~25

26~50

51~75

76~100

구분

배움

일(직장)

봉사

마무리

김송호박사의 노후 특강(불교TV)

 

 

25년 주기로 하였을 때, 1단계의 경우 배움의 단계이고, 2단계는 일하는 단계로서 주로 직장에 다닐 때이다. 4단계는 기대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있어서 마무리 하는 단계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애매것이 3번째 단계인 51-75세에 이르는 25년간이라 한다.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김송호 박사에 따르면 인생 3단계 기간은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는 단계라 한다. 그 동안 이루어 놓은 성과를 사회와 지역에 환원하는 삶이라 한다. 그래서 많이 번 자들은 기부금을 많이 내놓고, 지식과 경험이 많은 자들은 이에 걸맞는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3단계(51-75)야말로 가장 행복한 기간이라 하여 행복의 시기라 이름 붙였다.

 

문제는 4단계이다. 의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생 100세 시대를 바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자리가 없는 노년층은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금혜택이 없다면 살아 갈 수 없다. 공무원연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인들은 죽지 못해서 사는 것처럼 비참하게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노후수행공동체

 

김송호 박사는 노인공동체를 제안하였다. 개별적으로 노년을 보내는 것 보다 서로 힘을 합쳐서 함께 사는 삶을 말한다. 아직까지 계획에 불과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할 것이라 하였다.

 

노인공동체 보다 더 나은 대책이 노후수행공동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같은 성격이다.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봉사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를 말한다. 노인들은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실천할 수 있어 좋고, 자원봉사자는 공덕을 쌓음으로서 좋은 노후수행공동체를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빅쿠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빅쿠를 말한다. 단 초기불교 가르침에 따른 생활이다. 가급적 부처님 당시와 유사한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오후 불식에 따른 하루 한끼 식사를 하고 예불과 명상과 수행 시간을 갖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를 지키며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경전공부를 하고, 명상수행을 하여 부처님 당시의 빅쿠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복장도 당연히 남방식 가사이어야 할 것이다.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현재 당면 과제는 먹고 사는 문제이다. 특히 노년이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그런 걱정에 대하여 공무원의 경우 국민들이 낸 국가예산을 마치 주인 없는 돈 쓰듯이 자신들의 노후 대책을 확실하게 세워 두었다. 그래서 천상의 삶이 부럽지 않은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죽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생도 그와 같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삶이 보장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번 생에 찾아 먹을 것 다 찾아 먹고 더 이상 새로운 공덕을 짓지 않는다면 다음 생은 불행하고, 비참하고, 참혹한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에 무임승차하여 타 먹는 돈이 동시대를 살아 간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의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 날 지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면서 정직하게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이라면 노후대책이 서 있지 않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누군가 도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이웃이 굶어 죽는다면 두고 볼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깊은 산속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용케 찾아 쌀을 들고 올라 오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격려 하는 사람이 나타는 것은 사람이 사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노후 대책이 서 있지 않을지라도 걱정 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도와 주어도 도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인수행공동체에서 무소유를 실천하고 청정범행을 닦으면서 부처님 도량에서 노닐면서 임종을 맞는다면 지금 천상락을 누리고 있는 공무원연금 생활자와 비교할 바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대책이 세워져 있지 않을 지라도 굶어 죽을 일은 결코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오늘 열중할 뿐이다. 그런 미래는 가 보아야 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M131)

 

  

 

 

2013-02-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