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8. 15:33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접촉사고가 났는데

 

접촉사고가 났다. 정차하고 있는데 트럭이 후진하다가 후미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 후미등이 부서지고 범퍼가 회손되었다. 오래되고 낡은 소형차이기 때문에 왠만하면 그냥 타고 다니는데 부수어 졌기 때문에 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험처리를 하고 자동차를 정비소에 맡겼다. 3일간은 불편을 감수 해야 한다.

 

접촉사고 난 후 느낀 것은 하필 이면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마치 접촉사고가 나도록 모든 것이 유도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 때 우회전해서 들어 갔다면, 좀 더 앞으로 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트럭 운전자가 조금만 조심운전을 하였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마치 접촉사고가 나도록 모든 상황과 조건이 맞아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수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어느 경우는 목숨마저 잃는 사건도 있다. 차에 동승했는데 운전자의 과실로 인하여 앞차와 충돌하여 전원사망하였다는 기사도 접한다. 그럴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필 그 차에 타게 되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을 당하는 경우 억울하기 짝이 없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물적, 심적 손해를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면 그것 처럼 억울한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세상이 매우 불공평하고 뒤죽박죽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럴때 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왜 저 사람과 만났을까?” “내가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일을 당하나요?”

 

비밀댓글을 받았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대한 것이다. 법륜스님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일을 당하나요?”에 대한 것이다. 법륜스님의 답변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맞지 않아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스님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였길레 거부감을 느꼈을까. 먼저 질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도질문]

 

“우리 장애법우님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이렇게 불편한 몸을 갖게 된 이유가 전생의 업(
)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그래서 이 생(
)은 그저 지금대로 만족하면서 살고 내생을 기약해야 하는지
정말 그러한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님께서 저희 장애법우님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도질문, 불행을 당하거나 신체 장애는 전생의 때문인가? )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다. 장애가 업으로 인한 것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

 

장애와 전생의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이에 대하여 스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륜스님 답변]

 

여러분.. 저를 한 번 가만히 보세요.
이 중이 위로 같은 말 하게 생겼어요 안 생겼어요?
저는 바른 말만 하지, 위로 같은 거 잘 안 합니다.
그래서 위로의 말은 할 수 없고 진실만 말하겠습니다.
그게 뭐 가슴이 아프면 아프고.. 일부러 얼버무리는 얘길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전 미얀마에서 태풍 때문에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걸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저런 일을 당하나?'
'저 북한에 태어나 굶어죽는 사람들은 또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러나?'
이런 것을 불교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가르치는 법이 없어요.
이런 얘기는 힌두교 논리이지, 불교가 아니예요.
불교가 인도로부터 오다보니까 힌두교가 섞여 들어온 걸 가지고
불교 아닌 걸 불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법륜스님 , 불행을 당하거나 신체 장애는 전생의 때문인가?)

 

 

 

스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장애와 전생의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질문에서는 () 때문이 아닌가?”라고 물었는데, 답변에서는  ()로 바꾸어 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륜스님은 장애와 전생의 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 말한다. 이를 죄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힌두교적 발상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죄와 벌, 업과 업보

 

죄를 언급하면 반드시 벌이 따라 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죄와 벌은 항상 쌍으로 말하여진다. 그런데 업이라고 하면 따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보이다. 그래서 업과 업보는 항상 함께 하게 되어 있다. 그런 업도 선업이 있고 악업이 있다. 그래서 선업을 쌓으면 선과보를 받고, 악업을 쌓으면 악과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사람들의 얼굴모양은 왜 모두 다를까?

 

사람들의 얼굴은 왜 모두 다를까? 또 사람들의 성향은 왜 모두 제각각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대부분 부모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좀 더 유식하게 말하는 이가 있다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등의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모로 받은 유전적 특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mmasakkā māava,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isaraā. Kamma satte vibhajati yadida hīnappaītatāyāti.

 

[세존]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akammavibhaga sutta-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한다 (Kamma satte vibhajati)’고 하였다.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은 ‘업(Kamma)’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하고 (Hīna) 뛰어난(paīta) 상태가 된다고 하였다.

 

유전적인 문제이거나, 무슨 사고 때문이거나 그런 거죠

 

하지만 법륜스님 ‘죄’를 언급하며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륜스님 답변]

 

마찬가지입니다.
귀가 안 들린다.. 눈이 안 보인다.. 팔이나 다리에 장애가 있다..
이건 죄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유전적인 문제이거나, 무슨 사고 때문이거나 그런 거죠.
유전적인 문제가 없는데 그렇다면.. 엄마 탓인 경우가 있습니다.
임신중에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거나, 특히 임신 2달 이내에 심한 정서불안이 있었다면
뱃속의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쳐서 그런 장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밥 먹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안 되거나 위장장애를 겪는 것처럼 말입니다.

 

 (법륜스님 , 불행을 당하거나 신체 장애는 전생의 때문인가?)

 

 

스님의 말에서 ()’라는 말 대신 ()’을 집어 넣고 읽어 보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업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유전적 탓으로 돌리고 있다.

 

장애가 부모의 유전 때문이라면

 

만일 장애가 부모의 유전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라면 부모는 한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장애를 업으로 본다면 죄인으로 살아 가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고,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우리는 업의 상속자(kammadāyādā)’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부모의 유전형질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또 부모의 태아관리가 안되어 있어서 장애가 생긴 것으로 보는 것 역시 무리 있는 주장이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

 

그렇다면 지은 업에 따른 차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32.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33.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사람 몸 받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말한다. 이를 맹구우목(盲龜遇木)’ 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축생에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로 부터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지은 공덕이 짧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낮은 지위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지위로 머무는 것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의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마음으로 악업을 지을 가능성이 높기 떄문이라 한다. 그래서 몸이 파괴되고 나면 더 나 쁜곳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구제 받을 길은 없을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경우

 

부처님은 뿍갈라경(S3:2)에서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1)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2)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3)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4)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을 말한다. 비록 낮은 지위로 태어난자라고 하더라도 더 높은 지위로 올라 갈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대왕이여, 사람이 어떻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가게 되는가. 대왕이여, 여기 어떤 사람이 미천한 가문인 짠달라의 집이나 죽세공의 집이나 사냥꾼의 집이나 수레를 고치는 집이나 청소부의 집이나 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

 

그의 집에는 음식물이 부족하고 생계가 곤란하여 어렵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습니다. 그는 아름답지 않거나 흉칙하게 보이거나 기형이거나 등이 굽었거나 병이 많거나 애꾸눈이거나 손이 뒤틀렸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입니다. 그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탈 것, 꽃장식,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지상에서 수레에 오르고 수레에서 말의 등에 오르며 말의 등에서 코끼리의 어깨에 오르고 코끼리의 어깨에서 궁전으로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나는 이 사람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어둠에서 빛으로 갑니다.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1(3-1),전재성님역)

 

 

비록 낮은 지위로 태어났을지라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하늘나라와 같이 더 높은 지위에 태어 날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이는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여 선업 공덕을 짓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악업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자가 될 것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집에서 머리가 총명하고 신체적으로도 우월하게 태어 났다고 할지라도 오계를 어기고 십악을 행한다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일체 중생은 다 불성(佛性)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륜스님은 죄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니 장애는 전생의 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경우에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는
장애 때문이 아니라 부모부터 장애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을수록 더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동정받을 필요도 없고, 열등감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다 불성(
佛性)이 있다..
다 평등하다..
이게 부처님 가르침이지
전생의 죄 때문이다.. 이건 불교하곤 전연 관계 없는 얘깁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법륜스님 , 불행을 당하거나 신체 장애는 전생의 때문인가?)

 

 

법륜스님은 장애가 전생의 죄와 관련이 없음을 거듭밝히고 있다. 대신 “유전적인 문제이거나, 무슨 사고 때문이거나 그런 거죠.”라고 모두에서 말한 바 있다.

 

이런 접근방식은 매우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이 자신이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라는 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장애에 대하여 유전적인 요인으로 돌린다면 천상에 태어난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지옥이나 아귀, 아수라에 사는 존재는 어떻게 태어 났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생성방식을 보면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크게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로 나누고 있다. 이를 세분화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여섯 개로 분류 된다. 그래서 육도윤회한다고 한다. 신구의 삼업에 따라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방식과 형성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생성방식

형성조건

천상

화생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수행의 과보

-욕계천상은 믿음, 보시, 지계

인간

태생

오계

아수라

화생

성냄

축생

태생, 난생

우치, 탐욕

아귀

화생

인색, 집착

지옥

화생

잔인, 살생

 

 

 

형성조건을 보면 천상의 경우 욕계천상에 나려면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 가면 그에 대한 과보로 천상에 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경우 오계를 이해하고 준수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을 말하고, 아수라는 성냄의 과보로, 축생은 우치와 탐욕의 과보로, 아귀는 인색과 집착의 과보로, 지옥은 잔인과 살생의 과보로 태어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생성방식을 보면 인간과 축생을 제외 하고 모두 화생(化生)’인 것을 알 수 있다. 화생이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자신의 업력(業力)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형성방식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오로지 태생과 관련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경우 유전적 요인이나 태아관리 부실 때문에 장애가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애가 무엇이길레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 여섯가지 감각능력은 부분적 또는 모두 구족한다. 장애가 없는 한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의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구족된다. 그런데 욕계천상에서 화생하는 뭇삶들은 모든 감각기능을 모두 구족하여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최고의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색계의 경우 다르다.

 

선정수행을 닦아 색계에 화생화는 존재들은 여섯가지 감각능력 중에 눈과 귀와 마노(意)의 능력만 있다고 한다. 여섯가지 중에 세 가지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색계천상에 사는 존재가 중성이기 때문이라 한다. 욕계천상과 달리 선정수행을 닦은 과보로 화생하는 색계의 뭇삶들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몸으로 인한 접촉 기능이 없다. 또 색계천상의 경우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후각능력이나 촉각능력이 없다. 인간으로 기준으로 본다면 세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색계 4선천에 있는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마노의 기능이 없다. 마음이 모든 번뇌와 망상, 분별 등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에 마음을 내는 것을 혐오한다. 그래서 무심의 상태에 적정이 있다라는 선정수행을 하여 무상유정천에 화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지만 마노의 기능이 정지해 있기 때문에 무분별과 무심의 상태로서 마치 식물인간처럼 일생을 살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죽을 때 다시 마노의 기능이 생겨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무상유정천에 사는 뭇삶 역시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다고 볼 수 있다.

 

무색계의 경우 오로지 마노의 기능만 있다. 이 또한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안이비설신 등 다섯가지 감각능력을 결여한 쟁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이하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뭇삶들은 모든 감각능력을 다 구족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옥의 뭇삶들의 경우 감각기능을 통하여 고통을 느껴야 되기 때문이라 한다. 

 

일원론적 세계관

 

태어남에 대하여 업에 의지한 것이 아닌 유전적 요인으로 본다면 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부처님과 다른 것이다.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내가 태어 나기도 전에 이미 이 세상이 있었고,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이 세상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따라서 나는 주변에 이미 형성된 기세간(器世間)’, 즉 산하대지와 함께 존재 한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부모로부터 출생하였다고 보는 것은 존재론적 관점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아버지는 누구이고, 그 아버지는 누구이고 하여 무한 소급하다 보면 결국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궁극적 실재라고도 하는데, 이를 인격화 하면 야훼, 알라, 브라흐마, 비로자나 등으로 불리울 것이다.

 

법륜스님이 말하는 세계관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기 보다 이미 형성된 이 세상의 객관적 존재로서 나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체 중생은 다 불성(佛性)이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일원론적으로 세상을 바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

 

법륜스님은 장애가 발생하는 요인에 대하여 대승불교적 시각에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바탕에는 생물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부모의 유전적 요인으로 의하여 장애가 발생하고 차별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적 요인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칫 유물론자로 오해 받을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대표적인 유물론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벗이여, 이 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지수화풍 4)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 몸이 파괴되어 단멸하면 사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D1)”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유물론자들은 우리들이 부모로부터 생겨 났음을 강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유물론자들의 사상이다.

 

이런 유물론자들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소위 불교단멸론로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업과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부모로부터 태어 났다고 주장한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이나 축생의 경우 태생나 난생이기 때문에 부모가 없으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축생을 제외한 존재들은 모두 화생이다.

 

만일 태생만을 주장한다면 삼계와 육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계, 자신의 깜냥으로 판단 할 수밖에 없는 것만 믿겠다는 발상이다. 그래서 회의론자가 된다. 팔만사천에 달하는 부처님의 법문에 대하여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이나 전생, 윤회와 같은 이야기 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경만 믿는 것이다. 염처경 등과 같이 수행과 관련된 경들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이 장애에 대하여 유전발생요인으로 설명한다면 이는 외도의 사상과 다를 바 없다.

 

세간적 정견

 

법륜스님의 접근 방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업이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은 정견이다. 이를 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바란 견해라는 뜻이다. 참고로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이다.

 

내 탓네 탓도 아니다

 

출세간적 정견이 사성제라면, 세간에서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하는 것이 정견이다. 그렇다고 해서 업을 짓는자나 경험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아난다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이교도들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12:24(3-4), 전재성님역)

 

 

불자들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하여 믿는다. 그런데 잘 못 믿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영원불변의 자아(atman)을 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자기원인설이라 한다.

 

 다음으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타자를 가정하는 것이다. 시간(kala), 신(isuara), 자성(suabhava), 업(kama) 또는 운명(niyati) 같은 것이다. 이를 ‘타자원인설’이라 한다.

 

다음으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이나교도들이 취하는 입장이라 본다. 이를 ‘자타원인설’이라 한다.

 

다음으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이는 어떤 인과론도 부정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비자비타원인설’이라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원인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외도의 사상이다. 따라서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이 내탓도 아니고 네탓도 아닌 것이다. 내가 왜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는고!” 라고 한탄 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요!”하며 자학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모두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하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 하는 것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접촉(phassa)때문에

 

그렇다면 이런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초기경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paiccasamuppanna kho āvuso dukkha vutta mayā.

Ki paicca? Phassa paicca.

 

[세존]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서 생겨 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이교도들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12:24(3-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요인에 대하여 접촉(phassa)때문 이라고 하였다. 이 때 접촉은 감각접촉을 말한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정신접촉 등 여섯가지 접촉을 말한다. 따라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요인이 내 탓도 아니고 네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장애가 일어난 요인에 대하여 유전적 요인이라거나 태아부실관리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부모탓이라 볼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평생 죄인으로 살아 가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접촉때문이라 하였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생겨 났고, 세상도 생겨났고, 괴로움도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발생할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도로를 주행중에 종종 사고를 목격한다. 크고 작은 사고를 목격하였을 때 대부분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왜 하필이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을까하며 자책하거나, 뒤에서 받은 상대방의 차주에 대하여 원망하게 된다. 대부분 이와 같은 방식이다. 그래서 내 탓아니면 네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든지 사고가 난 것은 확실하다. 그런 사고도 접촉에 의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접촉으로부터 비롯된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라면 내 탓’ ‘남의 탓하기 전에 접촉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 발생할 만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태어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어남 역시 접촉을 연유로 발생된 것이다. 태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모의 유전적 요인이라기 보다 장애를 태어날 조건을 갖추어서 접촉에 따라 태어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본다면 장애를 가진 부모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러워 진다.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볼 때

 

그렇다면 나 보다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

 

 

 

 

Les Miserables

 

 

이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쌍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에게 자비의 시선으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반조 하는 것이다. 한량 없는 윤회과정 속에서 나도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2-01-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