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그를 제관(祭官)이라 부른다” 마하야나의 브라흐마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11. 13:48

 

나는 그를 제관(祭官)이라 부른다마하야나의 브라흐마나

 

 

 

비호감 인물

 

대선TV토론을 보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특히 가진 자를 대변하는 정당의 아전인수격 억지주장이 판을 친다. 대표적으로 종편채널을 들 수 있다.

 

대선정국에 있어서 특이한 점의 하나는 종편채널의 대활약이다. 시청률이 1% 대라는 종편채널들의 공통적인 현상은 대선정국에 대한 프로를 경쟁적으로 방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편에 고정적으로 출연하여 대선정국에 대하여 해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일방적이다. 철저하게 가진 자들 편의 정당의 입장을 반영한다. 반면 상대방 측에 대해서는 억지 주장과 이간질을 밥 먹듯이 한다. 그런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얼굴의 이미지가 비호감으로 급격하게 바뀐다. 한 번 이미지가 형성되면 심한 혐오감을 유발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듣지 않게 되고, 그 얼굴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리게 된다.

 

비호감으로 바뀐 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려다 보니 거짓말과 중상모략을 일삼는다. 대체로 기득권층에서 볼 수 있다

 

최선이 아닌 차선

 

정치는 여와 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으로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다. 만일 최선만 바란다면 더 이상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파탄 나고 말 것이다. 최선이라는 것은 종교에서나 추구하는 것이지 정치에서는 통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의 산물로서 항상 차선을 채택하게 되어 있다.

 

정치는 또 표를 의식한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선택한다. 노동자라면 노동삼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선택할 것이고, 기업가라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정당을 선택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표로 연결된다. 그래서 정치인은 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유권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표로써 선택한다. 대체적으로 보수정당은 가진 자들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반면에 진보정당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층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보수는 진짜 보수일까?

 

보수의 사전적 의미가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시키려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는 가진 자들과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두려워 한다. 그리고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불온시 한다. 기득권이 침해 당할 것을 우려 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란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

 

이처럼 보수의 특징이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중요시 하고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보수의 특징이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바라문 계급이 그것이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은 지배계급이었다. 바라문들은 우주를 만든한 창조신이자 최고신인 브라흐마(범천, 하느님)를 믿고 있었고 또 제사와 종교의 권리를 독점하는 최상위 계층이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에게 있어서 변화는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 영원히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제지상주의에 반기를 들고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 났다. 바라문에 대항하여 새롭게 정신적인 지도자로 나타난 이들이 사문(samana)이다. 사문들은 어떤 계급도 무시하고 베다의 권위도 부정하였다. 그런 사문중의 하나가 부처님 이었다.

 

바라문의 타락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문들을 브라만이 좋아 할 리 없다. 부처님도 마찬가지 이었다. 그런 내용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평민이 나누어지고,

여러 갈래로 왕족들이 분열하고,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브라흐마나담미까경-Brāhmaadhammikasutta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성이 계급이 생겨나고 여러 나라로 분열되고 윤리가 무너진 것에 대하여 바라문의 타락때문이라 한다. 바라문들이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 제사를 주관함으로 인하여 부를 축적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Mandala Brahmana Upanishad

 

 

 

옛날 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옛날의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옛날에 살던 선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해 유행하였습니다.

 

그들 바라문들은 가축도 갖지 않고, 황금도 곡식도 갖지 않고,

그러나 베다의 독송을 재보와 곡식으로 삼아,

하느님의 보물을 지켰던 것입니다.

 

 (브라흐마나담미까경-Brāhmaadhammikasutta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옛날 바라문들이 행했던 바라문의 삶과 부처님 당시의 타락한 바라문들의 삶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원래의 바라문들은 청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이었다고 한다.

 

이는 바라문 4주기에 있어서 임서기(林棲期)에 해당된다. 범행의 삶(梵行期)과 재가의 삶(家住期)인 세속의 삶을 떠나 숲속에 사는 삶을 말한다. 그런 바라문들은 재산도 축적하지 않았고 오로지 하느님의 보물’을 지켰다고 하였는데, 이는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탁월한 역사의식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당시 보수기득권층이었던 바라문의 타락에 대하여 지적하고, 본래의 바라문의 생활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부처님의 탁월한 역사의식때문이라 볼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 이전에 인도에서는 철기문명으로 접어 들자, 각 나라 들이 정복전쟁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한다. 사제계급인 바라문들 역시 대규모동물희생제와 제사의식을 통하여 그 부를 공유하면서 타락해 왔다고 한다.

 

부처님이 새롭게 규정한 바라문이란 그 근원적 의미에서 거룩한 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으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태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하늘나라가 범천계이다.

 

범천계는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 모두를 말한다. 범천계를 불교의 세계관에 편입한 것은 브라만교의 창조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세상의 창조자이자 최고신인 브라흐마는 실체도 없고 실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부처님의 해체해서 보기와 연기법으로 인하여 모두 부정된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청정범행을 닦으면 하늘나라에 태어 날 수 있다고 브라흐마(범천, 하느님)와 브라흐마나(바라문, 제관)의 의미를 재설정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역사 의식에 따른 것이다.

 

바라문과 아라한

 

이처럼 부처님은 바라문의 종교관을 재해석하여 부처님 당시 타락한 보수기득권층인 바라문의 사상을 부수었다. 바라문이란 출생에 기인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하는 자이라기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 청정하고 거룩한 자라 하였고, 불교적 세계관에 대입하여 청정범행을 닦은 자는 아라한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재해석된 바라문에 대한 이야기가 법구경 마지막 품에 등장한다.

 

 

Jhāyi virajam-āsīna           자잉 위라장 아시낭

katakicca anāsava             까따낏짱 아나사왕

Uttamattha anuppatta,         욷따맛타낭 마눕빳땅

tam-aha brūmi brāhmaa.       따마항 브루미 브라흐마낭

 

선정을 이루고 티끌을 떠나고 정좌한,

해야 할 일을 이룬, 번뇌를 여읜 님,

위없는 목표에 도달한 님,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고 부른다.

 

(법구경, Dhp386,전재성님역)

 

 

선정이라고 번역된 자이(Jhāyi)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상을 지향하는 선정이고, 또 하나는 특징을 지향하는 선정이다. 먼저 대상을 지향하는 선정은 청정도론에 따르면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를 말한다. 특징을 지향하는 선정은 세가지 존재의 특징에 대한 것, 즉 무상, , 무아에 대한 성찰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지혜, (magga), 경지(phala) 등을 뜻한다. 

 

티끌을 여의는(viraja) 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읜 것을 말한다. 정좌(āsīna)한 자는 숲속에서 홀로 앉아 있는 자를 말한다. 해야할 일(katakicca)은 사성제에 대하여 네 가지길(사향, cattaro magga)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완수 한 것을 말한다. 번뇌를 여읜(anāsava)님은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아라한)을 말한다. 위없는 목표에 도달한 님 (Uttamattha anuppatta)은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자를 뜻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청정범행을 닦아 아라한이 된 자를 부처님은 바라문이라 하였다.

 

재해석된 바라문

 

이렇게 재해석된 바라문에 대하여 의미를 잘 모르는 제자들이 있었던 같다. 인연담에 따르면 어느 바라문 출신이 자신은 태생과 가문으로 보았을 때 바라문이기 때문에 자신을 당연히 바라문이라고 불러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바라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제자는 부처님께 찾아가 그 의미를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나는 태생과 가문 때문에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최상의 목표인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자를 그렇게 부른다

 

 

이렇게 부처님은 새로 해석된 바라문의 의미를 알려 주었다.

 

가짜보수와 진짜보수

 

오늘 날 기득권층은 보수화 되어 있다. 주로 자신의 재산이나 지위를 지키려 한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두려워 한다. 왜 그럴까 재산이나 기득권 형성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라기 보다 불법과 탈법, 불로소득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성된 재산을 지키려고만 할 뿐 좀처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변화에 대하여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런 보수는 진짜 보수가 아니다.

 

보수의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보수는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시키려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에 있어서 오늘날 보수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이다. 그러나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이는 부처님 당시 인도상황과 유사하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특권계급인 바라문의 역할에 대하여 재해석 하였다. 원래 바라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바라문은 청정범행을 닦는 거룩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아라한과 같다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득권층은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 하면서 전통은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가진 자로서의 아름다운 실천덕목이다. 오늘날 용어로 말한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부와 권력과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회지도층에 있는 자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 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 받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보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보수적인 종교계

 

부처님은 오늘날의 기득권층과 유사하였던 바라문계급에 대하여 도전하여 변화를 일으켰다. 원래 바라문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바라문이고,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기득권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한다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유사한 개념이다. 이렇게 왜곡된 보수층을 세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계에서도 볼 수 있다.

 

종교계야말로 가장 보수적이다. 종교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으로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만일 교리를 새롭게 해석한다면 이단으로 몰릴 것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우리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종교계일 것이다.

 

원래 불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전통을 잘 지키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불교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 불교가 그렇다. 시대에 따라, 지역적 특징에 따라 변형 되었다고 하지만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았을 때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 체르바츠키 (Stcherbatsky) 박사는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 고 주장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부처님이 계신다면 보수화 되고 기득권수호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불교에 대하여 무어라 말할까. 아마도 초기경에서 그랫듯이 오늘날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원래 불교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 없다.

 

나는 그를 제관(祭官)이라 부른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마치 부처님 당시의 바라문교를 보는 듯하다천도를 주관하는 자는 수행자라기 보다 제관(祭官)’에 더 가깝다. 교리는 영원주의를 인정하는 듯하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럼에 따라 존재의 근원에 합일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경계 하였던 아뜨만과 영원주의로의 회귀를 말한다. 부처님이 오늘날 한국불교를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브라흐마(범천, 하느님)와 브라흐마나(바라문, 제관)를 재해석하여 불교의 세계관에 편입하였다. 그래서 창조신이라 불렸던 브라흐마는 부정되고, 대신 청정범행을 닦으면 범천에 태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제관 역할을 하던 브라흐마나 역시 재해석 되어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아라한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에 있어서 천도재주관자는 고대 인도에서의 제관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역할을 하는 주관자들에게 붙여 줄 명칭은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고 부른다라가 아니라, “나는 그를 제관이라 부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됨에 따라 부처님의 원음을 접한 탓이다.

 

 

 

2012-12-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