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지에서 본 일부스님들의 막행막식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스님상
금강경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렇게 네 가지 상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하여 ‘스님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종교전문기자 김나미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스님이 된 것 자체가 마치 누굴 위한 것처럼 승복 입은 자체를 대단한 일처럼 여깁니다. “난 스님이오” 하는 스님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스님상’이란 것이 하나 더 추가 되지요, 삭발하고 잿빛 옷을 입은 외양만 갖추고 부처님 얼굴에 먹칠하는 스님들을 너무 자주 보았습니다.
(취재 후…그 뒷이야기, 김나미기자)
스님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누구나 승복만 걸치면 하나의 상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스님상이라 한다. 그래서 스님이 된 것에 대하여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신도들에게 권위를 부리고 특권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외양만 스님일 뿐 하는 행동은 속인 못지 않아서 진정한 스님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비구니 스님들의 해외여행
6박9일 일정으로 실크로드 성지순례를 다녀 왔다. 기차에서 1박, 비행기에서 1박을 뺀 것이므로 6박 9일 일정이 된다.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그 다음 주인 5월 28일 출발이어서일까 스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돈황에서 우루무치에 이르는 여정에 같은 비행기를 탄 세 그룹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그룹이 스님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구니 스님들이다. 한 그룹이 20여명이므로 비구니 스님 그룹도 20여명이 된다. 그러나 모두 비구니 스님들이 아니다. 반 가량은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구니 스님 그룹은 반은 비구니스님이고 나머지 반은 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세 개의 그룹이 있었는데 여행 일정이 같아서 여행지에서 반드시 마주 쳤다. 그래서 식당에서도 마주 쳤다. 그러나 호텔에서는 마주 치지 않았다. 호텔을 제외한 여행지, 식당, 열차, 공항대합실 등에서 마주친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은 실망스런 것이었다.
새로운 승가청규를 만들었다는데
불교닷컴 기사를 보니 승가청규에 대한 기사가 여러 개 발표 되었다. 관련기사를 보니 “법와 율을 수지하려는 의지가 약해져 한국불교가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국불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계율이 무너져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승복을 입었으나 스님답지 않은 행태에 대하여 반성하고 이를 실천할 청규를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강제사항이 아닌 권고사항이기 때문이다. 이는 청규에서 “권고합니다” 라든가 “삼가합시다”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승가의 진면목을 회복하려는 뼈아픈 반성의 시작으로 청규가 제정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 제정된 청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승가청규 전문을 보았다. 제목은 대비원력의 발심과 실천을 위한 승가청규라고 되어 있다. 대승보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청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승가청규’라 하였을까.
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규(淸規)란 ‘참되고 바른 규칙이나 법도’라는 뜻이다. 또 인터넷 국어사전에 따르면 ‘선종의 사원에서 여러 승려들이 늘 지켜야 할 규칙’이라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청규는 선종에서 스님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율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 할 수 백개 에 달하는 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별도로 규칙을 만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이번 청규제정의 목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청규제정의 목적에 따르면 인도와 한국의 지리적 문화적 차이와 2600년의 시간의 간격을 들고 있다. 부처님 당시 계율이 있지만 지리적, 문화적, 시간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 맞는 새로운 규칙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당신이 제정한 계율이라도 상황에 맞지 않을 때는 고치고 보완 하였다는 예를 들고 있다.
하지만 승가청규는 북방대승불교, 특히 선불교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본다. 지금도 남방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별도의 청규없이 부처님 당시 만들어진 율장정신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대로 살면 새로운 청규를 만들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로 판단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 실정에 맞는 새로운 청규를 만든다는 것은 승가가 특히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 났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 예를 이번 실크로드 성지 순례 기간 중에 비구니 스님팀들의 행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해외여행에 대한 청규를 보았더니
승가청규 전문을 보았다. 크게 수행의 장, 생명의 장, 평화의 장, 나눔의 장, 문화의 장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문화의 장에 의식주 문화, 소유와 소비문화, 의례와 의식문화, 일상위의 문화, 소임과 실천문화로 나누어져 있다. 이중 유심히 살펴 본 것은 ‘해외여행’에 대한 청규이다.
청규중에 해외여행에 대한 항목이다. 내용은 “구도를 위한 성지순례나 학습을 위한 목적이 아니면 해외여행을 삼간다” 라고 단 한 줄에 그친다. 성지순례나 공부하러 떠나는 여행이 아니면 삼가해 달라는 것이다. 강제성이 없이 단지 권고 사항에 그치고 있다.
공항에 가면 스님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다들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하러 가는 스님도 있을 것이고, 성지순례 하러 가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스님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경우 아침 호텔에서 식사 할 때 스님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비구니 스님들이다. 신도와 함께 온 경우도 있고 스님들 끼리 온 경우도 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끝나서 홀가분 마음으로 순례 떠나는 스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실크로두 성지순례 기간 중에 본 비구니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수행자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실망이 컸다.
새로 제정된 청규에는 해외여행에 관하여 “구도를 위한 성지순례나 학습을 위한 목적이 아니면 해외여행을 삼간다”라는 단 한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크로드에서 본 비구니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새로운 청규에 내용을 보완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출가자로서의 위의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청규이다.
고발하는 이유는
이번 실크로드 순례를 하면서 비구니 스님들 팀과 여러 차례 마주쳤다. 마주 칠 때 마다 느낀 것은 출가수행자로서 위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속인 보다 못한 행태를 보여 주었다. 대표적으로 널부러져 자는 것이다.
여행 기간 중에 스님들의 행태에 대한 이야기를 쓸까 쓰지 말까 고민하였다. 쓰면 한국불교의 승가를 욕먹이게 하는 것이 되고, 쓰지 않으면 또 다른 여행지에서 ‘막행막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기로 하였다. 욕 먹을 지라도 승가의 위의를 훼손하는 것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린다면 결국 같은 편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발하는 이유는 초기경전에서도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하여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여행지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행태에 대하여 가르침에 벗어난 행위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재가불자가 스님들의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설령 스님들이 일탈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곧 알아채고 참회하여 초심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도박승, 은처승, 성추행, 먹튀 사건 등이 일어 나는 것은 이를 알고도 묵인한 재가불자의 책임도 크다. 잘 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Nidhīnaṃva pavattāraṃ 니디낭와 빠왓따랑
yaṃ passe vajjadassinaṃ 양 빠쎄 왓자닷시낭
niggayhavādiṃ medhāviṃ 닉가야와딩 메다윙
tādisaṃ paṇḍitaṃbhaje 따디상 빤니땅 바제
tādiaṃ bhajamānassa 따디앙 바자마낫사
seyyo hoti na pāpiyo. 세이요 호띠 나 빠삐요.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Dhp 76)
잘못을 지적하는 님(vajjadassinaṃ)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 각주에 따르면 ‘남의 잘못 만을 찾는 자’와 ‘잘못을 그만 두게 하려는 자’ 이렇게 두 가지 부류이다. 전자의 경우 비난과 비방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 비판적 시각이라 볼 수 있다. 비난과 비판은 다른 것이다. 비판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때문에 장려 되어야 할 사항이지만, 비방이나 비판은 모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잘못을 지적하는 님’은 후자에 해당된다.
잘못을 하여 잘못을 지적당하였다면 이를 모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래서 각주에 따르면 “그대가 아사리나 친교사의 입장에서 내게 행하고 훈계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거듭 그렇게 하길 부탁한다.”라고 되어 있다. 건전한 비판에 대하여 내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고맙고 감사해야 될 일임을 말한다.
게송에서 ‘꾸짖어 충고하는 님(niggayhavādiṃ)’도 마찬가지라 본다. 각주에 따르면 “도반의 부당함과 실책을 보면서 어떤 수행승은 당사자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였다. 잘못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도반이 잘못을 하고 있음에도 말을 붙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내가 그의 잘못에 대하여 말을 한다면, 그는 나를 돕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에게 손해가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말해 보았자 본전도 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고서도 못 본 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나는 꾸짖어야 할 것은 꾸짖어 말하고, 충고해야 할 것은 충고하여 말한다. 견실한 자는 견디어 낼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비구니 스님팀의 막행막식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닌 것, 잘못 된 것은 지적해야 한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기간 중에 본 비구니 스님팀의 막행막식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승가로서의 위의를 손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행자들의 눈에 비추졌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크게 세 팀이 있었다. 편의상 이름 붙이면 KAL연합팀, KRT팀, 비구니 스님팀이다. 각각 20여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각각 세 대의 버스가 있고 가이드 또한 세 명이다. 모두 조선족 가이드들이다. 또 가이들 끼리 서로 아는 사이이다. 그래서 가이드의 말을 들어 보면 여행자들의 행태를 알 수 있다. 다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 않지만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목격한 것도 있다. 그렇다면 여행지에서 본 비구니 스님팀의 막행막식은 어떤 것일까?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스님들의 음주에 대한 것이다.
비구니 스님들도 음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중견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음주 하는 것은 예사 인 것 같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서 일까, 아니면 해방감에서 일까 분명한 사실은 음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독한 것이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은 오계이다. 오계는 부처님 당시부터 강조된 사항이다. 그래서 남방 테라와다 법회 의식에서는 반드시 독송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오계 준수 서약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회 의식에서 오계 준수 서약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법회에서 오계준수가 없는 한국불교
이처럼 출재가는 오계를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좀 더 확장하여 8계가 있다. 8계라면 스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재가자들도 포살일 등 특별한 날에 준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계를 포함한 팔계에 대한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계
1.
빠나디빠따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Panatipat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2.
아딘나다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Adinnad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3.
까메수 밋차짜라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Kamesu micchacar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삿된 음행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4.
무사와다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Musavad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5.
수라매라야 맛자빠마다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Surameraya-majja-pamadatth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6.
위깔라보자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Vikalabhoj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정오가 지난 다음 음식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7.
닛싸, 기따, 와디따, 위수카 다싸나, 말라간다, 위레빠나, 다라나, 만다나, 위부사나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Nicca,gita, vadita, vis?kadassana, malagandha, vilepana, dharana, mandana, vibh?sanatah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춤추고, 노래하고,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 향수,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8.
옥싸사야나 마하사야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Uccasayana, mahasay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높고 넓은 사치스런 좌구나 침상을 사용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이와 같은 오계와 팔계는 재가와 출가가 지켜야 할 실천 덕목이다. 하지만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목이 아마도 다섯 번 째 항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일 것이다. 불음주계를 말한다.
이슬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출가자와 달리 재가자는 생활인이다.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기 때문에 오계를 모두 준수하기 힘들다. 특히 불음주계가 그렇다. 고된 노동 끝에 마시는 술은 음식일 수 있고 또 내일을 위한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업상 접대하기 위하여 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는 수행자가 술을 마시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로지 참선 수행에 몰두 하는 수행자가 술을 마시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재가불자들이 생각하기를 스님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알 고 있다. 마치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생각하기를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마치 이슬을 먹고 살고 화장실도 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 불자가 아닌 국민들도 하나의 스님상이 있어서 스님에 대하여 도사, 도인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이런 스님상을 가지고 있는데 스님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승가에 만연된 음주문화
곡차라는 말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차의 종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은 술을 일컫는 말임을 알았다. 승가에서 스님들끼리 사용하는 곡차인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이제 대중화 되어서 재가불자들도 곡차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승가에 음주문화가 만연돼 있음을 말한다.
스님들끼리 은밀히 주고 받는 말 곡차가 나오게 된 배경은 스님들이 음주를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재가자들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참선 수행하는 스님들이 술을 마시는 행위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재가자들이 불음주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스님들이 불음주계를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음주문화의 영향이어서일까 이번 여행에서 스님들이 그것도 비구니 스님들이 음주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새로운 청규에 없는 음주관련 조항
스님들의 음주 행위는 금지시켜야 한다. 재가불자들이 지키지 못하는 불음주계를 스님들만이라도 지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새로운 청규에서 음주와 관련된 부분이 있을 것 같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승랍에 따른 자동차 분류 기준표와 같이 세세한 항목도 있었지만 음주에 대한 항목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식생활문화 항목에서 ‘권합니다’ ‘삼가 합니다’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만 있을 뿐이다.
<권합니다>
- 도량 내에서는 소욕지족의 정신으로 소박하게 전통적인 사찰음식의 식생활을 한다.
- 도량 밖에서는 서민대중들과 함께 하는 탁발 정신에 입각한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한다.
- 음식점에서도 오관게(五觀偈) 정신으로 수행자답게 공양을한다.
<삼갑시다>
- 질병과 요양 등의 이유가 아니면 육식을 삼간다.
- 고급 음식점이나 수행자의 품격에 맞지 않는 음식점의 출입을 삼간다.
- 고급 차(茶)와 고급 과일 등 고가(高價)의 음식을 삼간다.
( [전문] 대비원력의 발심과 실천을 위한 승가청규 , 불교닷컴 2013-06-05)
절 안에서는 사찰음식을 먹어야 하고 절 바깥에서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육식을 삼가자고 하였다. 그 어디에도 불음주에 대한 항목은 없다. 스님들이 불음주계를 철저하게 지켜서 청규에 집어 넣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불음주계를 집어 넣으면 이제까지 음주행위를 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결과가 되기 때문일까?
청규에서 불음주계 항목을 집어 넣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고급차와 고급 과일 등 고가의 음식도 금지했다. 반면 ‘음주’에 대한 권고 사항은 담지 않았다.(불교닷컴, 2013-06-04)”라 하였기 때문이다. 청규에 불음주계를 집어 넣지 않은 것에 대한 댓글을 보면 더 가혹하다. “빠진 것, 술 마시지 말 것!! 강조사항, 룸살롱 가지 말 것!!” 라든가 “술은 마셔도 되남?? 음주는 왜 들어있지 않을까.”와 같은 댓글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스님들의 위의(威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아무 곳이나 널부러져 자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번 여행 기간 중에 열차 대합실에서, 열차안에서, 공항대합실에서 널부러져 자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정이 빡빡하여 강행군을 하기 때문에 지치고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삭발을 하고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아무곳에서나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면 보기가 민망하였다. 더구나 여행객 중에는 교회나 성당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힘들다고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여행 넷 째날 돈황에서 일박을 하고 돈황 부근의 유원역에서 하미역으로 기차로 이동하였다. 현지인들도 타는 일반기차이다. 약 5시간 걸린다. 좌석도 보통좌석이다. 그래서 냄새도 나고 환경도 좋지 않다. 더구나 기차타기 전에 장시간 하염없이 대기하여 모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강력한 사막의 바람으로 인하여 기차가 제 시간에 오지 못한 것이다.
세 시간을 기다린 끝에 기차를 탓으나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환경이 열악한 기차안에서 5시간 동안 참고 가야 했다. 하미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 반이 되었다. 그래서 밤중에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번 여행의 세 팀 즉. KAL연합팀, KRT팀, 스님팀 이렇게 세 개의 그룹이 기차 한량에 모두 타게 되었다. 그래서 재가와 승가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승가의 여러가지 허물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자는
승가의 허물 중에 대표적으로 음주를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빈 의자에 널부러져 자는 모습이었다. 그런 스님들의 모습이 재가자의 눈에 보기에 위의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행동하는 것이 재가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재가자 보다 더 못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 승복 만 걸쳤을 뿐 또 그저 그런 또 다른 사람들의 모임처럼 보였다.
새로운 청규에 따르면 “승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진리의 수호자이며 대중의 귀의처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음주를 하며 아무곳에서나 널부러져 자는 스님들에게 귀의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나라 한글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어서 스님들이 승보로 간주 되고 있으나 열차안에서 본 비구니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스님들이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중생일 뿐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단지 사는 곳이 다르고 겉 모양만 다를 뿐 모두 다 똑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셋째, 스님들의 복장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복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론 회색 위주이지만 여행지에서 본 스님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보면 ‘승복 패션쇼’를 보는 듯 했다. 어떤 스님은 두루마기 형식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스님은 회색조끼만을 입고 있는 스님도 있었다. 또 어떤 스님은 거친 여행의 와중에 빳빳하게 풀먹인 삼배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다 부채까지 들고 있는 모습이 여유러워 보였다. 그러나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명사산-월아천 관광지에서 본 모습이었다.
돈황 시내 바로 인근에 있는 명사산은 모래산이다. 모래가 바람에 날려 입자가 매우 작은 모래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다 보니 발이 푹푹 빠진다. 또 돈황지역이 건조한 지역이다 보니 햇볕이 강렬하다. 그리고 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단히 무장한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썬크림을 바른다. 그것도 모자라 썬글라스를 쓰고 골프장에서나 볼 수 있는 안면 안대를 착용한다. 그러다 보니 눈만 나오게 되어 이상하고 때로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다. 특히 여자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스님들에게서도 보았다는 것이다.
썬글라스의 스님
여행일정이 같다 보니 스님들 일행을 종종 마주친다. 특히 명사산-월아천에 마주친 비구니스님들 모습을 보면 승복만 입었지 사실상 속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떤 스님은 속인들이나 쓰는 챙이 넑고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썼는가 하면, 또 어떤 스님은 색깔이 있는 커다란 썬글라스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또 속인들처럼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수건,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대부분 가렸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다른 여행객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제정되 승가청규에는 의복에 대하여 어떤 사항이 있을까? 의복생활문화 항목을 보니 “승가의 옷은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첫 번째 평가의 척도입니다. 따라서 승가의 옷차림은 탈속(脫俗)과 절제와 품격이 있어야 하며~”라고 되어 있다. 스님의 승복은 독특해서 쉽게 눈길을 사로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옷 입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승가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스님들이 입는 옷은 탈속(脫俗)과 절제와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사산-월아천에서 본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은 세속따라하기 이었다. 아무리 햇볕이 강하기로 세속인들이나 쓰는 썬글라스를 착용한다든가 스카프를 착용하는 것은 승가의 위의를 져 버린 대표적인 케이스라 본다.
“선재야, 선재야”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다. 여행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행위 같은 것이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소풍 나온 것처럼 들떠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빳빳하게 삼배옷을 입고 색깔이 있는 안경을 쓴 어느 비구니 스님은 갑자기 큰 소리로 “선재야, 선재야”하였다. 그 소리에 놀라 스님 있는 곳을 보니 개 한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절에서 키우는 개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 소리에 다른 스님들도 깔깔 거리며 웃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자꾸 지적이 나오는 것은 스님들이 재가자들의 눈에 노출 되었기 때문이다.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가
새로 만든 청규에 따르면 스님이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강제사항은 아니다. ‘권합니다’ ‘삼갑시다’ 로 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음식점에서도 오관게(五觀偈) 정신으로 수행자답게 공양을한다.”는 ‘권합니다’로 되어 있고 “질병과 요양 등의 이유가 아니면 육식을 삼간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권합니다’ ‘삼갑시다’라고 하는 것은 강제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나마 이런 청규가 제정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된다. 이런 청규가 제정 되기 이전에 보는 여행지에서 보는 스님들의 막행막식을 보면 타종교인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 이었기 때문이다.
수녀들이 그랬다면
이번 여행지에서 본 비구니스님들의 막행막식에 대하여 타종교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천주교 수녀들이 열차간이나 대합실에서 널부러져 자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을까? 또 천주교 수녀들이 썬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무곳에서나 큰소리로 말하고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수녀들에게서도 볼 수 있을까?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 비구니 스님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님으로서 위의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승보로서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여행지에서 한국불교를 망신시키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서 고발한다.
공인으로서 스님
새로운 청규에 따르면 승가는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숭상하는 집단이라 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공인이라 하였다. 공인으로서 스님에 대하여 새로운 청규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 하고 있다.
종단과 사찰의 공적 소임을 맡지 않은 일반대중이라 하더라도 출가수행자는 공인이요 대중의 지도자입니다. 따라서 늘상 인격적으로 언행을 일치하는 실천모범을 보임으로써 대중생활에 충실하고 출가와 재가가 화합하여 불교발전에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도록 헌신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 [전문] 대비원력의 발심과 실천을 위한 승가청규 , 불교닷컴 2013-06-05)
2013-06-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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