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저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전재성박사의 십지경과 인식의 지평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4. 22:33

 

 

저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전재성박사의 십지경과 인식의 지평선

 

 

 

아침에 신청한 책이 저녁에 도착하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이다. 최근 전재성박사가 편역한 십지경-오리지날화엄경이다.

 

급하게 포장을 뜯어 보았다. 빨간 하드커버에 꽤 두툼한 책이 나왔다. 930여페이지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책을 아무곳이나 열어 보니 기존 빠알리니까야와 구조가 유사하다. 본문이 있고 주석이 되어 있는 형식이다. 그리고 산스크리트 원본이 실려 있다.

 

 

 

 

 

 

 

 

 

혜거스님의 추천사를 보니

 

추천사를 읽어 보았다. 금강선원장 혜거스님이 쓴 것이다. 화엄경의 권위자 탄허스님의 제자인 혜거스님은 탄허스님의 말을 빌어 집대성하고 내린 결론이 우주와 인생전체가 마음뿐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돌을 들어 말하면 돌이 바로 우주의 핵심이 되고, 개개의 사물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의 핵심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이 말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돌이 바로 우주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돌이 돌 다웠을 때 돌은 돌이라는 고유의 특성을 가졌을 때 돌로서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곡의 이름 없는 돌 조각 하나도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또 개개의 사물들이 하나하나가 모두 우주의 핵심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꽃의 예를 들 수 있다. 꽃이 피면 자신의 할 바를 다한 것이다. 그래서 꽃이 핀다는 것은 꽃의 고유성이 발현된 것으로 본다. 꽃이 꽃다웠을 때 자신만의 독특한 꽃을 피워 냈을 때 꽃은 할 바를 다 한 것이다. 이처럼 돌이나 꽃과 같은  무정물일지라도 고유성을 발현 하면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날 때

 

그렇다면 화엄경을 설명할 때 왜 돌이나 꽃과 같은 무정물을 예로 드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의 불교tv강의를 보았다.

 

 

화엄경의 꽃의 이미지가 아주 장엄한 모란 꽃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이 생각한 꽃이라는 것은 냉이꽃 같은 거에요. 잡초, 이 작은 잡초도 말이죠, 그 울밑에 있는 잡초도 조그마한 잡초인데, 그 벼라별 잡초들이 벼라별 꽃을 펴요. 그런데 이놈들이 아주 죽을 힘을 다해서 온몸을 던져서 피는 거에요.

 

(김용옥 교수, <특집>탄허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강설 탄허스님의 화엄세계 2, 불교tv 2013-06-05)

 

 

 

 

 

화엄경의 대가 탄허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말한 것이다. 이름 없는 잡초에서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날 때, 잡초는 꽃을 피워 내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 한 다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이다.

 

김용옥 선생에 따르면 화엄경에서 말하는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는 모란이나 장미처럼 커다랗고 화려하고 유명한 꽃이 아니라 한다. 이름 없는 들꽃, 이름 없는 잡초에 피는 꽃으로 장엄된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잡화엄(雜華嚴)이라 한다. 온갖 이름 없는 잡꽃들로 장엄된 세계를 말한다.

 

거체전진(擧體全眞)하여

 

들꽃은 누가 보건 말건 누가 알아주건 말건 때가 되면 꽃을 피워낸다. 그런데 꽃이 필 때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를 도올 김용옥선생은 거체전진(擧體全眞)’이라 하였다. 온몸을 던져서 있는 힘을 다한 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온힘을 다해서 꽃이 피듯이 이 세계에 현현하고 있는 모든 것들, 물소리고 바람소리고 지금 꽃이 피어 있고, 모든 것이 그대로 불성이 현기한 것이다.

 

(김용옥 교수, <특집>탄허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강설 탄허스님의 화엄세계 2, 불교tv 2013-06-05)

 

 

들에 피는 이름 없는 한송이 들꽃하나, 저 산위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하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한줄기 부드러운 바람 등 모든 개개사물은 그것 자체가 우주의 핵심임을 말한다. 각자 꽃으로서 고유성, 바위로서의 고유성, 바람으로서의 고유성을 발휘 하였을 때 불성이 현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성불한 것으로 본다.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냈을 때

 

들에 이름 없는 잡초일지라도 한 송이 꽃을 피워 내기 위해서는 있는 힘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무명가수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하다. 라이브카페에서 또는 산사음악회에서 통키타를 치는 젊고 가난한 무명가수가 있다. 그가 노래할 때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니다. 관중이 많던 적던 간에, 누가 알아주던 않던 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한다.

 

이처럼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는 것은 무명가수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은 선생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집에서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광부는 광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작가는 작가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이렇게 역할을 다 하는 것은 고유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개성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이름 없는 들풀이 꽃을 피워 내듯,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워 내듯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 보일 때, 화엄교학에서는 성불했다고 한다. 이런 성불론은 반드시 유정물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저 산위의 바위나 뜰 앞의 잣 나무 역시 고유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밤새 인생과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뒤척이다가 새벽녁 뜰 앞에 의연히 서 있는 잣나무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뜰 앞의 잣나무는 누가 보고 말건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한 것이다. 잣나무 고유의 성질이 발현되어 그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잣나무가 잣나무 답게그 자리에 서 있을 때 잣나무는 성불한 것으로 본다.

 

저 산위의 바위는 어떨까? 비록 무정물이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 바위로서 고유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바위가 바위다웠을 때고유성을 잘 드러냈기 때문에 성불한 것으로 본다. 이처럼 무정물과 유정물이 자신의 고유성을 발휘할 때, 그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할 때 모두 성불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환희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회엄교학에 따르면  산천초목, 삼라만상 기세간 모두가 진리의 당체인 바이로차나 부처님의 화현으로 본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출현하면 부처 출현에 산천초목 동시성불”하는 것이라 한다.

  

후원자는 누구일까

 

다음으로 발간사를 보았다. 발간사는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박사가 하였다. 전현수박사는 불교tv에 출연하여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를 강연한 바 있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한 바 있는 전현수 박사는 초기불교의 수행방법을 정신과에 적용하여 현대인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책의 머리말에 따르면 십지경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후원을 하였다고 하였다. 또 십지경의 후원자 중에는 혜거 스님과 월호스님도 있다. 월호스님이라면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스타스님으로서 불자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스타스님이다. 그리고 선사이다. 그런데 이번 십지경 번역의 후원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놀라웠다.

 

왜 지평이라 하였을까?

 

전재성박사는 번역에서 지평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환희지할 때 지()지평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마치 지평선을 연상시킨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말한다.

 

실크로드에 가면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지평선이다.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이다. 그런 지평선에는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다. 집도 없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가 보아야 안다.

 

 

 

 

 

전재성박사는 머리말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은 단지 깨달음 자체에 의한 일회적인 앎의 지평선을 연 것이 아니라, 깨달음 이후의 전생애에 걸쳐 반복적이고도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열리는 무수한 깨달음의 지평선을 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이 전 생애를 무수한 깨달음의 지평선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 지평선을 넓혀 놓았기에 훗날 무수한 부처님(깨달은 자)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인식의 지평선

 

또 전재성박사는 머리말에서 화엄경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로서 다마키 고시로의 말을 빌어 세계가 세계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어지는 설명에서 전재성박사는 상윳따니까야의 일체의 경(S35:23)’을 들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일체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 맬 것이다.

 

(삽바경-Sabbasutta-일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 전재성님역)

 

 

전재성 박사는 화엄경의 지평, 세계가 세계를 아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일체의 경(S35:23)’을 들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관적 세계를 말한다. 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있었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세상은 계속 있게 될 것이라는 객관적 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 가는 세계를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따라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세계가 세계를 안다는 의미에 대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지평의 확장으로 보았다.

 

그런 인식의 지평은 확장없는 확장으로서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고, 단계 없는 단계로서 무한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마치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 같은 것이다.

 

 

 

 

 

열단계 지평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인식의 전환을 하는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런 지평이 열 가지라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단계 지평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곧,

첫째는 큰 기쁨(歡喜)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둘째는 때여읨(離垢)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셋째는 새벽빛(發光)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넷째는 불꽃놀이(焰慧)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다섯째는 드높음(難勝)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여섯째는 꿰뚫음(現前)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일곱째는 온거님(遠行)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여덟째는 아니뮐(不動)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아홉째는 한슬기(善慧)라는 깨달음의 지평이고,

열번째는 빛구름(法雲)이라는 깨달음의 지평입니다.

 

(열단계 지평의 서, 십지경, 전재성님역)

 

 

번역을 보면 모두 우리말로 풀어 놓았다. 과감하게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 한 것이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한역번역어를 답습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위 문장에 대한 기존의 한역번역은 그 열 가지란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며, 둘째는 이구지(離垢地)이며, 셋째는 발광지(發光地)이며, 넷째는 염혜지(焰慧地)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며,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입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한역 번역을 처음 접하였을 때 에 대하여 땅으로 알았다. 그래서 환희지라는 땅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물리적 땅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 내지 인식의 확장을 뜻하는 깨달음의 지평임을 알 수 있다.

 

순수한 우리말 번역어

 

그렇다면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된 번역어의 뜻은 무엇일까? 머리말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첫 단계 '큰 기쁨의 지평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섯 번째 단계 꿰뚫음의 지평에서는 연기에 의한 공성을 깨닫고, 일곱 번째 온거님의 지평에서는 가피적 수행에서 자립적 수행으로 전환하고,  여덟 번째 아니뮐의 지평에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수행이 진척되고, 마침내 열 번째 빛 구름의 지평에서는 불가사의한 궁극적인 깨달음에 듭니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화엄지평을 설하는 십지경은 초기불교 경전이 제시하는 윤리적 우주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은 어디서 만들어졌을까?

 

화엄경 십지품은 입법계품과 함께 산스크리트 원본이 존재하는 경이라 한다. 수 많은 화엄경의 품에서 오로지 두 개의 품만이 산스크리트 원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품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도올 김용옥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강성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그 밑에 곤륜산맥이 지나갑니다. 곤륜산맥을 남쪽으로 하고 북쪽으로 광막한 사막이 있는데, 그 경계선상에 도시들이 천산남로거든요. 거기에 호탄이라고 하는데, 이 도시에서 화엄경이 만들어 졌어요. 일본학계에서도 정설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를 가볼려고 해요. 어떻게 해서 그런 도시에서 이렇게 위대한 경전이 만들어졌는가? 참 희한한 거죠.

 

(김용옥 교수, <특집>탄허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강설 탄허스님의 화엄세계 2, 불교tv 2013-06-05)

 

 

화엄경은 타클라마칸 사막 아래에 있고 곤륜산맥과 접해 있는 실크로드 도시 호탄에서 편집되었다고 한다. 서역에서 만들어진 경전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동아시아 불교의 최고봉이 된 것이다. 그런 호탄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지도를 검색해 보았다.

 

 

 

B 가 호탄이다.

 

 

화엄경의 탄생지 호탄

 

호탄은 중국인에게 위톈(, 우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호탄의 인구는 현재 28만명이고 주로 위구르족이 거주한다. 호탄은 김용옥선생이 말하는 천산남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호탄은 역사적으로 남쪽 비단길, 즉 서역남로에 위치하였다. 한편 천산남로라 불리우는 길은 천산산맥 바로 아래, 즉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에 있는 길로서 서역북로 중의 하나이다.

 

호탄은 역사적으로 우전국이라 불리웠고 중국 최초로 불교를 받아 들인 도시이다. 중국과 서방을 잇는 비단길과 중국과 인도-티벳,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잇는 주요도로로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호탄에는 기원전 76년에 불교가 전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호탄에서 편집된 화엄경은 언제 중국에 전달 되었을까? 불교신문에 따르면 “5세기 초 법정(法淨)스님과 지법령(支法領)스님 등이 호탄에서 범본(梵本) 〈화엄경〉을 구해 중국으로 갖고 갔다. 이것을 토대로 동진의 불타발타라스님(북인도 출신. 359~429)이 역경(418~420), 34 60권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60권본 〈화엄경〉. 60권본 〈화엄경〉은 흔히 진본(晋本구역(舊譯)·60화엄 등으로 불린다.(2003-04-23 불교신문)”라고 되어 있다. 화엄경이 중국에 전래 된 것은 5세기초라 한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영향인가

 

5세기 초(401) 인도를 순례한 법현스님도 호탄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5세기 호탄은 불교의 전성기기었다. 화엄경이 탄생한 곳 호탄에 김용옥 선생이 가보고 싶다고 한다.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의 최고봉이 나올 수 있었던 곳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호탄에는 불교의 흔적이 없다. 화엄경이 탄생한 호탄에는 이슬람교만 있다. 천오백년전 자신들의 조상은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불교자체를 모른다고 한다. 그런 불모의 땅에서 화엄경이 탄생되었다. 그런 배경에는 지평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보고 열 가지 인식의 지평선을 바탕으로 한 화엄교학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2013-06-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