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행도 좋지만 지금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27. 10:57

 

수행도 좋지만 지금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넷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익명성이다. 현실과 가상공간을 매일 넘나 들며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인터넷 공간은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런 인터넷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익명성이다.

 

이제 일상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인터넷공간에서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 ‘인터넷필명’이다. 다양하고 갖가지 필명을 볼 수 있는데 거의 대부분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다. 오로지 필명으로만 소통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남겨진 글로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겨 진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수행하라는 댓글을 받았는데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거의 대부분 익명으로 소통한다. 로그인 하여 들어 온 경우 간혹 블로그를 볼 수 있어서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지만 대부분 로그인 없이 들어와 글만 남겨 놓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어느 정도 교학에 대한 공부가 되었으면, 수행하십시오..
수행을 하면서 경전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바른 경전의 이해가 가능합니다..
불교는 교학과 수행이 함께하여야 합니다..!!!!!

 

(M법우님)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는 것에 대한 충고의 글이라 본다. 좋은 지적이라 생각한다.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는 법우님들

 

스님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학자도 아닌 것이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이다. 그날 그날 느꼈던 것 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다.

 

2006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으니 8년째 이다. 그 동안 작성된 글이 2200개가 넘었다. 모두 필업이라 본다. 한 번 뱉어진 말을 주어 담을 수 없듯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 인터넷의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매일 구업을 짓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구업이 악업이 되지 않도록 살피고 또 살피고, 과거에 썻던 것 중에 잘못 된 것이 있으면 시간이 오래 지났을지라도 수정을 한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매일 천명 이상 이천명 가까이 관심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는 법우님들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지켜 보아 주신 분들이다.

 

처음에는 같잖게생각하였으나

 

처음에는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글 같잖게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쓰기를 한다. 기분이 좋으면 글을 쓰고 기분이 나쁘면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오래 전부터 지켜 보던 법우님들은 스토리를 대강 알고 있다. 교학 이야기 뿐만 아니라 수행이야기등도 종종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방문한 법우님들은 대체로 같잖게생각하는 것 같다. 대체로 교학만 이야기하고 수행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선사들 법문의 특징

 

불자들은 많이 알아야 한다. 왜 많이 알아야 할까? 그것은 알아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몰라서 탈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 스님들의 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런 스님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제각각이다. 이 스님 말 다르고 저 스님 말 다르다. 그리고 법문을 해도 자신의 이야기 위주이다. 받아 적을 것이 없다. 모두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 또는 신도들한테 들은 이야기 위주이기 때문이다.

 

선사들의 법문의 특징은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하는 식의 반복이다. 이는  불교방송 불교강좌 프로를 다시 듣기로 들으면 알 수 있다. 벌써 햇수로 3년째 방송되고 있는 인천 Y선원의 S선사 법문은 마치 녹음기 틀어 놓듯이 매일 똑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지식이 많기로 한 시간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3년 동안 주로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법문하다 보니 그나물에 그밥이듯이 매일 이야기가 똑 같다.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수행에 대한 것이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교학적으로 많이 알아도, 팔만대장경을 모두 알아도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정의 노정기, 안내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이렇게 선사들은 방송을 통하여, 글을 통하여, 법문을 통하여 끊임없이 교학 보다 수행이라고 강조한다. 교학을 공부하고 교리를 따져 알고, 이치를 탐구 하는 것에 대하여 알음알이라고 말한다. 알음알이만 늘면 사량분별하게 되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교학을 공부하고 교리에 대하여 천착하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더구나 재가불자가 많이 아는 것에 대하여 경계 하는 듯 하다.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그럴까? 신도들이 무지해야 자신들의 권위가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신도들이 경전을 읽고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질문하였을 때 답을 하지 못한다면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고 기도위주의 신행생활을 유도한다. 그래서 무지한 신도들은 스님이나 선사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그런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은 이 공부는 스승이 있어야 하고 눈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생업에 바쁜 불자들

 

우리나라 불자들은 천만명에 달한다. 그에 비하여 승려 수는 고작 일이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자 천만명이 모두 스승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모두다 수행지도를 받을 수가 없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바쁘다.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 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시간 내기가 힘든 것이다.

 

불자라고 하지만 절에 찾아 다니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 절도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산유곡에 있기 때문에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다. 그러다보니 절에 가는 것은 부처님오신날과 같이 특별한 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간도 없고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경전 읽을 시간도 없다. 그리고 비싼 경전을 살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짜나 다름 없는 인터넷 공간을 기웃거리게 된다.

 

생업에 바쁜 불자들에게 인터넷공간은 매우 효율적이다. 일터나 집에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심산유곡에 찾아 갈 필요도 없다. 자신과 생각이 맞는 사이트에 접속하여 소통하면 된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경전의 한 구절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경전 한 구절로 인하여 크게 깨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뭇삶의 특징은?

 

바쁘게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기독교처럼 동네 마다 교회가 있듯이 동네 마다 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송에서 스님들이 법문을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 뿐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무지하다. 겉으로는 불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르침에 대하여 안느 것이 별로 없다. 대부분 무늬만 불자인 셈이다. 그런 불자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보통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중생이라 한다. 그렇다면 중생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는 빠알리니까야에 상세히 소개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라다]

 세존이시여, ‘뭇삶’, ‘뭇삶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뭇삶이라 합니까?”

 

[세존]

 

Rūpe kho rādha, yo chando yo rāgo yā nandi yā ta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Vedanāya yo chando yo rāgo yā nandi yā tahā tatra satto tatra visatto tasmā sattoti vuccati.

 

라다여,

1) 물질에 대하여 욕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환락이 있고, 갈애가 있는데, 거기에 붙들려서 꼼짝 못하기 때문에 뭇삶이라고 한다.

 

(삿따경-Satta sutta-뭇삶의 경, 상윳따니까야 S23:2, 전재성님역)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아마 중생일 것이다. 그래서 말끝마다 중생, 중생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중생을 뜻하는 삿따(satta)’에 대하여 뭇삶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뭇삶이라는 말은 인터넷국어사전에 보이지 않는다. 신조어라고 볼 수 있다.

 

번역어 뭇삶 최대히트작

 

하나가 아닌 여러라는 뜻이고, ‘태어나서 죽기에 이르는 동안 사는 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뭇삶은 여럿의 삶’, 즉 중생이라는 한자어를 순 우리말로 표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번역어 중에 최대 히트작은 뭇삶이라 본다. 순 우리말로 표현 하였을 뿐 만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양을 압축해서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생으로 대표되는 중국한자식 용어와 결별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중국불교와 결별을 뜻하고 직수입한 부처님당시의 불교, ‘자주불교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용어라 볼 수 있다.

 

탐진치와 동의어인 뭇삶

 

부처님은 뭇삶에 대하여 욕망, 탐욕, 환락, 갈애 이렇게 네 가지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설명하였다. 그런 뭇삶은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존재들이다. , 좋고 싫음이 확실한 삶을 말한다. 그래서 좋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한다.

 

거머 쥐려 하는 것은 탐욕을 말하고, 밀쳐 내려는 것은 성냄을 말한다. 그래서 뭇삶의 특징은 항상 탐욕과 성냄에 절어 사는 것이다. 이런 삶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뭇삶에 대하여 탐, , 치의 삶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뭇삶과 탐진치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경에서는 뭇삶의 특징에 대하여 오온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욕망, 탐욕, 환락, 갈애에 붙들리게 하는 것은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정신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오온이 모두 욕망, 탐욕, 환락, 갈애에 붙들려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집착이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오취온이라 한다.

 

모래성에 올인 하는 아이들

 

그렇다면 존재의 다발()에 대한 집착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아주 재미 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라다여, 예를 들어 소년이나 소녀들이 모래성을 갖고 논다고 해보자. 그들에게 그 모래성에 대한 탐욕이 없어지지 않고, 욕망이 없어지지 않고, 애착이 없어지지 않고, 갈증이 없어지지 않고, 열망이 없어지지 않고, 갈애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하고, 귀하게 여기고, 그리고 소유 재산처럼 다룬다.

 

라다여, 그대는 이와 같이

 

1) 물질을 흩뜨리고 부서뜨리고 깨부수고 버려버려야 하고, 갈애를 소멸을 위해 수행해야 한다.

 

(삿따경-Satta sutta-뭇삶의 경, 상윳따니까야 S23: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모래성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아이들이 모래로 만든 성에 집착하는 것을 오온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손으로 흩으면 무너져 내릴 모래성에 아이들은 올인한다. 마찬가지로 뭇삶들은 무너져 내릴 물질, 느낌 등 오온에 올인 한다. 그래서 오온이 마치 자기의 모든 것인양 귀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모래성과 같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흩뜨리고 부수고 깨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누구나 꿈꾸는 수행

 

이처럼 현대인들 대부분은 시간 내기가 힘들다. 불자라고 하지만 별도로 시간을 내서 공부한다는 것은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수행은 더 그렇다.

 

우리나라에 수행처가 많은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처를 말한다. 제대로 지도하는 곳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더구나 전국에 걸쳐 산재해 있기 때문에 큰 마음 먹지 않으면 다닐 수 없다. 직장인이라면 주말이 아닌 평일의 경우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집중수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미얀마의 유명수행처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수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불자들이 교학을 통하여 공부가 깊어지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수행이다. 이는 스님들도 마찬가지라 본다. 최근 우학스님이 무문관 수행을 들어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1년 동안 영남불교대학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스님이 3년간 무문관 수행을 시작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이번 안거부터 시작하여 3년간 수행한 다음 2016년 회향할 것이라 한다.

 

이처럼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수행처에서 원없이 수행을 해보고 싶은 것이 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재가자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지금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만명에 이르는 불자들의 근기는 다양하다. 여유가 있고 시간이 남아 도는 사람은 미얀마와 같은 수행처에 가서 수행을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불자들은 먹고 살기에 바쁘다. 그런 불자들을 향하여 교학도 좋지만 수행도 하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은 귀에 와 닿지 않는다.

 

지금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한 구절, 한 게송이 더 마음에 닿는다. 친구나 어른의 말한마디로 생각이 크게 바뀌어 180도 다른 삶을 살아 갔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한 구절로 인하여 커다란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면 수행하는 것 못지 않을 것이다.  

 

 

 

2013-05-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