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멘토와 안심법문(安心法門)
힐링(healing)콘서트
요즘 힐링(healing)을 이야기 하고 있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국민멘토라 불리우는 스님들이 조계사에서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힐링콘서트를 한다고 한다. 우리시대 힐링멘토라 불리우는 혜민, 법륜, 마가, 정목스님 이렇게 네 분의 스님들이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이제 힐링시대라 한다. 바로 이전에는 행복시대이었다고 한다. 행복을 주제로 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와 행복특강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이제 힐링이 대세라 한다.
이처럼 힐링이 대세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사회가 지나치게 물질화 된 것에 대한 반성이라 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무한경쟁으로 소외된 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힐링이라 한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법회와 음악회가 열리고 , 명상과 관련된 책이 나오고, 트위터로 소통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법륜스님의 행복특강,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마가스님의 자비명상, 혜민스님의 트위터를 들 수 있다. 관심 있는 불자라면 한 번쯤 보거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법륜스님의 행복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안양투어의 경우 복도까지 가득찬 사람들을 보았다.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는 정목스님의 간판프로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진행하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일요일 아침 불교방송의 마가스님의 자비명상을 들으면 스님의 음성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혜민스님은 트위터를 통하여 짧게 소통하지만 “토닥 토닥”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 실제로 위로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힐링선(heling禪)
법보신문에서는 혜민, 법륜, 마가, 정목스님 이렇게 네 분의 스님을 국민멘토라 하였지만 여기에 월호스님이 빠져 있다. 월호스님 역시 불자들의 멘토라 볼 수 있는데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항상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스님의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다. 작년 10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있었던 종단출범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이다. 이때 스님은 논문에서 ‘힐링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처음으로 들어 본 힐링선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대는 힐링(healing)이 대세이다. 참선은 본래 안심법문이며, 선사야말로 진정한 심성치유사임을 감안하면, 바야흐로 힐링선(heling禪)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호스님, 선불교의 눈으로 본 오늘의 한국불교-선문단련설을 중심으로-, 2012-10-19,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월호스님은 힐링과 선을 결합하여 ‘힐링선(heling禪)’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였다. 그런 힐링선은 다름 아닌 ‘안심법문(安心法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심법문이란 무엇인가?
안심법문은 달마와 혜가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혜가가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하자,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라고 말한 것이 안심법문의 요지이다. 혜가는 불편한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없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달마는 “그대의 마음을 벌써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라고 말하였다.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이미 불안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콜링(calling) 시대
행복을 말하는 시대에서 이제 힐링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도래할까? 이에 대하여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는 ‘콜링(calling)’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 예측한다. 콜링이란 무엇일까? 김응철 교수의 법보신문 기고문에 따르면 “콜링은 ‘천직(天職)’ 혹은 ‘소명(召命)’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불교적으로는 ‘지혜로운 실천’을 의미하는 ‘지행(智行)’으로 표현할 수 있다.(법보신문 2013-05-18)”라고 하였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웰빙에서 자가 치유를 촉진하는 힐링으로 변해 왔고, 앞으로 콜링으로 변할 것이라 한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해 왔다. 한 때 웰빙열풍에 이어 웰다잉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으나, 이제 그런 말은 쑥 들어갔다. 그 대신 아직까지는 생소한 힐링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가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고, 희망 보다는 절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질 때 웰빙이나 웰다잉 같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금 당장 상처받고 절망 하는 마음에 대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해법을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의 안심법문
힐링을 이야기하는 국민멘토스님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일으킨다. 모두 현실적인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괴로움’이다. 괴롭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멘토스님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힐링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경전 속에 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모두 해법이 제시 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멘토스님의 법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면 된다. 단 몇 줄만 읽어도 안심(安心)이 된다. 안심법문이 별도로 필요치 않은 것이다. 불안했던 마음이 법구경 게송 몇 개 읽다 보면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절정에 달해 도저히 제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때 마다 멘토스님을 찾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법구경을 펼치면 된다. 24개의 주제 중에 17번째 품인 ‘분노의 품’이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kkodhena jine kodhaṃ 악꼬데나 지네 꼬당
asādhuṃ sādhunā jine 아사둠 사두나 지네
jine kadariyaṃ dānena 지네 까다리양 다네나
saccenā' likavādinaṃ 삿쩨나 릴까와디낭.
분노를 여윔으로 분노를 이기고
착함으로 악함을 이겨야 한다.
보시로 인색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을 이겨야 한다. (Dhp 223)
상대방이 화를 내어 화를 유발하였을 때 함께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자는 분노를 여윈자에게 패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두 번째 줄에서 같이 악한 자가 선한 자에게 패하게 마련인 것과 같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서 인색한 사람은 소유와 관련하여 관대한 사람에게 패하게 마련이고, 네 번째 줄에서 거짓을 말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라 하였다.
이전 마음이 되도록
“분노를 여윔으로 분노를 이기고 (Akkodhena jine kodhaṃ)”에 대한 더 구체적인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분노하지 않는 님, 길들여진 님에게
올바로 사는 님, 바른 앎으로 해탈한 님,
고요한 그와 같은 님에게
어떻게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S7:2)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의 지배계층인 브라만에서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자가 속출하였다. 유력 가문의 브라만이 부처님에게 화풀이를 하자 부처님이 게송으로 답한 것이다.
이와 같이 법구경이나 상윳따니까야 게송 몇 개만 접해도 화가 났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안심(安心)이 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빠알리니까야는 힐링멘토나 다름 없다.
버려지는 것과 얻어지는 것
그런데 게송을 읽는 것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선정삼매에 드는 것이다. 선정삼매에 들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이 있다.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idhāvuso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bhikkhuno kāmacchando pahīno hoti, byāpādo pahīno hoti, thīnamiddhaṃ pahīnaṃ hoti, uddhaccakukkuccaṃ pahīnaṃ hoti, vicikicchā pahīnā hoti.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ev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싸리뿟따]
“벗이여, 첫 번째 선정에서 다섯 가지 요소가 버려지는 대신 다섯 가지 요소가 성취됩니다. 벗이여, 이 세상에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버려지고, 분노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고, 흥분과 회한이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지는 대신, 사유가 성취되고, 숙고가 성취되고, 희열이 성취되고, 행복이 성취되고, 마음의 통일이 성취됩니다. 벗이여, 첫 번째 선정에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버려지는 대신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성취됩니다.”
(마하웨달라경-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선정삼매의 이익에 대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가 말하기를 좌선을 하면 버려지는 것과 얻어지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선정에서 버려 지는 것과 얻어 지는 것
N0 |
버려 지는 것 |
얻어 지는 것 |
1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āchanda) |
사유(尋, vitakka) |
2 |
분노(vyāpāda) |
숙고(伺, vicāra) |
3 |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
희열(喜, piīti) |
4 |
흥분과 회한(uddhacca-kukucca) |
행복(樂, sukha) |
5 |
의심(vicikicchā) |
마음의 통일(心一境, cittassekaggatā) |
참선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더 구체적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만일 다리를 꼬고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이 고행이라면 참선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통일되어 희열과 행복, 평온을 맛 보기 때문에 참선을 하려는 것이다.
참선을 하는 더 근본적인 목적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āchanda), 분노(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한(uddhacca-kukucca), 의심(vicikicchā)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참선을 하게 되면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 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해로운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려서 안심(安心)이 된다. 그리고 희열과 행복감을 맛본다는 것이다.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그러나 참선만으로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해결 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행복을 맛 볼 수 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든지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덕이게 된다. 이를 잘 표현한 말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이다. 12연기 정형구에서 볼 수 있다. 이말은 소까(Soka, 슬픔), 빠리데와(parideva, 비탄), 둑카(dukkha, 고통), 도마낫사(domanassa,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 절망)의 복합어이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누구든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 하였다. 그 방법은 사성제이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mātiha bhikkhave ye te 2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ṃ [PTS Page 120] [\q 120/]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katame ca te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3 desitā, ye vo4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Seyyathī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Ime kho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ahulīkātabbā yathā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nti. "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은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어떠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고득락이라 한다. 현재의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그런 즐거움에 대하여 행복이라 하여 현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의 행복이라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더 비중을 두었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는 태어남 없는 불사의 완전한 열반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sutta)이나 품(vagga)에서도 일상적인 행복을 이야기 하지만 결론적으로 항상 ‘열반’으로 마무리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열반
왜 열반으로 귀결되는가?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문으로 사용되는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라 하였고, 멧따경(자애경, Sn1.8)에서도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na hi jātu gabbhaseyyaṃ punaretī)”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망갈라경(길상경, Sn2.4)에서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ariyasaccānadassanaṃ Nibbānasacchikiriyā ca)”라 하여 역시 열반의 실현으로 마무리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느 경에서나 어느 품에서나 최종목표는 열반의 실현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도 역시 열반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37조도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길에 대한 것이다. 즉,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 사정근(cattāro sammappadhānā), 사신족 (cattāro iddhipādā), 오근(pañcindriyāni), 오력(pañcabalāni), 칠각지(Satta bojjhaṅgā), 성스런 팔정도(ariyo aṭṭhaṅgiko maggo)이다.
전도선언의 목적은?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 하였다. 그래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가르침을 설하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단지 뭇삶들의 일상적인 행복에 한정된 것일까?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보여지는 문구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실현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예를 들어 갠지즈 강, 야무나 강, 아찌라바띠 강, 싸라부 강, 마히 강이든 그들 모든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 간다.
(Chatthapacinacinaninnasutta-동쪽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96, 전재성님역)
팔정도를 예로 든 것이다. 다섯 개의 강이 하나로 모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팔정도를 닦고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에 이를 것이라 한다.
이는 팔정도 뿐만 아니라 칠각지, 사념처 등 37조도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길, 즉 37조도품을 닦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뭇삶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체험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이 바라는 바, 즉 전도선언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길거리에 전도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면 어디든지 어김없이 전도사들을 볼 수 있다. 아예 길을 막고 한사람 한사람씩 검문하듯이 종이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대부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끝까지 들고 있는 경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나 어린애 들이다. 이처럼 타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알리기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인들은 길거리 전도가 없다. 대승보살정신을 구현하려면 기독인들 못지 않게 전도에 열을 올려야 하나 전혀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라고 외친 ‘산띠데바’의 보살정신이라면 누구나 길거리 전도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전도해야 하나
길거리 전도에 대하여 대하여 목사들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판대기를 내려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다 도망가고 피래미 몇 마리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올바른 포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주변에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종교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 대한 표현이 빠알리니까야에 보인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랏타빨라가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청정하고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청정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자,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M82)”일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승가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면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르익었을 때 말한디로 상대방을 끌어 당길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국민멘토는
국민멘토라 불리우는 네 분의 스님들이 27일부터 조계사에서 어떤 치유대책을 내 놓을지 궁금하다. 법보신문에서 ‘국민멘토’라는 거창한 명칭을 부여 하였는데 그에 걸 맞는 법문을 기대해 본다. 사실 국민멘토는 많이 있다. 법문잘하기로 유명한 스님이나 재가의 법사들 역시 국민멘토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진정한 국민멘토는 부처님일 것이다.
비록 부처님이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빠알리니까야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 책만 열면 부처님을 면전에서 보는 것 같이, 바로 옆에서 들려 주는 것 같은 생생한 가르침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이다. 특히 괴로움에 처한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특효약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 )에 처해 있다. 이는 존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이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결국 열반으로 귀결된다. 열반만이 궁극적으로 뭇삶들의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열반타령한다고
그러나 열반을 너무 이야기 하면 비판 받는 것이 현실이다. 재가자가 맨날 ‘열반타령’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열반은 출가자가 추구하는 목표이고 재가자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목표이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어느 종교이든지 베이스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행복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을 믿는 자만이 구원 받아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행복 다음에 무엇인가? 대승불교라면 극락왕생을 발원할 것이다. 좀 더 신심 있는 불자라면 원생을 발원할 것이다. 보살이 되어 다시 태어나 지옥문이 닫힐 때 까지, 허공이 다 할 때까지 남김 없이 제도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어라 하셨을까? 다름아닌 열반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어느 경이나 품이든지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난 다음 열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에서 볼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열반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앙꼬 없는 빵과 같이 밋밋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바퀴가 오늘날 까지 굴러 온 것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체험한 경지에 오른 성자들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D16)”라고 하였다. 승가가 존속해야 함을 말한다. 성스런 승가가 있어야 불자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승가의 일원은 복전이기 때문에 불자들에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재가자라 하여 앙굿따라니까야를 위주로 읽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핵심을 가로지르는 상윳따니까야를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 또 재가자라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비현실적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은 결국 열반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만이 불교의 구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한 구절을 보면 힐링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출가자 역시 무상하다. 출가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로 일생을 마치리라는 보장이 없다. 환속하여 재가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의 삶 역시 무상하다. 재가자라 하여 죽을 때까지 재가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출가하여 승가의 일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범부로 살다 보면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고, 재가자가 출가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열반을 목표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본다.
2013-05-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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