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란다 대학에서 천도재를? 스님들의 성지순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3. 13:33

나란다 대학에서 천도재를? 스님들의 성지순례

 

 

 

불자들이 왜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가?

 

인도성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TV에 인도성지에 대한 프로가 있으면 꼭 본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왜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가?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유훈이 있다.

 

 

[세존]

아난다여, 믿음 있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보아야 하고 경건해야 할 이와 같은 네 가지 장소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아난다여, ‘여기서 여래가 태어났다.’라고 믿음 있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보고, 경외의 념을 품어야 하는 장소가 있다.

 

2) 아난다여,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라고 믿음 있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보고, 경외의 념을 품어야 하는 장소가 있다.

 

3) 아난다여, ‘여기서 여래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라고 믿음 있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보고, 경외의 념을 품어야 하는 장소가 있다.

 

4) 아난다여, ‘여기서 여래가 잔여가 없는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라고 믿음 있는 고귀한 가문의 아들이 보고, 경외의 념을 품어야 하는 장소가 있다.

 

아난다여, 믿음있는 수행자들, 수행녀들, 청신자들, 여자 재가신자들이. ‘여기서 여래가 태어났다.’라고,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았다.’라고, ‘여기서 여래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라고, ‘여기서 여래가 잔여가 없는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라고, 아난다여, 누구든지 이러한 성지순례를 한다면, 그들 모두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이슬람교도는 일생에 한 번쯤은 메카성지순례 하는 것을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의무사항이다. 그런데 불교에도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훈에서 네 곳 성지를 말씀 하고 있다.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Lumbini), 부처님이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사르나트(Sarnath), 부처님이 열반에 든 꾸시나라(Kusinara) 이렇게 네 곳을 말한다.

 

사대성지는 불자라면 한 번쯤 가보아야 한다. 시절인연이 되면 그곳에 가서 경건하게 경외의 념을 품어야 한다. 그럴경우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들의 성지순례

 

불교TV사이트에서 스님들의 인도성지 프로를 보았다. 스님들의 교육을 위해 마련한 조계종 교육원 연수교육단 성지순례 붓다의 제자 붓다의 길을 가다(불교TV 2013-06-17)’라는 프로이다.

 

프로에서는 4대 성지를 비롯하여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천불화현탑이나 상카시아 같은 유적도 보여 주었다. 주로 지안스님이 설명하고 참가한 스님들이 짤막한 소감을 밝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사는 예불용인가?

 

프로에서 관심있게 본 것은 성지에서 예불의식에 대한 것이다.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성지에서 보여준 예불의식이 현지정서와 맞지 않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부처님의 탄생지, 초전법륜지 등에서 보는 스님들의 한국식 예불의식이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해 보였기 때문이다.

 

초전법륜지 녹야원(사르나트)에서 스님들의 예불의식을 보았다. 수십명의 스님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모두 괴색가사를 수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다른 성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평소에는 회색승복을 입고 다니지만 예불할 때 만큼은 괴색가사를 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색가사는 예불의식할 때만 입는 예불의식용으로 보여진다.

 

성지에서 칠정례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 초전법륜지 사르나트에서 괴색가사를 수한 스님들의 예불의식이 열렸다. 불자들에게 익숙한 “지심귀명례”로 시작되는 예경문(禮敬文)이다. 이 예경문은 모두 일곱귀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칠정례라고도 한다.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삼계의 길잡이시고 뭇 생명의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며,

우리들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2.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시방삼세의 수많은 세계에 항상 머무르시는

모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3.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磨耶衆

시방삼세의 수많은 세계에 항상 머무르시는

모든 진리에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4.

지심귀명례 대지문수사리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至心歸命禮 大智文殊舍利菩薩

大行普賢菩薩 大悲觀世音菩薩 大願本尊地藏菩薩摩訶薩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과 실천의 화신 보현보살,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 대원의 화신 지장보살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5.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咐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獨修聖 乃至 千二百 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영축산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중생제도를 부촉받은 10대 제자와 16성인, 500성인, 혼자 수행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성인부터 1200의 모든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비로운 성인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6.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진리의 등불을 이어온 모든 큰스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7.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시방삼세의 수많은 세계에 항상 머무르시는

모든 스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

오직 원하옵나니, 한량없이 많은 삼보께서는

크나크신 자비로써 저의 지극한 예배를 받으시고

깊이 가피력을 베푸시어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 예불문이다.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스님들이 예불할 때 반드시 독송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식 예경문을 역사적인 부처님이 태어난 성지에서 독송한다는 것이 어색해 보인다. 7정례 중에 첫 번째에 해당되는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을 제외 하고 나머지는 현지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같다.

 

빠알리예경문을 하면 어떨까?

 

인도성지는 역사적인 부처님이 탄생하고 설법하고 열반한 곳이다. 이를 4대성지, 또는 8대성지로 부른다. 그런 성지에서 부처님의 행적은 모두 초기경전에 기록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하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럼에도 성지에서 대승불교식 예불을 올리는 것은 역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부처님의 초전법륜지에서 어떤 예경을 올리는 것이 좋을까. 가급적이면 초기경전에 근거한 예불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빠알리어로 된 것이면 더 좋을 듯 하다. 부처님당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지배층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지 않고 민중어인 마가다어를 사용하였다. 빠알리어도 마가도어의 일종이다. 그래서 빠알리 예불문을 사용하는 것이 현지에서는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빠알리어로 된 예불문을 사용한다. 부처님 당시의 민중어 그대로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대승을 신봉하는 불교인일지라도 성지에서만큼은 빠알리어로 예불 올리는 것이 역사적인 부처님에 대한 예의라고 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빠알리 예경문을 독송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이것이 빠알리 예경문이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라고 세 번 독송하는 것이다. 내용은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이다. 이런 예경문은 한문으로 된 “지심귀명례”로 시작하는 문구 보다 훨씬 더 현지정서와 어울린다.

 

‘3전 법륜을 처음 들어 보았다고

 

프로를 보면 초전법륜지에서 한문예불을 마치고 난 다음 지안스님의 법문이 있다. 지안스님의 초전법륜에 대한 법문이 끝나자 참가한 어느 스님은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가 보편적으로 녹야원이 초전법륜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곳으로 이제 까지 알고 있는데, 오늘 지안 큰스님 한테 ‘처음으로’3전 법륜에 대해서 공부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H스님)

 

 

비구니 스님이 말하기를 ‘3전 법륜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고 한다. 지안스님이 법문을 듣고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우리나라 스님들이 초기경전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초전법륜지에서는 초전법륜경을

 

인도에는 수 많은 성지가 있다. 탄생지도 있고, 초전법륜지도 있고, 열반지도 있다. 그런데 성지마다 관련이 있는 경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승경전은 아니다.

 

초기경전, 특히 빠알리니까야에는 부처님의 행적이 적혀 있는 것이 많은데,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의 경우 가장 적합한 경이 초전법륜경(S56:11)’일 것이다.  그런데 비구니 스님은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3전법륜에 대하여 처음 듣는 것이라 하였다.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스님들이 초기경전 공부를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방대한 빠알리니까야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경전 몇 개 정도는 알고 있어도 된다.

 

핵심경전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초전법륜경이다. 더구나 처음으로 설법 하였던 초전법륜지에 갔다면 당연히 초전법륜경을 독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스님은 ‘3전 법륜을 처음 들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대승경전을 신봉하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초기불교에 대한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3전 법륜이란 무엇인가?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지안스님이 설명하였다는 3전 법륜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na suvisuddha ahosi, neva tāvāha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야와끼완짜 메 빅카웨, 이메수 짜뚜수 아리야삿쩨수 에왕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 야타부땅 냐냐닷사낭 나 수위숫당 아호히, 네와 따와항 빅카웨, 사데와께 로께 사마라께 사브라흐마께 삿사마나브라흐마니야 빠자야 사데와마눗사야 아눗따랑 삼마삼보딩 아비삼붓도 빳짠냐싱.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3전 법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 문구이다. 경에서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라는 문구이다. ‘세 번 굴렸다(tiparivaṭṭa)’는 것을 한문으로 표기 하면 삼전(三轉)이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세 번 굴렸다는 것일까? 이는 경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세 번 굴린형태가 열두 가지라 하였다. 이것 역시 경에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을 한자어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라 한다.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선언한 이유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에 대한 것을 경을 근거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1

 

사성제

이해

수 행

완성

고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pariññeyyanti)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pariññātanti)

집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pahātabbanti)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 (pahīnanti)

멸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nti)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 (sacchikatanti)

도성제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nti)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 (bhāvitanti)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2

 

 

1

2

3

고성제

궁극적으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과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nti)

그것은 나에게 완전히 알려졌다.

(pariññātanti)

집성제

갈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거 되어야 한다. (pahātabbanti)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 되었다.

(pahīnanti)

멸성제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nti)

그것은 나에게 실현되었다.

(sacchikatanti)

도성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nti)

그것은 나에게 닦여졌다.

(bhāvitanti)

도의 단계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표1은 경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이다. 이해, 수행, 완성측면에서 3번 굴린 것을 말하고, 고집멸도 네 가지를 곱하면 모두 12가지 형태가 된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을 보면 마치 반복구문처럼 보이고 그 말이 그말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단어가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단어 차이가 표2에 나타나 있다.

 

고성제에 대한 것을 보면 1전에서는 “이것이 성스런 괴로움의 진리이다(Ida dukkha ariyasaccanti”라고 확실히 알아야 한다. 2전에서는 ‘빠린네이얀띠(pariññeyyanti)’라 하여 괴로움은 “완전히 알려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수행을 통하여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3전에서는 ‘빠린냐딴띠 (pariññātanti) ‘라 하여 그리고 괴로움이 완전하게 알려졌음을 말한다. 이는 완성차원으로서 무학도단계(아라한)을 말한다. 이처럼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三轉十二行相)로 청정해졌을 때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대승경전속의 성지 순례

 

초전법륜경의 내용을 알고 성지순례에 임하는 것과 초전법륜경에 무지한채 성지에 앉아 있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성지에 가면 성지에 맞는 초기경을 골라서 독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 스님들의 성지순례를 보면 대승경전에 근거한 것 같다. 바이샬리를 방문하였을 때 나레이터는 대승경전이 시작된 곳이라 하였다. 아마 유마거사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유마경을 의식해서 말한 것 같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대승경전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대승불교의 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가공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성지순례단 프로을 보면 바이샬리에 대하여 유마거사가 활동한 곳이라 말한다.

 

우리나라 성지순례단은 초기불교 경전에 있는 성지를 순례 하기 보다 대승경전속의 성지를 순례 하는 것 같다. 그런 단적인 예를 다음과 같은 나레이터의 목소리로 확인 할 수 있다.

 

 

스님들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쉼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30분 정도 오르면, 성스런 독수리의 산 영축산 정상에 다다른다. 봉우리에 있는 바위가 독수리를 닮아서라고도 하고, 산에 독수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수 많은 제자들과 보살과 신장들이 모두 모여 붓다의 법화경 설법을 들었던 영산회상이 바로 이곳이다.

 

( <특집>붓다의 제자 붓다의 길을 가다, 불교TV 2013-06-17)

 

 

나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영축산은 법화경의 성지이다. 부처님이 영축산에 법화경을 설한 장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영산회상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지심귀명례로 시작 되는 예불을 올린다음 법화경에 실려 있는 게송을 낭송한다. 아마 영산회상과 관련된 게송같다.

 

부처님이 깃자꾸따산에서 법문한 것은

 

하지만 초기경전에 미간 백호광명으로 시작되는 영산회상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 있는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로 시작 되는 수 많은 경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축산이라 불리는 산이 빠알리어로 깃자꾸따산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부처님은 깃자꾸따산에서 어떤 법문을 하였을까? 수 많은 법문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 있는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일 겁의 세월을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일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하셨네.

 

그런데 큰 산은 이처럼

베뿔라 산이라고 불리우니

깃자꾸따의 북서쪽에 놓여 있고

그곳에 마가다의 산성이 있네.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거룩한 진리,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괴로움을 종식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보는 자가 있으니.

 

그는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이리.”

 

(뿍갈라경-Puggalasutta-사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0,전재성님역)

 

 

역사적인 부처님이 깃자꾸따산(영축산)에서 설법한 것이다. “미간의 백호상으로 광명을 놓으시어 동방으로 1 8천의 세계를 비추시니~”로 시작되는 법화경과 다르다. 같은 영축산이지만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

 

깃자꾸따산(영축산)이 법화경 설법장소라 하여 법화경과 관련된 게송을 독송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을 떠올리려 한다면 초기경전을 독송하는 것이 더 맛이 날 것 같다. 부처님이 깃자꾸따산에서 수 많은 설법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 골라서 독송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빠알리어로 독송하면 더 좋겠지만 우리말로 된 경전을 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일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로 시작되는 게송을 읊는다면 부처님이 바로 면전에 있고 바로 옆에서 말씀을 들려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성지에서 반야심경 독송은 타당할까?

 

우리나라 스님들과 불자들은 인도성지 순례를 가면 꼭 하는 의식이 있다. 그것은 반야심경이다. 칠정례와 같은 예불의식을 다 하지 못하다해도 반야심경만큼은 꼭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등 사대 성지에서도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프로에서도 보드가야 불상 앞에서도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을 보았다. 보드가야 대탑이 있는 불상이 대승경전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스님들은 새벽예불에서 가사를 수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부처님의 성지에서 반야심경 독송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대승경전의 정수인 반야심경을 보면 부처님이 설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모든 교리를 공의 입장에서 무()자로 부정하였다. 그리고 공으로 환원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재해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든 것이다. 대승경전의 정수 반야심경을 부처님의 성지에서 독송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나란다 대학에서 천도재를?

 

또 하나 이번 프로를 보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란다 대학을 순례한 스님들은 목탁과 함께 금강경 독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교육원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신라스님들이 여기까지 오셔서 공부를 하시고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못 돌아 가신고선 하염없이 해뜰녁이나 해질녘에 신라쪽을 쳐다 보면서 눈물흘리다가 열반에 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구법승 스님들의 천도재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J 스님, ( <특집>붓다의 제자 붓다의 길을 가다, 불교TV 2013-06-17)

 

 

 

 

 

Nalanda

 

 

 

참으로 놀라운이야기이다. 그리고 한국 스님다운 이야기이다. 나란다 대학에서 천도재를 지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화면에서는 요령소리가 나고 금강경 독경소리가 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나란다 대학에 유학온 신라스님들에 대한 천도재라 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신라스님들이 나란다대학에 유학을 온 것일까? 신라 출신으로 혜초스님은 알아도 아직까지 신라스님들이 나란다 대학으로 유학을 많이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다.

 

또 스님은 이곳 나란다 대학에서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열반에 든 스님들을 위하여 천도재를 열어 천도 해 주었다고 하였다열반에 들었는데 어떻게 천도할 수 있을까? 불교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다! 우리다! 우리다!”

 

프로를 보면 이번 스님들의 성지순례는 조계종 교육원에서 스님들의 연수를 위해 마련한 10 11일의 인도성지순례 한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온 스님들의 인터뷰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순례가 다 끝날 무렵 프로에서는 스님들의 파이팅 장면을 보여 준다.

 

성지순례한 스님들이 한 곳에 모인 장소에서 어느 스님이 큰소리로 한국불교 누가 이끄는가!”라고 외치자 2열로 모여 있는 스님들이 우리다! 우리다! 우리다!”라고 팔뚝 구호를 외친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해외여행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라 보여진다.

 

해외여행지에서 보는 스님들은 걸림이 없어 보인다. 남방테라와다 비구들과 달리 우리나라 스님들은 예불할 때만 가사를 걸친다. 그러다 보니 복장은 매우 자유롭다. 회색빛 승복이지만 스타일은 모두 달라 보인다. 어느 스님은 두루마기 타입이고, 또 어느 스님은 삼베옷 스타일이다. 이렇게 옷입는 것도 다르다 보니 행동 역시 가지 각색이다. 팔자 걸음을 걷기도 하고 두리번 거리며 잡담을 하기도 한다. 승복만 입었을 뿐이지 일반인과 다름 없어 보인다.

 

스님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를

 

불자들은 스님들이 스님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초기경에서 볼 수 있다. 탁발할 때 모습이다. 숫따니빠따에서 보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빔비싸라 왕]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청정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할 뿐 아니라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

 

눈을 아래로 뜨고 새김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천한 가문 출신이 결코 아니다. 왕의 사신들이여,

그를 쫓아가라.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Sn3.1)

 

 

숫따니빠따 출가경의 내용이다.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처음 보고 반한 것이다. 그것은 탁발하러 나갔을 때 모습이다. 눈을 멍에의 길이 만큼 앞만 보고, 눈을 아래로 내려 뜨며 사띠를 확립하며 걷고 있는 장면이다. 이런 모습을 우리나라 스님들에게서 보고 싶다.

 

 

 

2013-06-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