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 금강승(金剛乘)의 얍윰(yab-yum)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5. 12:04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 금강승(金剛乘)의 얍윰(yab-yum)

 

 

 

결혼을 용인하고 있는 종단

 

불교포커스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2013년 조계종 아사리 1차 포럼에서 지현스님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독신문제와 관련해 지현스님은 "한국불교의 60여 종단 중 조계종과 보문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결혼을 용인하고 있다"며 "독신 보살비구승 종단인 조계종은 승복에 변화를 줘 한국불교의 주류적인 전통인 독신승단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사회적인 인식에 차별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대처ㆍ육식 엄금 변별력 갖는다"지현스님, 교수아사리 포럼서 주장, 불교포커스 2013-06-24)

 

 

먼저 놀라운 사실은 독신종단을 표방하고 있는 조계종과 보문종을 제외한 나머지 종단은 결혼을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봄 불교박람회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승복입은 스님과 스님 옆에 있는 중년여자가 함께 다니는 모습이 마치 부부처럼 보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몇해전 TV를 보았는데 강원도 산간에서 폭설이 내렸을 때 산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때 고립된 산사에서 스님과 중년여자가 다정히 차를 마시는 모습이 마치 부부처럼 보였다.

 

스님과 여자가 함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데 삭발염의한 스님이 여자와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스님과 여자가 부부라면 스님혐오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승복을 바꾸자고

 

정화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우리나라 불교는 대처육식을 허용하였다. 일제강점시대 일본불교의 영향탓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을 한 대처승이었고 독신비구승은 극소수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우리나라에서 결혼을 인정하는 종단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지현스님은 독신비구종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승복을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하면 결혼을 허용하는 타종단과 차별화 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지난 3월 조계종 중앙종회에서는 의제개혁특위를 만들어 승복연구를 시작하였다고 보도 하였다. 요지는 율장정신에 맞고 현시대에 맞는 승복을 연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어떤 승복일까? 그래서 기대섞인 희망으로

미래의 승복, 어떤 모양의 가사(Kasaya)일까?’라는 글을 올렸다. 미래 승복은 부처님 당시의 승복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식 가사가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불교계에 두 가지 핫이슈가 있는데

 

스님들의 복장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회색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회색의 전통복장을 하면 스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머리깍고 회색승복을 입으면 스님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나라 스님들은 걸림없이 사는 것 같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영향이어서일까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사상의 영향이어서일까 행동에 거침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때로 천진해 보이기도 하고 나쁜 말로 하면 철이 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걸림없이 살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스님들은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성매수도 하는 것 같다. 종종 발표 되는 신문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최근 불교계에 두 가지 핫이슈가 있다. 그것은 스님들의 계행에 대한 것이다. 설조스님과 장주스님이 폭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폭로한 내용을 보면 불자로서 차마 낯뜨거워 거론하기 조차 민망할 정도의 사건들이다.

 

“끌어내!”

 

먼저 설조스님의 단식사건이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원로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간 설조스님을 강제로 끌어내려한 사건이 보도 되었다. 이른바 “끌어내!”라고 조폭사회에서나 있음직한 사건이 불가에서 발생한 것이다. 총무원장 스님이 스님의 건강을 걱정하여 단식중단을 요청하고 떠나자 마자 벌어진 사건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설조 스님이 물 컵을 방바닥에 던진 까닭은

 

총무원장 일행이 방을 나가고 난 직후 문제가 발생했다.

5~6분 뒤 법주사 주지 현조 스님이 7직과 선방대중 7~8명을 데리고 응주헌에 들어왔다. 문밖에도 몇몇 대중들이 서 있었다. 현조 스님은 설조 스님의 건강을 염려하며 "병원으로 모셔야 겠다. 제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했다.

설조 스님은 "장례나 49재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며 "내 의지와 육신 뿐이다. 내 소망마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느냐. 단식 마칠 의사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잠시 후 현조 스님이 대중들에게 "스님을 모십시다"라고 말하자 스님들이 일어나 설조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설조 스님은 사력을 다해 물 컵을 방바닥에 내리치는 것으로 의지를 피력했다. 컵이 깨져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설조 스님은 동국대 감사시절 얘기를 대중들에게 들려주며 "나를 위해서 끌고 간다지만 날 죽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어딨나. 강제로 하면 내일 아침 기자회견하고 죽고 말겠다"고 했다.

그 사이 문밖에 응급차로 추정되는 차량이 도착하고 2~3명이 내려 방안을 훑어 보기도 했으나 결국 주지 일행도 물러났다.

 

( [인터뷰] 강제 입원 시도 주지에게 물컵 던지며 나무란 설조스님, 불교닷컴 2013-06-21)

 

 

팔순노구의 스님이 원로원 개혁을 요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있었는데, 주지스님과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스님들 여러명이 들이닥쳐서 스님을 끌어 내려 했다는 것이다. 강제로 입원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설조스님은 물컵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고 한다. 마치 용산참사 당시 사건을 떠 올리게 한다. 용역을 동원하여 농성자를 강제로 끌어 내려 한 수법과 조금도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설조스님을 끌어 내려 하기 전에 총무원장스님과 함께 불국사 주지 성타 스님, 종회의원 종상 스님, 성직 스님, 전 법주사 주지 도공 스님, 법주사 주지 현조 스님 등과 함께 응주헌을 찾아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성타스님 과 종상스님이다, 모두 불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스님은 또 다른 사건에 연루 되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대전 버스터미널 근처 ㅇㅇ장 여관에서

 

다음으로 핫 이슈가 장주스님건이다. 장주스님이 조계종 각종 선거의 직선제를 요구하며 고위층의 비리를 공개하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전해지자 불국사 고위층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장주스님이 폭로하겠다는 고위층의 비리는 무엇일까?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장주 스님은 “평생 묻어두려던 사건이지만 불교 개혁을 열망하는 마음에 언급한다”며 “30년 전 대전 버스터미널 근처 ㅇㅇ장 여관에서 스님이 처녀를 겁탈해 임신케 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처녀는 결혼해 스님의 자식을 낳았다. 이같이 내가 폭로할 내용 중에는 세상에 알려지면 스님 노릇할 수 없을 사건이 많다”고 했다.

 

( 장주 스님 “선거법 개정 않으면 폭로 후 소신공양”, 불교닷컴 2013-06-12)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이야기이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될 내용이다. 그런데 실제로 30여년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주스님은 “총무원장 직선제 등 선거법 개정, 멸빈자 대사면, 재가자를 포함한 중앙종회 구성을 9월까지 종단이 수용하지 않으면, 원로의원을 포함한 종단 지도층 인사 비리를 폭로하고 조계사에서 분신 열반하겠다.”라고 밝혔다고 하였다.

 

불국사의 고위층 스님들이 연루되어

 

법주사에서는 80노구의 설조스님이 원로원 개혁을 요구하며 단식중에 있고, 불국사와 인연있는 장주스님은 조계종 개혁을 요구하며 분신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불국사의 고위층 스님들이 연루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설조스님의 단식현장에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과 전주지 종상스님이 등장하였고, 30년 전 대전 버스터미널 근처 ㅇㅇ장 여관 사건을 폭로하려 하자 성타스님과 종상스님 등 불국사 고위층 스님들이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두 사건 모두 불국사 고위층 스님들이 관련 되어 있는 것이다.

 

설조스님의 단식과 장주스님의 폭로에 대하여 격려의 글도 많지만 비판의 글도 만만치 않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분별한 폭로작전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폭로는 결국 종단과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한국불교는 상승세인가 쇠퇴기인가

 

현재 한국불교는 어떤 상태일까? 상승세중일까 아니면 쇠퇴하고 있을까?  불교TV에서 불국사 주지 성타스님은 현재 한국불교는 단군이래 최고의 성장시대를 맞고 있다라고 하였다. 현재 한국불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성장론을 주장한 것이다.

 

반면 법응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출가자 감소와 간화선의 위기 등 양적, 질적으로 쇠락하고 있다. 여기에 거듭되는 승려 비리가 종단 위상의 추락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불교포카스 2013-6-17)”라고 주장하여 한국불교 쇠퇴론을 주장하였다.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성타스님의 성장론과 법응스님의 쇠퇴론을 보면 정반대의 견해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

 

한국불교가 성장일로에 있다고 보는 스님들은 일반적으로 종단 고위층에 있는 스님들이다. 특히 문화유산이 많아 입장료 수입이 좋은 절에 사는 스님들이 그렇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절을 찾아 오고, 절이 북적이는 모습을 보고서 불교가 성장일로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산중에서만 사는 스님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산중을 벗어나기만 하면 불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라곤 교회 십자가뿐이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절을 구경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는 쇠퇴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

 

불자들은 한국불교가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처럼 불국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그것이 일부일 수도 있고 거의 대부분일 수도 있지만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님들이 계행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스님들의 막행막식을 보았다. 스님들과 접하기 힘든 불자가 보았을 때 충격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스님들이 술을 마시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 음주문화는 일반화 되어 있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음주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장주스님의 대전여관 폭로 기사에서 보았듯이 성문제에 있어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독신종단을 표방하는 조계종을 제외한 대부분 종단들이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또 여자와 가까이서 걷거나  마치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이야기 하는 모습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장면이 일반인들에게 노출되었을 때 스님 혐오증을 유발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 조짐은 이미 TV드라마나 영화의 대사속에서 볼 수 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이라든가 염불보다 잿밥등 스님과 관련된 비속어를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행위를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신도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스님들이 식당에서 고기에다 술을 마시고 심지어 담배를 피운다라는 숱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막행막식을 보았을 때 은연중에 TV드라마에서 표현되고, 더구나 소설속에서는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불교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낸 문학작품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스님들의 막행막식을 하면 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문학작품 속에 소재로서 등장할 수 있다. 그런 예를 보았다.

 

일아스님의 아소까에 따르면 문학작품 속에 표현된 불교박해 내용이 있다. 인도에서 힌두교가 크게 융성하였을 때 브라만들은 수 세기 동안 혹독하게 문학작품 속에서 불교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불교도와 접촉하면…,

그는 목욕을 해야 정화된다.

(닐깐뜨의 ‘뿌라야쉬뜨 마유카’에서)

 

2.

“불교사원에 가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으로

그 부정을 제거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아빠라까의 스므리띠 브라다 하리뜨에서)

 

3.

“신이나 조상에게 봉헌한 식사에 불교도나, 아위지까,

노예, 유배자를 대접하는 사람은 100빠나의 벌금이 부과된다.

(까우띨야)

 

4.

“불교 비구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야즈나발까, 유명한 힌두법전 문헌가)

 

5.

“브라흐민이 불교도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 큰 위험에 처했을 때라도 죄가 된다.

(아그니 뿌라나)

 

6.

“하얀 이빨, 눈은 절제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노란 가사를 입은 이 노예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거행할 것이다.

(바유 쁘라나)

 

7.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머리 깍은 사문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진다.

(비누 쁘라나)

 

(아소까, 8 412-413p, 일아스님지음)

 

 

이것이 인도 힌두 문학작품속에 등장하는 불교박해 문구이다. 불교를 비하고 경멸하여 불교를 말살시키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경멸적인 표현을 하였을까? 이는 불교가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의 불교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전혀 다른 불교로 변질 되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후 변질된 불교는 민중들의 혐오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속에서 불교에 대한 경멸적 표현이 나타났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타락했길래 민중들로부터 외면 받았을까?

 

주술적 의례와 신비주의

 

인도에서 불교는 7세기에 접어 들면 급격하게 밀교화 된다. 현장스님이 7세기 초반 인도를 순례 하였을 당시 밀교화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스님이 떠난 후 한 세대만에 인도대륙에서는 밀교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사실상 밀교불교가 되었다.

 

밀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경서원에서 발간한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밀교의 특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는 주술적인 의례를 조직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이다.

 

주술은 신이나 운명 혹은 자연현상 등 우리들의 행 불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작동시켜 원망(願望)을 이루게 하려는 의도나 수단이다.

 

또한 신비주의란 우주의 중심-절대자인 신등으로 불리우는 존재와 자기와의 내면적인 결합을 감지하여 얻게 되는 심리상태이다.

 

(밀교의 특질, 인도불교사 154P, 경서원)

 

 

7세기 인도에서 밀교화된 불교를 보면 초기불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주술과 신비주의이다. 다라니와 진언을 외우고 존재의 근원과 합일하는 것이 밀교의 특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대승불교의 불보살 외에 힌두교의 여러 존상이 유입되어 힌두교와 불교의 구별이 없어져 버렸다.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을 보면

 

그렇다면 밀교는 얼마나 타락하였길래 힌두문학 작품속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을까? 7세기 말부터 시작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을 보면 알 수 있다.

 

금강승불교는 무엇일까? 경서원의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금강승의 금강은 금강석처럼 변화하지 않는 자아와 법의 자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이 그토록 우려 하였던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도 금강석처럼 변치 않는 자아를 말한다. 사실상 아뜨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금강의 자성, 즉 금강성(金剛性)을 실현 하는 방법을 금강승이라 한다.

 

금강과도 같은 자성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성(空性, Sunyata)’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금강승을 ‘공성승(空性乘, Sunyatayana)’ 이라고한다.

 

남녀교합상, 얍윰(yab-yum)

 

그런데 금강승의 수행법이 매우 독특하다. 불교가 타락하면 그 타락의 끝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금강승의 수행방법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특히 그들의 수행법인 요가는 성적인 쾌락과 결부 되어 있다. 즉 진언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이 중심교의이지만, 금강승에서는 지혜는 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방편은 동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남성으로 비유되어 이 같은 남녀의 교합을 요가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밀교의 특질, 인도불교사 158P, 경서원)

 

 

 

Yab-yum form

 

 

 

지혜와 방편에 대한 내용이다. 정적인 지혜를 여성으로, 동적인 방편을 남성으로 비유하였다. 이에 대하여 티벳 불교에서는 어머니로 표현되는 반야(般若, prajna)와 아버지로 표현되는 방편(方便, upāya)으로 표현한다. 이를 탕카나 조상으로 표현한 것이 ‘얍윰(yab-yum)’이다. 얍윰은 부모를 뜻한다. 부모가 교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남녀교합상을 일컫는 얍윰에 대하여  ‘부모존(父母尊)’이라고 한다.

 

불교가 타락하면 어디까지

 

얌윰은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의 합일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부처님법은 남녀가 교합하는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중생들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명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금강승에서 남녀교합을 요가로 나타낸 것은 힌드이즘의 탄트리즘에서 시바와 샥티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와 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라고 인도불교사에 설명되어 있다.

 

 

 

 

 

얍윰(yab-yum)

돈황박물관(원대)

 

 

 

대승불교의 핵심은 공사상이다. 이 공사상은 밀교에서도 역시 교의의 근본을 이룬다. 그래서 공성의 인식이 지혜이고, 지혜를 실현함으로서 현실상태를 그대로 긍정하게 된다. 그래서 밀교경전에서는 이러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이라 한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수단을 방편(upaya)이라 한다. 따라서 지혜와 방편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금강승은 힌두이즘의 시바(Siva)와 샥티(Sakti)와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Prajuna)와 방편(Upaya)으로 용어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바탕에 있어서는 양자는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금강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에 의해서 얻어진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반야방편(Prajunopaya)’이라 하였다. 지혜와 방편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를 대락(大樂, mahasukha)’이라 한다. 열반을 커다란 행복이라는 뜻의 마하수카 (mahasukha)’로 본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열반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금강승에서는 커다란 행복, 즉 대락(마하수카)이라 한다. 어느 정도 행복한 것일까?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이는 곧 남녀 교합의 경지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강승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성적행위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타락한 불교를 말한다. 불교가 타락하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타락한 불교를 좌도밀교(左道密敎)’라 한다.

 

 

 

 

 

Chakrasamvara Vajravarahi

 

 

 

불교는 시대에 따라 발전해 왔다고?

 

 

종교는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퇴보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대승론자들은 불교는 시대에 따라 발전해 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 덜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대승론자들은 초기불교 또는 근본불라는 말대신 원시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승론자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또 대승론자들은 불교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더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예로 보살사상을 든다. 그리고 더욱 발전된 양상이 공사상이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보살사상, 공사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유식, 여래장, 선불교로 발전되어 왔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못지 않은 수 많은 깨달은 자들이 나타났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를 더욱 더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

 

하지만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이다. 테라와다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깨달은 내용과 나이를 먹어서 깨달은 내용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 즉 무상정득각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위없는 깨달음, 즉 무상정득각을 얻었을 때 부처님은 법을 선포하였다. 그런 과정이 초전법륜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suvisuddha ahosi, athāha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야또 코 메 빅카웨, 이메수 짜뚜수 아리야삿쩨수 에왕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 야타부땅 냐냐닷사낭 수위숫당 아호히, 아타항 빅카웨, 사데와께 로께 사마라께 사브라흐마께 삿사마나브라흐마니야 빠자야 사데와마눗사야 아눗따랑 삼마삼보딩 아비삼붓도 빳짠냐싱. 냐난짜 빠나 메 닷사낭 우다빠디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처음 깨달았을 때 곧바로 법을 설하지 않았다. 이렇게 선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S56: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처음 깨달았을 때 왜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 번 굴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열두가지 형태로 지와 견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를 삼전십이행상 (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 한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부처님은 법을 설한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어서 법을 설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여래 십호중의 하나인 무상정등각자라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부처님에 대하여 ‘일체지자’라 한다. 이렇게 초기불교에서는 무상정득각자로서의 부처님,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으로 본다. 다만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퇴보한 것으로 본다. 본래의 가르침에서 크게 후퇴한 것으로 본다.

 

종교는 퇴보의 역사

 

일반적으로 종교의 역사는 종종 발전이 아니라 퇴보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의 가르침에서 크게 후퇴하였을 때, 타락하였을 때 본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한국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스님들의 계행이 엉망인 것도 본래의 가르침에서 크게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조스님의 단식에서 끌어내!”와 같은 조폭식 조치나, 장주스님의 대전여관 발언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타락하였음에 틀림 없다.

 

승가의 타락에 대하여 일부현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식중인 설조스님의 말에 따르면 종단 고위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타락이 더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위층의 비리 현상에 대하여 역삼각형 모습이라 하였다.

 

왜 비구선언을 다시 해야하는가

 

지현스님은 조계종 교수 아사리 모임에서 승복변화를 촉구하였다. 독신비구종단과 결혼을 허용하는 타종단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조계종단만의 독특한 승복을 입게 되면 한국불교가 성장세를 멈추고 주춤거리고 있는 이 시점에, 대처와 육식의 문제정리는 새로운 부활의 첩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불교포커스 2013-06-24)”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해야 할일이 있다. 그것은 비구선언이다.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불교단체인 사부대중연대회의 에서는 성명을 발표 하였다. 총무원장이 되려면 비구선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성명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는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도박을 하고, 룸살롱 출입하는 스님을 더 이상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갈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스님이 은처의혹을 받는다면 한국불교의 망신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쇠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계를 받을 때 비구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비구선언을 요구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막행막식을 일삼는다면

 

승복을 바꾼다고 해서 차별화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스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구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빅쿠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스님들이 막행막식을 일삼는다면 힌두문학작품에서와 같이

 

 

“만일 불교도와 접촉하면…,

그는 목욕을 해야 정화된다.”

 

“불교사원에 가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으로

그 부정을 제거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신이나 조상에게 봉헌한 식사에 불교도나, 아위지까,

노예, 유배자를 대접하는 사람은 100빠나의 벌금이 부과된다.”

 

“불교 비구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브라흐민이 불교도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 큰 위험에 처했을 때라도 죄가 된다.”

 

“하얀 이빨, 눈은 절제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노란 가사를 입은 이 노예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거행할 것이다.”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머리 깍은 사문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진다.”

 

 

와 같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 할 수 있을까.

 

 

 

2013-06-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