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는 빠알리 경전과 전자사전,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 14:05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는 빠알리 경전과 전자사전,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

 

 

 

번번이 헛탕치다가

 

그 동안 쌓였던 의문이 풀렸다. 빠알리 사전 보는 방법을 알아 내었기 때문이다. 지난 이삼개월간 빠알리사전 사이트를 기웃거렸으나 번번이 헛탕쳤다. 단어를 입력하여 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하게 사전 찾는 법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알고 나니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없기에 헤메이었다.

 

빠알리 사전 사이트 Pāi Dictionary  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은 약 1년 정도 되었다. 그 어떤 사이트 보다도 마음에 든 것은 단어만 입력하면 관련 단어가 고구마 줄기 캐내듯이 줄줄이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영어, 한문, 일어로 번역어가 달려 나왔다. 그래서 궁금하던 빠알리 용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삼개월 전부터 사이트가 먹통이 되었다. 사이트가 개편되고 나서부터이다. 이런 불편함을 글로서 몇 차례 호소한 바 있다. 사실 누가 아는 분 있으면 가르쳐 달라는 신호이었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서

 

이처럼 개편된 사이트가 먹통이 되다 보니 빠알리-한글 사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금한 단어를 일일이 찾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결정적으로 영어 알파벳 순서와 달랐기 때문에 더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한글사전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빠알리사전에 보이지 않는 단어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사전과 한글-빠알리 사전을 겸용으로 사용하면 금상첨화라 본다.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 하면서 지내다가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 해서 다시 사이트를 찾았다.

 

마침내 발견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About This Website’라고 표시된 부분에 The source of the dictionaries come from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라고 소스가 있음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 텍스트로 표시된 부분으로 들어 갔다. 그러자 한문으로 된 중국사이트가 떳다. ‘담마 테라와다 부디즘(Dhamma Theravada Buddhism, 上座部佛敎)’라는 사이트이다.

 

사이는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다운로드와 관련된 내용이 보였다. 이를 캡쳐 하면 다음과 같다.

 

 

Download PCED 1.94 Full Version(139M) (2 link choose one download and unzip is Ok)

上述文件使用解压缩软件解压缩看安裝使用說明行程序 Pced.exe 图标文件

PCED)是自由自由流通分享件版权归作者所有在不用于商牟利之前提众随意流通使用

 

(Dhamma Theravada Buddhism, 上座部佛敎)

 

 

다른 것은 보지 않고 ‘Download PCED 1.94 Full Version(139M)’문구 밑에 있는  美洲下点一를 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클릭 하였다. 그러자 저장하겠느냐는 서브창이 떳다. 저장을 누르고 지정된 폴더에 다운 받았다. 139메가나 되는 용량이어서일까 5분 이상 걸린 것 같다.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는 Pali Canon E-Dictionary Version 1.94 (PCED)

 

마침내 다운을 다 받았다. 그리고 집파일을 열었다. 집파일을 열자 PCED194라는 폴더에 수 많은 서브폴더와 도큐먼트와 실행파일(exe)이 보였다. 파일이 많아서 어느 것을 어떻게 해야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것 저것 건드려 보다가 PCED 와 관련된 exe파일 네 개를 발견하였다. 확장자 exe로 끝나기 때문에 실행파일로 알고 더블클릭 하였다. 첫번째 것 ‘pced.exe’ 을 더블 클릭하자 창이 떴다. 창을 보니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알 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두 번째 실행 파일 ‘pced_EN.exe’ 을 더블 클릭 하였다. 그러자 영문메뉴가 떴다.

 

한문으로 된 것과 달리 영문으로 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지나치려 하였다. 처음 클릭하였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 검색창이 보였다. 시험삼아 빠알리 단어 하나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look up’을 클릭 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빠알리 사전임을 알았다. 그동안 인터넷 사이트로만 제공되던 것을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다운 받은 빠알리사전은 강력했다. 어떤 단어를 집어 넣어도 결과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인터넷 빠알리사전 사이트를 보면 제대로 된 단어만 집어 넣어야 결과를 보여 주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에러처리 하는 것과 달랐다.

 

더구나 다운 받은 빠알리 사전에는 영어번역뿐만 아니라 일어번역과 한문 번역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관련된 용어가 고구마 줄기처럼 죽 달려 나온다. 이전 사이트에서 보여 주었던 그대로이다.

 

빠알리 삼장도 동시에

 

그런데 pced_EN.exe에는 사전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블클릭 하면 빠알리삼장(Tipitaka) 메뉴가 동시에 뜨기 때문이다.  삼장을 보면 위나야삐따까(Vinaya-pitaka, 律藏)와 숫따삐따까(Sutta-pitaka, 經藏), 아비담마삐따까(Abhidhamma-pitaka, 論藏)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앗타까타(Atthakatha, )라 불리는 주석서와 띠까(Tika, )라 불리는 복주석서가 보인다. 그리고 안냐(añña, 史傳其他)  라 불리우는 항목에서는 청정도론(Visuddhimagga)도 보인다.

 

 

 

 

 

이 중 초전법륜경에 대한 것을 찾아 보았다. 숫따삐따까(Sutta-pitaka)에서 상윳따니까야로 들어간다. 초전법륜경은 가장 마지막 상윳따에 있기 때문에 5권에 해당되는 마하왁가빠알리를 선택한다.  그러면 12번째 삿짜상윳따가 나온다. 이를 더블 클릭하면 5권으로 이동하는데 두 번째 품의 첫번째 경이 초전법륜경이다.

 

편리한 ‘The TIPITAKA’ 사이트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찾으면 매우 불편하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라면 THE TIPITAKA 사이트를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특히 경장만 보기를 원한다면 인터넷사이트 THE TIPITAKA 사이트가 훨씬 편하다. 그러나 THE TIPITAKA 사이트에는 주석이나 복주석, 그리고 논외(안냐)가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찾으려 한다면 다운 받은 pced_EN.exe 를 참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THE TIPITAKA 사이트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배열 되어 있다. 초전법륜경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찾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빠를까? 먼저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찾는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사용하는 분류방식을 사용하였다.

 

초전법륜경의 경우 ‘S56:11’로 표기 되어 있다. 이는 56번째 상윳따의 11번째 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추가하여 S56:11(2-1)라 하였다. 여기서 ‘2-1’라는 것은 빠알리성전협회의 분류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는 두 번째 품의 첫 번째 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THE TIPITAKA사이트에서 먼저 삿짜상윳따(Sacca Sayutta)를 찾고 2번째 품인 Dhammacakkappavattana vaggo’로 들어가 첫번째 경인 Dhammacakkappavattana sutta 을 찾으면 된다.

 

스리랑카에 빠알리원전이 전승된 이유 하나

 

왜 빠알리니까야를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들라면 부처님의 원음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민중어인 마가다어로 말씀 하셨다. 마가다어를 쁘라끄릿뜨어라고도 한다. 그 때 당시 민중들이 가장 많이 쓰던 언어이다. 16대국 당시 가장 강성하였고 가장 중심에 있던 마가다에서 쓰였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쁘라끄릿뜨어는 인도에서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통용되고 있었는데 지역마다 약간 차이가 있었다.

 

빠알리어도 지역언어 중의 하나이다. 자료에 따르면 인도 서부지방인 웃자인(Ujjain, Ujjeni, 웃제니)이라 한다. 산치대탑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스리랑카에 빠알리원전을 볼 수 있을까? 이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장로와 관련이 있다. 아소까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출생한 곳이 인도서부의 웃자인이기 때문이다.

 

스리쿠션 돌리 듯이 변질된 불교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당시의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편집되었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원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부처님 말씀 하셨던 말씀을 접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 변질된 말씀이 아니라 원전에 쓰여 있는 말씀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고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빠알리사전을 찾아 본다.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불교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많이 변질되었는지 알 수 있다. 대승불교가 일어남에 따라 빠알리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바꾸어 졌다. 아함경이 대표적이다. 또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으로 전래 되고, 서역에서 취합된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졌을 때 불교는 크게 변질 되었다.  또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미의 변질이 일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당구에서 스리쿠션 돌리 듯이 산스크리트어-서역불교-한문불교로 바뀌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방향을 튼 것이다. 이 모두가 빠알리니까야를 근본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드위빠(dvipa, )와 디빠(dīpā, )

 

한역 아함경에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자신을 섬으로 하고 (Attadīpāna)’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dhammadīpāna)’라고 되어 있. 아함경에서는 등()이라 하였고, 니까에서는 섬(dīpā)이라 하였다.

 

같은 경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등이 맞는 것일까? 섬이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의 글을 참고하여 글(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그리고 윤회의 바다와 ‘섬’)을 올린 바 있다.

 

등에 대한 산스크리트어는 드위빠(dvipa)이다. 공교롭게도 섬을 뜻하는 디빠(dīpā)와 발음이 매우 유사하다. 또 빠알리어 디빠는 등불과 섬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빠알리어를 산스크리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섬이 등불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빠알리어 앗따디빠(attadipa)를 ‘자등명(自燈明)’으로 번역하면 유아(有我)의 상견(常見), 즉 영혼불멸론 혹은 유아론(有我論)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디빠(dipa)를 등불이 아닌 ‘섬’으로 번역하면 ‘자신을 섬으로 삼아’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과 잘 맞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경전의 주석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큰 바다의 섬처럼 안전한 곳인 섬을 네 자신의 안식처로 하여 안주하라.”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주석이 없는 아함경

 

한역 아함경의 문제점은 주석이 없다고 한다. 오로지 번역만 있는 것이다. 이는 대승경전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 한다. 그에 반하여 빠알리니까야 에서는 도처에서 주석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주석에 주석을 한 복주석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과 같은 해설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역 경전에서는 주석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 또 그런 해석이 바른 것인지 알 수 없다.

 

한역 경전에 유명한 게송이 있는데

 

한역 경전에 유명한 게송이 있다. 최근 불교신문에서 지안스님의 글을 보았다. 열반경에 실려 있는 유명한 게송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불교신문 2013-06-24)을 예로 들어 설명한 글이다. 이 게송에 대하여 이시대의 대강백이라 불리는 지안스님은 모든 것은 덧없어서 생겼다 없어지는 법이니 생멸이 없어지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라고 해석하였다. 이 문구는 대반열반경(D16)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 베뿔라산의 경(S15;20)’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빠알리어와 함께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S15;20,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관련된 것이 아닛짜 와따 상카라(Aniccā vata sakhārā)이다. 이에 대하여 지안스님은 모든 것은 덧없어서라고 하였다. 마치 허무주의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 전재성박사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라고 번역하였다. 또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다라고 번역하였다. 특징은 상카라(sakhārā)에 대하여 조건지어진 것또는 형성된 것들로 본 것이다. 참으로라고 번역한 것은 빠알리어 와따(vata) 때문이다.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와따(vata)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다(Aniccā vata sakhārā , D16)”라고 번역한 것이다.

 

제행무상에 대한 문구는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다. ‘삽베 상카라 아닛짜 (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가 그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상카라에 대하여 조건지어진 것 또는 형성된 것들이라 하였다. 또 아닛짜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다 라 하여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또는 변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지안스님은 덧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염세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앞 뒤 생멸을 비교해 보니

 

한문게송 諸行無常 是生滅(생멸) 生滅(생멸)滅已 寂滅爲樂을 보면 생멸(生滅)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앞의 생멸과 뒤의 생멸이 한자어로 모두 같다. 그러다 보니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빠알리 문구를 보면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한문게송

빠알리 게송

 

앞 생멸

 

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은 덧없어서

생겼다 없어지는 법이니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현상

(sakhārā)

生滅

Uppādavaya

뒤 생멸

 

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없어지면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

오온

(pañca-khandā)

 

生滅

Uppajjitvā nirujjhanti

 

 

나와 무관한 생멸

 

첫 번째 생멸은 모든 조건 지어진 것, 형성된 모든 것들, 즉 삼라만상을 포함한 일체의 모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빠알리 게송에서는 자연의 법칙으로서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 ‘웁빠다와야담마(Uppādavayadhamma)’라 하였다.

 

여기서 웁빠다와야(Uppādavaya)는 웁빠다(Uppād, 생성)과 와야(vaya, 소멸)의 복합어이다. 그래서 생성과 소멸, 생멸로 번역된다.  그런 자연법칙은 ‘덧 없다’라기 보다 인간으로서 어찌 해 볼 수 없는 생멸이다.

 

만약 자연법칙을 덧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나의 입장에서 본 것이라 볼 수 있다. ‘덧 없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부 게송은 나와 무관한 것이다. 내가 없어도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지고, 저 바위는  형성되었다고 무너져 내린다. 이것이 첫 번째 문구의 생멸이다.

 

나와 관련이 있는 생멸

 

두 번째 생멸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Uppajjitvā nirujjhanti’라 하였다. 일어남을 뜻하는 Uppajjit의 원형은 Uppajjati이다. 이는 일어나다, 발생하다, 탄생하다라는 뜻이다. 특히 탄생과 관련된 ‘jati’가 복합어 안에 들어가 있다. Jati는 태어남, 다시 태어남의 뜻이 있기 때문에 오온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nirujjhanti의 원형 nirujjhati는 ‘멈추다,파괴되다, 죽다’의 의미이다. 이처럼 뒤 생멸은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것이 모두 포함 되어 있다. 

 

뒤 생멸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 그친 상태를 말한다. 바로 그런 상태가 행복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의 성취는 산천초목과 같은 무정물에서 성취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가진 오온, 즉 유정물에서 성취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해탈과 열반이 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두 번째 문구의 생멸이다.

 

모든 것이 덧없다고?

 

이를 다시 정리하면 앞생멸은 자연의 법칙으로서 생멸, 현상으로서의 생멸, 존재일반으로서 보편적인 생멸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Dhp277)”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뒷생멸은 오온으로서의 생멸을 말한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이루어진 오온에 있어서 생멸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리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15;20)”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생멸과 뒤의 생멸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한문게송에서는 이와 구별없이 사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앞의 생멸에 대하여 모든 것은 덧없다라 하여 마치 자신이 느낀 것처럼 번역한 것이다.

 

()자성의 본소리라고

 

빠알리 원전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이는 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한문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문은 글자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구성된 한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문경전은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그런 예를 보았다. 불교TV사이트에서 원로스님은 적멸위락(寂滅爲樂)()’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경전을 보면 게송에 적멸위락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락’으로 보지말고 ‘악’으로 번역했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누구 하나 날 더러 미친놈이라고 그러지 그 말 귀담아 듣고 생각해 본 사람 없어요.

 

그이야긴 무슨소리냐 하면, 적멸에 고가 있고 락이 있을까? 내가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의 본소리이다’ 이겁니다. 모든 일체의 색경계가 나무면 나무의 제소리가 있고 피리는 피리의 제소리가 있듯이, 다 본음이라는 이야기거든요.

 

마음 가운데 자성자리에서 만법을 생할 수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로 구마라습이 악으로 번역하지 않았겠느냐, 낙이 아니고. 그런데 아무도 들어 주지 아니하고 범생이 오늘 회장님께만 이런 이야기 하네요.

 

(밀운스님, <특집>제8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밀운스님께 듣는다, 불교 tv 2012-12-12)

 

 

원로의원 스님이 한 말이다. 적멸위락에서 락에 대하여 나름대로 해석을 한 것이다. 이라는 것이 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한다. 악은 다름 아닌 자성의 본소리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은 빠알리 원전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처럼

 

시대가 바뀌고 있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문경전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이제 우리말로 된 빠알리니까야가 보급 되어 대세를 형성해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한문경전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글자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 한자는 교리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게송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사구게 형식으로 된 게송을 선사들이 법문할 때 구성지게 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S선사의 법문이 2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S선사는 법문을 하기 전에 사구게를 구성지게 읊는다.  흥에 겨우면 법문 도중에도 읊는다. 마치 목사들이 설교를 하기전에 찬송가를 부르고, 또 설교 도중에 찬송가를 부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사구게를 읊을 때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문구는 길게 빼는 듯이 읊고, 두 번째 문구는 소리를 비튼다. 세 번째 문구는 통곡하듯이 흐느끼는 것처럼 들린다. 마지막 문구는  “~이니라라고 길게 끝을 맺는다. 게송이 끝나면 반드시 나무~ ~미타~하며 길게 뽑는다. 이때 신도들도 함께 합송한다.

 

이런 한문게송과 나무아미타불송을 들으면 마치 시대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사들이 한문경전으로 시대의 흐름을 막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시대에 저항하고 흐름을 막고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2013-07-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