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아낌없이 퍼 주는 부모의 마음, 원인 없이 작용하는 아라한의 마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6. 11:48

 

아낌없이 퍼 주는 부모의 마음, 원인 없이 작용하는 아라한의 마음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났을 때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교교양대학에서 배운대로 행한다면 합장해야 한다. 어떤 스님과 마주쳤건 합장하며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불자로서 기본적인 예의라 하였다.

 

그것은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사문이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버리지 못하고 오로지 거머 쥐려고만 하는 재가자들에게 있어서 버렸다는 것 하나만 해도 충분히 합장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 스님이 어떤 사람인지, 계행이 어떤지를 모를지라도, 떠나서 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만큼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를 가다 스님과 마주치면 합장하며 반배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배웠다.

 

합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 때 길거리에서 스님을 마주치면 반배하며 합장하였다. 특히 산에서 그랬다. 그리고 공항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사는 곳에서 스님을 마주쳤을 때 참으로 난감하다. 그 때 합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대부분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이기 때문이다. 가게를 돌아 다니며 탁발행각을 벌이는 스님들이다.

 

길을 가다 스님을 보았다. 상가가 밀집된 곳이다. 멀리서 보니 틀림 없는 스님이다. 머리에는 모자를 썼지만 회색승복을 입고 염주를 목에 걸친 모습이다. 그리고 바랑도 매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위의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두리번거리더니 중국집으로 들어 가는 것이었다. 거리의 탁발승인 것이다.

 

기독교세가 강한 곳에서

 

사는 곳은 불교세가 약한 지역이다. 눈에 밟히는 것이 교회이다. 구멍가게 보다 더 많은 것이 교회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그리고 동네 마다 성당이 있는데 그 규모가 무척크다. 동네에 크고 작은 교회가 열개 가량 된다면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한동네에 하나꼴이다. 그러나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른 아침 일터에 나가는 길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새벽기도의 영향이어서일까 찬송가를 읊조리며 걷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툭 던지듯이 “예수 믿으세요”하며 지나간다.

 

이렇게 기독교세가 강한 곳에서 절 보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스님 보기도 힘들다. 어쩌다 스님을 보면 거의 대부분 거리의 탁발승들이다. 스님복장을 하고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는 것이다. 실제로 식사를 하다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그 경우 주인은 군말 없이 천원 짜리 한장을 쥐어 준다. 영업에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일까 탁발승들은 한 지역의 모든 가게를 빼놓지 않고 순례한다. 그 가게 주인이 기독교를 믿든 안믿든 상관 없다. 마치 금강경의  차제걸이(次第乞已) ‘하는 것처럼 한 가게씩 차례로 순례하는 것이다.

 

진짜일까? 가짜일까?

 

거리의 탁발승을 볼 때 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저 스님은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하는 의문이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를 판가름 하는 것은 계를 받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비구계를 받았다면 진짜스님이고, 그런 것 없이 단지 승복만 걸쳤다면 가짜스님일 것이다.

 

진짜스님이 탁발행각을 한다면 이는 수행차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짜스님이라면 생계차원으로 볼 수 있다. 걸인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구걸을 하더라도 계를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진다. 그렇다면 걸인과 수행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고대인도에서는 불교수행자만이 걸식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라문을 포함한 육사외도들도 걸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제자의 걸식과 외도의 걸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어느 바라문 걸식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똑같이 걸식을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Na tena bhikkhak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 dhamma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 brahmacariyavā3,
Sa
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영위하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빅카까경-Bhikkhakasutta-걸식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0, 전재성님역)

 

 

빠알리 게송을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걸식자에 대한 것이고, 후반부는 걸식수행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걸식자를 빅카(bhikkha)’라 하였고, 걸식수행자를 빅쿠(bhikkhū)라 구분 하였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빅카(bhikkha)와 빅쿠(bhikkhū)

 

전반부 게송에 따르면, 걸식자는 악취가 나는 가르침(Vissa dhamma)’을 따르는 자들이라 하였다. 부처님 당시 허무주의적 견해와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진 자들을 말한다. 이들에 대하여 단지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하는다는 뜻으로 빅카(bhikkha)’라 하였다.

 

후반부 게송에 따르면, 걸식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빠알리어로 ‘빅쿠(bhikkha)’라 하였다. 걸식수행자라는 뜻이다. 그런 빅쿠에 대하여 공덕(puñña)마저 버리고 악함(pāpa)도 버려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영위하는 자라 하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

 

공덕(puñña)마저 버리고 악함(pāpa)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선행도 하지 않고 악행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악행은 당연히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으로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그렇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으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수행하면 고통에서 해방되고 윤회를 종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그래서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S4:5)”라고 하였지만, 또한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S4: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살아 열반을 실현 하였을 때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라한이 된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고?

 

하지만 이런 말에 오해를 하는 이들도 있다. 아라한이 된 다음에 대체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오로지 자신의 해탈만 추구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그 다음에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번뇌가 모두 소멸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탐,,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남김 없이 소멸된 상태가 아라한이다. 그렇다면 탐, , 치가 소멸된 그 자리에 무엇이 채워졌을까?  가르침에 따르면 관용, 자애, 지혜가 채워진다고 하였다. 즉 탐욕이 소멸된 자리에 관용이, 성냄이 소멸된 자리에 자애가, 어리석음이 소멸된 그 자리에 지혜가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자는 기본적으로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넘쳐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아라한에게 있어서 할 일은 무엇일까?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므로 가정을 이루어 자손을 보았을까? 아니면 사업을 하여 큰 부자가 되었을까?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아라한이 되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 간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굳이 대승보살사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라한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비의 마음이 생겨 나는 것이라 한다.

 

아라한의 마음

 

아라한이 되면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번뇌가 얼마나 소멸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청정해졌는지에 대하여 자신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선언이 나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 아라한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게송을 보면 공덕(puñña)마저 버리고 악함(pāpa)도 버려 (S7:20)”라는 문구가 이를 말한다. 이 것은  티를 내지 않고행함을 말한다. 아라한이라면 악행은 당연히 버려질 것이다. 그런데 공덕마저 버린다고 하였다. 이말은 선행을 해도 티내지 않고 선행을 한다는 말이다.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아라한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 다만 티내지 않고 하는 것이다. 이런 아라한의 행위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끼리야찟따(kiriya citta)’라 한다.

 

끼리야찟따를 한자용어로 말하면 작용심(作用心)  또는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이 된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작용심이다. 원인 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이 무인작용심이다. 행위를 해도 했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은 선업도 짓지 않고 악업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어떤 일을 할까?

 

부모의 마음

 

아라한이 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있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이 있다. 오십대의 법우님은 70대의 어머니로부터 이것 저것 받는다고 한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김치를 담가주고 농산물을 챙겨 준다고 한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 노모가 딸에게 김치를 담가 주고 나서 , 내가 오늘 공덕을 쌓았구나!”라고 말할까? 아마 그렇게 말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식에게 주었으면 주는 것으로 그칠 뿐이지 어떤 댓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노모로부터 김치를 받은 법우님은 그 김치를 딸에게 준다고 한다. 시집간 딸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때 그 법우님이 딸에게 , 내가 오늘 착한 일을 했구나!”라고 일기장에 써 놓듯이 말을 할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행위는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딸은 또 자신의 딸에게 모든 것을 다 주듯이 잘 해준다고 한다. 이제 유치원에 들어 간 어린 아이에게 아낌 없이 잘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우님은 4대에 걸친 모녀가 마치 릴레이 하듯 아래로 베풀고 있다라고 표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안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직계는 아낌 없이 베풀지만 건너 뛰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노모가 50대의 자식을 건너 뛰어 손자에게 직접 챙겨 주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오로지 아래로만 내려 갈 뿐 이라 한다. 그래서 4대가 일렬로 앉아 직계 자식의 뒷통수만 바라 보고 있는 형국이라 하였다.

 

이것이 아라한의 마음이다. 선행을 했어도 티내지 않고 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영위하며 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를 걸식수행자, 즉 빅쿠라 하였다. 그런 빅쿠는 어떤 것일까?

 

빅쿠(bhikkhu)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빅카(bhikkha)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음식을 얻어 먹는 자(begged food,施食)’를 말한다. 걸식자 또는 걸인이라는 뜻이다. 빅쿠(bhikkhu)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빅쿠는 사전적으로 ‘A beggar; a mendicant friar; a Buddhist monk, 比丘, 苾芻, 乞者, 乞食者’라 표현된다.

 

그러나 빠알리 전자사전 PCED194에 따르면 빅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고 있다. 이를 번역해 보았다.

 

 

bhikkhu:

A fully ordained disciple of the Buddha is called a bhikkhu. "Mendicant monk" may be suggested as the closest equivalent for "Bhikkhu", literally it means "he who begs" but bhikkhus do not beg. They silently stand at the door for alms. They live on what is spontaneously given by the supporters. He is not a priest as he is no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He has no vows for life, but he is bound by his rules which he takes of his own accord. He leads a life of voluntary poverty and celibacy. If he is unable to live the Holy Life, he can discard the robe at any time.。

 

 

빅쿠:

구족계를 받은 부처님의 제자를 빅쿠라 한다. 걸식에 의존하는 승려는 가장 빅쿠다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빅쿠는 문자적으로 구걸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보시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다만 자신이 준수하는 계율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 만일 그가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면, 그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

 

(빠알리 전자사전 PCED194)

 

 

 

 

 

bhikkhu

 

 

 

 

 

빅카와 빅쿠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문장이다. 걸식을 하지만 걸인과 다른 이유에 대한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와 관련 된 것이다. 빅쿠는 비구계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빅쿠라 하였다. 만일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빅쿠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50가지에 달하는 비구계를 지키는 자가 비구인 것이다.

 

 

계를 지키기 어려우면

 

그런데 비구계를 지킬 자신이 없으면 자발적으로 가사를 벗으면 된다고 한다. 재가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 둔 사람이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율사인 철우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비구가 자유롭게 세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비구계를 지키지 않거나, 못하는 경우나, 걸식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비구의 생활을 그만두고 재가자의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한 번 비구생활을 그만둔 사람이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서 비구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출가와 환속을 일곱 번까지 반복할 수 있다. 환속과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일이 가능하다.

 

( 21. 사계(捨戒 : 還戒), 철우스님, 불교신문 2005-11-26)

 

 

환속하는 경우 계를 지키기 어려워서 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계를 버린다고 고하고 재가자의 삶으로 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오계를 준수하는 우바새의 삶을 살다가 다시 출가 할 수 있는데, 법대로 환속한 사람은 구족계를 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환속과 출가를 일곱번 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 네가지 바라이를 범하였을 경우 추방되는데 그 경우 재출가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네 가지 바라이는 사람을 죽이는 것, 도둑질 하는 것, 음란한 짓을 하는 것,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거짓말 하는 것을 말한다.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토막처럼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는 자, 비구계를 지키기 힘든 자는 가사를 벗으면 된다. 그럼에도 계를 어긴 자가 끝까지 승단에 남아 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도박, 룸살롱 출입, 은처, 횡령 등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승단에 남아 있다면, 그리고 직업으로서 승려 생활을 한다면 적주비구에 해당될 것이다.

 

겉으로는 비구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비구라고 볼 수 없을 때 그런 집단을 무어라 불러야할까? 불행하게도 한국불교에서 그런 현실을 목격한다. 비구라고 하지만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 승려들을 말한다. 그런 승려들을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 한다. 비구도 아니고 불자들도 아닌 집단을 말한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반승반속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계행이 나쁜 사람은 나쁜 계행 때문에

 

(1)신들과 인간들이 불쾌하게 여긴다.

(2)동료 수행자들의 훈도를 받을 수 없다.

(3)나쁜 계행을 비난할 때 괴로워한다.

(4)계를 지닌 이를 찬탄할 때 후회한다.

(5)그 나쁜 계행으로 인해 대마로 만든 옷처럼 추하다.

 

 

계행이 나쁜 사람의 견해를 따라 행하는 이들은

 

(1)오랫동안 처참한 곳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과 속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5)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게 살 수 없다.

(8)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동료 수행자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나니

마치 화장터의 불이 바라문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9)수승한 법을 증득할 수 없나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나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불의 무더기의 가르침(火聚經, A.iv.128-34)에서설한 그런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1장 계, 151)

 

 

5세기 붓다고사는 반승반속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토막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승과 속으로부터 모두 제외된다고 하였다.

 

혹시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 계를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을 하고 있다면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서울대공원의 탁발승

 

서울대공원에 가면 몇 년째 절을 하는 스님이 있다. 지하철에서 빠져 나와 서울대공원 분수대에 진입하기 전에 가장 목 좋은 자리에 있는 스님이다.

 

이 스님에 대하여 여러 차례 비판의 글을 썼다. 조계종에서 금하는 탁발행위로 인하여 대다수 스님들의 위의를 손상시키고 한국불교를 망신시키고 있다고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 그 스님이 거룩한 성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하였다. 한 장소에서 그것도 10년 가까이 절만 하는 스님을 보았을 때 비록 그 행위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짜승려처럼 보일지라도 계를 어기면서 반승반승의 삶을 살아 가는 스님들 보다 더 낫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차제걸이 하듯이 가게를 들락거리는 탁발승 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되었다.

 

비록 옷은 다 헤어지고 얼굴에는 고뇌에 가득찬 모습이지만 천천히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절을 하는 모습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보았다. 비구계를 받은 빅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걸식에 의존하는 걸식자, 빅카(bhikkha)’임에 틀림 없다.

 

 

 

 

 

 

 

2013-07-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