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1. 11:38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고

 

 

 

평소보다 조회수가 급증하였는데

 

평소보다 조회수가 급증하였다. 약 이삼십프로가 증가하여 이천명에 육박하였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증가하였을까? 블로그 관리를 열어 보니 게시글 베스트 1위에 한국의 새로운 카스트제도, 공무원 연금 귀족가 올라와 있다. 412회이다. 이 조회수로 인하여 일일 조회수가 급증한 것이다.

 

글은 지난 2월 18일에 올린 것이다. 그런데 매월 베스트 조회수에서 항상 상위를 기록한다. 공무원 연금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하여 지적한 글이다. 이어서 이와 관련된 여러 편의 글을 썼는데, 이런 글 역시 항상 상위에 랭크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연금을 버려라!” 공무원의 삼중혜택’이다.

 

이렇게 두 개의 글이 월 조회수 상위에 랭크되는 것으로 보아 연금관련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연금개혁에 찬성하는 측과 해명하는 측의 날 선 댓글 공방이 글을 올린지 5개월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다.

 

공무원연금개혁 관련 글 조회수가 급증하였다는 것은 누군가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 중에 정책입안자가 읽어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글을 읽고 정책에 반영될 수도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아 넷상에 올려진 글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말한다. 반드시 현실공간에서 마이크 들고 외쳐야만 먹히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하나의 공간에서

 

인터넷시대이다. 또 하나의 공간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바쁜 현대인들은 책상에 앉아서도 업무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메일과 전화를 이용하면 돌아 다니지 않고서도 일처리를 할 수 있다. 물건을 부치려면 택배를 이용하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두 배 세 배 효율을 높여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하여 이동한다면 반나절은 쉽게 깨진다. 때에 따라 한나절이 다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터넷을 활용하면 그 만큼 시간이 절약 된다. 그 남는 시간에 자기개발도 하고 글도 쓴다.

 

자기일을 하는 사람,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금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금보다 더 값어치 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 까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게으름피지 않고 할 일을 한다. 더구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기 때문에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무언가 남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것이 불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다. 돌아 다니지 않고 남는 시간에 경전 한 구절이라도 더 보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다.

 

왜 논쟁과 투쟁을 좋아하는가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 그런 소중한 시간에 쓸데 없는 일에 몰두 하는 것은 시간낭비이다. 특히 투쟁과 논쟁과 관련된 일에 휩쓸리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은 투쟁과 논쟁을 삼가는 법문을 남겼다. 숫따니빠따에 있는 투쟁과 논쟁의 경.(Sn4.11)’이 그것이다.

 

경에서 질문자는  “투쟁, 논쟁은 어디서 일어난 것이지, 비탄과 슬픔, 그리고 인색, 자만과 오만, 그리고 중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Sn4.11)”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Piyā pahutā kalahā vivādā
Paridevasok
ā samaccharā ca,
M
ānātimānā sahapesunā ca
Macchiriyayutt
ā kalahā vivādā
Viv
ādajātesu ca pesunāni.

 

[세존]

투쟁, 논쟁, 비탄, 슬픔과 인색, 자만과 오만,

그리고 중상은 좋아하는 대상에서 일어납니다.

투쟁과 논쟁에는 인색이 따르고,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이 따릅니다.

 

(Kalaha-vivada Sutta-투쟁과 논쟁의 경, 숫따니빠따 Sn4.11, 전재성님역)

  

 

투쟁(kalahā, quarrel)과 논쟁(vivādā, dispute)은 좋아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대상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람들은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 다는 것을 말한다. 초전법륜경에서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 S56:11)’와 같은 말이다.  ‘여기 저기서 즐길거리를 찾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이런 갈애는 결국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열등감도 자만이다

 

투쟁과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게송에서와 같이 자만과 오만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 자만(pride)은 어떤 것일까?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우월감이다. 그러나 자만에는 우월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Sn4.5)”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만에는 우월하다는 자만, 동등하다는 자만, 열등하다는 자만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자만이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자만이다. 그렇다면 왜 열등감이 자만일까?

 

지금 나 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 재산으로나 학력으로나 여러가지 면으로 보아 나 보다 훨씬 못하다. 또 신체적조건이나 미모가 나만 못하다. 그럴경우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게 된다. 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자만이라 한다.

 

그런데 나보다 더 나은 자가 있다.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인품도 원만해 보인다. 더구나 재산도 많다. 그것도 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럴경우 사람들은 재산형성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 혹시 불법, 탈법, 투기를 일삼아서 형성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래서 무시한다. 이것이 열등감이다. 나 보다 잘난 남에 대하여 인정하려 않고 깍아내리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다보니 스님들은 종종 기독교와 비교하곤 한다. 전래 된지 불과 2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천주교와 이제 100년이 조금 지난 기독교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한다. 또 불교의 우수한 교리를 예를 들어 마치 유치원 동화 같은 창조론 등을 반박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불교세가 기독교에 밀려, 사회 전분야에서 기독교가 주류로 부상하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열등감이다. 1700년 역사와 전통을 운운하면서 상대방의 종교를 애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열등감 역시 자만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등감도 자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이 ‘동등하다’든가 ‘우월하다’든가‘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때문에 다툴 것입니다.(Sn4.9)”라고 말씀 하셨다.

 

우월감과 열등감을 없애려면

 

그렇다면 우월감과 열등감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해법이 있다. 먼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여기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대부분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그것은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우월감도 자만심도 아니다. 이런 마음 가짐을 하는 것은 자비와 다른 것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자를 향하여 자비심을 낸 다는 것은 자칫 우월감이라는 자만심을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들의 높은 지위, 재산 등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진 것만을 먹을 뿐이고, 내가 일한 만큼만 얻을 뿐이다. 왜 다른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열등감이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발동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등감이라는 자만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2)”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열등감에 따른 자만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Big House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자애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다른 것이다.

 

논쟁과 투쟁의 대가들

 

게송에서 ‘논쟁과 투쟁을 일삼는 자들은 인색하다(Macchiriyayuttā kalahā vivādā, Sn4.11)’ 고 하였다. 이기적이고 탐욕이 많고 베풀지 않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자비롭지 않음을 말한다.

 

소모적인 논쟁과 투쟁을 일삼는 자들은 현실공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공간에도 존재한다. 주로 상견론자(영원주의자) 아니면 단멸론자(허무주의자)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한 자들을 말한다.

 

상견론자와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경전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말은 방편이라거나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법에 집착하게 되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가 아닌 뜻과 마음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래서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이 나왔을 것이다.

 

이처럼 경전을 무시하는 자들은 영원주의자 아니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경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한다. 선사들의 법문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다 보니 모두 제각각이다. 그래서 이 스님 말 다르고 저 스님 말 다르다. 불자들은 어느 스님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진다. 법과 율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경전을 찾아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법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 보면 한결같이 똑 같다. 법문에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상견론자들이나 단멸론자들은 논쟁과 투쟁의 대가들이다. 현실에서나 넷상에서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다 보니 베풀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색한 것이다.

 

인색한 자 죽어서 가는 곳

 

인색한 자 죽어서 가는 곳은 어디일까?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e'dha maccharino loke

kadariyā paribhāsakā,

Aññesa dadamānāna

antarāyakarā narā.

 

Niraya tiracchānayoni

yamalokañcupapajjare,

Sace enti manussatta daidde jāyare kule,

Coa piṇḍo ratī khiḍḍā yattha kicchena labbhati.

 

[세존]

이 세상에서 인색하여

재물을 아끼고 걸식자를 꾸짖으며

베풀고자 하는 다른 이를

베풀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세계에 떨어지며

인간의 세계에 이르더라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네.

 

(Maccharisutta-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9, 전재성님역)

 

 

가르침에 따르면, 걸식자를 꾸짓고 걸식자에게 베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는 죽어서 악처에 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아귀의 세계나 인간으로 태어나도 가난한 집에서 날 것이라 한다.

 

이런 가르침이 있지만 경전을 무시하는 영원론자나 단멸론자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와 같다. 특히 윤회를 무시하는 단멸론자들이 그렇다.

 

불교연합당의 장주스님

 

게송에서 “논쟁이 생겨나면 중상이 따릅니다. (Vivādajātesu ca pesunāni, Sn4.11)”라고 하였다. 논쟁과 투쟁을 일삼다 보면 ‘중상모략(slandering)’하기 쉽다는 것을 말한다. 파당을 만들고, 그 파당에서 또 파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고 싸움박질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모함하고 파멸시키려 하는 것이다. 요즘 조계종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로가 그렇다.

 

장주스님의 폭로로 인하여 한국불교의 치부가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지만 종단의 고위직 승려들이 억대도박을 하였다는 것은 이제 방송과 메이저 신문을 통하여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불교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내부에서 해결해야 함에도 외부의 힘을 빌어 목적을 달성해 보겠다는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그런 장주스님은 어떤 사람일까?

 

장주스님에 대하여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보통스님이 아니다. 스님이지만 전혀 스님 같지 않은 승려를 말한다. 그것은 과거 행적 때문이다. ‘판도라tv’에서 본 스님의 말을 들어 보면 정치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과거 한 때 시도의원에 출마하였다. 또 ‘불교연합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고 지난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후보가 되려 하였다. 이처럼 스님은 불교 보다 정치에 더 관심이 많은 정치승이고 또 한편으로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인다. 그런 스님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폭로한 것이다. 이 모두가 논쟁과 투쟁을 일삼은 결과라 본다.

 

왜 파당을 만드는가

 

논쟁과 투쟁을 일삼는 자들은 모임을 만들고자 한다. 세력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권력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마다 하지 않는다. 세를 규합하고 불리는 것은 물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하여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행위는 정치판 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재가단체에서도 벌어진다. 끼리끼리 노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자들은 주지 않은 것을 빼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자는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Pañcasikkhāpadasutta-다섯 가지 배움의 기초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14:25,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관계를 맺는 자들끼리 서로 어울린다고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한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끼리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23)”라 하였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끼리,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은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끼리 관계를 맺는다고 말씀 하셨다.

 

십선행의 원형

 

논쟁과 투쟁을 일삼는 자들은 중상이 따른다고 하였다. 이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욕지거리를 하고, 이간질을 하고, 꾸며 대는 말을 하는 자들 역시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친절하게도 그 답을 말씀 하셨다.

 

 

1)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이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2) 주지 않은 것을 빼았는 것을 삼가는 이는

주지 않은 것을 빼았는 것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이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4) 거짓말을 삼가는 이는 거짓말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5) 이간질을 삼가는 이는 이간질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6) 욕지거리를 삼가는 이는 욕지거리를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7) 꾸며대는 말을 삼가는 이는 꾸며대는 말을 삼가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8) 탐욕이 없는 이는 탐욕이 없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9) 화내는 마음이 없는 이는 화내는 마음이 없는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10) 올바른 견해를 지닌 이는 올바른 견해를 지닌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Dasakammapathasutta 열 가지 행위의 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14:27,전재성님역)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천수경에서 말하는 십악행에 반대되는 말이다. 십선행을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십악행이나 십선행에 대한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가 오리지날임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가 무지한 이유

 

그런데 빠알리 십선행에서 천수경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열번째 올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에 대한 것이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 라 하여 어리석어 지은 죄업 오늘 모두 참회하옵니다.”라고 번역하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다르다. 정견(Sammādiṭṭhi)을 갖지 못한 것을 어리석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정견이란 다름 아닌 ‘사성제’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차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막연하게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인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 불교에서 어리석음은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 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 무지(無知)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조차 모른다.

그래서 그의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러한 중층적인 무지의 구조 때문에 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뱀의 경 (Sn1.1) 13번 게송 ‘어리석음을 버린’에  대한 각주)

 

 

무명이 왜 어리석음인지 설명하고 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은 무지한 것이고, 그런 무지는 사성제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는 무지를 말한다. 그런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 즉 켜켜이 쌓인 중층의 무지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고집멸도라 하였는데,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도 사성제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무지한 것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파당을 지어 종권투쟁을 하고, 이에 질세라 재가들까지 나서 역시 파당을 만들려고 한다.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고

 

인터넷시대이다. 누구라도 하루에 몇 차례씩 가상공간을 들락 거린다. 그리고 사이버공간을 이용하여 일을 한다. 이처럼 세상은 네트워크로 모두 연결 되어 있다. 그래서 넷상에 커뮤니티도 있고 친구도 있다. 비록 아이디와 필명으로 통하지만 올린 글과 자료로 판단된다. 그래서 올린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귀한자나 천한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넷상에서는 모두 동등하다. 하나의 아이디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조소를 가지기 때문에 메이저 신문사이트나 개인 홈페이지는 주소를 하나를 갖는다. 그런 면에 있어서 또한 공평하다. 따라서 누구나 가상공간에다 집을 지어 놓고 손님을 맞이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이버 공간은 사실상 현실과 다름 없는 세계이다.

 

한국불교에서는 끊임 없는 불사를 하였다. 그 결과 여법한 가람을 갖추게 되었다. 방방곡곡 깊은 산 속에 마치 대궐같은 가람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텅텅 비어 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비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뜻하지 산불이나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으면 불에 탈 염려가 없다. 그리고 집을 짓기 위한 막대한 불사를 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것이다.

 

개종 이야기

 

사이버상에 집을 지어 놓고 글을 쓴지 8년 되었다. 그 동안 수 많은 네티즌들이 방문하였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타종교신자도 있을 수 있고, 초등학생도 방문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감사의 댓글을 받는다. 그런 글 중에 개종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였다고 하였다.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 대승불교를 접하며 불교에 호감을 가졌고,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기독교를 완전히 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감사의 댓글을 보내 왔다. 이 모두가 빠알리니까야에 있는 가르침을 공유한 덕분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넷상에서도 얼마든지 포교가 가능하다. 굳이 심산유곡에 있는 선지식을 찾아 가지 않아도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인터넷에 집을 짓는 것이다.

 

왜 놀러 오는 것일까?

 

인터넷에 집을 지어 놓아도 현실공간 못지 않다. 굳이 현실공간에 불사를 해 놓지 않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잘 전달 될 수 있다. 그것은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개혁을 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단체를 만들고 창종을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포교를 위하여 절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다.

 

현실공간과 다름 없는, 그리고 매일 들락거리는 사이버 공간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는 최적의 조건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홈페이지 하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의욕도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시간낭비라 생각해서 일 것이다. 또 돈도 안되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모른다. 그 시간에 책을 쓰고, 논문을 쓰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보통불자의 집에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아닐까?

 

 

 

 

2013-07-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