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초전법륜경을 외우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9. 15:03

 

초전법륜경을 외우고

 

 

 

초전법륜경을 다 외웠다.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에서부터 시작 되는 초전법륜경에서 마지막 구절인 “~안냐꼰단뇻테와 나망 아호시띠.”에 이르기 까지의 긴 빠알리어 문장이다. 지난 5 28일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면서 발원한지 40여일 만이다.

 

초전법륜경은 빠알리어로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라 한다. 우리말로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이라 한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으로 인하여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하여 일반적으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이라 부른다.

 

벽돌쌓기식으로

 

초전법륜경 전반부, 3(三轉) 까지는 여행지에서 외웠다. 여행지 호텔 아침시간에 주로 외웠다. 그리고 장거리 이동시 미리 준비한 프린트지를 꺼내 보며 수시로 외웠다. 그렇게 처음부터 3전까지 모두 외운 상태에서 귀국하였다. 그러다 몇 일 공백을 가졌다. 처리 해야 할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3전 이후 후반부를 다시 외우기 시작하였다. 사구게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게송을 하루에 하나씩 외우는 방식이다. 그래서 오늘 새롭게 외운 게송이 있다면 어제 외운 게송과 함께 외웠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게송을 외울 때는 이전 게송을 계속 함께 외워 왔으므로 모두 외우게 된다.

 

만일 하루에 한 게송씩만 외우게 된다면 이전 게송은 잊어 버리게 된다. 그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전에 외웠던 것과 반드시 붙여서 외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 게송을 외울 때 모두 외워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벽돌쌓기식이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은 너무 길어서 중간을 끊어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반부를 모두 외우고 난 다음, 전반부를 다시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 이틀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외운 전반부가 이틀만에 모두 복원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전반부와 후반부를 붙여서 외우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전반부와 후반부를 모두 외운 상태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부와 후반부를 붙여서 여러 차례 외운 결과 어느 순간 , 내가 다 외웠구나!”라고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부터는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하여 외웠다.

 

반복구문을 포함하여 외우면 약 40여분 걸린다. 금강경 외우는 시간과 비슷하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금강경과 비슷한 글자수일것이라여겨 진다. 참고로 금강경은 한자어로 5,249자이다.

 

금강경을 외웠을 때

 

경전외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중국 정주-낙양-서안 여행을 갈 때 라따나경(Sn2.1)부터 외우기 시작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자야망갈라가타, 멧따경(Sn1.8), 망갈라경(Sn2.4)를 외웠다. 주로 여행을 떠날 때 경전외우기를 한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마땅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빠알리 경전 이전에는 대승경전을 외웠다. 반야심경, 천수경, 법성게, 금강경 등이다. 모두 2004년 불교교양대학 입학하고 나서 일년 이내에 외었다. 특히 금강경을 모두 다 외웠을 때 매우 환희하였다. 그래서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분이 고양되었다.

 

금강경 외우기는 쉽지 않았다. 금강경의 내용 자체도 어려울 뿐 아니라 한자용어도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문경전은 외국어나
다름 없다. 알고 있는 한자어가 있기 하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자체를 모르니 그저 주문 외우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막무가내식, 우격다짐식으로 꾸겨 넣듯이 외운 것이다. 이때 사용한 기법도 역시 벽돌쌓기방식이다. 한 분 외우고 나면, 이전에 외운 분과 합쳐서 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32분을 외웠을 때 32분을 외움과 동시에 모두 외울 수 있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에왕메수땅(Eva me suta)

 

이제 더 이상 한문경전을 외우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로 전향한 탓도 있겠지만 한문보다 빠알리 문구가 더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처님이 설한 것이고 부처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를 금강경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금강경에서 여시아문 일시불(如是我聞一時佛)~”로 경이 시작 된다. 어느 대승경전이나 똑 같은 패턴이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에서는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로 시작 된다. 우리말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이라고 번역된다.

 

한문 여시아문(如是我聞)’에 해당되는 것이 에왕 메 수땅 (Eva me suta)’이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문으로 여시아문하는 것과 빠알리어로 에왕 메 수땅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그것은 부처님의 원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산스크리트어를 한역한 것이다. 이 말을 중국인들은 금방 알아 들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한역그대로 여시아문이라고 말하면 생소하다. 그때 여시아문은 뜻을 모르는 외국어와 다름 없다.

 

여시아문은 중국어이다. 그러나 에왕 메 수땅은 부처님 당시 언어이다. 부처님이 민중어로 교화 할 때 쓰던 말이다. 그래서 여시아문하는 것 보다 에왕 메 수땅하는 것이 더 가슴에 다가 오는 것이다.

 

일시불에깡 사마양 바가와

 

일시불(一時佛)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부처님은 이라고 해석되지만 한문투이다. 일시불에 대응되는 빠알리어가 에깡 사마양 바가와(eka samaya bhagavā)’ 이다. 빠알리 전자 사전을 찾아 보면 에까(eka)’하나(one)’라는 뜻이고, 사마야(samaya), 시간(time)’이라는 뜻이다. ‘바가와(bhagavā)’는 십호중의 하나인 세존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에깡 사마양 바가와는 우리말로 한때 세존께서는이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한문 일시불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빠알리어 에깡 사마양 바가와라고 외우면 느낌이 다르다. 역시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사용하던 언어이기 때문이다.

 

불립문자와 선종

 

어떤 외국인 스님이 한 말이 있다. 어느 날 이름 있는 스님을 찾아 갔더니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아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영어로 된 경전을 읽어서는 깨달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직까지 우리나라 선사들은 한문경전만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한글이나 영어로 표현 되어 있으면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의 깊고 심오한 진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오늘날 까지 보고 있고, 한문 게송을 읊고 한문이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문으로 된 문장만이 진실한 뜻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이다. 오히려 한문으로 된 문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자가 표의 문자로서 글자 자체가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뫼 산()’의 경우 ()자 모양이 산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수에 따른 논리적 설명으로 되어 있는데 한문으로는 부처님의 논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면 역자에 따라 해석이 서로 다름이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180도 거꾸로인 경우도 있다. 부처님이 무상, , 무아라고 설하였음에도 이를 상락아정으로 바꾸어 해석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 결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불교가 되었다. 선불교가 대표적이다.

 

선종은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언어나 문자로 된 가르침 보다 마음과 뜻으로 전달된 가르침을 중시한다. 이는 선종이 중국적 환경에서 발생된 원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문자체가 논리적 설명을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외별전, 불립문자라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선종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을 특징으로 하다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초기불교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온 현시점에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초전법륜경이다.

 

지금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초전법륜경을 외우는 내내 감동하고 환희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언어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내용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는 반야심경이나 법성계, 금강경 등에서 보는 것처럼 형이상학 내용이 고도로 축약된 것이 아니라, 마치 이야기 하듯이 되어 있고 그 내용이 모두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에 대해서이다.

 

선사와 이야기하다 보면 핀트가 맞지 않음을 느낀다. 선사들의 관심사와 불자들이 생각하는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주로 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 때 마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 등의 문구를 곁들인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재자불자들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고, 나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불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산천초목 산하대지와 같은 자연도 아니고 먼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변과 부딪쳐 발생된 일들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인연 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된 일들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겪고 있는 괴로움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관심사에 대하여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마음 심()자와 사띠(sati)

 

불교에 팔만대장경이 있다. 부처님이 팔만사천 법문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방대한 부처님이 말씀을 한마로 말하면 무어라 할까? 이런 질문에 선불교에서는 ‘마음 심()’자라 한다. 팔만사천 법문이 마음 심자 하나에 다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다르게 말한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37조도품’으로 요약되고, 37조도품은 ‘8정도’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계정혜 삼학은 ‘사띠(sati)’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마음심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사띠라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르니 목적지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팔만대장경을 마음심자로 귀결하는 것은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에 따른 불교전통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음하나로 팔만사천법문을 수렴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팔만사천법문 무용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띠로 수렴하는 경우 이와 다르다. 사띠라는 말은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S46:3)”라는 경전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띠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음 심자로 팔만사천 법문을 내치는 것과 다르다.

 

사띠는 팔만사천 법문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심자와 사띠는 완전히 다른 말이고, 그에 따라 목적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팔만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팔정도라 하였다. 그런데 팔정도는 사성제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성제에서 도성제가 바로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사성제로 귀결된다.

 

사성제는 다름 아닌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런 사성제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명쾌하게 정의 하였다. 고성제에 대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 ariyasacca, 고성제)

No

빠알리어

우리말

1

자띠삐 둑카

jātipi dukkhā

태어남도 괴로움

2

자라삐 둑카

jarāpi dukkhā

늙는 것도 괴로움

3

뱌디삐 둑코

vyādhipi dukkho

병드는 것도 괴로움

4

마라남삐 둑캉

maraampi dukkha

죽는 것도 괴로움

5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appiyehi sampayogo dukkho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6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piyehi vippayogo dukkho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

7

얌삣짱 나 라바띠 땀삐 둑캉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

8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고성제)를 보면 여덟 가지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오온에 집착하는 것, 즉 오취온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 하였다.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 즉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처럼 산천초목 산하대지 삼라만상에 불성 아닌 것이 없다는 우주론적 시각과 다른 것이다. 부처님인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존재들에게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것이다. 문제가 무었인지 알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파악한 것이 위 여덟 가지 괴로움이다.

 

이 여덟 가지의 범주에 걸려 들지 않은 괴로움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온이라 하였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 발생하는 근본원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괴로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면 다음단계는 무엇일까?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한다. 괴로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되는 원인에 대하여 설하셨다. 이를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즉 집성제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 하셨을까? 빠알리 니까야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 하게 말씀 하셨다.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집성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은 딴하(tahā)’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은 것을 말한다. 결국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을 이 딴하로 본 것이다.

 

뽀노바위까(ponobhavikā)

 

이 딴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는 문장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이다. 이는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것으로 번역된다. 특히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여기저기에 환희하며)’에 주목한다. 이는 여섯 감각능력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가만 있지 않는다.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기 때문이다. 만약 즐길거리가 없다면 당장 심심하다” “따분하다” “권태롭다등의 말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입이 심심하지 않게 해 주어야 하고, 귀로는 계속 노래와 같은 좋은 소리를 들려 주어야 한다. 눈은 항상 두리번 거리면서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고 토론사이트를 기웃거린다. 마치 원숭이 눈알 돌아가는 것처럼 잠시도 가만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모두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경에서 말하는 뽀노바위까(ponobhavikā)이다. 즉 감각대상에 대한 존재의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ponobhavikā)하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 없이 여기저기에 환희하며(tatra tatrābhinandinī)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즐길거리를 찿는

 

이와 같은 갈애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감각 대상에 대한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뽀노바위까, ponobhavikā)합니다. 중생이 갈애에 붙들려 있는 한 재생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갈애는 감각대상에서 즐거움을 찾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마치 기름이나 염료액이 표면에 퍼진 상태로 있다가 배여 나오듯이 이 갈애는 즐거워 보이는 감각대상을 좋아하며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이 갈애는 여기저기 즐길 거리를 찾아 다닙니다. 쾌락을 찾는데 절대로 지치거나 지겨워하는 법이 없고 즐거워 보이는 감각대상이 있으면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의 경우, 상류층 사람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하류층 사람들의 삶이 결코 매력적이거나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태어난다 해도 자신들의 삶을 여전히 즐기며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축생의 삶이 즐거운 것이 못되고 혐오스럽고 끔찍스럽게 생각됩니다.

 

우리가 뱀이나 벌레의 형체를 연상하는 것은 역겹습니다. 그렇지만 축생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중생들은 자신의 형체를 아주 좋아하고 그 삶을 즐깁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 만족할 것을 찾는 갈애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에 대하여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 그 어느 곳에서든 여기저기서 즐길 것을 찾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어는 존재이든지 즐길거리를 찾기 때문에 다시태어남을 가져 오는 것이라 하였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 모두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축생들 조차 즐길거리를 찾는 다고 한다. 그 원인을 갈애로 보고 있다.

 

어떻게 소멸해야 하는가

 

괴로움의 발생 원인이 딴하(갈애)에 있음을 알았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제거하는 일만 남았다.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즉 멸성제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o tassāyeva ta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inissaggo mutti anālayo.

 

요 땃사예와 딴하야

아세사위라가니로도

짜고 빠띠닛삭고 뭇띠 아날라요.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든지 명쾌하다. 두루뭉실하거나 애매모호한 것이 없다. 멸성제도 마찬가지이다. 초전법륜경에 멸성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딴하(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즐길거리를 찾아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는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소멸시켜야 하는가?

 

경에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기하고(cāgo)’ ‘버려야 (painissaggo)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 ‘해탈 (mutti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갈애를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해탈하는 것이다. 이것이 멸성제이다. 이 문구는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라는 정형구로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하여 ‘염오-이욕-해탈’로 설명하고 있다.

 

염리(nibbidā)-이탐(virāgā)-해탈 (vimutti)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Nibbinda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라는 정형구는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으로 이끄는 문구라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에서 다음과 말하였다.

 

 

세 가지 사실의 특징(무상, 고, 무아)에 대한 대부분의 경들에 부가된 정형화된 유형에 따르면, 존재의 다발에 대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통찰을 통해 우리는 조건지어진 존재에서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해탈에 이르러 궁극에 도달한다.

 

주석가들은 싫어하여 떠남(nibbidā: 厭離)을 조건지어진 존재에서 보다 높은 통찰을 위한 내면으로의 방향전환이라고 설명한다. 사라짐(virāgā: 離貪)은 갈애의 마지막 궤적을 소멸시키는 출세간의 길, 특히 아라한의 경지로 이끄는 길이다. 해탈(vimutti)은 집착과 번뇌의 마음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그것은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을 통해 확정된다.

 

해탈에 대한 앎과 봄(vimuttiñāadassana:  解脫知見)은 윤회가 정지되고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염리(nibbidā)-이탐(virāgā)-해탈 (vimutti)이다. 이는 초불연에서 말하는 염오-이욕-해탈과 같은 말이다. 단지 단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이다.

 

해탈지견(vimuttiñāadassana:  解脫知見)

 

멸성제에서는 해탈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탈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선종에서처럼 스승이 인가해 주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삼전에 따르면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라는 문구가 이를 말한다. 앎과 봄 āadassana, )’이 발생하였으므로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자신에게 남은 번뇌가 어느 정도인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해졌는지는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앎과 봄에 따른 해탈을 해탈지견(vimuttiñāadassana:  解脫知見)이라 한다.

 

해탈지견이 되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더 닦아야 한다. 설령 사성제를 이해하고 열반을 체험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을지라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 즉 도성제이다.

 

팔정도 정형구

 

초전법륜경에서 도성제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īda:

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

삼마딧티

삼마산깝뽀

삼마와짜

삼마깜만또

삼마아지오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분류 할 수 있다. 계온에 해당되는 것이 삼마와짜 (올바른 언어),  삼마깜만또(올바른 행위),  삼마아지오(올바른 생활),  삼마와야모(올바른 정진)이다. 정온에 해당되는 것은 삼마사띠(올바른 새김)와  삼마사마디(올바른 집중)이다. 그리고 혜온은 삼마딧티(올바른 견해)와 삼마산깝뽀(올바른 사유)이다.

 

혜온(慧蘊)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

 

하지만 팔정도에서 순서는 혜온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사성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팔정도에서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다. 이는 정견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보면 알 수 있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Ya kho bhikkhave,

dukkhe ñāa

dukkhasamudaye ñāa

dukkhanirodhe ñāa

dukkhanirodhagāminiyā paipadāya ñāa,

aya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2)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알고

3)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8,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고, 사성제에서의 도성제는 팔정도이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성제를 이해해야 한다.

 

팔정도를 닦는데 있어서 반드시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혜온-계온-정온-혜온순이라 한다. 처음 혜온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을 말하고, 나중 혜온은 지혜의 완성을 말한다. 그래서 팔정도에서 정견이 항상 앞에 나오는 것이다.

 

빠알리 사성제 노래

 

초전법륜경에서 클라이막스는 사성제이다.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캉 아리야삿짱~(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에서부터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에 이르는 부분이다. 불교의 핵심이라고 부르는 사성제를 잘 요약해 놓은 문구이다. 팔만사천 법문이 이 사성제 문구안에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성제 노래도 있다. 다음과 같은 빠알리어 노래이다.

 

 

 

사성제 노래

 

 

 

삼전십이행상의 축약게송

 

초전법륜경은 크게 사성제와 삼전과 삼전 이후로 나누어져 있다. 따라서 사성제가 정종분이라 볼 수 있고 삼전 이후는 유통분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다른 경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삼전에 대한 것이다.

 

삼전은 세 번 굴린다는 의미이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리면 열두 가지 형태가 된다. 그래서 삼전십이행상(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굴린다는 말인가?

 

삼전십이행상은 반복구문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열두 가지 게송에 대한 내용은 약간씩 다르다.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이다, 이어야 한다, 하였다’로 표현된다. 그래서 특히 ‘이어야 한다’로 표현된 것은 수행의 단계를 말하고, ‘이었다’라고 완료형으로 끝난 것은 수행의 완성을 말한다.

 

그래서 1) 고성제에서는 빠린네이얀띠(pariññeyyanti, 알려져야 한다)와 빠린냐딴띠(pariññātanti, 알려졌다)로 표현되고, 2) 집성제에서는 빠하땁반띠(pahātabbanti, 제거되어야 한다)와 빠히딴띠(pahīnanti, 제거되었다), 3) 멸성제에서는  삿치까땁반띠(sacchikātabbanti, 실현되어야 한다)와 삿치까딴띠(sacchikatanti, 실현되었다), 4) 도성제에서는  바웨땁반띠(bhāvetabbanti, 닦여져야 한다) 바위딴띠(bhāvitanti, 닦여졌다)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알면 길고 지루한 열두 가지의 십이행상을 쉽게 외울 수 있다. 그런데 삼전십이행상과 관련 하여 완성형 형태의 게송이 맛지마니까야와 숫따니빠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전십이행상을 축약하여 놓은 듯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 pahī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세존] 

알려져야 하는 것이 바로 알려지고

닦여져야 할 것은 바로 닦여지고

버려져야 할 것은 바로 버려졌으니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Brahmayu Sutta-브라흐마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91,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셀라경(Sn3.7)에서도 볼 수 있다. 게송에서 바로 알려지고(abhiññāta)고성제에서의 빠린냐딴띠(pariññātanti, 알려졌다)’와 같은 것이고, ‘바로 닦여지고(bhāvita)’는 도성제에서의 바위딴띠(bhāvitanti, 닦여졌다)’와 같은 것이다. 바로 버려졌으니(pahīna)’는 집성제에서의 빠히딴띠(pahīnanti, 제거되었다)’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buddha)’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멸성제의 삿치까딴띠(sacchikatanti, 실현되었다)’로 볼 수 있다. 갈애가 소멸되어 해탈하게 되었을 때 이를 깨달은 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라 하였다.

 

배신하지 않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이라고 할지 모른다. 오로지 돈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겠다고 말하며 열심히 돈을 모은다.

 

그러나 돈은 쉽게 배신한다.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을 경우 오로지 돈만을 위하여 한 평생 보낸 것이 너무나 허무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사랑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배신하게 되어 있다.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인생관과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 간다. 그러나 누구 하나 제행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한 사실은 이세상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배신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전외우기라 본다. 한 번 외워 놓은 경전은 여간해서는 배신 하지 않는다. 설령 잊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몇 번 읽다 보면 금방 복원된다. 그래서 평생 내것이 되는 것이다. 돈이나 사랑과 달리 달아 나지 않는 평생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왜 외워야 하는가

 

누구든지 경전을 읽으면 차분해진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두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대부분 읽는 것으로 그친다. 한번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생노병사등 8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를 단지 읽고 그런 것이 있는 것으로 그친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겉핱기로 아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워야 한다. 그래서 고성제 하면 즉각 8고가 떠올라야 한다. 책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즉각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뱌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짱 나 라바띠 땀삐 둑캉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라고 곧바로 튀어 나와야 한다. 이렇게 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마치 3전에 언급된 빠린냐딴띠 (pariññātanti)’와 같은 것이다.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아는 것은 1(一轉)이다. 이는 단지 책을 보고 한 번 읽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2(二轉)에서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라고 하여 빠린네이얀띠 (pariññeyyanti)’라는 진행형을 사용하였다. 외우기를 예를 든다면 외우는 과정이라 본다.

 

그리고 3(三轉)에서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라고 하여 빠린냐딴띠 (pariññātanti)’라는 완료형을 사용하였다. 외우기를 예로 든다면 다 외운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고성제에서는 이다(~anti)’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nti)’  알려졌다(pariññātanti)’ 이렇게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을 단지 한 번 읽어 보는 것으로 그친다면 1단계인 이다(~anti)’에 머무는 것이라 본다. 8고를 알지만 책을 보아야 알 수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2단계인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nti)’와 유사한 외우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다 외웠을 때 알려졌다(pariññātanti)’와 같이 과거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8고에 대하여 책을 보지 않고도 머리속에서 즉각 꺼내어 알 수 있다. 이렇게 경을 외우게 되었을 때 그 기쁨과 환희는 외워 본자만이 알 수 있다.

 

경전외우기만한 수행이 없다

 

어렵게 경을 외웠다. 이제부터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외워야 한다. 그런데 경을 한 번씩 외우고 날 때 마다 기분이 좋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 부처님이 설한 진리의 말씀을 되새기기 때문이다.

 

선정삼매 수행, 간화선 수행, 위빠사나 수행이 좋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경전외우기만한 수행이 없다고 본다. 일단 외우고 나서 느끼는 그 희열은 경에서 말하는 선정삼매의 희열, 행복, 평온에 못지 않기 때문이다.

 

 

빠알리독송용 초전법륜경

 

 

담마짝깝빠왓따나경

(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

 

 

1.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bārāasiya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바라나시양 위하라띠 이시빠따네 미가다예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2.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dve 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따뜨라 바가와 빤짜왁기예 빅쿠 아만떼시 :

드웨 메 빅카웨, 안따빱바지떼나 나 세위땁바.

 

그 때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의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3.

Yocay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yo cāya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hito,

ete te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에떼 떼 빅카웨,

우보 안떼 아누빠감마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4.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īda:

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까따마 짜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꾸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따띠: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삼마딧티 삼마산깝뽀 삼마와짜 삼마깜만또

삼마아지오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아양 코 사 빅카웨,

맛지마 빠띠빠다 따타가떼나 아비삼붓다

짝쿠까라니 냐나까라니 우빠사마야

아빈냐야 삼보다야 닙바나야 상왓땃띠.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5-1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둑캉 아리야삿짱: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뱌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짱 나 라바띠 땀삐 둑캉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5-2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

kāmatahā bhavatahā vibhavata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사무다야 아리야삿짱: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

까마딴하 바와딴하 위바와딴하.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5-3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

yo tassāyeva ta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inissaggo mutti anālayo.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니로도 아리야삿짱:

요 땃사예와 딴하야 아세사위라가니로도

짜고 빠띠닛삭고 뭇띠 아날라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5-4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īda:

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짱: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세이야티당 :

삼마딧티 삼마산깝뽀 삼마와짜 삼마깜만또

삼마아지오 삼마와야모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6-1

Ida dukkha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당 둑캉 아리야삿짠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아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6-2

Ta kho panida dukkha ariyasacca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네이얀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6-3

Ta kho panida dukkha ariyasacca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냐딴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7-1

"Ida dukkhasamudayo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당 둑카사무다요 아리야삿짠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7-2

Ta kho panida dukkhasamudayo ariyasacca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사무다요 아리야삿짱 빠하땁반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7-3

Ta kho panida dukkhasamudayo ariyasacca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사무다요 아리야삿짱 빠히난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8-1

"Ida dukkhanirodho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당 둑카니로도 아리야삿짠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8-2

Ta kho panida dukkhanirodho ariyasacca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니로도 아리야삿짱 삿치까땁반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8-3

Ta kho panida dukkhanirodho ariyasacca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니로도 아리야삿짱 삿치까딴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9-1

"Id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이당 둑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짠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9-2

Ta kho panid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짱 바웨땁반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9-3

Ta kho panid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땅 코 빠니당 둑카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

아리야삿짱 바위딴띠 메 빅카웨

뿝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

짝쿵 우다빠디 냐낭 우다빠디

빤냐 우다빠디 윗자 우다빠디 알로꼬 우다빠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10.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na suvisuddha ahosi,

neva tāvāha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야와끼완짜 메 빅카웨,

이메수 짜뚜수 아리야삿쩨수

에왕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

야타부땅 냐냐닷사낭 나 수위숫당 아호시,

네와 따와항 빅카웨,

사데와께 로께 사마라께 사브라흐마께

삿사마나브라흐마니야 빠자야 사데와마눗사야

아눗따랑 삼마삼보딩 아비삼붓도 빳짠냐싱.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suvisuddha ahosi,

athāha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Ñāañca pana me dassana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야또 코 메 빅카웨,

이메수 짜뚜수 아리야삿쩨수

에왕 띠빠리왓땅 드와다사까랑

야타부땅 냐냐닷사낭 수위숫당 아호시,

아타항 빅카웨,

사데와께 로께 사마라께 사브라흐마께

삿사마나브라흐마니야 빠자야 사데와마눗사야

아눗따랑 삼마삼보딩 아비삼붓도 빳짠냐싱.

냐난짜 빠나 메 닷사낭 우다빠디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11.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 abhinandunti.

Imasamiñca pana veyyākaraasmi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 vītamala dhammacakkhu udapādi: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이다마워짜 바가와 앗따마나

빤짜왁기야 빅쿠 바가와또 바시땅 아비난둔띠.

이마사민짜 빠나 웨이야까라나스밍 반냐마네

아야스마또 꼰단냣사 위라장 위따말랑 담마짝쿵 우다빠디: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고 기뻐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12-1

Pavattite ca pana bhagavatā dhammacakke

bhummā devā saddamanussāvesu:

"eta bhagavatā bārāasiya isipatane migadāye

anuttara dhammacakka pavattita appativattiy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빠왓띠떼 짜 빠나 바가와따 담마짝께

붐마 데와 삿다마눗사웨수:

“에땅 바가와따 바라나시양 이시빠따네 미가다예

아눗따랑 담마짝깡 빠왓띠땅 압빠띠왓띠양

사마네나 와 브라흐마네나 와 데웨나

마레나 와 브라흐무나 와 께나찌 와 로까스민띠”.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 (반복구문) ***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12-2 (짜뚬마하라지까, 사천왕)

Bhummāna devāna sadda sutvā

cātummahārājikā devā saddamanussāvesu:

 

붐마낭 데와낭 삿당 수뜨와

짜뚬마하라지까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땅위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도(반복구문)

 

12-3 (따와띵사, 삼십삼천)

Cātummahārājikāna devāna sadda sutvā

tāvatisā devā saddamanussāvesu:

 

짜뚬마하라지깡 데와낭 삿당 수뜨와

따와띵사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반복구문)

 

12-4 (야먀, 야먀천)

Tāvatisāna devāna sadda sutvā

yāmā devā saddamanussāvesu:

 

따와띵사낭 데와낭 삿당 수뜨와

야먀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축복 받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반복구문)

 

12-5 (뚜시따, 도솔천)

Yāmāna devāna sadda sutvā

tusitā devā saddamanussāvesu:

 

야망 데와낭 삿당 수뜨와

뚜시따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축복 받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반복구문)

 

12-6 (님마나라띠, 화락천)

Tusitāna devāna sadda sutvā

nimmāaratī devā saddamanussāvesu:

 

뚜시땅 데와낭 삿당 수뜨와

님마나라띠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반복구문)

 

12-7 (빠라님미따와사왓띠, 타화자재천)

nimmāaratīna devāna sadda sutvā

paranimmitavasavattī devā saddamanussāvesu:

 

님마나라띠낭 데와낭 삿당 수뜨와

빠라님미따와사왓띠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반복구문)

 

12-8 (브라흐마까이까, 범천)

Paranimmitavasavattīna devāna sadda sutvā

brahmakāyikā devā saddamanussāvesu:

 

빠라님미따와사왓띠낭 데와낭 삿당 수뜨와

브라흐마까이까 데와 삿다마눗사웨숭 :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세계의 신들도(반복구문)

 

13.

Itiha tena kha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ñchi.

Ayañca dasasahassī lokadhātu

sa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o ca u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 devānubhāvanti.

 

이띠하 떼나 카네나 떼나 무훗떼나

야와 브라흐마로까 삿도 압붓간치.

아얀짜 다사사핫시 로까다뚜

산깜삐 삼빠깜삐 삼빠웨디.

압빠마노 짜 울랄로 오바소 로께 빠뚜라호시:

아띳깜마 데와낭 데와누바완띠.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14.

Atha kho bhagavā udāna udānesi: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Itihida āyasmato koṇḍaññassa aññākoṇḍaññottheva nāma ahosīti.

 

아타 코 바가와 우다낭 우다네시:

“안냐시 와따 보 꼰단뇨, 안냐시 와따 보 꼰다뇨띠”.

이띠히당 아야스마또 꼰단냣사 안냐꼰단뇻테와 나망 아호시띠.

 

이 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이와 같이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읊으셨다.

그래서 존자 꼰당냐는 앙냐 꼰당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S56:11전재성님역)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빠알리독송용 초전법륜경.docx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Part one]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Part Two]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Part Three]

 

 

 

 

 

2013-07-09

진흙속의연꽃

 

 

빠알리독송용 초전법륜경.docx
0.05MB
빠알리독송용 초전법륜경_130626.docx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