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이대로 영원히!”그들만의 리그 불교광장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3. 11:48

 

지금 이대로 영원히!”그들만의 리그 불교광장

 

 

 

 

다음 총무원장은 스님이었으면 좋겠어요불교닷컴에 난 기사의 내용이다. 이 한 마디에 한국불교의 현실이 모두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종책모임 불교광장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는 일제히 불교광장 창립소식을 알려 주었다. 사진과 함께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34대 총무원장 선거를 92일 앞두고 한국불교역사문화회관 컨벤션 센터에서 개최되었다고 한다. 조계사 뒤에 현 조계종 청사가 있는 건물이다.

 

기사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면면을 소개 하였는데 공동대표는 지홍(무소속법보(무량성문(동화사주지성직(화엄)스님이 선출됐고, 감사는 태연(무량초격(법화) 스님이 선출됐다. 부대표는 성월·정문·원경·법안·정도 스님, 운영위원회 위원은 정묵·진화·정념·자현·삼혜·장명·함결·덕문 스님이 맡았다. 사무처장에는 덕문 스님, 대변인에는 덕문·장명 스님이 맡았다. 정호, 우송, 정념, 지운, 흥선, 성문, 돈관, 성타, 원산, 호성, 원행, 진우, 영관, 무상, 성효, 법만, 정수, 범각, 도문, 현조 스님 등 교구본사주지 20명은 지도위원으로 위촉됐다. (불교닷컴 2013-07-11)”라고 소개 되어 있다. 한국불교를 이끌고 있는 스님들의 이름이다.

 

작년 승려도박사건이 일어 났었을 때 경쟁적으로 종책모임이 해체를 선언하였다. 중앙종회에서 종책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지난 1994년 개혁종단 이래 성립된 일종의 당과 같은 것이다. 새누리당, 민주당 하듯이 종회의원들이 만든 정당성격의 종책모임이다. 그래서 화엄회, 무량회 등의  종책모임이 잇달아 해체 선언을 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 주는 듯 하였다. 그래서 패거리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종도와 신도와 국민들에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34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다시 새로운 종책모임이 탄생하였다. 그것도 초대형이다. 과거 모든 종책모임을 아루르는 대규모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면면들을 보니…”

 

스님들의 리그에 재가불자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지만, 거대 정당이 출현하듯이 불교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친 스님들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댓글이다. 댓글을 보면 기사의 이면, 행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 중에서도 비교적 품격있게 쓰는 분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면면들을 보니...

한국불교,조계종의 문제아들은 죄다 모여 있다.
혹시나를 노리는 법등에서부터 장주의 명단에 오른 인믈등등이 즐비하다.
어렵사리 출가하여 고작 한다는 짓이 이 모양이니...참으로 한심스럽다.

이런 면면의 불교광장 이 떨거지들만 없어도...
한국불교는 한결 청정해질 것이다.

 

 

2) 헌법소원이라도 해야 된다...

 

이렇게,
선거를 앞두고 불교광장이라는 도당을 만든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구성원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결정권을 박탈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간접선거를 하는 것도 문제이고,그 간접선거의 참여자 절대다수를 모아 도당을 만드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며,초헌법적인 것이다.
국법에 어긋나는 초헌법적인 만행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최악의 경우 헌법소원에 의하여 그 부당함을 바로 잡아야한다.

 

(sk, 최대 선거캠프 ‘불교광장’ 창립 댓글, 2013-07-11 불교닷컴)

 

 

sk님은 면면들을 보니...’  헌법소원이라도 해야 된다...’라는

두 개의 댓글을 올렸다. 지도자급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기 총무원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맛는 인물로 뽑기 위하여 담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거대조직 불교광장에서 총무원장 후보를 추대하면 사실상 선거는 하나마나가 되었다. 그것은 321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광장에서 추대하는 후보가 후보가 됨가 동시에 사실상 총무원장에 당선 것이나 다름 없다. 이른바 유신시절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 없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왜 거대 종책모임을 발족하였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매일 문안 인사드리는 곳이 있다. 불교닷컴, 미디어붓다, 불교포커스 등 불교 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이다. 거의 8년간 매일 기사와 컬럼과 사설 등을 빠짐 없이 읽다 보니 불교계 돌아 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스님들의 동향은 물론 기자의 성향까지도 알게 된다.

 

불교광장이 창립된 이유는 간단하다. 현 자승총무원장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다름 아닌 기득권 수호이다. 불국사 등 소위 돈되는 곳에 자리잡은 교구본사 스님들이 대거 참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님들의 면면을 보면 이번 장주스님의 억대도박사건에 대한 연루자들이다.

 

이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명백하다. 힘있는 스님들이 대거 모여 든 것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이다. 마치 이땅의 보수기득권 세력들이 보수정당을 지원하여 그들의 기득권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를 싫어 한다. 변화와 분배를 요구하는 자들을 불온시하고 법과 질서라는 명목으로 억압한다. 종교계도 정치판과 조금도 다름 없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하여 입장료 수입이 보장되는 곳에 있는 스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정치판이나 종교계에서 기득권층이 항상 외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대로 영원히!”라는 구호이다.

 

가장 부패한 집단은?

 

국민들은 종교집단이 가장 청정한 줄 알고 있다. 그것은 내막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이 군대가 가장 깨끗한 집단인 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군대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물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비리를 보면 군대만큼 부패한 집단이 없는 것이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겉모양만 보고 청정하다고 볼 지 모르나, 알고 보면 종교집단 만큼 부패한 곳이 없다. 이는 최근 기사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가장 깨끗하고 신성할 것이라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한국의 종교계가 부패한 집단 3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세계적으로는 종교계가 가장 깨끗한 집단에 뽑혔다.

한국투명성기구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국의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분야별 부패 점수(1∼
5점, 높을수록 부패)를 측정한 설문조사에서 정당(3.9점), 국회(3.8점)가 최상위권을 차지했다고 10일 밝혔다.

종교단체 3.4점, 공무원 3.3점으로 뒤를 이었고 사법부·경찰·민간기업·언론이 3.2점이었다. 군대·교육 분야는 3.1점, 보건의료서비스는 2.9점, 시민단체가 2.8점으로 비교적 낮았다.

 

( 가장 부패한 집단은 정치권·종교” 투명성기구 부패점수 설문조사, 공무원·사법부 順, 불교닷컴 2013-07-10)

 

 

기사에 따르면 가장 부패한 집단이 정치권이고 그 다음이 종교라 한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는 종교계가 가장 청렴하다고 한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종교계가 부패지수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기득권 수호때문이라 본다. 정치집단이 가진자들과 이해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집단이 부패지수 2위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종교계도 정치판과 다름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기득권을 지켜 내기 위한 것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스님들의 의한, 스님들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

 

스님들이 종책모임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 해 줄 수 있는 총무원장을 뽑아도 천만재가불자들은 여기에 낄 수 없다. 그리고 교구본사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중앙종회에서 갖 가지 법을 만들어도 재가불자들 역시 참견할 권리가 없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철저하게 스님들 위주로 돌아 간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스님들의 불교, 스님들의 의한 불교, 스님들을 위한 불교이다. 이런 행태에 대하여 불교닷컴 기자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명칭을 붙여 주기도 하였다.

 

승려도박, 은처의혹, 먹튀사건이 일어나도 스님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처벌받는다 해도 솜방망이 징계가 고작이다. 옷을 벗겨 속세로 내 보내는 일은 결코 없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승복을 입고 있는 한 안전한 것이다. 그것은 같은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동료의식, 동류의식의 발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승단은 스님들에게 있어서 안전지대이다.

 

머리 깍고 한번 스님이 되면 영원한 스님이다. 마치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듯이 도박, 은처, 횡령 등 차마 말로 표현하기 민망한 사건들이 일어나도 그때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해결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속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대신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서슴없이 한다. 특히 동진출가한 스님들이 그렇다.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종교단체라기 보다 하나의 이익 단체에 가깝다.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지켜 내기 위하여 뭉쳐진 특수집단으로 보여진다. 이번 불교광장 창립에 모인 멤버들 역시 그렇게 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 하기 위하여 똘똘뭉친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무능력자를 양산하는 곳

 

우리나라 불교속담에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한국불교의 현실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는 속담이다. 심산유곡에서 사는 선사들의 한가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선사들은 할 일이 별로 없다. 참선을 하고 도를 닦는 것 외에 달리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활은 단순하다. 그래서 아는 것도 별로 없다.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하여 공부에 방해 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떻게 될까? 다음과 같은 일아스님의 기고문이 잘 말해 준다.

 

 

<현 실정>

한국에서 강원도 안 가고 선방에만 다녔다는 스님들이 미국에 오면 이분들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맨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식이지요.

 

이런 스님을 사찰이나 신도들이 환영할 리가 없지요. 이 스님을 이렇게 무능력자로 만들어 슬프게 하는 근본원인은 “강원 안가도 기초선원만 나오면 구족계 받는다.”는 종단의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입니다. 일생을 참선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소임이나 사찰운영 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참선만을 한다 해도, 배운 사람이 참선하는 것은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기초선원 제도는 없어져야 됩니다.

 

LA 불교의 모습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스님들을 서당식 강원교육에 선교육만 시키니 한탄스럽습니다. 작금의 종교편향으로 불교를 무시하는 현상은 기독교의 훼불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사안일로 일관해온 스님들의 결과입니다.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2009 11 27일 일아 합장)

 

 

일아스님이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기고문은 스님의 요청에 의하여 삭제 되었다. 그럼에도 인터넷의 속성상 이 글은 인터넷에 널리 유포 되어 있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무능력자만 배출한다고 하였다. 서당식 승가교육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선방에서 오로지 참선만 하는 것도 해당 될 것이다.  10, 20, 30년을 선방에서 보내고 세상 밖으로 나와 보지만 염불, 포교 등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사는 스님들은 한 마디로 무능력자와 같다는 것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는?

 

실제로 들은 이야기이다. 2004년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하여 불교교양대학에 다닐 때이다. 신심으로 반야심경과 찬수경은 물론 금강경을 외웠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절의 주지스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도반 여러 명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스님은 선방출신이었다.

 

스님이 이야기 하기를 선방에 사는 스님들은 염불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천수경을 외는 스님도 매우 드믈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때 당시 크게 놀랐다. 스님이면 기본적으로 염불도 잘하고 천수경은 물론 금강경도 다 외우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느 선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스님은 심산유곡에 토굴을 지어 놓고 혼자 지내고 있다. 가끔 재가불자가 찾아 오면 화두점검을 해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꾸 핀트가 빗나가는 것이었다.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이야기 하였을 때 도무지 합의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스님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아주 젊었을 때 출가한 이유 선방에서 살았고 지금은 개인 토굴에서 살고 있는데 관심사는 화두이었다. 젊었을 때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 받기 위하여 유명스님들을 찾아 나섰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깨달음인지는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 후 새롭게 화두 공부를 하였고 지금도 화두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는 명백하다. 세상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는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지고 화두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오염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에서는 살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모르기 때문이라 본다. 세상 사람을 교화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는 교학이 뒷받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일아스님이 지적하였듯이 선방에서만 사는 스님들은 염불이면 염불, 포교이면 포교 등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력자인 것이다. 그래서 산중에 머무는 것이라 본다.

 

산속의 은둔승

 

우리나라 스님들은 산중에서만 산다. 그것도 깊은 산중이다. 마치 꼭꼭 숨어 살듯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암자, 토굴을 만들어 놓고 산다. 그곳에서 새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과 담을 쌓고 10, 20, 30년 평생 동안 화두를 들며 살아 간다. 마치 신선처럼 살아 가는 스님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가장 적합한 말이 아마 은둔승일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토굴을 지어 놓고 은둔하듯이 살아 가는 것이 한국불교에 있어서 스님의 자화상이다. 그런 은둔승은 세상사람들과 무관한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든 말든 나와 상관 없는 일들이다.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어 가면서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런 스님들이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해와 관련된 것들이다.

 

불국사 법당보살의 위세

 

지난해 불국사에 간적이 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간 이후 수십년만에 두 번째로 가 보았다. 그런데 그곳 대웅전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법당을 지키는 노보살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한 것이다. 법당 앞에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데 찍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세를 준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을 불국사 주인은 누구? 사유화된 문화재관람사찰과 출재가역할분담론라는 제목으로 남겼다.

 

 

 

 

국사

 

 

 

법당보살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마치 불국사의 안주인처럼 보였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 왔음에도 손님 대접은 커녕 이리저리 지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무엇이든지 오래 하면 권위가 생긴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 이었다. 법당보살의 위세가 이 정도라면 불국사를 지배하고 있는 문중의 위세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34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불교광장이 창립되었다. 그런데 그 멤버 중에 불국사 문중의 스님들이 상당수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로 보인다. 수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불국사, 석굴암은 목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픈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들의 입맛에 맡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이처럼 스님들이 산속에 살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것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교닷컴 기자가 종회의원들과 총무원 집행부에 대하여 그들만의 리그라 명명하였을 것이다.

 

아아, 중이 싫으면 절은 어디로 갈꺼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과 함께 절집에서 회자 되는 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야 한다.  절이 스님을 떠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이 스님이 싫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득권 수호와 이권을 위하여 아수라판이 되어 버린 현재 한국불교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의 글을 하나 보았다. 그것은 신문사이트에 올려진 것도 아니고 책으로 나온 것도 아니다.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려진 글이다. 평소 블로그에 종종 댓글을 남겨 주시던 스님이다. 이름 없는 보통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불교는 아수라장인가?

 

한국불교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게 분명해 보입니다.

일제에서 벗어난 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무엇을 했는지 돌아봅니다.

 

비구, 대처분규의 난투극은 결과적으로 정화가 아닌 절 뺏기가 돼버렸고

점쟁이집과 절을 신도들조차 구분을 못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사종단의 난립으로 무슨무슨 조계종만 수십개에 달합니다.

출가와 재가는 샅바싸움으로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갖가지 주장과 아집의 포로가 돼버려 불교의 정체성은 설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라건대 장자종단을 자처하는 대한불교조계종만이라도 교단의 사표가 되어

국민과 신도들의 신뢰를 회복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우린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승려들의 신심은 땅에 떨어져 일어설 줄 모르고 재정의 투명성은 물 건너간지 오래입니다. 급기야는 자정능력이 없는 집단, 이 사회에 불필요한 집단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먹물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부처님과 국민들께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자성과 쇄신을 내세우는 인물들이나 비리를 폭로하는 인물들이나

면면과 그 주장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거의 모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이렇다할 성과가 없으니 박수를 쳐줄 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도박과 축재, 은처의혹에다 요직을 둘러싼 온갖 비리와 모함이 날로 심해져 쑥쌔기 정치판을 무색케 할 정도입니다

또한 어떤 어리석은 신도들은 벼슬 높은 승려, 유명 사찰과의 인연만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며 이 절 저 절을 떠돌아다닙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력한 타종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사회정의의 대열에 앞장 섰고, 궂은 곳의 어려운 이들을 찾아다녔으며, 전도에 이르기까지 광신도 몇몇의 거슬린 언행을 제외하곤 모두가 하나되어 물러섬이 없이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각계각층 주요요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국민들도 불교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5060세대들마저 모두 떠난 대한민국에서 과연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요?

입으로는 무아, 무욕을 외치면서도 나만 잘 낫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속셈과 싸움만이 판을 치는 마당에 부처님법이 아무리 좋은들 누가 귀의하며 누가 남아있겠습니까?

 

한국불교는 이대로 아수라장으로 영영 전락하고 마는걸까요?

현 불교계 세태에서 저 같이 힘 없는 사람들의 외침이 무슨 영험이 있겠습니까?

그저 속으로만 깊은 한숨 내쉬며 묵빈대처만이 현명한  태도라 여겨지지만,

볼품 없는 초라한 토굴에서 가진 것 없이 홀로 사는 이 못난이 OO(?) 

오늘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숨어 우는 바람처럼 꺼이꺼이 큰 울음을 터트리며

목놓아 웁니다.

아아, 중이 싫으면 절은 어디로 갈꺼나... 

 

(OO중 합장)

 

 

 스님은  말미에 아아, 중이 싫으면 절은 어디로 갈꺼나...”라 하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여진다.

 

미래와 비젼이 분명하다면

 

중이 싫으면 절은 어디로 갈꺼나라는 말은 하나의 화두와 같다. 말이 성립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의심을 함으로서 본래성품을 깨친다는 그 화두를 말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은 스님들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이를 회사가 싫으면 내가 떠나야지로 바꾸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회사가 싫으면 대부분 떠난다. 그러나 회사를 바꾸어 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대게 강직한 성품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고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행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상사나 설령 경영진이라 해도 상식과 절차에 어긋난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그리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앞장서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 그러나 결국 조직을 떠나게 되어 있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이 조직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조직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과 같은 글이 답을 제시해 주는 것 같다.

 

 

회사라는 조직은 구성원 개개인이 중요시 하는 원리원칙이나 정의 등의 덕목에 연연하지 않는다. 각 조직이 처한 상황에 맞춰 절대선을 규정하며 그에 따라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여기에 맞게 행동하면 능력있고 정의롭고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회사의 정의에 반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설령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의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준과 원칙이 지금 현재 조직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힘겨운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회사와 내가 지금 이 순간 서로 필요에 의해서 만났으며 각자의 목표나 요구에 따라서 거래를 주고 받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김정선의 비굴클럽, 머니투데이)

 

 

글에 따르면 가급적 조직에 붙어 있으라는 것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조직의 잘못된 문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조직을 기반으로 해야 된다는 말이다. 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절을 리모델링하겠디거 나서다가 지쳐 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절은 절대 바꿀 수 없는 곳이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지하며 내가 떠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해 보아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다는 특유한 절문화로 인하여 눈하나 꿈쩍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글쓴이는 말한다. 조직내에서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략을 수정하자는 것이다. 비록 잠시 주춤하고 구부러져야 하는 상황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원칙과 기준이 분명히 서 있다면, 어떤 조직 내에서도 미래와 비젼이 분명하다면 자신을 기분좋게 리모델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가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제발로

 

조직을 나간다고 능사는 아니다. 그래서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기득권에만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이 싫어서 절을 나가게 만들면 된다.  그런 중은 다름 아닌 도박승, 은처승, 횡령승, 문화재 관람 징수 사찰의 승려를 말한다. 그런 승려들이 절 밖으로 스스로 나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서먹을 건덕지가 없게 하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산이라 하였다. 민족의 자산이라면 국가가 관리해야 할 것이다. 70%에 달하는 불교문화재를 국가가 관리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의 재정을 재가자가 관리하는 것이다. 스님은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서로 주지직을 맡지 않으려 할 것이다. 돈도 되지 않는 주지에 당선되기 위하여 수억, 수십억을 뿌려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승반속(半僧半俗)’은 나가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제발로 걸어 나가게 될 것이다.

 

 

 

 

2013-07-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