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늙으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10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8. 19:32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늙으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10가지

 

 

 

법문을 잘 하는 스님이 있다. 대체로 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법문을 잘하는 스님들 중에 종범스님이 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종범스님의 법문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잘 전달해 준다. 그런 스님의 법문중에 늙어서 해서는 안될 것몇 가지를 법문 하였다. 

 

스님의 법문이 좋아 다시 보려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수 십개의 동영상 법문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늙으면 해야 할일 10가지, 하지 말아야 할 일 10가지

 

검색과정에서 늙으면 해야 할일 10가지늙으면 하지 말아야 할일 10가지를 발견하였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늙으면 해야 할 일 10가지

 

1) 마음의 짐을 내려 놓아라.

재산을 모으거나 지위를 얻는 것이 경쟁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노인은 이제 그런 마음의 짐을 내려 놓아야 한다

 

2) 권위를 먼저 버려라.

노력해서 나이 먹은 것이 아니라면 나이 먹은 것을 내세울 것이 없다.

나이 듦이 당신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권위도 지위도 아니다.

조그만 동정일 뿐이다.

 

3) 용서하고 잊어야 한다.

살면서 쌓아온 미움과 서운한 감정을 털어 버려야 한다.

 

4) 항상 청결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추한 꼴 안 보이려는 것이 인간의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이다.

 

5) 감수해야 한다.

돈이 부족한 데서 오는 약간의 불편, 지위의 상실에서 오는 자존심의 상처,

가정이나 사회로부터의 소외감도 감수해야 한다.

 

6) 신변을 정리해야 한다.

나 죽은 담에야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사고 방식은 무책임한 것이다.

 

7)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금전적인 독립은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인 부모 자식 관계를 버려라.  

자식도 남이다.   제일 좋은 남일 뿐이다.

 

8) 시간을 아껴야 한다.

노인의 시간은 금 쪽같이 귀하다. 시간은 금이다. 라고 말 했지만

노인의 시간은 돈보다 귀하다.

 

9) 감사하고 봉사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은 누군가에 의지 해야 한다더구나 효성스런 자식이

없다면 더욱 그렇다. 이사회에 고마움을 표하고 살아 움직일  있을 때 

타인을위해서도 미리 갚아 두어야 한다. 살아온 이 지구의 환경과 우리사회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어야 성숙한 노년의 삶이다.

 

10) 참여하라.

사회나 단체 활동 혹은 이웃간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친구와 어울리고 취미 활동에 가입하라.

 

 

 

늙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 10가지

 

1) 잔소리 하지 마라.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보았어도 못 본 척 넘어 가라.

원만한 가족관계의 제1조이다.

가정사나 사회 일이  이미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2) 큰소리도 하지 마라.

내 주장 내세우며 다 가르치려 해봐야 따르지 않는다.

 

3) 남을 원망 하지 말아라.

더구나 가족 중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 하는 일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4) 포기하지 말아라.

너무 오래 살았느니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 는 ,

헛소리 하며 스스로 죽음을 불러 드리지 말라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생의 환희라는것을  깨달아라.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어도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5)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를 책하지 마라.

젊은이의 생활양식이나 생각이 노인과 같다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젊은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 들여라.

 

6) 자주 삐치지 말아라.

가족이나 타인에게 서운한 맘의 표현이겠지만 책임은 당신의 몫이다.

 

7)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하지 마라.

 

8) 응석 부리지 마라.

자식이나 주위사람에게 관심이나 동정을 받기는 커녕 주책으로 보인다.

 

9) 절약하지 마라.

노인의 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있는 돈을 즐거운 마음으로 쓸 줄을 알아야 한다.

 

10) 자식  며느리 흉보지 마라.

당신이 먼저 하찮아 보인다.

  

 

 

 

 

 

 

늙으면 해야 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이 약간씩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부정적 언표가 훨씬 더 포괄적이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더 주의가 기울여 진다.

 

노인들은 왜 말이 많은가?

 

종범스님은 법문에서 늙어서 해서는 안될 것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잔소리 하지 마라, 아는 체 하지 마라이었다. 이와 유사한 문구가 부정적 언표에서 1번 항인 잔소리 하지 마라.” 7번 항인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하지 마라.”일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노인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이것 저것 말이 많다. 특히 젊은이들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렇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은 노인에게 있어서 젊은이들이 하는 행위가 못 마땅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잘 못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려 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노인의 생각일 뿐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잣대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잔소리한다느니 아는 척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듣기 쉽상이다. 그래서 늙어 노인이 되면 말을 줄이라 하였다.

 

나이를 밝히는 이들

 

글쓰기를 하다 보니 수 많은 사람을 접한다. 주로 글이다. 글로서 소통하는 것이다. 넷상에서는 오로지 필명과 남겨진 글로서 밖에 판단할 수 없으므로 글이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몇 살인지, 학력은 어떻게 되는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밝히는 이들이 있다. 특히 나이를 밝힌다.

 

나이를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알아 달라는 말과 같다. 그 것은 다름 아닌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라 본다. 경험이 풍부한 노인이 젊은 것들의 행위가 못 마땅해 보이듯이, 넷상에서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나이 든 어른으로 대우 받고 싶은 것이다.

 

노인들은 말도 많지만 또 하나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이런 고집도 풍부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살아온 인생역정에서 겪은 경험이야말로 노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길로 가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넷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고 있음에도 문자에 너무 집착한다고 충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 준다. 경전을 보지 않아도 교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의 방식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걍 앉아서 부처님만 간절히 바라면 된다라고 신심을 강조한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하였을 때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다. “불교는 이고득락이다라거나 불교는 행복이다등의 말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반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열반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행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행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불교가 행복이 목적이라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이야기 하지 않은 종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행복을 베이스로 깔고 간다. 그 바탕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본다.

 

교학과 수행의 양날개로

 

마찬가지로 경전을 근거로 하여 교학을 하였을 때 반드시 교리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교학과 수행을 병행 하는 것이다. 굳기 수행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교학을 공부하다 보면 수행을 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어야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 모두 수행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 pahī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알아야 할 것이란 교학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성제를 말한다. 그리고 닦아야 할 것은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강조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다거나, 반대로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새가 양날개로 날듯이, 부처님은 교학과 수행을 겸비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알아야 할것을 알고, 닦아야 할 것을 닦고, 마침내 모든 오염원들이 버려 졌을 때 깨달은 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교학하는 것에 대하여

 

그럼에도 오로지 문자에 탐닉하고 경전에만 천착한다고 나무라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노인네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교학과 수행을 겸하고 있고 오염원을 버리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행만 강조하고 교학을 멀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라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자 선불교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조사불교이다. 중국적 환경에서 발생된 중국식 불교를 말한다. 중국의 전통사상인 도교와 인도의 불교가 융합되고, 여기에다 중국인들의 현실주의적 세계관까지 반영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많이 변질 되었다. 선종의 종지라 볼 수 있는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대표적이다.

 

조사불교의 영향하에 있는 한국불교의 선사들은 대체적으로 책을 보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한다.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학적으로 알고, 이치적으로 따지는 것에 대하여 알음알이또는 분별이라 하여 경계한다.

 

이런 전통하에서 선사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부 재가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종종 선을 공부하였다는 나이 든 재가자가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전 공부 아무리 해 보았자 절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헛수고 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느는 것은 고집밖에 없다고

 

엔지니어 세계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땜질 오래 하다 보면 느는 것은 고집밖에 없다라는 말이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

 

기술자들은 특징이 있다. “일 플러스 일은 이(1+1=2)”라고 한다. 그러나 영업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일 플러스 일은 이도 될 수 있지만 영(0)이 될 수도 있고 삼(3)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을 상대하는 영업에서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이 될 듯 하다가 안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안될 것 같은 일도 경우에 따라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만 상대하는 엔지니어에게 어느 경우에서나 일 플러스 일은 이가 된다. 이런 생활 방식이 굳어지다 보면, 그리고 나이만 먹다 보면 고집으로 변한다. 좀처럼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옛것을 고수한다.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지금 대승불교를 접한 불자들은 좀처럼 대승불교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특히 공사상에 빠져 있는 불자들이 그렇다. 그런 공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그 어떤 진리도 공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 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공중(空中)에서 모두 무()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공중무색(空中無色)’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중무색에서 공중(空中)’공가운데로 번역하면 잘못된 번역이라 한다. 단지 한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공중은 공의 입장에서라고 번역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이처럼 공의 입장에서 바라 보았을 때 모두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본래부터 없는 것이라 하여 불생불명을 말한다. 또 본래 청정한 것도 없다 하여 불구부정이라 한다. 이처럼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어떤 진리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고집멸도라 하여 사성제가 없는 것이 되고, ‘무무명 역무노사진이라 하여 십이연기 또한 없는 것이 된다.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이와 같은 공관(空觀)을 가진 대승불자가 초기불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청원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pārutā tesa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
Vihi
sasaññī pagua na 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ti.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S6:11, M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브라흐마 사함빠띠의 청원으로 마침내 법을 설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다. 이 때 부처님은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그것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pamuñcantu saddha)” 라는 말이다. 왜 이 말이 중요할까?

 

왜 신앙을 버려라 하였을까?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 하였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런 깨달음을 이해 할 수 있을지 의문하였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역류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도를 말한다. 탐진치 등 번뇌를 소멸하여야만 성취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망설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브라흐마)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세상에 법을 설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예전의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뜻이라 한다. 예를 들어 브라만교에서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하면 복을 받는다든가, 육사외도의 유물론과 계금취견 같은 신앙이나 신념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신앙, 믿음을 먼저 내려 놓으라고 하였다.

 

만약 자신의 신앙을 간직한 채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 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융합이 일어날 것이다. 이를 좋게 말하면 원융이고 화쟁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습합이고 혼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믿어라!”고 하지 않았다. 유일신교 전도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적 믿음을 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물장 같은 신앙을 먼저 버리라고 하였다.

 

180도 다른 번역 믿음을 보여라

 

그런데 똑 같은 빠알리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초불연 번역)

 

 

초불연의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180도 다르다. 전재성박사는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신앙을 버려라라고 하였는데, 초불연에서는 정반대로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다. 부처님이 아직 법을 펴지도 않았는데 믿음부터 내라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먼저 자신의 믿음부터  버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초기불교 맏형론, 초기불교 막내론

 

무엇이든지 새로운 사상을 받아 들이라면 자신의 믿음을 먼저 버려야 한다. 공관을 가진 대승불교도가 초기불교를 받아 들이려면 먼저 공사상과 대승불교를 버려야 한다. 그 다음에 초기불교를 받아 들여야 한다. 만일 대승불교를 유지한채 초기불교를 받아 들이려 한다면 서로 융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도들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년 초불연에서 4부 니까야 완역 봉헌 법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각묵스님은 초기불교 맏형론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여섯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초기불교는 종손의 역할이다.

둘째, 초기불교는 맏형의 역할이다.

셋째, 초기불교는 막내의 역할이다.

넷째, 초기불교는 도덕불교의 역할이다.

다섯째, 초기불교는 봉사하는 불교의 역할이다.

여섯째, 초기불교는 우리말, 우리 글 불교의 역할이다.

 

(각묵스님, 사부 니까야 완역 봉헌 법회, 2012-11-18)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불교는 한국불교의 일원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 대하여 가장 오래 된 불교라 하여 맏형이라 하였고, 또 가장 늦게 소개 된 불교라 하여 막내라 하였다. 특히 초기불교 맏형론을 강조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맏형이 다른 일곱명의 형제들을 다독이듯이 초기불교가 다른 일곱개의 불교를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껴안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다름 아닌 원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하면 대승불교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맏형의 입장에서 껴안는 입장을 말하고, 또 막내의 입장에서 편입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pamuñcantu saddha에 대하여 신앙을 버려라가 아닌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한 것이 아닐까?

 

나이는 어떻게 쳐드셨어요?”

 

자신의 신앙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수십년 된 신앙을 바꾼다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으면 평생가기 쉽다. 이는 신앙뿐만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이나 지식, 지혜 등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더 강화 될 뿐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납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은 고집밖에 없다는 소리를 듣고,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들은 잔소리가 심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절에 오래 다닌 보살이 느는 것은 아상 밖에 없다고 한다. 절에 다니면 다닐수록 탐진치가 소멸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아만 더욱 더 강화된 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하는 이들이 아상이 매우 높다. 그것도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에 따른다. 이처럼 자아만 잔뜩 강화되어 하늘을 찌를 듯한 아상을 가진 자가 나이를 먹은 늙은이 행세를 하면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 자칫하면 나이는 어떻게 쳐드셨어요?”라고 봉변을 당하기 쉽다. 그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는 부정적인 뜻도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본다면 나이는 어떻게 쳐드셨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뜻으로 본다면 포기 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늙어서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중에 4번째 항이다. 이를 다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4) 포기하지 말아라.

너무 오래 살았느니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느냐 는 ,

헛소리 하며 스스로 죽음을 불러 드리지 말라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생의 환희라는것을  깨달아라.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어도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하랴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담마를 배우는데 있어서 나이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남은 여생을 가르침과 함께 살아 갈 때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2013-07-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