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상을 대체할 불교의 상징 담마짝까(法輪), ‘이슬람의 보물’ 알사바왕실콜렉션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2. 15:57

 

불상을 대체할 불교의 상징 담마짝까(法輪), ‘이슬람의 보물알사바왕실콜렉션을 보고

 

 

 

중앙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모처럼 박물관에 갔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다목적은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실크로드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서역관련 유물을 사진에 담아 오거자 함이다.

 

중앙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하차하여 걸어 갔으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졌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마자 박물관으로 연결된 통로가 새롭게 생겨 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빙워크까지 마련 되어서 더 할 나위 없이 편리 해졌다.

 

 

 

 

 

여름에 찾은 박물관

 

박물관 입구 지하철 통로를 빠져 나오자 바로 중앙박물관 앞 광장이다. 이전에 여러 번 와 보았지만 이렇게 여름에 찾아 오기는 처음이다. 겨울에는 마땅히 활동할 공간이 없어서 실내 공간을 찾다 보니 주로 추운 겨울에 다녔다.

 

 

 

 

 

중앙박물관은 겉보기에도 규모가 무척 크다. 외국의 유명 박물관 못지 않다. 그러나 외관을 보면 심플하다. 현대식 디자인을 적용해서 인지 네모난 모양으로 모두 각져 있다. 한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기와 지붕을 형상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본관은 현대식 디자인 기법을 이용하였지만 바로 앞 공원은 한국식이다. 커다란 한국식 정원이 그것이다.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정자가 있다. 그 연못에 연꽃이 한창이다.

 

새로운 경영기법이 도입된 박물관

 

박물관에도 변화가 있었다. 지하철과 연결통로가 새로 생겨난 것처럼 외관의 변화뿐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무료’로 전환 하였다는 사실이다. 불과 2-3년 전만 하여도 몇 천원 단위의 입장료를 받았으나 모두 폐지한 것이다. 누구나 와서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좌측 사이드에 있는 특별기획전은 예외이다. 돈을 내고 관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만원 단위까지 올라 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박물관에도 새로운 경영기법이 도입된 것 같다. 상설전시관은 무료로 모두 개방하는 대신 특별전시실을 만들어 입장료를 비싸게 받는 것이다. 일단 사람들을 많이 오게 한 다음 특별한 것을 보여 주는 형식이다.

 

일부로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은 특별기획전을 보고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려운 발걸음을 하여 이왕 온김에 보고 가는 것이다. 이처럼 박물관도 새로운 서비스와 경영마인드가 도입 되어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채광을 이용하여

 

박물관은 중앙을 중심으로 우측날게와 좌측날게로 나뉜다. 우측 날개에 있는 부분이 무료관람이 가능한 상설전시관이다.

 

상설전시관이 있는 우측 날게 부위는 모두 대리석으로 처리 되어 있다. 그리고 매우 밝다. 박물관의 이미지가 어둡고 칙칙한 것과 대조적이다. 중앙통로의 천정을 유리로 하여 자연채광을 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조명시설 없어도 밝은 느낌을 준 것이다. 더구나 온통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걷기에도 기분이 산뜻하다.

 

 

 

 

 

디카로 촬용하였으나

 

목적지 3층으로 올라 갔다. 3층에는 중앙아시아 전시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투루판의 베제클릭 천불동 관련 유물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천불동에서 뜯어 온 것을 전시해 놓은 것이다.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디카를 이용하여 촬영하였다. 그러나 성능이 좋지 않아서인지 자꾸 번진다. 많이 찍었지만 제대로 나온 것이 드믈었다. 그래서 이슬람 특별전을 보고 난 후 다시 올라와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랬더니 정상적으로 찍히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이 휴대용 디카 보다 성능이 더 낫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특히 박물관처럼 어두운 곳에서 그렇다. 그런 디카를 항상 휴대 하였다. 마치 서부시대 보안관이 항상 총을 휴대하고 다니듯이, 또 일본 사무라이들이 항상 검을 차고 있듯이 바지 주머니에는 디카가 있어서 언제든지 찍을 준비를 하였다.

 

디카는 2006년도에 구입하였다. 20만원 대의 보급형이다. 벌써  7년 째 사용하고 있다. 이 디카를 이용하여 그 동안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올렸다. 이렇게 항상 휴대 하고 다니는 디카인데 박물관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슬람의 보물, 알사바왕실콜렉션

 

3층 중앙아시아관을 보고 난 후 1층 특별기획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슬람의 보물’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알사바왕실콜렉션’이라 한다.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전시유물은 8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미술작품 367점(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대여기관은 알사바 컬렉션 쿠웨이트 국립문화예술위원회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슬람 문화는 생소하다. 이슬람교가 세계 3대 종교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호기심을 끌 수도 있다. 더구나 이슬만의 독특한 예술품을 보면 그렇다.

 

연대표를 보니

 

전시실이 시작 되는 초입에 하나의 연대표가 보였다. 이슬람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난 이래 전 세계로 확장된 과정을 연대기로 보여 주고 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 되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전세계 각지로 뻗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세 개의 대륙에 걸쳐 이슬람 왕조가 흥망성쇠 하였는데, 지금까지 상당 부분 그 세력이 유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럽의 스페인과 인도의 경우 한때 이슬람이 왕국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슬람 영향권은 아니다.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이슬람의 보물 특별기획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화려한 장신구이다. 갖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화려함의 극치를 볼 수 있다.  

 

 

 

터번장식

인도 데칸 또는 서인도추정, 17세기 후반

금,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

 

 

 

 

 

 

장검

인도, 칼자루, 16세기~17세기 초

금,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강철

금으로 만든 칼자루 끝은 앵무새의 머리 모양이며

앵무새의 분 부분에는 다이아몬드, 부리 부분에는

끝이 붉은 루비로 장식하였다.

 

 

 

 

 

칼과 칼집

인도 데칸 추정, 1650~75년경

옥, 강철, 금, 루비,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백옥으로 만든 칼자루는 쿤단 기법으로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를 이용하여 절제되고

우아한 꽃 모양을 장식하였다.

 

 

 

 

 

 

목걸이

17세기 중반

금, 루비, 에메랄드, 에나멜, 진주

 

 

 

 

이슬람 성전 쿠란

 

또 하나 관심있게 본 것은 쿠란이라고 불리우는 이슬람 성전 코란이다. 모두 필사본이다.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금색안에는 아라베스크 무늬를 표현 하였다.

 

  

 

 

 

 

 

 

 

 

 

 

 

 

 

 

 

 

코란에는 글자와 기하학적 도형만 보인다. 이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의 전통에 따른다. 그래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 숭배할 수 없다. 다만 경전에 있는 글자를 표현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기하학적 무뉘와 함께 이슬람 문자가 복합된 아랍 특유의 예술품을 볼 수 있다.

 

기하학적 무늬

 

기하학적 무늬와 이슬람 문자는 양탄자를 비롯하여 창문이나 벽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타일이나 접시, 건축장식물에서도 볼 수 있다.

 

 

 

직물

터키 부루샤, 16세기 전반, 비단, 금속사

실크 벨벳 직물에 2가지 형태의 둥근 소용돌이 무뉘를

노란색, 주황색, 상아색의 화려한 금속 견사를 이용하여

장식하였다. 고도로 전문화된 기법으로 장식된 오스만

제국의 작품이다.

 

 

 

 

 

직물

터키, 17세기 후반. 리넨 비단

튤립과 톱니 모양이 달린 연꽃을 장식한 직물이다.

 

 

 

 

 

 

 

타일

이란 동부, 14세기 초~15세기 초, 토기

별모양의 타일로 중앙에 노란색 로제트 무뉘를

중심으로 삼엽형과 사엽형 식물 무뉘를 장식하였다.

 

 

 

 

 

접시

이란, 16세기경, 도기

중심에는 도식적인 식물 넝쿨 무뉘를 반복적으로 연결하고

테두리에는 2개의 넝쿨 무늬를 간격을 두고 배치 하였다.

 

 

 

 

 

건축장식물

이란, 대리석

대리석재 건축 장식물로 표면에 아치형 구획속에 완전한

팔메트와 반복 팔메트 무뉘를 반복하여 배치 하였다.

 

 

  

팔메트 무늬와 베벨드 양식

 

이슬람 예술품의 특징은 기하학적 무늬이다. 특히 식물무뉘를 팔메트 문양이라 하여 양탄자, , , 도자기 등 모든 부분에 식물무늬를 사용하고 있다. 또 식물무늬를 추상화한 베벨드 양식이 있는데 주로 기둥 등에 사용된다.

 

 

 

 

이와 같이 이슬람문양은 식물무늬를 형상화한 ‘팔메트 양식’과 식물무늬를 추상화한 ‘베벨드 양식’ 이렇게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란, 12세기, 나무,

목재 문 좌우에는 육각형 구획 안에 팔메트 식물 무늬를 조각하고

중앙의 기둥에는 베벨드 양식의 추상적인 식물 무늬를 표현 하였다.

 

 

 

 

불상은 온데 간데 없고 두 눈은 패이고

 

이슬람은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금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어떤 우상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슬람이 진출하는 어느 곳이라도 전통문화는 철저하게 파괴 된다. 심지어 자신의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파괴 되기 일쑤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그랬다.

 

투르판에 있는 베제클릭 천불동이 있다. 돈황 막고굴 다음으로 가장 큰 천불동이다.  그러나 불상은 온데 간데 없고, 벽화의 불상은 모두 눈이 파져 있다. 자신의 조상이 이룩해 놓은 것을 모조리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파괴해 버린 것이다.

 

 

 

투르판 베제클릭 천불동

불상은 보이지 않고 두 눈은 파여 있다.

 

 

 

쿠란에서 공식적으로 형상표현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슬람에서는 어떠한 형상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전시실의 설명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우상 숭배를 금지함에 따라 인간과 동물의 형상 표현을 금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이슬람이 종교와 정치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이 형상 표현을 반대하기도 하였지만 쿠란에서 공식적으로 형상표현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슬람 미술의 형상표현, 전시실 설명문구에서)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코란(쿠란)에서는 형상표현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적으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우상표현을 금지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코란에서 형상표현을 금지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한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흡수 하는 과정에서 일부지역에서는 이슬람 세계 형성 이전 단계의 전통에 따라 동물과 인물의 형상 표현을 묵인 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모스크와 같이 종교성을 띠는 곳은 지역을 막론하고 형상 표현(우상숭배)이 금지되었지만, 세속적인 일반생활의 장식에서는 형상 표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하미의 이슬람 모스크 내부에 연꽃 문양 기둥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은 파괴 하였지만 연꽃 문양은 남아 있는 것이다.

 

 

 

 

하미모스크 내부의 연꽃 문양 기둥

 

 

 

우상숭배한다고 하는데

 

흔히 외도들은 불교에 대하여 우상숭배의 종교라고 비판한다. 돌덩이나 쇠붙이,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에 절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라 하여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이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기독교적 사고방식과 알라는 이 세상에 유일신이다라는 이슬람교의 잣대를 불교에 들이 대었을 때 모두 우상숭배로 보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불교에서 하는 말이 있다. 돌덩이나 쇠붙이에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절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상 뿐만 아니라 보살상을 비롯하여 신중들과 같은 온갖 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외도들이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여도 마땅히 설명할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무불상(無佛像)시대 오백년

 

부처님 당시에는 불상이 없었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후 수 백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불상은 없었다. 이는 가장 오래 된 불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불교 유적지로서 가장 오래 된 산치(Sanchi)대탑에서도 불상의 흔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처님의 상징으로서 보리수나 불족적, 보륜 등이 표시 되어 있을 뿐이다.

 

 

 

산치(Sanchi)대탑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쉬주의 수도 보팔 근처 북부 46km 지점에 위치한다.

아쇼카 왕(기원전 286-232재위)이 기원전 3세기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Buddhist Monuments at Sanchi

 

 

 

그렇다면 불멸 후 오백년 까지 왜 불상이 출현 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불상을 만든 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신성모독(불상의 기원 유래)”으로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은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동일하다고 한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 될 때 까지 조형예술품을 예배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초상화는 금지되고 다만 상징적인 그림만을 허용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초기불교 방식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 대부분 종교의 기본 입장이다. 이에 철저한 것이 이슬람이라 볼 수 있다. 이슬람의 경우 오늘날 까지 그 어떤 종교적 형상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멸 후 오백년이 지나 시점부터 달라진다. 대승불교가 흥기할 시점에서부터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불상을 만들지 않고 단지 부처님의 근본 정신만을 계승한 시기이었기 때문에 ‘무불상시대’라 한다.

 

무불상시대에는 무엇을 숭배하였을까?

 

그렇다면 무불상시대의 불자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숭배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몸을 다비 해서 얻은 사리라 한다. 사리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를 널리 선양하기 위하여 웅대한 소설적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 디가니까야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완전한 열반의 큰 경, D16)’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리 이야기가 나온다.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따삿뚜는 ‘세존께서 꾸씨나가라시에서 완전히 열반에 드셨다.’라고 들었다. 그래서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따삿뚜는 꾸씨나라 시의 말라 족들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아지따삿뚜]

“세존께서도 왕족이고, 나도 왕족입니다. 나도 세존의 사리를 분배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도 세존의 사리를 보존하기 위해 큰 탑묘를 세울 것입니다.”

 

(마하빠리닙바나경-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

 

 

부처님의 다비식이 끝나고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간 이야기이다. 16대국 중 가장 강성하였던 마가다국왕이 사리를 보존할 탑을 세워 예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나라에서도 분배자격이 있음으 말하고 탑묘를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아자따삿뚜, 릿차비족들, 싸끼야 족들, 불리 족들, 꼴리야 족들, 바라문, 빠바시의 말라 족들, 꾸씨나라시의 말라 족들 이렇게 여덟 군데에서 사리 분배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바라문 도나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나]

“존자들이여, 내 한 말씀 들어보십시요.

우리 부처님은 인욕을 설하는 님입니다.

최상의 참사람이신 분의 사리분배에

다툼이 생겨나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존자들이여, 모두 함께 화합하여

기뻐하며 여덞 부분으로 나누어

사방에 탑묘를 널리 세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눈 있는 님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하빠리닙바나경-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

 

 

게송에 따르면 사방에 탑묘를 세워야 함을 말하고 있다. 사리가 들어 있는 탑묘를 세워서 청정한 믿음을 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불교시대에는 불상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부처님의 신체 일부라 볼 수 있는 사리가 들어간 탑이 예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중단을 보면

 

우리나라 절에 가면 갖가지 불상이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만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절에 가면 석가모니부처님상은 보이지 않고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불이 주불로 모셔진 곳도 있다. 또 다른 절에 가면 주불로서 미륵불이나 약사여래 부처님상이 모셔진 곳도 있다. 심지어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놓은 경우도 있다. 이처럼 절의 법당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볼 수 없는 곳도 있다는 것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절에 가면 석가모니부처님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신들이 절을 차지하고 있다. 신중단이라 하여 다양한 호법신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인도 고유의 신들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제석천, 범천, 사천왕을 비롯하요 야차나 아수라와 같은 팔부신중이 대표적이다. 이런 신들을 모신 곳이 신중단이다.

 

신중단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 신중단을 향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은 신중이 불법을 호법하고 불교도들은 이런 호법에 대하여 감사의 표시라 하여 예를 갖추는 것이라 한다.

 

일주문에 단청하였다고

 

이교도들은 절에 가는 것을 대체로 싫어 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고 있다. 절에 가면 불상 뿐만 아니라 험상 궂게 생긴 사청왕상 에서부터 칼과 무기를 든 수 많은 신중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단청만 보아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절의 일주문에 단청을 하였다고 하여 집단으로 데모한 사건이 있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형상에 대한 숭배를 극히 싫어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아전인수격이다. 교회에 가면 벽면에 예수그림이 있고, 성당에 가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 입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우상숭배인가

 

불자들은 불상이나 신중, 단청 등에 익숙하다.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사천왕상을 보아도 무서워 하지 않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으로 받이 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합장하며 예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이교도들에게는 모도 우상숭배로 보인다는 것이다. 더구나 바위로 만들어진 불상에 소원을 빌며 절하는 행위를 보면 더욱더 우상숭배로 볼 지 모른다.

 

돌이나 쇠붙이,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나 각종 보살상에 절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도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 예배의 대상으로도 볼 수 있다.

 

만일 불상에 이기적인 기도만 하는 경우 우상숭배라 볼 수 있다. 건강, 학업, 사업, 안녕 등 이른 바 사대 소원 성취의 대상으로서 절을 하고 기도만 한다면 돌이나 쇠붙이, 나무 조각에 기도 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같은 예배를 하더라도 개인적인 소원성취가 아닌 가르침의 예배하는 것은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알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경우 불상은 더 이상 돌이나 쇠붙이,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격화 해 놓은 부처님 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은 부처님

 

부처님 입멸후 5백년간은 불상이 없었다. 그런 무불상시대에 예배의 대상은 탑묘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족적 또는 보륜, 보리수 등이었다. 또 사리를 모셔둔 탑묘이었다.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무관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오온으로 나누어 실체가 없음을 설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Yadanatta sutta-실체가 없는 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7, 전재성님역)

 

 

경에서와 같이 부처님은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연기적 사유로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적 사유에 개념이 발 붙일 수 없다. 브라만과 같은 궁극적 실재나 영원한 자아를 뜻하는 아뜨만을 비판하고 성립한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 어떤 개념, 그리고 개념을 형상화 한 우상을 배격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예배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수 많은 불상이 출현한 이유는

 

오늘날 대승불교권 뿐만 아니라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도 불상을 본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오로지 한 분의 부처님, 즉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다. 그것은 소원을 들어 주는 부처님이 아니라  가르침을 펼친 부처님에 대한 형상이다. 따라서 가르침에 대하여 예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에는 갖가지 온갖 종류의 불상이 있다.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석가모니 불상에서 부터 개념이 인격화 되어 형상화 된 불상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다불다보살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수 많은 불상을 만들게 되었고 수 많은 대승경전이 편찬 되었다. 그러나 오로지 빠알리니까야 하나만 있는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 있을 뿐이다.

 

책이 없던 시절에는 형상을 찾았지만

 

불상이 꼭 있어야만 할까? 무불상시대 처럼 하나의 상징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불상을 만들려고 한다면 한계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진리를 설한 부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언어와 문자로 아무리 가르침을 설명해 놓아도 한계가 있듯이 아무리 부처님의 형상을 그럴 듯 하게 만들어 놓아도 본래 부처님을 표현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럴 경우 차라리 상징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좋은 상징일까? 그리고 예배의 대상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이 담겨진 책이라 본다. 책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책 그 자체에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책 그 자체에 예배한다면 돌덩이로 만든 불상에 절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책을 소중히 여겨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른 다면 책이 바로 부처님이라 볼 수 있다. 책을 볼 수 없던 시절, 문자를 모르던 시절에 불자들은 형상을 찾았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책을 떠들어 보면 언제든지 부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담마짝까(Dhamma-cakka, 法輪)인가?

 

그럼에도 불상을 대체할 상징할 찾는 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아마도  담마짝까(Dhamma-cakka, 法輪)’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팔정도를 형상화한 법의 바퀴를 말한다.

 

왜 담마짝까인가? 그것은 한 번 구르기 시작하면 계속 구르기 때문이다. 그 바퀴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고 거꾸로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런 담마짝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담마의 왕(dhammarājā)’으로서 법의 바퀴를 굴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바퀴는 앞으로만 나아 갈 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바퀴라 한다.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고대인도에 전륜왕이 있었다. 그 전륜왕은 사군을 갖추고 있었다. 네 종류의 군대를 말한다. 코끼리부대(象軍, hatthikaya), 기마부대(馬軍, assakaya), 전차부대(車軍, ra-thakaya), 보병부대(步兵, pattikaya)의 이렇게 사군(四軍, caturagini sena)을 말한다. 전륜왕이 이와 같은 사군을 거느리고 진격할 때 막을 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항하지 못하고 성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법의 왕 부처님도 담마의 바퀴를 굴렸다. 네 가지 진리의 바퀴를 굴린 것이다. 즉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는 진리의 바퀴이다. 이와 같은 진리의 바퀴를 굴렸을 때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입니다(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S56:11)”라고 말씀 하셨을 때, 어느 누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부처님이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S56:11)”라고 설하였을 때, 이런 진리를 누가 부정할 수 있었을까? 마치 전륜왕이 사군을 거느리고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담마짝까는 한 번 구르면 앞으로만 갈 뿐 결코 뒤로 굴러 가지 않은 진리의 수레바퀴(Dhamma cakka)’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cakka appativattiya, Sn3.7)”라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eta bhagavatā bārānasiya isipatane migadāye anuttara dhammacakka pavattita appativattiya samaena vā brāhma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S56:11)”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불상을 대체할 불교의 상징 담마짝까(法輪)

 

이처럼 부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법의 바퀴를 굴린 것이다. 그래서 꼰단냐로부터 시작된 법의 바퀴가 지금 까지 계속 굴러 오고 있다. 그런 법의 바퀴, 담마짝까가 불교의 상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담마짝까심볼(Dharmacakra,  위키백과)

 

 

 

 

2013-07-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