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도박승들에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7. 14:34

 

도박승들에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해

 

 

 

 

중독(中毒)이란?

 

중독에 대한 프로를 보았다. EBS 다큐 명의에서 중독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었다. 특히 도박에 대한 중독을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였다. 담당 의사가 도박중독자의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 하였는데 프로가 유익해서 잘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기억하려고 노력하였다.

 

중독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중독 [中毒]

 

1) 술이나 마약 따위를 계속적으로 지나치게 복용하여 그것이 없이는 생활이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

2) 음식물이나 약물 따위의 독성으로 인해 신체에 이상이 생기거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일.

3)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 중독 [中毒], 인터넷국어사전)

 

 

인터넷국어사전에 따르면 중독이란 술이나 마약 처럼 신체와 관련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 역시 중독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대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중독이 될까?

 

이와 같은 사전적 정의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은 중독자의 심리 상태를 잘 이해 할 수 없다. 그런데 EBS 다큐 명의에서 정신과 전문의는 아주 명쾌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즉각적인 결과때문이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에 중독에 걸린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알코올을 예로 들 수 있다. 술을 마시면 곧바로 취기가 오른다. 만약 취기가 일년 후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몇 잔 마시다 보면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취기와 함께 감정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즉각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술을 자주 마시게 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알코올을 오래 하다 보면 몸이 망가진다. 그럼에도 망가질 때까지 마시는 것이 중독자들의 특징이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마시지 못할 정도에 이르면 모를까 망가지는 그 순간 까지도 계속 마시는 것이 중독자들의 특징이다.

 

도박중독자는

 

알코올 중독자와 달리 도박중독자는 몸이 망가지지는 않는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신체적으로 망가지지 않는다. 다만 돈만 있으면 된다. 돈이 떨어지는 그 순간 까지도 손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도박중독자에게 돈이 다 떨어졌다고 하여 그만둘까? 빚을 내서라도 하는 것이 도박이라 한다. 그래서 옛말에 따르면 도박중독자들은 아내도 팔고 딸도 팔고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서 베팅한다고 한다. 결국 패가망신으로 끝나는 것이 도박이라 한다.

 

경마장에 가면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술이나 도박 뿐만 아니다. 주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허가 받은 도박 같은 것도 있다. 국민 오락이라 불리우는 경마가 그렇다. 경마장에 가면 알 수 있다.

 

과천에 경마장이 있다. 주말 경마공원에 가면 엄청난 인파에 놀란다. 그리고 주변의 빈 공간은 모두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종종 경마를 마치고 지하철로 귀가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경마장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타는데 얼굴을 보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어두운 표정들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비슷한 부류로 보인다. 큰 것 한방을 기대하고 베팅해 보았지만 돈만 날린 것처럼 보인다.

 

경마장에 가면 한 가지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다. 베팅을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인다. 그렇게 분석하고 연구하여 베팅을 한다.

 

마침내 레이스가 시작 되면 일제히 한 곳에 집중하게 된다. 장내 아나운서는 특유의 흥분된 목소리로 중계를 하고 분위기는 한껏 고조 된다. 특히 결승선에 다가올수록 점점 흥분된다. 그리고 크게 술렁인다. 자신이 베팅한 말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라 본다. 승부가 갈렸을 때 대부분 탄식으로 끝난다. 이렇게 10여 차례 주기가 반복된다.

 

홈트레이딩 시스템

 

정부에서 허가한 국민도박장은 경마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누구나 주식거래를 할 수 있는 홈트레이딩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마다 홈트레이드 시스템을 개발하여 국민도박장으로 손님을 유도하고 있다. 누구나 거래를 할 수 있는 돈만 있으면 참여 할 수 있는 허가 받은 도박이나 다름 없다. 그것도 강한 중독성을 가진 국민도박이다.  

 

홈트레이딩 시스템은 장기 매매 보다 단기 매매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어른들의 오락 게임처럼 홈트레이딩 시스템을 이용한 주식거래를 하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온라인 게임하는 것과 똑 같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중독에 걸리듯이 하루 종일 모니터만 쳐다 보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는 어느 중독과 마찬가지로 즉각적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돈을 넣고 돈먹기 식인 주식거래는 결과가 빨리 나온다. 거의 초분을 다툰다. 심지어 초치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돈을 벌 욕심으로 자꾸 거래 하지만 점점 까지기만 한다. 욕망이 개입 되어 있는 한 거기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손을 대면 자금이 바닥날 때 까지 계속하게 된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한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거래를 한다. 그 끝은 무엇일까? 패가망신이다. 떠날 사람들 모두 떠나고 자신 혼자만 남게 된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도박중독을 끊기 힘든 이유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경마중독, 주식중독이 되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결과가 바로 바로 나타나는 것 때문이라 하였다. 농부가 농사짓듯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중독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모든 중독중에 특히 도박중독을 끊기 힘들다고 한다. 왜그럴까? 결과를 확인 하는 것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화투나 카드로 도박을 하였을 경우 까 보기만 하면되기 때문이다.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이다.

 

도박은 알코올 중독처럼 술을 많이 마시면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니고, 허가된 국민도박장이라 볼 수 있는 경마나 주식처럼 결과를 보는데 있어서 인터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까 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더구나 크게 베팅하여 돈도 딸 수 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사람들이 도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중에 수 백만명이 도박에 중독되어 있고 그 중 수천명은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또 다시 도박승인가!

 

최근 스님도박이 다시 문제되고 있다. 작년 봄 백양사 승려도박 사건으로 인하여 불교계가 발칵 뒤집혔는데, 일년이 멀다 하고 또 다시 승려도박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부상하였다. 그것은 SBS에서 승려도박사건을 고발하였기 때문이다.

 

공중파 방송을 탄다는 것은 국민들이 안다는 것을 말한다. 산간벽지 방방곡곡 TV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한 번 방송을 타면 국민 대다수가 알게 된다. 그래서 불교와 관련한 추문이 방송을 타게 되면 불교계는 치명타를 입는다.

 

실제로 겪은 이야기이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식사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사촌형님은 백양사 도박사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자로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빨리 화제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TV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정해야 할 종교집단에서 도박과 같은 사건이 터 졌을 때 그 충격은  매우 컷던 것 같다.

 

사람들은 스님들이 병도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스님상이 있다. 아직까지는 매우 건전한 것이다.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탁발하는 스님의 이미지가 아직 까지 남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스님의 이미지는 아직까지 좋은 것이라 보여 진다.

 

이처럼 대다수 국민들은 스님을 좋은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님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이슬만 먹고 사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사람들은 스님들이 병도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라고 말한 것을 불교방송에서 들었다. 스님이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병도 나지 않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을 하는 스님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스님은 수행을 하기 때문에 병도 나지 않는 존재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국민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도박사건이 터지자 국민들은 실망한 것이다.

 

쪽팔려서한 마디 말도 못하고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뀐다. 사촌형님이 도박사건을 꺼낸 것은 실망이라기 보다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형님의 앞에서 쪽팔려서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쪽팔리다라는 말은 비속어로 알고 있다. 국어 사전에서도 “<속된 말로>(사람이)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속된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넷에 자료에 따르면 쪽팔리다라는 말이 나온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말이라 한다. 따라서 자주 사용하기에 국어 사전에 등재 되어 있다.

 

쪽팔리다+팔리다의 합성이다. ‘팔리다는 피동형으로서 뜻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은 무엇을 뜻할까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쪽을 뜻하는 말은 11가지가 되지만 대체로 얼굴의 의미라 한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쪽팔리다는 말은부끄러워서 체면이 깎이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에까지 사용되는 광범위한 쓰임새를 지니게 된 것이다. ( 쪽팔리다" 어원)”라고 설명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쪽팔리다라는 말은 속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속된 표현이라고 낮추어 설명한 것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쪽이 얼굴을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쪽팔리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수준 높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심심해서 화투나 카드놀이를 한다고

 

불자들을 쪽팔리게한 작년 백양사 승려도박사건은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한 번 충격을 준 사건이 연이어 일어 났다. 그것은 도박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일어 났다.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서리이었던 정념스님이 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스님들이 5~6천명이고 수행하시는 분인데 놀이문화라는 게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고 저희가 들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도박이 있고 내기 문화가 있고 또 어른들이 나이 드시면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하면 좋다고 하더라. 화투 이런 문화를 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가지고) 함부로 전체를 매도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정념스님, 정념스님스님에겐 화투가 놀이문화치매 예방 도와”, 한겨레신문 2012-06-16)

 

 

 

화투

 

 

 

이 발언으로 사실상 스님들 전체가 도박하는 것으로 매도 당하였다. 스님들이 화투나 카드놀이를 심심풀이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박은 일부 승려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스님들이 5~6천명이고 수행하시는 분인데 놀이문화라는 게~” 라고 말함으로서 대부분 스님들이 화투나 카드하는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정념스님의 발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승가에 놀이문화로서 화투나 카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속에서 심심할 때  화투나 카드 놀이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왜 화투와 카드 놀이를 하며 이것이 도박으로 발전 되는 것일까?

 

승려도박과 간화선

 

하나의 가정일 수 있다. 가정이 전부 맞을 수 없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승려도박과 한국선불교의 수행과의 관계이다. 왜 그럴까?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선불교이다. 중국에서 발생한 선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 선종의 주된 수행방법이 간화선이다.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 깨쳐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방에 1, 10, 20, 30, 심지어 평생을 앉아 있어도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매년 안거철이 되면 전국 각지 선방에서 수 많은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한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 깨달음은 초기불교와 다르다.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내가 본래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본래 부처임을 굳게 믿으면 이미 깨달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한다. 법성계의 초발심시변정각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본래 부처라고 굳게 믿는 순간 이미 부처가 된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음 단계는 내가 부처인지 확인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때 화두를 든다. 독을 독으로서 제독하듯이, 화두라는 작은 번뇌로서 큰 번뇌를 제거하여 본래부처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 ‘판치생모’ ‘등의 화두를 든다. 이때 교리적으로 알려고 하거나 이치적으로 따져 알면 안된다.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정을 키워 나가면 된다. 그러다 화두가 폭발하면 견성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견성성불하면 어떻게 될까?

 

50년 선수행자의 말을 보면

 

최근 봉암사에서 적명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하였다.

 

 

스님은완전히 적멸한 상태의 무여열반을 추구한다는 이들은 이 세계가 그대로 열반이 완성될 수 있고, 중생이 그대로 해탈할 수 있다는 대승교리를 비판한다무여열반 주장대로라면 부처님은 열반하기 전까지 온전치도 못한 깨달음을 갖고 49년을 설법을 했다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대승불교에서는 깨닫는 즉시 온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처뿐 아니라 모든 이가 깨달음을 얻으면 완벽한 지혜를 성취한다고 했다.

 

( 적명 스님, 중노릇 때려 뻔한 사연 밝히며, 불교닷컴 2013-07-20)

 

 

적명스님은 한국를 대표하는 선사이다. 50년 동안 선수행을 하였고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다. 그런데 스님은 부처님의 딜레마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무여열반이 불교의 목표라면 살아 생전의 부처님은 유여열반이었기 때문에 부처님 하신 말씀은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뉘앙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미완성이거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석가도 모르는데…”

 

이에 대한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 수 있다.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직지심경 134)

 

 

선종의 직지심경에 따르면 일상원(一相圓)’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깨달음에 대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동그라미로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그라미를 부처님도 몰랐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것을 모르니 부처님 멸후 후계자 이었던 깟사빠 존자가 몰랐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게송의 영향이어서일까 대체로 선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완전한 것, 덜 완성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초기불교라는 말대신 원시불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소소영영한 그놈

 

그렇다면 일상원으로 표현된 그것은 무엇일까?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따르면 한 물건을 말하고 있다. 그 한 물건은 본래부터 있던 것인데 한 없이 밝고 신령스런 것이라 한다. 이를 이뭐꼬 화두에서는 소소영영한 그놈이라 한다. 그런데 그 한 물건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것이라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생불멸이다. 이 한 물건은 무었일까?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기에

 

서산대사가 한 물건이라 한 것은 여러가지로 표현 된다. 직지심경에서는 일상원이라 하여 동그라미로 표현 되었다. 선종에서는 본래불이라고도 한다. 또 불성, 진여, 참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선사들은 아무게야하면 하고 말하는 그놈이 있다고 한다. 그놈을 찾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화두를 드는 것도 그놈을 찾기 위해서라 한다. 그놈은 본래부터 있던 한 물건이고 한 없이 밝은 것이고 신령스런 것이고 나지도 죽지도 않은 것이어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한다. 이름도 없기에 누구든지 이름 붙일 수 있고 누구든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경계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선사들이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동그라미, 그놈, 본래불, 진여, 불성, 참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한다.

 

이처럼 본래불, 본래나, 참나를 찾는 것이 간화선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놈을 잘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삼년 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간화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이삼년 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 일단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다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못하는 영어나 일어가 방언 나오듯이 줄줄이 나오고 일체지자인 부처님 처럼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된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런 신념은 적명스님이 말한 모든 이가 깨달음을 얻으면 완벽한 지혜를 성취한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일단 깨달아 버리면, 본래불을 보기만 하면 모든 일거에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한탕주의라 본다.

 

한탕주의 전형 도박

 

경마, 주식, 도박의 특징은 무엇일까? 가장 큰 특징은 즉각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일확천금이다. 베팅을 크게 하면 할수록 배당도 커진다. 낸 돈에 비하여 수배, 수십배, 수천배의 기대를 하고 베팅을 하는 것이다.

 

베팅은 패가 좋을 때 하는 것이다. 조건이 좋아 가능성이 있을 때 지르는 것이다. 다행이 예상이 적중하면 크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실패할 수도 있다. 가진 것 모두 베팅하였는데 상대의 패가 더 높았을 때 한 순간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처럼 베팅을 하면 크게 먹을 수도 있지만 반면 크게 손실을 볼 수도 있다. 크게 먹었다고 해서 정당하게 번 돈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와 운수로 딴 것이기 때문에 불로소득이다. 농민이 씨앗 뿌려 땀흘려 가꾸어 팔의 힘으로 이루어낸 수확과 다르다.

 

도박은 생산성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돈을 땃다고 하더라도 노동의 댓가가 아닌 불로소득이다. 그래서 도박하는 것에 대하여 반사회적으로 보고 법을 적용하여 엄중히 다스린다. 그럼에도 승가에서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도박이 성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화선수행과 도박의 유사성

 

간화선수행과 도박의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큰 것 한방이다. 화투나 카드를 하면서 계속 돈을 잃다가도 패가 잘 걸리면 한방에 만회할 수 있다. 운이 따라주면 돈을 더 많이 딸 수도 있다.

 

간화선의 역시 ‘큰 것 한방이 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대신심을 낸다. 그 다음 단계는 내가 부처인 것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오직 모를 뿐!”하며 의심덩어리를 키워 나간다.

 

그 과정에서 교리나 이치로 따져 아는 것은 무의미하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인하여 화두참구에 진척이 없을 때 공부가 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가 더 잘되고 있는 중이라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인천Y선원의 S선사로부터 수 없이 방송을 들은 말이다.

 

그래서 마침내 의정이 의단이 되어 화두가 타파 되었을 때 견성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성불하면 적명스님이 깨달음을 얻으면 완벽한 지혜를 성취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단숨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도박에서 말하는 한방과도 같은 것이다. 큰 것 한방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박과 간화선 수행은 일맥상통한다.

 

도박과 간화선 수행과 다른 것 하나

 

하지만 도박과 간화선 수행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즉각적인 결과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알코올, 마약, 화투, 카드, 경마, 주식의 특징은 결과를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알코올의 경우 몇 잔만 들이키면 취기가 올라 오기 때문에 즉각적이다. 화투나 뒤집어 보면 되고 카드는 까 보면 승패를 바로 알 수 있다. 경마는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독성 도박은 승패를 분명히 알 수 있고 결과를 즉각적으로 확인 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간화선 수행은 그렇지 않다. 본래불이 있다고 굳게 믿고 그 본래불을 찾는 수행을 해 보지만 잘 찾아 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삼년 앉아 있으면 모두 다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5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소식이 없다. 그래서 20, 30, 심지어 평생동안 산속에서 살아간다.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라고

 

이렇게 해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도법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법 스님은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

 

고 탄식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 마성, 불교평론 2011-09-01)

 

 

불교평론에 실린 마성스님의 글이다. 글은 도법스님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제까지 간화선 수행자 50만명 중에 20여명 정도가 한소식을 하였는데, 그나마 그 소식이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이 간화선 수행인 것 같다. 도법스님은 신동아에서 그런데 해도해도 안 돼요. 책이나 법문대로라면 잘돼야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대단히 실망스럽고 좌절감이 컸죠.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도 별수 없더라고요. 선배도 친구도. 어른이라고 큰소리치는 분도. 말씀 들어봐도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고. 성철 스님에게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분이 훌륭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신동아 12월호, 생명운동 기수 도법 스님의 쾌도난담)”라고 말했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이 간화선이라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방을 뛰쳐 나와 자신의 방식대로 불교를 해석하였다고 한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이 간화선이라 한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다음과 같은 수경스님의 인터뷰기사이다.

 

 

“봉암사에서 20여년을 간화선 수행을 한 상좌가 얼마 전 토굴에 왔다. 묻더라.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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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에 가보면 제각각이다. 염불, 위파사나... 등등 간화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선방에 처음 갔더니 화두 3개를 늘어놓고 골라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1번 해보다 안 되니 2번 하고, 그래도 안 되니 3번을 해본다는 거다....

 

(불교닷컴, 수경스님 “ 떠난 사람... 말이 없어)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으로 충격을 받아 잠적한 수경스님이 불교닷컴과 인터뷰한 기사 내용이다. 스님의 상좌가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간화선 수해을 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자포자기가 되어

 

이처럼 간화선은 수행을 하여도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그래서 3년 목표를 세우지만 5년이 지나도 진척이 없고 10년이 지나도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자포자기 상태에 이를 것이다. 해도 해도 안되요라든가, “갑갑해 미치겠다라는 말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에 진척이 없을 때 쉽게 빠져 드는 것이 도박이라 한다. 이렇게 도박에 빠져 든 것은 화투나 카드놀이 처럼 심심풀이로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다.

 

스님들은 왜 화투와 카드놀이를 즐길까?

 

정념스님은 화투나 카드놀이가 스님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런 놀이의 좋은 점으로서 수행자들의 머리를 식혀 주고 더구나 나이 든 수행자의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이는 대단한 역풍을 맞았다. 스님들 스스로가 카드나 화투놀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전국적으로 알린 결과를 초래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왜 화투와 카드놀이를 즐기는 것일까?

 

첫째, 스님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간화선 수행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화투나 카드는 뒤집거나 까기만 하면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다. 10, 20, 30, 심지어 평생 선방에 앉아 있어도 한소식을 듣지 못하는 간화선 수행자가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화투나 카드놀이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화투와 카드놀이가 즉각적 결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단지 뒤집기만 하면 되고 또 까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스님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큰 것 한방을 노리는 심리에 있다고 본다. 스님들이 간화선 수행을 하면서 10, 20, 30, 심지어 평생 선방에 앉아 있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내가 부처인 것을 확인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소식하면 일체지를 얻는 환상을 갖게 된다. 바로 이것이 큰 것 한방이고 한탕주의이다. 도박도 마찬가지이다. 패가 잘 들어 왔을 때 베팅을 하면 크게 먹을 수 있다. 그 한 방을 보고서 밤샘 도박을 하는 것이다.

 

이카루스 역설(Icarus Paradox)

 

이카루스(Icarus) 이야기가 있다. 이카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눈 한 소년의 이름이다. 이카루스가 날개를 붙이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런데 너무 높이 올라갔다. 그러자 뜨거운 태양으로 인하여 접착제가 녹아서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이카루스는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이것을 이카루스 역설(Icarus Paradox)’이라 한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을까? 영화에서는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라고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날개가 없는 것 같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자에게 날개가 없다면 심하게 다칠 것이다. 그러나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한다면 가속도가 붙어 더 심하게 다쳐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추락하는 자에게 날개가 없고 그대신 더 빨리 추락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예를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 하는 고위층의 비리에서 수 없이 볼 수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추락하는 것도 높이에 따라 다르다. 낮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과 높은 것에서 추락하는 것은 충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직자, 사회지도층의 비리가 더 크게 부각되는 것도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trānanda, yo cevāya ācariyūpaddavo yo ca antevāsūpaddavo, aya tehi brahmacārūpaddavo dukkhavipākataro ceva kaukavipākataroca, api ca vinipātāya savattati.

 

[세존]

아난다여, 청정한 삶을 사는 자로서 파멸은 스승으로서의 파멸, 제자로서의 파멸보다 더한 고통을 초래하며, 그것들 보다 더한 아픔을 초래하고 또한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

 

(Mahāsuññata sutta-공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자의 파멸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출가수행자로 삶을 살기로 한 비구가 타락하였을 때 받는 받는 과보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 (vinipātāya savattati)”라고 하였다. 

 

청정한 수행자가 타락하면

 

왜 청정한 수행자가 타락하면 악처에 떨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vinipātāya savattati: Pps.IV.165에 따르면, 가르침을 모르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은 이득이 작다. 세속적인 성취에서 멀어진 자는, 당나귀의 등에서 떨어진 자가 기껏해야 똥을 만나는 것처럼, 큰 고통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출가한 자는 큰 이익 즉 길과 경지와 열반을 가져 온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멀어지면, 코끼리 등에서 떨어진  것 같이 큰 고통을 만나게 된다.

 

(vinipātāya savattati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로 출가한 자가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계를 어겨 타락하였을 때 커다란 고통을 만나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높이 올라간 자일수록 추락할 때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한다. 출가한 스님이 심심풀이로 화투나 카드놀이를 하고 이것이 발전되어 도박을 하게 되었을 때, 더구나 세상에 알려져 손가락질을 받았을 때 고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왜 그럴까? 청정한 삶을 살기로 한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는 게송이 있다. 수행자의 허물은 보통사람들 보다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잔소리

 

그렇다면 타락한 수행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단지 참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제자들을 다룰 것이라 말씀 하시고 있다.

 

 

Na kho aha ānanda, tathā parakkamissāmi. Yathā kumbhakāro āmake āmakamatte. Niggayha niggayhāha ānanda vakkhāmi. Pavayha ānanda pavayha vakkhāmi. Yo sāro so hassatīti.

 

[세존]

아난다여, 나는 옹기장이가 생 진흙으로 다루는 식으로 그대들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그대들을 다스리고 또 다스리며 말할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그대들에게 충고하고 또 충고하며 말할 것이다. 견실한 자는 그것을 견디어 낼 것이다.”

 

(Mahāsuññata sutta-공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제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옹기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대조 되는 것은 옹기가 생 진흙일 때구워 졌을 때다루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을 다시 해석하면 나는 한번 충고한 뒤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반복적으로 충고해서 가르칠 것이다. 마치 옹기장이가 구워진 옹기를 시험하여, 금이 가고 균열되고 잘못 만들어진 것은 버리고 시험에 통과한 것만을 보관하듯, 나는 그대를 시험하면서 반복적으로 충고해서 가르칠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착하고 건전한 자가 길()과 경지()를 성취하고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Pps.IV.166)”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에 구워져 나온 옹기가 금이 갔을 때 여지 없이 깨서 버리듯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제자들에게 끊임 없이 잔소리하겠다는 말과 같다.

 

쑥대밭이 된 한국불교

 

현재 한국불교는 쑥대밭이 되었다. 도박을 하였다고 스님이 스님들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런 이야기가 공중파 방송을 통하여 전국방방곡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 고 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은 잘못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검찰에 고발한 스님을 징계하려고 한다.

 

도박, 그것도 억대 도박 혐의가 있는 스님들은 조계종 고위층이다. 입장료를 받는 문화재가 있는 사찰에 있는 스님들, 그리고 재단을 운영하는 스님들이다. 비록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이끌어 가고 있는 고위층 스님들이다.

 

그럼에도 잔소리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종단의 높은 자리에 있는 큰스님들이 침묵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부처님과 대조적이다. 부처님은 제자의 잘못에 대하여 나는 한번 충고한 뒤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반복적으로 충고해서 가르칠 것이다. (M122)”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큰스님들이 침묵한다면 불자들이라도 충고해 주어야 한다. 한국불교는 스님들만의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EBS 다큐 명의에서 어느 도박중독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성인데 남편에게 수 없이 많은 각서를 썼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다는 최후의 각서가 보이고, “도박을 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도 보였다. 그런 각서 뭉치가 한 다발 되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틈만 나면 도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빚진 돈을 메꾸기에 바빴던 남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30년 결혼 생활을 청산하려 하였다. 최후로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갔는데, 이때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치료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저 말로 하고 각서를 하면 나아지겠거니 하였으나 중독 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불교도대회를 열어야

 

최근 장주스님의 도박폭로에 따라 SBS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송하였다. 그러자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장스님을 해종행위로 처벌을 주장하고 있고 해당 방송국에 대해서는 법적대응을 천명하고 있다. 더구나 조계종 중앙신도회에서도 “2천만 불자에 사과하고 제작진 엄중 문책하라SBS를 규탄 하였다. 이어서 도박연루 스님이 소속된 교구본사 주지협에서도 해종 세력의 종단 분란 행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각종 비방 및 폭로 행위에 대해 구종의 일념으로 단호히 맞설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대응에 불자들의 호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있다. 조계종 최고 책임자가 연루 되어 있고 목 좋은 입장료 사찰의 고위층 스님이 다수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망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검찰 수사를 지켜 보아야 겠다는 것이다.

 

만일 장주스님의 폭로가 진실이 아니고 SBS의 보다 또한 진실이 아니라면 조계종 총무원의 최고 수장인 자승스님은 불교도대회를 열어야 한다. 그래서 지난 2008‘8.27 범불교도대회처럼 시청 앞에 광장에 20만명 이상 집결하여 왜곡보도를 청산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명분도 없고 따라 나설 불자도 없기 때문이다. 종단 고위층 대부분이 도박연루 혐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가 필요해

 

작년에 이어 연이어 도박 사건이 터지고 있다. 그럼에 따라 한국불교는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다. 포교등 그 동안 이루어 놓은 성과가 한 순간에 날아가고 불자들은 허탈해 하고 있다. 이번에도 작년과 같이 유야 무야 넘어 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도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넘어 간다면 몇 년후에 또 다시 방송에서 승려도박뉴스가 나올 것이다. 왜 그럴까? 해당 승려들이 도박에 이미 중독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한 번 중독되면 끊기 힘들다. EBS다큐에서 보았듯이 도박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많은 각서를 써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번에 도박혐의가 있는 종단 고위층 스님들 모두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결코 도박을 근절할 수가 없다.

 

이미 중독된 도박승들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도박하는 자들이 패가망신하듯이 도박승들이 한국불교를 말아 먹게 될 것이다. 하루 빨리 그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2013-07-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