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님은 분별론자(分別論者)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4. 12:31

 

부처님은 분별론자(分別論者)

 

 

 

여기 들어 온 인연으로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누구나 어느 사이트이든지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사이트의 경우 출입제한을 하는 경우도 있다. 회원이 아니면 들어 갈수 없다. 인터넷카페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검증된 회원이 아니면 출입이 제한된다. 그런데 불교카페도 그런 곳이 많다는 것이다. 비밀결사체도 아닌데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함에도 회원에게만 접근하도록 하고 그들끼리 공유한다면 대단히 이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블로그를 오픈 해 놓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제한없이 들어 올 수 있다. 초등학생부터 타종교인 까지 제한이 없다. 실수로 들어 왔든, 글을 보러 들어 왔든 여기에 온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 여기 들어 온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달 될 수 있다면 가가호호 방문하여 전단지를 뿌리는 여호와의 증인 못지 않은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들어 오거나 놀러 오지만 흔적을 남겨 놓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대부분 흔적 없이 들어 오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이들은 댓글을 남겨 놓기도 한다. 대게 불교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다음과 같은 글이다.

 

 

참으로 좋은 글로 깨우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듭 읽고 숙고하여 이해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불교에 대한 열의와 절실한 추구도 없이 단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되고 현실을 좀 더 편안하게 살고 죽음의 공포에서 위안을 얻고자 (한마디로 말하면 대승불교에서의 부처님 가피를 입어 행복을 얻고자) 아무런 지식도 없이 대승경전을 간간히 독송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삶의 여러가지 스트레스로부터 위안을 얻으며 살다가     2년쯤 전에 우연히 여기 연꽃님의 블러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기불교를 접하게 되었죠. 그렇지만 원체 대승불교를 포함하여 불교적 기본지식이 없었고 신심이나 근기도 부족했기에 이 블로그의 글들을 처음부터 꾸준히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여기 저기 읽다가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올려주시는 글들을 기반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겼고 그리하여 지금 이 글 내용에 들어있는 바와같이 대승불교에 대한 의문점과 갈증을 발견하게 되어   이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고심을 겪기 시작하는 첫단계에 서 있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숙고하여 배워 나가겠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모든 님들이 편안하시기를 발원드립니다.

 

(R법우님)

 

 

 

 

 

인사말과 함께 격려의 글을 주셨다. 올려진 글이 누군가에는 도움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얼굴도 모르고 오로지 올려진 글로서 밖에 알 수 없지만 이런 글을 받으면 힘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드시 격려와 칭찬의 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이나 심지어 비방성 글도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안다는 사람들의 글도 보인다.

 

자칭 한소식 하였다는 이가

 

최근 어떤 이가 댓글을 올렸다. 도배를 하다 시피 수 많은 글을 올렸는데 과거에 글 좀 써 본 솜씨인 것 같다. 그리고 수행을 해 본 사람 같다. 자신의 나이를 밝히며 전화와 이메일까지 남겨 놓았다. 그러면서 불교 개혁운동을 하자고 한다. 한국불교는 썩었으니 새로운 종단을 창종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불교를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견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대단히 과격하고 비불교적임을 알 수 있다.

 

글쓴이는 올린 글의 횟수가 많아 짐에 따라 점차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대승불교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불교관에 따른다. 학창시절부터 불교학생회를 하며 오랜 세월 불교와 인연을 맺어 왔다는 그는 철저하게 대승불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선불교적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한소식 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 하고 있다.

 

그는 자칭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바라 보았을 때 문자주의에 천착하는 초기불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기불교가 나쁘단 것이 아니라 그게 마치 전부인양 생각하거나 선전함은 허공에 구름잡는 소리하는 얼치기 선사들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패턴의 엉터리짓이란 말이오.

 

(D법우님)

 

 

초기불교와 관련하여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 하는 것에 대하여 엉터리짓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올린 글에 대하여 선사들이 구름잡는 소리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글 같지 않게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 대하여 안다는 사람들, 특히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대단히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특히 대승불교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선사들이 하는 이야기들

 

D법우님이 말한 것은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거의 같다. 일반적으로 선사들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언어나 문자가 아닌 부처님의 마음과 뜻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와 별도로 가르침 전승되어 왔다는 교외별전을 주장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 부처의 성품을 보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을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빠알리 니까야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단어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에 대하여 대단히 냉소적인 것이다. 그래서 붓다를 아직 초견성도 얻지 못한 인간이 언어인식으로 사량하고 한정 짓게 된다 그말이오.”라고 말한다. 언어와 문자로 사량분별하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수 없이 듣는다.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2년 째 법문을 들려 주는 있는 인천 Y선원 S선사의 이야기에서도 들을 수 있고,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 볼 수 있고, 불교TV사이트에서 선사들의 법문이나 선어록 강좌에서도 들을 수 있다.

 

한결 같이 분별하지 마라, 내려 놓아라, 둘이 아니다등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화두를 둘 때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라고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라고 한다. 그래서 이치적으로 따져서도 안되고 교리적으로 해석해서도 안된다고 한다. 모든 알음알이를 내려 놓고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참구하다 보면 언제 어느 순간 몰록 깨닫게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려면 교리적으로 이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S선사가 그랬다.

 

2년간 S선사의 아침 법문을 듣다 보니 간화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교리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리침에 대하여 수 많은 왜곡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S선사에 한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선사들의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사들의 말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견성성불이라고 하고, 간화선으로 깨우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 못된 것이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개인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법문이 한 사찰의 법문에 그치지 않고 방송을 타고 전국방방곡곡 국민들에게 전파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에 너무 오래 다녀도

 

절에 너무 오래 다녀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10, 20, 30년 절에 다닌 사람 중에 한 가지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그것은 아상(我相)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절에 오래 다닌 보살들은 늘어 나는 것은 보살상이라는 아상 밖에 없는 것 같다. 절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고 스님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이런 현상은 스님도 마찬가지이다. 절에서 20, 30, 40년 산 스님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님상이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상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릴 때 동진출가한 스님들이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유독 세상것들에 대하여 호기심과 관심이 많다고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승려도박이나 은처의혹 등은 세상 물정 모르고 어렸을 적에 들어 온 동진출가 스님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보살이나 스님에게만 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불교와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었다는 남자거사에게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학생회 시절부터 불교를 접했고 수행 등을 통하여 불교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초기불교를 하는 자들은 우습게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에 집착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이번에 글을 준 이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분별하지 말라고

 

오로지 대승만 접하고 대승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그 불자는 초기불교에 대하여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초기불교 경전의 경우 경쟁력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청정하고 일관되게 수행하고 살려 하겠습니까? 바쁘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야 사는 세상에...
그리고 거기 나오는 힌두적 모습들이 서양 예수의 모습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묵어주겠습니까?
일부 마니아들이 지적으로 수용하고 말것이고 그건 결국 자타의 세월낭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됩니다.

 

(D법우님)

 

 

나름대로 수행을 통하여 한소식하고 견성을 하였다고 자부하는 D법우님의 글이다. 초기불교는 경쟁력이 없다고 한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온갖 흰두교적 요소들이 수용되어서 초기경전 공부를 하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장 빠른 길인 선적 체험을 하면 단번에 깨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무상, , 무아가 사라진 그 자리에 상락아정이 채워지는 무아지경을 경험할 것이라 한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선사들에게서도 많이 듣는다. 이른 바 일체가 되는 선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선정삼매에서 오는 희열, 행복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선불교에서 삼매를 강조하다 보니 분별하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라고 말한다. 이는 오로지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야 되기 때문이다이뭣고, 판치생모 등 화두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항상 하는 말은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 십이쳐,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분별을 설하는 빠알리 니까야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분별하지 말것을 강조하는 것이 선사들의 가르침이다. 분별하고 분석하고 분해하고 이치를 따져 보는 것은 삼매 수행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분별론자

 

그러나 부처님은 분별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나누고, 십이처, 십팔계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도 모두 분별이다. 사성제, 십이연기 역시 분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위방가(Vibhaga)’라는 명칭이 들어간 분별경(Vibhagasutta)이 매우 많다. 그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Paiccasamuppāda vo bhikkhave, desissāmi. Vibhajissāmi. Ta suātha. Sādhuka manasikarotha. Bhāsissām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경에서 분명히 분별을 이야기 하셨다. 선불교에서 선사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분별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분별하여 (Vibhajissāmi)’ 설하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각주에 따르면 싸끼야 고따마의 교단은 일찍이 분별설의 교단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에서 부처님이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M99. 쑤바의 경)”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왜 분별하여 설하였을까?

 

이처럼 부처님은 분별론자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법을 분별하여 설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붓다는 자신이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라고 했는데, 이는 분석을 통한 통찰이 세계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올바른 방법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

 

 

부처님이 법을 분별하여 관찰한 것은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이다. 이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빠알리로 야타부따(yathābhūta)’이다. 이를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드러나는 현상은 무상, , 무아이다. 어느 것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고, 지속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고, 자꾸 변하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존재, 모든 현상의 속성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분석을 통한 관찰을 하는 자라 하여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 vibhajjavadin) 라 하였다.

 

이와 같은 뜻으로 보았을 때 분별이라는 말은 매우 좋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가르침에서 분별하여 설하셨다. 팔정도를 설 하실 때도 수행승들이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분별해 보이겠다. S45:8)”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분별을 말씀 하였다.

 

윤회 그런 것 없습니다

 

하지만 선사들은 분별하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안다. 이는 수행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정삼매 수행에서는 대상에 몰입하기 때문에 절대 분별해서는 안된다. 대상에 몰입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분별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D법우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라 본다.

 

 

윤회 그런것 없습니다. 업이란 것도 다 말입니다 말... 연기라는것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인겁니다.

 

 

윤회 업 그런 것은....
웃기는 만화같은 만화경 속에서나 하는 소리입니다. 견성하면 다 녹아버립니다..

 

(D법우님)

 

 

댓글에서 보는 D법우님은 대승불자이다. 그것도 자칭 신대승운동을 한다고 하였다. 썩어 빠진 한국 불교를 바꾸기 위한 운동이라 한다.

 

글에서 법우님은 윤회라는 것은 없다라고 천명하였다. 다 웃기는 만화 같은 이야기라고 내친다. 자신이 실재로 선정삼매를 통하여 한소식한 바에 따르면 윤회나 업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되는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의 본성 자리에서는 이분법적인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등 공한 것이라는 뜻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선정삼매에서는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정삼매의 체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고 대상에 몰입하는 선정삼매의 상태에서 분별을 설하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무력화 된다. 이 세상의 어떤 탁월한 진리도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조리 무()자가 된다. 가공할 공의 위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였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상견 아니면 단견에 빠지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

 

우리나라 선사들은 삼매와 무분별 이야기는 해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분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특히 연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연기가 불교의 가장 핵심 교리임에도 연기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연기가 분별을 설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연기법이다. 만일 불교에서 연기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불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불교를 불교이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그렇다면 왜 연기법이 중요한가?

 

인터넷에는 온갖 사상이 난무한다. 마치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영원론과 단멸론이 판을 친다. 특히 익명을 전제로 서슴없이 단멸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적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내세와 윤회를 부정한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라 한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이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윤회를 인정하면 단멸론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D법우님에 따르면 선정삼매 수행을 하는 사람도 윤회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회 그런것 없습니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 업도 개념일 뿐이라 한다.

 

이런 주장은 놀랍게도 단멸론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이자 유물론자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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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낫티경-Natthidinna sutta- Nothing- 없음경, 상윳따니까야 S23.1.5, 전재성님역)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철저하게 내세를 부정하였다. 몸이 파괴 되고 죽으면 아뭇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내세도 없고 윤회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부정한다.

 

그런데 D법우님은 놀랍게도 윤회 그런것 없습니다. 업이란 것도 다 말입니다 말... 연기라는것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인겁니다.”라고 하였다. 단멸론자들의 주장과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더구나 대승도 아니고 신대승 운동을 한다는, 그것도 한소식 하였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소식한 선사들은 모두 단멸론자들일까?

 

윤회를 부정하는 법륜스님

 

요즘 한국불교에 이상한 풍조가 있다. 그것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법륜스님의 법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윤회사상에 원 뿌리는 지금부터 5천년 전 인도의 토착세력인 드라비다족, 드라비다족의 사상입니다.

그것이 인도의 브라만교가 들어와서 아리안족이 인도를 침략해서 인도 대륙을 지배하면서 자기들 사상이 주류를 형성하고 이 드라비다족 사상은 다 없앴는데 그중에 드라비다족 사상이 브라만 사상에 들어와서 그대로 남아서 거기에서 또 자리 잡은 게 뭐다? 윤회사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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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사상은 그것은 인도의 전통사상이지 불교의 핵심사상은 아니다. 이 말이오. 이 구분이 돼야 돼.

 

(법륜스님, 제314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58,000여 회에 이르는 법륜스님의 동영상 법문을 녹취한 것이다.

 

법문에서 스님은 윤회사상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윤회사상은 원래 드라비다족의 토착사상이라 한다. 그것이 아리안족의 브라만교로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도의 전통사상인 윤회사상이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같이 묻어 들어왔다고 말한다. 

 

법륜스님은 부처님이 윤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 하신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이는 빠알리 니까야를 보지 않았거나 초기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법상에 앉은 결과라 보여진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도처에서 윤회를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S15:11)”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법륜스님은 윤회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고 곁가지에 불과하고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상임을 강조한다. 이는 숙명론적 윤회설을 부정하기 위한 설명으로 그렇게 법문을 한 것으로 보이나 연기법에 대하여 잘 모르고 한 말이라 보여진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알면 윤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떻게 논파되었나

 

윤회를 부정하거나 윤회라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연기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연기법을 모르면 대게 영원론자 아니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다. 이는 부처님 당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는 영원주의로 대표되는 브라만교가 있었다. 그리고 육사외도의 단멸론이 있었다. 부처님은 이들 영원주의(상주론)와 허무주의(단멸론)을 모두 제압하였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어떻게 논파하였을까? 깟짜야나 곳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생겨난 것은 소멸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하였다. 이는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법칙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형성된 존재들이 무상하게 소멸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듯이 형성될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의 소멸을 보았을 때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거짓이 된다. 연기법으로 영원주의가 논파된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하였다. 형성된 존재들이 업(kamma), 무명(avijja), 갈애(tanha) 때문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현상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법칙때문이다. 이는 업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지은 업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단멸론자에게 낭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생성을 보면 단멸론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연기법으로 허무주의가 논파 된 것이다.

 

연기법이 실종된 결과

 

이렇게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와 육사외도의 허무주의는 연기법으로 모두 논파 되었다. 바로 이런 연기법이 있었기에 불교가 성립될 수 있었고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승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분별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연기법이 실종되었다. 이는 선정삼매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영향이다. 그러다 보니 분별하지 말것을 강조하고, 분별을 설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반야심경으로 무()자 행렬로 인하여 모조리 부정되었다. 그 결과 윤회가 부정되고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모두 선정삼매를 중시한 부분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스님이나 재가의 좀 안다고 하는 자나 모두 윤회 그런 것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윤회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서 ()’()’를 본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고 업보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허무주의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오욕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결국 막행막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 공병에 걸린자들이다. 공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여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 걸림없이 행동한다.

 

분별의 가르침을 알아야

 

인생이 원타임에 불과하다면 도덕을 지킬 필요도 없고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일까 D 법우님은 실력행사로 뭔가 보여 주자고 한다. 썩어 빠진 한국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창종해서 종정이 되고 총무원장이 되고 지역사찰 주지가 되어 나의 뜻을 펼치고...”라고 말한다. 여기서 허무주의자의 막행막식을 본다. 마치 1998년 최악의 조계종 종권사태가 일어 났을 때 일부 정치승들이 총무원 청사만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인식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이 모두가 초기불교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분별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항상 도덕적 허무주의와 막행막식으로 끝난다.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윤회를 부정하고 업의 과보를 부정한다. 그리고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오물장(汚物藏)’ 같은 개인적인 견해를 남발한다. 선정삼매를 추구하는 수행을 오래 하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가 보다.

 

부처님의 분별의 가르침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 여기에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그것이 무상, , 무아인줄 알게 된다. 그렇게 관찰하였을 때 결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질 염려가 없다.

 

 

 

2013-07-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