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깨어 있음(覺, Bodhi)에 전념한다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6. 3. 19:42

 

 

깨어 있음(, Bodhi)에 전념한다는 것은?

 

 

 

 

 

 

 

유튜브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사이버세상은 이제 현실세계와 다름 없다. 더구나 스마트폰 보급으로 인하여 손안에 늘 작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현대인들은 수시로 네트워크에 접속함에 따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또한 올려진 자료는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오래 전에 올려진 것이라도 누구나 검색창에 키워드만 집어 넣으면 쉽게 소통할 수 있다.

 

유튜브에서 종종 건질만한 자료를 발견한다. 요즘 유튜브는 인공지능기능이 있어서일까 선호하는 주제를 자동으로 선별해 준다. 종교와 관련된 검색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관련된 자료를 미리 소개해 주는 식이다. 그런 자료 중에 도올 김용옥님의 강연이 있다. 그것은 도올특강-종교란 무엇인가이다. 김용옥님이 원광대에서 강연한 것을 올려 놓은 것이다.

 

도올 김용옥님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극과 극이다. 아주 좋아하는 광팬이 있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그룹도 있다. 그러나 강연을 듣다 보면 새겨 들을 만한 사항도 매우 많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듣는다. 특히 종교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초월적 체험에 대한 것이다.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ness) 체험

 

김용옥님은 강연에서 루돌프 오토의 자료를 인용하여 초월적 경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종교적 체험은 자연적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초자연적(Super Natural) 인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월적 사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막강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초월적 타자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 범부의 마음 상태와 다른 어떤 초월적 경험을 하였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성스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대각(大覺)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컨버전스(Convergence)라 하는데 일상적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라 한다.

 

종교적 체험은 일상적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루돌프 오토는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ness)’라 하여 어떤 무엇이 나타나는데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겸손해 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기쁨이나 환희, 평화가 엄습해 오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 온다는 것이다. 사전에 경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준비된 상태에서 있었던 것도 아니라 한다. 저항 할 수 없는 것으로서 확신에 찬 절대적인 것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본인에게는 명료한 것이라 하였다.

 

루돌프 오토의 절대적 타자에 대한 체험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절대적 타자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나 존재의 근원이라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절대적 타자의 체험과 비종교적 체험과는 무엇이 다를까? 사실 김용옥님의 강연에서 가장 관심 있게 들었던 부분이다.

 

비종교인들의 신비한 체험

 

비종교인들도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를 마약의 비유를 들고 있다. 마약 중독자가 약물투여로 인하여 일반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체험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마약을 먹고 일어나는 절정의 체험(Peak Experence)의 체험은 일시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절정의 체험, 신비한 체험은 출산시에 할 때나 성교할 때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런 신비한 체험, 절정의 체험이 인격을 변화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약을 먹어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 하여 인격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또 다시 형편 없는 마약중독자의 모습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나면 불쾌감을 경험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 한모금 빨 때 행복해 하지만 담배를 끊었을 때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감각적 쾌락에 따른 행복은 일시적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 되지 않아 괴롭고 불쾌를 경험한다. 그래서 인격적 변화도 삶의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신비한 체험이나 행복은 다르다. 인격적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의미체계는 무엇인가?

 

종교적 대각이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체계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그 의미 체계가 총체적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더구나 개인적인 차원의 신비한 체험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용옥님의 강연 핵심은 이렇다.

 

 

종교적 대각은 개인적 차원의 신비한 체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작게는 동네사람들의 모든 삶을 변화시키는 어떤 새로운 각성과 의미체계로 나타난다.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서 보편적인 인류공동체에 영향을 주는데 까지 가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대각은 우리 전체의 삶을 변화 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도올특강-종교란 무엇인가)

 

 

루돌프 오토가 비록 절대적 타자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체험이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더구나 주변 뿐만 아니라 너른 지역의 사람들의 변화를 끌어 내었을 때 하나의 종교가 탄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각이라는 신비한 체험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 버리면 독각승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먹을 때는 종교적 유사체험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깨어 나서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변화를 전혀 이끌어 갈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홀로 깨우쳐 진리를 전파하지 않는 독각승은 세상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산속에서 홀로 사는 수행승 역시 세상에 변화를 주기 힘들다. 깨어 있는 자가 세상사람들과 함께 할 때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

 

깨어 있는 자가 출현하면

 

불교에 대하여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불교인들은 깨달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현재 진행형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수행자들이 평생 산에서 사는지 모른다. 깨달았으면 깨달음을 회향해야 하나 계속 산에 머무른다면 독각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우희종 교수가 깨달음이 아니라깨어 있음이라고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깨달음과 깨어있음은 다른 말이다. 깨달음에 대하여 한자어로 오()로 보고, 깨어 있음에 대하여 한자어로 각()으로 본다. 이런 구분법에 대하여 이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괴로움에 있다. 괴로움을 자각하여 사성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각(, Bodhi)으로 보고, 괴로움과 관련 없이 합일의 경지에 이른 것을 오()로 볼 수 있다.

 

선사들의 오도송이 있다. 깨달은 순간을 노래 한 것이다. 그런 오도송은 대부분합일의 경지에 대한 것이다. 이때 오도송의 오자는 한자어로 오()를 사용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은 철저하게 괴로움에 기반한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굴려서 확신이 섰을 때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라 하였다.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 sammāsambodhi)’, 즉 무상정득정각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정등각자가 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Bodhi)으로 인하여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많은 사람들에게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게 만든 것이다. 고귀한 가르침을 접하고 고귀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 분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지만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변화로 인하여 주변사람들도 변하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깨어 있는 자의 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네 가지 불퇴전의 원리가 있는데

 

깨어 있는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어느 경우에도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그리고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고도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깨어 있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Catū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abhabbo parihānāya nibbānasseva santike. Katamehi catūhi? Idha, bhikkhave, bhikkhu sīlasampanno hoti, indriyesu guttadvāro hoti, bhojane mattaññū hoti, jāgariya anuyutto h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열반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퇴전할 수 없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parihāniyasutta-불퇴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불퇴전의 원리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1) 계행을 갖추는 것 (sīlasampanno), 2)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indriyesu guttadvāro), 3)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bhojane mattaññū), 4)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jāgariya anuyutto)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는 수행자라면 항상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는 것

 

네 가지 중에 깨어 있음에 전념(jāgariya anuyutto)’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jāgariya’‘vigil; waking’의 뜻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Addicted to, devoted to’의 뜻을 가진 ‘anuyutto’가 붙어 있으므로 늘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깨어 있음이란 어떤 뜻일까?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들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도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

 

(Aparihāniyasutta-불퇴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37, 전재성님역)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이는 잠들기 전에도 알아 차림을 유지하고 잠에서 깨어나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sato sampajāno)”라 하였다.

 

늘 깨어 있으면 계행은 저절로 지켜 진다. 그리고 감각의 문도 수호된다. 식사절제도 이루어진다. 항상 깨어 있다면 퇴전 할 수 없고 열반을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을 때

 

늘 깨어 있기는 쉽지 않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에 휩쓸리기 쉬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사리뿟따의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성찰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사리뿟따]

벗들이여, 만약에 수행승이 성찰하면서 이와 같이 나는 자주 탐욕스럽고, 나는 자주 성내고, 나는 자주 해태와 혼침에 사로잡히고, 나는 자주 흥분하고, 나는 자주 회의적 의심을 하고, 나는 자주 분노하고, 나는 자주 오염된 마음으로 지내고, 나는 자주 격정적 마음으로 지내고, 나는 자주 게으르고, 나는 자주 집중에 들지 못한다.’라고 알면, 벗들이여, 그 수행승은 그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끊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내고 정진하고 분발하고 책려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일으켜야 합니다.

(사리뿟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52, 전재성님역)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러운 것이나 때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거울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 그 때 볼 수 있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다. 오장애가 대표적이다. 이는 욕망, 성냄,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마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드러난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을 비추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다. 그런데 타인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항상 깨어 있는 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와 같이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런 사람이 스승이 될 수도 있고 도반이 될 수도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다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늘 알아차림을유지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부처님을 생각해야 하나 부처님은 우리 옆에 계시지 않다. 다만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착하고 건전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늘 깨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면 감화를 받을 수 있다. 이는 내가 이 사람을 섬기면 악하고 불건전 것들이 줄어들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늘어난다.(A10.54)”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도반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라 하셨을 것이다.

 

 

2015-06-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