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겉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사람 구별하는 방법 네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6. 11:51

 

겉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사람 구별하는 방법 네 가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십년지기 법우라도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다. 경계에 처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초기경전에 답이 있다.

 

우다나에 결발고행자의 경(Ud.64)’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도 동일한 이름의 경(S3.11)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경우의 경(A4.192)’라는 제목으로 유사한 내용이 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

 

어느 날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가 육사외도 들이 지나는 것을 보았다. 이들 외도들은 명성이 자자 하였으므로 왕은 초청을 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에게 찾아 와서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라며 물었다. 빠세나디왕은 명성만 듣고 겉으로만 보아서 거룩하게 본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세존]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 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국에서 나는 화환과 향수와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결발고행자의 경, Ud.64, S3.11, A4.192, 전재성님역)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렇게 해석 할 수 있다. 깨달은 자만이 깨달은 사람만을알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세속에서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사는 범부들은 깨달은 자를 알 수 없다는 뜻과 같다.  마치 높은 산은 높은 산에 올랐을 때 큰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깨달은 자가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사람 구별하는 방법 네 가지

 

빠세나디왕이 육사외도를 본 것은 겉모습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말하는 명성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모든 것이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사람 구별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신다. 먼저 계행에 대한 것이다.

 

 

[세존]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 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의가 깊어야지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가 없습니다.”

(결발고행자의 경, Ud.64, S3.11, A4.192, 전재성님역)

 

 

어느 법우님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존경하는 스님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음계에 대한 것으로 차마 입으로 말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 스님은 청정비구로 알려져 있고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람을 처음 보아서 알 수 없다. 겉모습만으로 보아서도 알 수 없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가지고도 알 수 없다.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함께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께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수행공동체에서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주 접촉하여 경계에 부딛쳤을 때도 드러난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이 있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이다. 계행이 엉망인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야 알 수 있고 잘 살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계행을 지키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청정, 견고, 지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 사람이 청정한 지는

 

그 사람이 청정한 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에 따르면 대화를 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는 한 대화 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그 사람이 청정한지, 그 사람이 정직한지는 말하다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짧게 하면 알 수 없다. 더구나 주의를 기울여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정직과 청정에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보충설명이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와 우다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청정한지 정직한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대화를 통해 왕래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다. 이 존자와 예전에 나눈 대화는 나중에 나눈 대화와 일치 하지 않는다. 이 존자의 대화는 청정하지 못하고, 이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다.’라고 안다. (A4.192)

 

 

이 말의 요지는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한말 다르고 저 사람에 대한 한말 다르다면 그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경에서 청정이라는 말은 soceyya에 대한 번역이다.  이 말은 ‘Purification, purity’의 뜻으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정직으로 번역되었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깃발처럼

 

또 하나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견고함이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견고한 자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재난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견고함과 재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보충설명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친지의 상실을 겪고 재물의 상실을 겪고 건강의 상실을 겪으면서 , 이와 같이 ‘세상의 삶은 이러하고 존재의 획득은 이러하다. 이러한 삶을 취하고 이러한 존재를 획득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돌게 만들고 세상의 여덟 가지 원리를 돌게 만든다. 그것은 곧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다.’라고 성찰하지 못한다.(A4.192)

 

 

초기경을 보면 각 니까야마다 중복되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어느 경에서는 짤막하게 설명 되어 있지만 어느 경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길게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견고함과 재난의 관계에 대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팔풍(八風)이라 하여 획득과 손실’, ‘명성과 악명’,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을 말한다.

 

세상에서 여덟 가지 원리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깃발이 날리듯이 이득과 손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명성을 드날리기도 하지만 악명을 높을 수 있다. 때로 칭찬을 받지만 비난에 처하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은 수시로 교차한다. 그래서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깃발처럼 살아 간다. 그래서 팔풍이라 한다.

 

현자들은 어떤 이득과 불이익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명예와 불명예를 바라지도 않고 칭찬과 비난에도 초연하다. 그러다 보니 행복과 불행에도 끄덕 없다. 이런 사람이 바위와 같이 견고한 자이다. 마치 저 높은 산 위에 이는 큰 바위처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견고한 자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말솜씨에 대하여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지혜를 들 수 있다.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는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한번 보아서는 모를 것이다. 겉모습이나 사회적 지위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인지 알 수 있을까? 경에 따르면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라 하였다. 여기서 키워드는 논의이다.

 

논의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sākacchā이다. 이는 ‘conversation; discussion’의 뜻이다. 왜 논의를 해 보아야 지혜가 있는지 알 수 있다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에서는 길게 설명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논의 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 (A4.192)

 

 

경에서 키워드는 탐구하는 자세(ummaggo)’말솜씨(abhinīhāro)’질문 (pañha)’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로 지혜가 있는지 판단 된다는 것이다. 이 문구와 관련하여 초불연 대림스님의 번역을 보면 문제제기하는 것마음을 기울이는 것질문하는 것이라 하였다. 가장 차이가 나는 번역은 abhinīhāro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 ‘abhinīhār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말솜씨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다. 영문번역을 찾아 보았다. ‘a devious path, expresses himself, deals with the current topic’라 되어 있다. 여기서 자기자신을 표현 하는 것이 abhinīhāro에 해당된다.

 

빠알리어 abhinīhāro의 뜻은 ‘Earnest wish or aspiration’의 의미이다. 바람이나 열망, 포부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문번역 ‘expresses himself’가 타당하다. 전재성님이 말솜씨라 번역한 것도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림스님이 마음을 기울이는 것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과 동떨어진 말이라 보여진다.

 

경험한 것에 대하여

 

지혜 있는 자는 열심히 노력하는 자이다. 노력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 진다. 말로 잘 표현 할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내용을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논의 해 보면 지혜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지혜와 관련하여 호수위에 솟구친 물고기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 잔잔한 호수가 있다. 갑자기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이에 지혜가 없는 자 는 이 물고기가 위로 솟는 것과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헤엄치는 속도로 보아 이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이지 큰 물고기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작은 물고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여러 가지 것을 유추해 보건데 큰 물고기라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한다.(A4.192)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험 해 보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유의 영역을 뛰어 넘었다고 하였다. 이는 수행의 깊이를 말한다. 그래서 논의 하다 보면 경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가르침을 알기 쉽게 잘 설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지혜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가르침을 설할 때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있다. (tassa ca paibalo sakhittena vā vitthārena vā attha ācikkhitu desetu paññapetu paṭṭhapetu vivaritu vibhajitu uttānīkātu. A4.192)”라고 하였다. 이렇게 가르침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솜씨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혜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 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그가 오랜 친구라 하여도 또는 세상에 존경받는 사람이라 하여도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한 행동이 다른 것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오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고 자세히 살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가 정직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한입으로 두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람에게 하는 말 다르고 저 사람에게 하는 말 다르고, 아침에 하는 말 다르고 저녁에 하는 말 다르다면 정직하지 않다. 정직하지 않음은 청정하지 않음과 동의어이다. 그가 입을 어떻게 놀리는 것을 보면 그가 정직한지 청정한지 알 수 있다.

 

그가 견고한지는 팔풍에 휘둘리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세속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득과 불이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그는 견고하지 않은 자이다. 현자는 어떤 바람이 불어도 저 높은 바위산처럼 견고해야 한다.

 

그가 지혜있는지 알려면 논의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말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깊이 있는 말을 하는 자, 가르침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자는 말에 힘이 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온 것이기 때문에 심오하다.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의미 있는 말을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토론 해 보면 그가 지혜로운지 금방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 할 수 없다. 재산이 많다 하여, 학식이 풍부하다 하여, 사회적 지위가 있다 하여 판단한다면 대단히 실망할 수 있다. 그 사람의 계행이 어떤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청정한지는 대화를 해 보면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견고한지는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는 논의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2015-09-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