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4. 13:42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초기경에서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우다나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왓티 시에 비싸카라는 여인이

 

사왓티 시에 비싸카라는 여인이 있었다. 미가라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비싸카에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손자가 죽었다. 이에 비싸카는 거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옷을 적시고, 머리도 적신채 황급히 부처님을 찾았다.

 

비싸카를 본 부처님은 비싸카여, 그대는 싸밧티 시에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아들과 손자를 원하는가?”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물었을까? 이는 일반사람들의 무명과 욕심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비싸카는 저는 싸밧티 시에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아들과 손자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부처님이 비싸카에게 비싸카여,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가?”라고 물었다. 부처님 당시 대도시 사왓티에서는 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하여 물은 것이다. 이에 비싸카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비싸카]

세존이시여, 아마도 싸밧티 시에서 매일 열 사람이 죽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마도 싸밧티 시에서 매일 아홉 사람이 죽습니다세존이시여, 아마도 싸밧티 시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비싸카의 경, 우다나 Ud.91, 전재성님역)

 

 

비싸카는 사밧티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사왓티 시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손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매일 죽음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있고

 

부처님은 손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비싸카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 하신다.

 

 

[세존]

비싸카여,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있고, 아흔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흔 가지 괴로움이 있고,…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가지 괴로움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그에게는 슬픔이 없고 티끌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비싸카의 경, 우다나 Ud.91, 전재성님역)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있다고 하였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으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그 의미를 더욱 더 강조한다.

 

 

“Ye keci sokā paridevitā vā
Dukkhā ca lokasmi
anekarūpā,
Piya
paicca pabhavanti ete
Piye asante na bhavanti ete.

 

Tasmā hi te sukhino vītasokā
Yesa
piya natthi kuhiñci loke,
Tasmā asoka
viraja patthayāno
Piya
na kayirātha kuhiñci loke”

 

 

[세존]

세상에 갖가지

슬픔과 비탄과 고통이

사랑하는 자를 조건으로 생겨난다.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그것들은 생겨나지 않는다.

 

세상의 어디에도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슬픔을 여의고 행복을 얻으니,

슬픔을 여의고 티끌을 여의고자 하면,

세상 어디에도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비싸카의 경, 우다나 Ud.91,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보면 법구경 212번 게송이 연상 된다. 212번 게송은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사랑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 (Dhp212)”로 되어 있다.

 

죽어야 하는 것은 죽는 것이고

 

법구경 게송을 보면 슬픔과 비탄과 고통은 사랑하는 자 때문에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 법구경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연담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가 설해진 데는 이와 같은 인연담이 있다: DhpA.III. 276-278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에 계실 때, 어떤 재산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죽자 슬픔에 싸여 매일 화장터로 가서 울었다. 그는 비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서 아침 일찍 세상을 관찰하다가 그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탁발하고 돌아 오는 길에 한 사미를 데리고 그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일상적인 방문으로 생각하고 맞이 하여 자리를 내 주었다. 부처님께서 자리에 앉자 그는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재가신도여, 왜 슬퍼하는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부처님께서는 재가신도여, 슬퍼하지 말라. 죽음이라는 것은 한 장소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 모든 뭇삶의 것이다. 조건지어진 것은 어느 하나도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죽어야 하는 것은 죽는 것이고, 부서져야 하는 것은 부서지는 것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슬퍼해서는 안 된다. 옛날 현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죽어야 하는 것은 죽는 것이고, 부서져야 하는 것은 부서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슬퍼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았다.”라고 말했다.

 

재가신도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그렇게 한 그들은 누구입니까?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뱀이 허물을 벗듯, 사람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간다. 몸이 아름다워도 죽어 사멸할 때 무엇을 누릴 것인가? 몸이 불타면 친지들의 비탄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라. 가야 할 운명이면, 가는 것이다.’라고 우리가자따까(Uragajataka: Jat.351)를 상세히 설하고, 또한 과거의 현자들은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그대가 하듯 하지 않았다. 그대는 일도 안 하고, 음식도 먹지 않고, 비탄 속에서 지내고 있다. 현명한 자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비탄해하지 않고 음식도 먹고 일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에 슬퍼하지 말라. 슬픔이나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은 단지 사랑하는 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시로써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사랑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재산가는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

 

(법구경 인연담 Dhp212,  어떤 재산가와 관련된 이야기, 전재성님역)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슬퍼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아들을 잃은 장자에게 죽어야 하는 것은 죽는 것이고, 부서져야 하는 것은 부서지는 것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어야 함을 말하였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슬픔 중에서도 가장 슬픔은 사랑하는 자를 잃었을 때 이다. 특히 자식을 잃었을 때 매우 비통해 한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였다.

 

같은 죽음이라도 젊은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이 죽으면 슬픔은 매우 크다. 이는 살만큼 살다가 죽은 노인과 비교 된다. 세월호로 나이 어린 학생들의 죽음이 슬픈 이유이다.

 

현자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뱀이 허물을 벗듯, 사람은 자신의 몸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간다. 몸이 아름다워도 죽어 사멸할 때 무엇을 누릴 것인가? 몸이 불타면 친지들의 비탄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라. 가야 할 운명이면, 가는 것이다.”라는 자따카의 문구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슬피 울어도 죽은 자는 듣지 못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로 태어 났기 때문이다. 이는 대승불교와 다른 것이다.

 

중유(中有)는 있는가 없는가?

 

대승불교에서는 죽은 다음에 중유(中有)로서 머문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중간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49재 등 천도재를 지내준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따르면 죽는 순간 곧바로 다음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이다. 천상에 태어난다면 곧바로 천상에 화생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죽는 순간 입태 할 것이다. 이는 연기법칙에 따른다.

 

행위()를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는데 이 때 식은 재생연결식이다. 이런 식이 일어날 때 지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간(無間)이라 한다. 간격이 없이 바로 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난다. 이렇게 지체 없이 연기의 법칙은 흘러 간다.

 

지은 죄가 무겁다면 곧바로 악처에 태어나거나 화생할 것이다. 중유로서 49일 동안 보내는 것이 아니다. 49일 동안 천도재를 지내 주면 악처에 가는 것이 면하는 것이 아니다. 죽자마자 곧바로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경전에서도 알 수 있다. 우다나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세존]

재가자들이여, 세상에서 계행을 지니지 않고 계행을 어기는 자는 미혹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 재가자들이여, 이것이 계행을 지니지 않고 계행을 어기는 자의 네 번째 재난입니다.”

 

(빠딸리가마 사람들의 경, 우다나 Ud.83, 전재성님역)

 

 

여기서 미혹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음의 침대에 누우면, 계행을 지키지 않은 행위들이 집적되어 전개되면서 그의 시야에 들어 온다. 그는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고 눈을 감고는 저 세상을 본다. 네 가지 상태의 괴로운 운명이 행위에 따라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백개의 창에 찔리고, 타오른 불길에 타는 것과 같다. 그는 멈추어라. 멈추어라.’라고 외치면서 죽는다. (UdA.417)”라고 되어 있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의 임종 순간에 대한 것이다. 임종 순간에 악행에 대한 것이 파노라마 치듯이 떠 오르면서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생을 위한 재생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죽음과 태어남에 간격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를 들어 두 갈대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벗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 명색을 의존하여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S12:67)”라고 표현 된 것처럼 무간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조건발생과 조건소멸

 

괴로움, 슬픔, 비탄은 사랑하는 자를 조건으로 발생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조건이라는 말이 빠띳짜(paicca)이다. 연기에서 말하는 조건에 해당된다.

 

연기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 한다. 이말은 빠띳짜paicca: on account of, りて, 연하여)와 사뭅빠다(samuppāda: arising , 生起 ,발생)의 결합어이다. 이는 조건발생을 말한다. 연기는 조건발생이다. 또 조건소멸이 연기이다.

 

지금 괴로운 자는 괴로운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잃어서 슬프다면 슬픈 원인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조건으로 슬픔이 발생된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랑하지 않으면 슬플 일도 없다. 그래서 비싸카의 경 게송에서는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슬픔을 여의고라 하였다. 더구나 행복을 얻으니라 하였다.

 

사랑이라는 조건이 소멸 되면 슬픔도 소멸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건 소멸할 것인가? 이미 사랑하는 아들, 또는 손자가 죽었는데 어떻게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UdA.429에 따르면, 고귀한 님들은 일체의 탐욕을 여의었으므로 어떠한 것이라도 뭇삶의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들, 형제, 자매, 아내와 같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고 이것으로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사랑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슬픔을 여의고 슬픔을 여의었기 때문에 행복하다.

 

(1086번 각주,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놓아 버리는 것에 대하여 집착(upādāna)’으로 설명하고 있다.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조건소멸이 되어 더 이상 슬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픔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고성제에서는 생노병사 등 여러 가지 괴로움이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piyehi vippayogo dukkho)”이라 하였다. 아들이나 손자를 잃어 슬퍼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 집착을 들었다.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라고 선언하였다.

 

이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근본적인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반대로 여겨 이것은 나의 것이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고 이것으로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상실 되었을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 생겨나면 괴로움도 발생한다.

 

사랑하는 자는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 백명의 사랑하는 자가 있으면 백가지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가 한사람도 없을 때, 즉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괴로움은 발생되지 않는다. 설령 사랑스런 대상이 있어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어디에도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2015-09-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