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병환자 숩빠붓다의 인생역전

담마다사 이병욱 2015. 8. 14. 11:21

 

나병환자 숩빠붓다의 인생역전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나 가장 가난한 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차별 없이 설하였다. 다만 받아 들이는 것에 있어서는 차별이 있을 수 있다.

 

음식을 얻고자 설법장소에 갔는데

 

우다나에 나병환자 이야기가 있다. 경에 따르면 그 때 라자가하 시에는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사람 가운데 가장 곤궁하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비참한 나병환자 쑵빠붓다가 살고 있었다.” (Ud51) 라고 되어 있다. 가난과 곤궁과 비참함으로 표현 되는 나병환자는 불행한 자이다. 사람들이 멀리 할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므로 불행한 자 중에서도 불행한 자라 볼 수 있다.

 

나병환자 숩빠붓다(Suppabuddha)이야기는 법구경 인연담에도 나온다. 법구경 66번 게송이다. 또 맛지마니까야 마간디야의 경(M75)’에도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법구경 인연담의 원류가 되는 경이 바로 우다나 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이라는 것이다.

 

법구경 인연담에서 나병환자 숩빠붓다 이야기는 짤막하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우다나에서는 긴 길이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숩빠붓다 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이다.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부처님이 많은 대중에게 둘러 싸여 법문을 하며 앉아 있는데 그 광경을 보고서 저기에는 틀림없이 갖가지 음식과 나누어줄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저 대중이 있는 곳을 찾아 가면 어떨까? 조금이라도 갖가지 음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Ud51)라 생각하였다. 음식을 구하고자 설법장소로 간 것이다.

 

숩빠붓다 가 설법장소에 가 보니 먹을 것이 없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왕 온 김에 법문이나 듣고 가자는 심정으로 고따마가 가르침을 설한다. 나도 가르침을 들어볼까?”라 하였다.

 

나병환자를 위한 설법

 

이때 부처님은 모든 대중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나병환자 숩빠붓다 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 자가 참으로 세상에서 가르침을 알아 챌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병환자를 위하여 법문을 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Suppabuddha kuṭṭhi ārabbha ānupubbi katha [ānupubbikatha (sī.), anupubbikatha (syā. pī. ka.)] kathesi, seyyathida – dānakatha sīlakatha saggakatha; kāmāna ādīnava okāra sakilesa; nekkhamme [nekkhamme ca (sī. syā. pī.)] ānisasa pakāsesi.

 

세존께서는 나병환자 쑵빠붓다를 위해서 차제적인 설법을 행했다. 예를 들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져오는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것을 여읨의 공덕에 관하여 설하였다.

 

(Suppabuddhakuṭṭhisutta-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 우다나 Ud51, 전재성님역)

 

 

나병환자는 가르침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다. 그리고 부처님도 처음이고 설법도 이다. 이는 부처님에 대하여 고따마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수 많은 대중속에서 유독 가난하고 불행한 나병환자 한사람을 위하여 설법을 하는 형식이 되었다. 부처님이 천안통으로 보고 있었기 떄문이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어려운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가장 쉬운 이야기부터 시작 하였다. 이를 차제설법(ānupubbi katha)이라 한다. 차제설법에 따르면 1)보시에 대한 이야기, 2)계행에 대한 이야기, 3)하늘에 대한 이야기, 4)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져오는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것을 여읨의 공덕, 이렇게 네 가지로 순서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매우 길게 상세 하게 설명하고 있다.

 

보시에 대한 이야기(dānakatha)

 

첫 번째로 보시에 대한 이야기(dānakatha)이다. 보시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우다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이있다.

 

 

dānakatha: Uda.740에 따르면, 보시는 행복의 토대요, 번영의 뿌리요 향수의 기초이고 다양한 뭇삶의 피난처요, 동굴이요, 운명이고, 궁극의 의지처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보시와 같은 지지처, 기초, 버팀돌, 피난처요, 동굴이요, 운명이고, 궁극의 의지처가 없다.

 

지지처라는 의미에서 황금보좌와 같고, 기초라는 의미에서 대지와 같고, 버팀줄이라는 의미에서 밧줄로 만든 버팀줄과 같고, 괴로움을 건너는 의미에서 배와 같고,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의미에서 전장에서의 영웅과 같고, 두려움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성곽을 둘러싼 해자와 같고, 인색 등의 때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붉은 연꽃과 같고, 소각한다는 의미에서 불과 같고, 힘이 있다는 의미에서 코끼리와 같고, 큰 길상이라는 의미에서 흰 황소와 같고, 안전한 지역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말들의 왕 발라하까(Valahaka)와 같다.

 

보시는 왕의 영광을 주고, 전륜왕의 성취를 주고, 악마의 성취, 하느님의 성취, 학인의 성취, 연각불의 깨달음,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님의 궁극적인 앎을 준다. 이것이 보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674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초심자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보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시에는 재보시와 법보시가 있는데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보시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이 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 주석에 있는 것처럼 보시는 행복의 토대요, 번영의 뿌리요 향수의 기초이고 다양한 뭇삶의 피난처요, 동굴이요, 운명이고, 궁극의 의지처이다.”라는 비유를 들어 설법을 한 것이다. 보시와 관련하여

 

 

잘 살펴 보시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일.

이 생명의 세계에서 보시 받아야 할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리. (S1.33)

 

 

부처님은 보시하면 큰 과보를 가져 온다고 하였다. 그것도 성자에게 보시 하면 더 큰 과보를 가져 온다고 하였다. 이는 보배경(Sn2.1)’에서도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길로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라 하였다.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a)

 

두 번째로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a)이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īlakatha : Uda.740에 따르면, 보시는 행복의 토대요, 번영의 뿌리요 향수의 기초이고 다양한 뭇삶의 피난처요, 동굴이요, 운명이고, 궁극의 의지처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보시와 같은 지지처, 기초, 버팀돌, 피난처요, 동굴이요, 운명이고, 궁극의 의지처가 없다.

 

어떠한 꽃도 계행보다 아름답지 않고 어떠한 향기도 계행보다 향기롭지 않다. 계행에 장식을 붙이고 계행의 꽃으로 꾸미고 계행의 향으로 칠한 자는 신들을 포함한 세상사람들이 바라보는데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계행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675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역)

 

 

계행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꽃과 향기의 비유를 들고 있다. 꽃은 시들지 모른다. 그러나 계행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그래서 꽃 보다 계행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계의 향기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리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 간다. (dhp54)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그러나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로 사방팔방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이렇게 본다면 꽃향기 보다 계의 향기이다.

 

하늘에 대한 이야기(saggakatha)

 

세 번째로 하늘에 대한 이야기(saggakatha)이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ggakatha: Uda.740에 따르면, 하늘은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드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놀이가 있고 언제나 번영이 있다. AN.I.213에서 부처님이 비싸카에게 설명하는 하늘나라의 행복은 다음과 같다 : 비싸카여, 하늘나라의 행복에 비해서 인간의 권력은 저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싸카여, 인간의 오십년이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낮 하루 밤이고, 그 하루의 삼십 일이 한 달이고, 그 한달의 십이 개월이 일년이고, 그 일년의 오백년이 네 위대한 왕들 하늘나라의 신들의 수명입니다. 비싸카여, 세상의 어떤 남자나 여인이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포살을 지키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네 위대한 하늘나라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676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역)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욕계천상이다. 욕계 육욕천을 말한다. 즉 가장 낮은 사대왕천부터 시작하여 삼심삼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이렇게 여섯 천상을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하면 대게 삼십삼천을 말한다.

 

인간 바로 위 천상이 사대왕천이다. 그런데 사대왕천의 하루는 인간의 오십년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바로 위가 삼십삼천이다. 삼십삼천에서의 하루는 인간의 백년이다. 인간백세 시대에 접어 들었을 때 고작 천상에서의 하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삼십삼천에 대한 묘사가 매우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상윳따니까야 난다나의 경이다. ‘환희의 경이라 번역된다. 환희의 경에서 환희동산은 어떤 곳일까? 경에 묘사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한 하늘사람이 환희의 동산에서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여 갖가지를 구족하고 즐기면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하늘사람]

‘영예로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자 다른 하늘사람이 그 하늘사람에게 이와 같은 시로 대답했다.

 

[다른 하늘사람]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알지 못하니 거룩한 님께서 말씀하셨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S1.11)

 

 

천상에 태어나면 인간 세상의 왕권 보다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왕권을 가진 왕이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아 보았자 천상에서 하루 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부처님은 하늘나라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서 점차 가르침의 단계를 높여 나갔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여읨의 공덕이야기

 

네 번째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가져오는 위험과 타락과 오염, 그것을 여읨의 공덕(kāmāna ādīnava okāra sakilesa, nekkhamme ānisasa)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kāmāna ādīnava okāra sakilesa, nekkhamme ānisasa : Uda.740에 따르면, 부처님은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코끼리를 치장하여 그 코를 자른 것처럼, ‘하늘나라도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고 욕망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MN.I.130)는 것을 상기시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위험과 타락과 오염에 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출가, 선정등의 공덕을 찬양한다.

 

(677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역)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런 천상은 수명과 복이 보장 되어 있다. 특히 수명의 경우 인간과 비교하였을 때 인간의 수명은 하루살이 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천상에서 즐거움은 왕권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차제설법을 하면서 감각적 쾌락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말씀 하신다.

 

부처님은 듣는 자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감각적 쾌락의 위험에 대한 여읨, 즉 출가와 선정에 대한 공덕을 찬양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맛지마니까야 MN.I.130을 들고 있다. PTS본 맛지마니까야 1 130페이지에는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이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위험과 재난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했다. 또한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해골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고깃덩어리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건초횃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숯불구덩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빌린 물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나무열매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도살장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칼과 창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뱀머리의 비유를 설했는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했다. (M22)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즐거움 보다 괴로움이 더 많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병환자의 비유가 있다.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마간디야의 경에서 마간디야여, 예를 들어 한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이 할퀴어져서,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운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를 위해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친척이 외과의사를 초빙해서, 그 외과의사가 그를 치료하게 한다고 합시다. 그는 그를 치료해서 나병에서 해방되면, 병이 없고 안락하게 자유자재로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나병환자가 사지가 헐고, 사지가 썩어 들어가고, 벌레에 먹혀 들어가고, 손톱으로 상처의 구멍이 할퀴어져서,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마간디야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그 나병환자가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우는 것이나 치료를 받는 것을 부러워하겠습니까? (M75)라고 묻는다. 나병환자의 경우 불에 지질 때 쾌감을 느낀다. 바로 이런 것이 감각적 쾌락의 위험성이다.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나고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나병환자 숩빠붓다를 위해서 설한 것처럼 되어 있다. 여러 대중이 있지만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행하고 가장 천대받는 나병환자에게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 하여 차츰 단계를 높여 수승한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설한다.

 

 

Yadā bhagavā aññāsi suppabuddha kuṭṭhi kallacitta muducitta vinīvaraacitta udaggacitta pasannacitta, atha yā buddhāna sāmukkasikā dhammadesanā ta pakāsesi – dukkha, samudaya, nirodha, magga. Seyyathāpi nāma suddha vattha apagatakāaka sammadeva rajana paiggaheyya, evameva suppabuddhassa kuṭṭhissa tasmiyeva āsane viraja vītamala dhammacakkhu udapādi – ‘‘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 ta nirodhadhamma ’’ nti.

 

세존께서는 나병환자 쑵빠붓다가 마음이 준비되고 마음이 유연하고 마음이 장애를 벗어나고 마음이 고양되고 마음이 청정해진 것을 알자, 깨달은 님들이 칭찬하는 법문,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설명했다. 예를 들어 때가 없는 깨끗한 옷이 올바로 물드는 것과 같이, 나병환자 쑵빠붓다에게 그 자리에 앉은 채, 이와 같이 무릇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되는 법이다.’라는 때 없고 티끌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Suppabuddhakuṭṭhisutta-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 우다나 Ud51, 전재성님역)

 

 

나병환자는 수다원이 되었다. 이는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생겨났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무릇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되는 법이다(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 ta nirodhadhamma)”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와 똑 같은 표현이다. 이 게송에 대하여 수다원 오도송이라고도 한다.

 

약탈될 수 없는 일곱 가지 재물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하였다는 말과 같다. 그 진리는 다름아닌 사성제이다. 부처님은 차제설법 가장 마지막단계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눈이 생겨난 숩빠붓다에 대하여 경에서는 진리를 보고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에 뛰어들어 의심을 건너고 의혹을 여의었다.”(Ud51)라 하였다. 여기서 의혹을 여의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시험에 든 것을 극복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제석천이 숩빠붓다에게 그대는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비참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대가 부처님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참모임도 없다” (Ud51)라고 말한다면 한량 없는 재산을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이에 나병환자는 거절 하였다.

 

진리의 눈을 뜬 나병환자에게 사성제는 확신에 찬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사람도 비참한 사람도 아니다. 반대로 나는 행복에 도달하고 지복에 도달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Ud51)라고 하였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행한 나병환자는 부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주석에서는 앙굿따라 니까야 AN.IV.5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찾아 보니 총리대신 욱가의 경(A7.7)’이다. 대부호에게 있어서 재물이란 왕이나 도둑 등에 언제든지 약탈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가지 재물은 전혀 약탈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를 게송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

 

여인이나 남자에게

이러한 재물이 있다면,

신들과 인간의 세계에서

그는 실로 대부호이고 정복될 수 없다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믿음과 계행,

청정한 신뢰와 진리에 대한 봄,

부처님 가르침에 새김을 확립한다네.”(A7.7)

 

 

쑵빠붓다는 제석천의 제의를 왜 거절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진리

 

부처님의 설한 사성제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진리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이다.’ 라 하였을 떼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라 하였을 때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인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였을 때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고 설하였을 때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였을 때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였을 때 어느 누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였을 때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S56.11)라 하였을 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겼을 때 진리로서 받아 들인다.

 

삼십삼천에 태어나는 조건

 

쑵빠붓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자가 되었다. 더 이상 가장 가난한 자도 아니고 가장 불행한 자도 아니었다. 진리의 눈이 생겨나는 순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 그가 부처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일어났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인사를 드리며 오늘부터 목숨이 다 할 때까지 귀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쑵빠붓다는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떠났다. 가르침에 교화되고 붇돋우지고 고무되고 기뻐 한 그는 부처님님께 인사를 하고 세 번 돌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송아지를 데리고 있는 암소에 받혀 죽고 말았다.”(Ud51)라고 하였다. 일반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자의 눈으로 본다면 연기적으로 볼 것이다. 치여 받혀 죽을 조건이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까워 한다면 조건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조건 지워진 마음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고무 되어 소에 받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에 종종 등장한다. 맛지마니까야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M140)’에 따르면 뿍꾸싸띠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고무 되었다. 구족계를 청하자 부처님은 발우와 법복을 구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하러 돌아 다니던 도중에 돌아다니던 황소가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M140)라 하였다. 뿍꾸싸띠는 다섯 가지 가장 낮은 단계의 장애를 부수었으므로 불환자가 되어 정거천에 태어났다.

 

청정도론에 이런 개구리 만두까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개구리가 부처님 설법이 열리는 근처에 있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세존께서 각가라 강변에서 짬빠 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개구리 한 마리가 세존의 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했다.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눌리면서 서 있었다. 그는 죽어 곧 바로 삼십삼천의 12유순이나 되는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Vism 7) 라고 표현 되어 있다.

 

개구리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병환자 숩빠붓다, 유행자 뿍꾸싸띠, 개구리 만두까에게 공통적인 사항이 있다. 그것은 죽는 순간에 매우 청정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청정해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 선처에 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라 볼 수 있다.

 

나병환자 숩빠붓다는 암소에 치여 받혀 죽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고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이 그의 운명은 어떠하고 그의 미래는 어떠합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나병혼자 쑵빠붓다는 세 가지 결박을 부수고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반드시 궁극적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흐름에 든 님이 되었다.”라 하였다. 여기서 세 가지 결박은 유신견, 계금취, 의심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마음의 결박이 타파 되면 수다원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에 든 님에 들었다고 하였다.

 

숩빠붓다는 수다원이 되어 죽었다. 길거리 암소에 치받혀 죽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이 아니다. 나병환자라는 멍에를 벗어 던질 수 있었고 더구나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보장 되어 있는 수다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숩빠붓다는 죽어서 어디서 태어났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쑵빠붓다의 전생이야기

 

쑵빠붓다는 나병을 얻어 비참하게 세상을 살아 갔다. 그러나 우연히 부처님 설법에 참석하여 진리의 눈이 생겨나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 어떻게 단 한번 설법을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숩빠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들려 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나병환자 쑵빠붓다는 이 라자가하 시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유원으로 나갔을 때, 홀로 연기법을 깨달은 님인 따가라씨킨이 도시로 탁발하러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그는 이와 같이 이 문둥이, 문둥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생각하고 침을 뱉고 왼쪽으로 돌아 그곳을 떠나갔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행위가 성숙하여 그는 많은 해, 많은 백 년, 많은 천 년, 많은 십만 년을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그 행위가 남김없이 성숙하여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사람 가운데 가장 곤궁하고 사람 가운데 가장 비참한 나병환자 쑵빠븟다가 된 것이다.”

 

(Suppabuddhakuṭṭhisutta-나병환자 쑵빠붓다의 경, 우다나 Ud5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숩빠붓다는 전생에 마음으로 업을 지었다. 이는 “‘이 문둥이, 문둥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생각하고 침을 뱉고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생각으로 지은 업도 매우 중대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침까지 뱉어 신체적인 업까지 지은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깨달은 연각불에게 악행을 한 것이다.

 

깨달은자를 비방한 과보는 매우 컸다. 지옥에서 한량 없는 세월을 보내고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비참한 자로 태어났다. 단지 생각으로 문둥이라고 한 과보로 인하여 문둥병환자가 된 것이다.

 

나병환자 숩빠붓다는 한생각 잘못 하여 지옥고를 겪었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가장 낮은 지위로 살았다. 그러나 부처님 설법을 듣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수다원으로 거듭 난 것이다. 나병환자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것이다. 족보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죽어서 삼십삼천 천상에 태어났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설법으로 운명이 바뀐 것이다.

 

진정한 인생역전은?

 

로또에 당선되면 인생역전이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또 발표일이 다가 오면 표를 사기 위하여 줄을 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항상 이다. 로또에 당첨되기는 힘들다.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명한 자들은 로또를 사지 않는다. 다만 헛된 꿈을 꾸는 자는 헛된 망상과 함께 로또를 구입한다.

 

로또를 사지 않아도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 나병환자 숩빠붓다 같은 케이스이다. 우연히 들은 부처님 설법으로 진리의 눈이 생겨나 수다원이 되었다면 이는 인생역전이다. 더구나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고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이 보장 되었다면 이 보다 더 한 인생역전이 어디 있을까?

 

 

2015-08-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