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중도는 팔정도? 중도와 팔정도와 십이연기의 관계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16. 21:51

 

중도는 팔정도? 중도와 팔정도와 십이연기의 관계

 

 

그래서 어쩌자구요?”

 

미디어붓다의 칼럼에서 어느 법우님의 댓글을 보았다. 그 법우님은 업과 무아, 그리고 윤회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공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자구요?”라 하였다. 법우님은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글의 내용에 공감 하지만 그 내용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재미로 취미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절박해서 믿는 것이라 본다. 자신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해법을 얻고자 불교에 입문하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열심히 기도하세요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초기경전을 열어 본다.

 

초기경전은 아무 곳이나 열어 보아도 된다. 몇 줄 읽지 않아 금방 효과가 나타난다. 그것은 삶과 너무 밀접한 내용이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 대한 해법이 제시 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현실과 비교하여 틀림 없음을 확인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리로 받아 들이게 된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불자들은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 스님은 참나라 하고 저 스님은 중도라 한다. 이렇게 제각각 다르다 보니 깨달음은 어려운 것, 스님들이나 하는 것,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 깨달음이란 신비한 것으로서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재가자들에게 늘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누군가 수행이란 무엇이냐가 물어 보았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은 자신 있게 손들고 팔정도요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팔정도를 닦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럴 때 손을 들고 사성제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진리를 아는 것이 불교의 깨달음이다.

 

어느 스님은 중도가 깨달음이라 하였다. 유무양변을 떠난 중도야 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라 하며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중도라 하였다. 하지만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면만 본 것이다.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것은 맞지만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마치 공을 이해 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누군가에게 공에 대하여 설명하면 그래서 어쩌자구요?”라 할지 모른다. 지금 당면한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될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 중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역시 그래서 어쩌자구요?”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중도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중도에 대하여 제대로 안다면 그래서 어쩌자구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중도의 가르침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도는 팔정도이다?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고락중도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닉이나 자신에 대한 학대는 양극단이라 하였다. 이런 양극단에 대하여 부처님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hito, S56.11)”라 하였다. 여기서 비속하다는 말이 gammo’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촌스럽고라 번역 하였다. 실제로 gammo의 뜻은 ‘Belonging to villages’이다. 그렇다면 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열하고 무지렁이 들 뿐 일까? 이런 문제점이 있어서인지 전재성님은 비속하고라 번역하였다.

 

부처님은 쾌락과 고행에 대하여 무익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가? 팔정도를 닦아서 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경에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팔정도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S12.15의 각주에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고 이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상윳따2 108번 각주)”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초기경전에서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팔정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도 있기 때문이다. 고락중도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팔정도로 설명한다. 그러나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는 십이연기로 설명한다. 물론 경에서 정견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십이연기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팔정도이다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전략)초기불전 자체를 두고 보자면 중도는 팔정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4부 니까야에는 본서 제6권 초전법륜경을 위시하여 대략 6군데에서 중도가 나타나는데 4념처와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 앙굿따라니까야 나체수행자의 경을 제외한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되고 있다.

 

(초불연 상윳따2 108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로 표현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묵스님은 “(중략) 양극단의 중간(본서 나체수행자 경(S12.17))으로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이지만,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08번 각주)”라 하였다.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나체수행자경을 열어 보면 정견이라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팔정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십이연기가 설해져 있다.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중도에는 고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무중도도 있고, 자타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 오염중도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경전적 근거

1

유무중도

(有無中道)

()는 무조건적인 유일 수가 없고, ()는 무조건적인 무일 수가 없다. 존재인 유()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1) 깟짜야나 곳따의 경(S12.15)

2) 정견, 십이연기

3)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순관과 역관)

2

자타중도

(自他中道)

자기원인설은 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가 결과함을 말한다. 타자원인설은 비자기에 의해서 자기가 성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1) 아쩰라깟사빠의 경(S12.17)

2) 십이연기

3)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순관과 역관)

3

단상중도

(斷常中道)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발생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1) 아쩰라깟사빠의 경(S12.17)

2) 십이연기

3)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순관과 역관)

4

일이중도

(一異中道)

인과의 동일론과 차별론은 부정된다. 현상계가 완전히 동일하다던가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인과성의 원리는 성립할 수 없다.

1)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S12.35)

2) 십이연기

3)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 (이후 십이연기를 개별적으로 설명)

5

고락중도

(苦樂中道)

초기불교에서 연기설과 관련된 고락중도는 다른 중도사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고락중도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속성이라기 보다는 수행적 인과관계에 관련된 특수한 속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1)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S56.11)

2) 팔정도, 사성제

3)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6

오염중도

탐욕과 성냄, 분노와 원한, 저주와 횡포, 질투와 인색, 환상과 광기, 고집과 격분, 자만과 오만, 허영과 태만이라는 8가지 쌍의 16가지 오염원에 대한 버리기 중도가 있다.

1)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

2) 팔정도

3)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기 위한 중도가 있습니다. (중략) 그것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표는 니까야에서 중도와 관련된 경을 모아 놓은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였는데 크게 팔정도와 십이연기로 분류 된다. 팔정도로 분류 되는 경은 고락중도를 설한 초전법륜경(S56.11)과 오염중도를 설한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 두 개임을 알 수 있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정견이 나오지만 완전한 팔정도라 보기 어렵다. 나머지는 모두 십이연기를 설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이 중도는 팔정도를 뜻한다라고 천명한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중도는 팔정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중도에 대하여 팔정도를 만족하는 경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오염원과 양극단에 대한 것이다. 먼저 오염원에 대한 것이다.

 

오염원에 대한 것으로 맛지마니까야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을 들 수 있다. 이를 오염중도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에 따르면 8가지 쌍으로 16가지 오염원을 들고 있다. , 탐욕과 성냄, 분노와 원한, 저주와 횡포, 질투와 인색, 환상과 광기, 고집과 격분, 자만과 오만, 허영과 태만이라는 8가지 쌍의 16가지 오염원을 말한다. 이러한 오염원은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두 쌍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양극단은 아니다.

 

탐욕과 성냄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양극단은 아니다. 이후 분노와 원한, 저주와 횡포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유사한 것을 쌍으로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이 쌍으로 된 오염원에 대하여 팔정도 수행으로 소멸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싸리뿟따]

벗들이여, 이 세상에서 분노도 악이고 원한도 악입니다. 분노을 버리고 원한을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벗들이여,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입니다.

 

벗들이여, 이것이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입니다.

 

(Dhammadāyādasutta-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3, 전재성님역)

 

 

분노와 원한이라는 오염원을 어떻게 버려야 할까? 그것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버릴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으로 중도를 실천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중도는 양극단을 말하는 중도라기 보다 오염원을 소멸시키기 위한 중도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때 팔정도는 실천도를 뜻한다. 그래서 십이연기가 아니라 팔정도로 설명한 것이다.

 

중도에 대하여 팔정도와 연기를 모두 만족하는 경

 

팔정도로 설명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초전법륜경에서 고락에 대한 것이다. 극단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이 무익한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경에서는 팔정도와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락중도는 팔정도와 연기가 모두 적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성제는 십이연기는 아니지만 이지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에 대하여 팔정도와 연기를 모두 만족하여 설명된 경은 초전법륜경이 유일하다. 물론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정견과 십이연기가 설명되어 있지만 십이연기의 설명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중도에 대하여 연기를 만족하는 경

 

중도에 대하여 십이연기로 설명된 경들이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표적으로 유무중도, 자타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양극단은 오염원이라고 볼 수 없다. 일종의 견해이다. 그래서 팔정도가 아니라 십이연기로 설명되고 있다. 이는 연기의 가르침으로 이해 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무중도를 들 수 있다.

 

유무중도로서 대표적인 경이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이다. 한역으로 가전연경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깟짜야나곳따의 경이 중요한가? 이는 연기로써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양극단을 논파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초전법륜경과 함께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경이라 볼 수 있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의 진가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의 중요성은 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 하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핵심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논파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불교를 믿어서 정말 다행이야”연기법으로 논파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2015-01-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존]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였을 때 비존재()와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존재와 비존재, 즉 절대유와 절대무는 성립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관찰하였을 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라 하였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부수기 위하여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한 것이다.

 

연기의 순관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절대로 없다절대무는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연기의 역관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절대로 있다라는 절대유역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양극단은 성립되지 않는다.

 

유무양극단이 모순이라는 것은 오로지 연기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라 하시면서 곧바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라 하여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한 것이다. 그럼에도 중도는 팔정도이다라고 천명한 것은 무리가 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십이연기를 재해석한 성철스님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가전연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무중도의 중요성이어서일까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가전연경의 내용과는 다르게 중도를 해석하였다. 그것은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서의 중도이다. 이는 성철스님이 연기를 재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백일번문에서 십이연기를 재해석하였다. 이는 백일법문에서 십이연기의 재해석이라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재해석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래에는 십이연기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비등하게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연기의 본래 의미는 존재의 원리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 십이연기에서 연기를 소승의 유부적(有部的)인 생멸(生滅)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법계(法界)의 연기, 중도(中道)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십이연기의 재해석, 2장 원시불교사상, 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은 연기에 대하여 존재론으로 보았다.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단한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존재론적인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절대유로서 존재론에 기반한 브라만교를 연기법으로 부순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에 대하여 존재론으로 재해석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또 하나를 보면 십이연기에 대하여 법계연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만 인정할 뿐 조건발생적 연기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의 중도사상은 모두 상호의존적으로 설명된다.

 

성철스님은 자신이 재해석한 십이연기에 대하여 초기경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를 보면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라 되어 있다.

 

이어서 성철스님은 부연설명으로서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라 되어 있다.

 

하지만 성철스님은 십이연기를 자의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조건발생적 연기를 무시하고 모두 상호의전적 연기로만 해석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2013-03-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연기송을 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설명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연기송으로 알 수 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위 연기송을 보면 인과와 조건발생을 모두 만족하고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일반원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若有此卽有彼

iti imasmi sati ida hoti

1) 상호의존적 연기

2) 대승의 법계연기

특수원리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Imassuppādā ida uppajjati

1) 조건발생적 연기

2) 십이연기

3)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표를 보면 연기송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 하여 연기의 일반원리만 설명하고 있다. 즉 상호의존적 연기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이다.

 

대승불교에서는 특수원리에 해당되는 조건발생적 연기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의 십이연기를 완전히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반쪽만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모두 만족하는 것은 무엇일까?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M38)

 

 

paticcasamuppada

 

 

 

이것이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이 설한 십이연기 정형구이다. 인과와 조건발생적 연기, 그리고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잘 표현 되어 있고 모두 만족하고 있다. 그것도 순관 뿐만 아니라 역관도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부처님 원음이고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만 설한다면 반쪽짜리 가르침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논파

 

부처님이 깟짜야나곳따의 경은 설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 시대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각종 사상이 난무 하였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이다. 영원주의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상주론을 말하고, 허무주의는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을 말한다. 이는 양극단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는 깟짜야나여,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S12.15)”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상사람들은 부처님 당시 삿된 견해에 의존해서 살아 가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양극단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늘날 유일신교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유사한 영원주의 종교이다. 이렇게 영원주의 또는 상주론을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단멸론이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이라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극단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를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그와 관련된 경이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영원주의를 부수었을까? 이는 연기의 역관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역관에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라는 구절이다. 이렇게 무상하게 조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절대유로서의 극단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영원주의가 논파 된다.

 

허무주의는 연기의 순관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순관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조건발생하여 다시 형성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보는 절대무로서 극단은 역시 거짓이 된다. 그래서 허무주의가 논파된다.

 

부처님은 절대유와 절대무의 양극단에 대하여 연기법, 즉 십이연기로 논파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라 하였다. 이렇게 양극단에 대한 중도의 가르침은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가르침

 

불자들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한다. 또 부처님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그래서 경전을 열어보고 교리를 공부한다. 또 현실에서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또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경전을 열어 보게 된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신기하게도 답이 들어 있다. 어느 경전을 열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의 부처님 가르침은 그래서 어쩌자구요?”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십이연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로만 파악하였을 때 단멸론이 되기 쉽다.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여 연기 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졌을 때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염려에서인지 부처님은 친절하게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若有此卽有彼 : iti imasmi sati ida hoti)”라는 연기의 일반적 원리(상호의존적 연기)와 함께 반드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 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는 연기의 특수원리(조건발생적 연기)도 설하였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이와 같은 연기의 가르침으로 영원주의를 부수어 우리들을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또한 허무주의를 부수어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셨다.

 

 

2015-07-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