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14. 19:06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하여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율장대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꼬삼비에서 승단분열이 일어나자 그곳을 떠났다. 부처님이 발로까로니까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 바구존자가 영접하였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바구존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Bhagu: 바구는 싸끼야족의 출신으로 아누룻다와 낌발라와 함께 출가했다. 어는 날 그는 졸음을 쫓아 내기 위해서 방사를 나섰는데,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 그의 시는 Thag.271-274에 있다.

 

(바구와 존자들, 10장 꼬삼비의 다발, 율장대품, 전재성님)

 

 

바구존자는 넘어졌다 일어서려고 애쓰는 사이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룩한 님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뜻한다.

 

선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선사들의 기연에 따른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가장 유명한 것이 경허선사이다. 경허선사는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되는 게지.”라는 어린 사미승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였다. 경허집에 따르면 참선중인 경허 스님의 뒤통수를하고 때렸다. 대지가 그냥 내려앉았으며, 만물과 자신을 함께 잊고 온갖 법문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다.(경허집)”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 말에 깨달았다는 언하대오(言下大悟), 그리고 기이한 인연에 의해 깨달았다는 기연(機緣)등 수 많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어느 선사는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어느 스님은 본래면목이라 한다. 또 어느 스님은 중도라 한다. 이렇게 선사들은 다양한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스타스님의 깨달음이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스님들이 몇 명 있다. 그 중에 혜민스님이 있다. 해외 명문대 출신에다 마스크도 좋아서 청중을 몰고 다니는 스타스님이다. 스님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시가 있다. 이전에 ‘그놈’이나 ‘그분’이나,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2011-12-16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혜민스님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그놈을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스님의 시를 보면 그놈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그놈을 찾아 가는 과정 역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어지는 문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중략)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중략)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중략)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위 글은 혜민스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다. 청중을 몰고 다니는 혜민스님에게는 타종교인도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본 어느 기독네티즌은 요한복음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1장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 수행법으로 가면 불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없는듯해요.”라 하였다. 대체 어떤 부분이 비슷하다는 것일까?

 

바이블 찾아 보았다. 요한복음 1 2절에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라 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분이나 혜민스님이 말하는 그놈이나 거의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정 진제스님의 이야기하고도 유사하다.

 

기독교인들이 기립박수한 이유는?

 

진제스님은 늘 참나를 이야기 한다. 그래서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이라는 화두로 타파하자고 말한다. 그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이는 이는 “부모 몸에 들기 전에 어느 것이 참나인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본래면목이라는 말은 참나, 홀로밝은 동그라미, 소소영영한 한 물건, 그 놈 등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도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제스님이 종정이 되기 이전에 뉴욕에서 종교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 진제스님 그것도 사찰이 아닌 교회에서 한국 대표 선지식이 대규모 법회를 연 것이다.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던진 화두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스님의 법문에 타종교인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기독인들은 왜 기립박수하였을까? 혹시 진제스님의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라는 말과, 요한복음 1장에 쓰여 있는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라는 말이 똑같다고 보아서 이었을까?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불교에서 깨달음은 무엇일까? 선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참나, 본래면목, 그놈, 불성 등을 깨닫는 것일까? 하지만 초기불교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말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불리워지는 게송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nekajātisasāra ~

sandhāvissa anibbisa
Gahak
āraka gavesanto: ~

dukkhā jāti punappuna.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Dhp153)

 

 

Gahakāraka diṭṭhosi! ~

Puna geha na kāhasi:
Sabb
ā te phāsukā bhaggā, ~

gahakūa visakhita,
Visa
khāragata citta, ~

tahāna khayam-ajjhagā.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

 

 

이것이 부처님의 오도송이다. 선사들이 깨닫고 나면 오도송을 읊듯이 부처님도 이와 같이 오도송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갈애의 부숨이다. 즉 열반이다.

 

존재들은 갈애로 인하여 유전하고 윤회하여 왔다. 게송에서는 집짓는 자로 표현 되어 있다. 그 갈애가 부수어졌을 때 결국 괴로움도 멈추고 윤회도 멈추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tahāna khayam-ajjhagā)”라고 노래 하였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았다

 

부처님은 갈애를 부숨으로 인하여 열반을 성취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저마다 여로 가지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꿰뚫지 못했기 때문에, 나나 그대들이나 오랜 세월을 유전했고 윤회했다.(D16)”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났다. 이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라는 불리우는 초전법륜경(S56.11)에서도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해 주고자 45년 동안 맨발로 길에서 길로 걸어 다니며 설법하다가 길에서 열반하였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았다. 이렇게 본다면 누군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사성제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은 자, 붓다(buddha)가 된다. 이때 붓다는 보통명사로서 각자를 말한다. 부처님에 대해서는 정등각자라 한다. 최초로 깨달은 자이고,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룬자라 하여 정득각자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자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아라한이라 한다. 그런데 아라한의 깨달음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였다. 이는 법구경 부처님 오도송에서 알 수 있듯이 갈애를 부숨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는 초전법륜경 멸성제와도 일치한다. 멸성제에 따르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S56.11)”라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하지만 갈애의 부숨은 깨달음의 최종적 단계에 해당된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깨달음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예비단계 내지 수행의 단계라 볼 수 있다.

 

사성제를 알았다고 해서, 이해하였다고 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사성제를 이해 하였어도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이디. 비록 일반인들에 비해서 매우 미미하지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의 경우 최대 일곱생을 더 살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수다원 단계는 견도(見道)라 볼 수 있다.

 

진리를 보았으면 이제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 시키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 단계가 수도(修道)로서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여기서 아라한 이하 수다원과 사다람, 아나함의 단계를 유학(有學)’이라 한다. 더 배우고 실천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갈애가 부수어져서 부처님과 동급인 아라한이 되었을 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된다. 이를 무학도(無學道) 단계라 한다. 그리고 아라한에 대하여 무학(無學)’이라 한다. 그래서 사성제는 진리를 이해하는 견도(수다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도(사다함과 아나함), 더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도(아라한)의 단계로 나뉜다.

 

부처님의 차제설법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적이다. 이는 선종에서 돈오돈수를 말하는 것과 다르다. 견도부터 시작하여 수도, 무학도의 단계가 있어서 돈오점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계적으로 가르침을 설하였다.

 

부처님은 초심자에게는 보시하고 계행을 지키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시작 하였다. 처음부터 사성제를 가르치지 않았다. 공부가 무르익으면 다음 단계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1) 보시를 설하고, 2) 계행을 설하고, 3)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고, 4)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5)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설하고, 6) 수행적 관점을 설하였다. 이를 차제설법nupubbīkatha  kathessāmīti)이라 한다.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에서

 

깨달음과 유사한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도이다. 깨달음과 중도는 어떤 관계일까? 맛지마니까야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M3)’이 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재물의 상속자가 되어서는 안된다.(M3)”라 하였다. 마치 오늘날 탐욕스런 권승들을 지칭한 듯한 말이다.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 존자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Tatrāvuso, lobho ca pāpako doso ca pāpako. Lobhassa ca pahānāya dosassa ca pahānāya atthi majjhimā paipad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Katamā ca sā, āvuso, majjhimā paipad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eyyathida– 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 kho sā, āvuso, majjhimā paipad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싸리뿟따]

벗들이여, 이 세상에서 탐욕도 악이고 성냄도 악입니다.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벗들이여,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니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입니다.

 

벗들이여, 이것이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고 고요함, 탁월한 앎, 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입니다.

 

(Dhammadāyādasutta-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3, 전재성님역)

 

 

경에서 탐욕(lobha)과 성냄(dosa)이 나온다. 여기서 탐욕과 성냄은 성격이 다르다. 탐욕은 거머쥐려는 특성이 있고, 성냄은 밀쳐 내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한순간의 마음에 탐욕과 성냄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런 탐욕과 성냄은 대표적 오염원으로서 불선한 마음으로 분류 된다.

 

중도(majjhimā paipadā)에 대하여

 

경에 따르면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습니다.”라 하였다. (Lobhassa ca pahānāya dosassa ca pahānāya atthi majjhimā paipadā)”라 하였다. 탐욕과 성냄이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발생하지 않음에도 중도(majjhimā paipadā)’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의 뜻은 무엇일까? 먼저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탐욕도 하나의 극단이고, 성냄도 하나의 극단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양극단에 다가지 않고, 접근하지 않고, 이 양극단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쾌락에 빠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 자기학대에 빠지는 것도 하나의 극단이고(S56.11), 상견도 하나의 극단이고 단견도 하나의 극단이라고(S12.15) 이전에 설한 방법에 따라서도 알아야 한다.(MA,i.104)

 

(초불연 맛지마 1 142번 각주, 대림스님)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MA,i.104)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중도에 대하여 단지 문자적으로 풀이 하여 양극단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라 하였다. 이런 류의 설명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비판적으로 보았다.

 

전재성님의 맛지마니까야 가르침 상속의 경에 실려 있는 중도에 대한 각주는 초불연에서 단지 주석에 의존하여 문자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과 다르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처음 나오는 중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Aya kho sā, āvuso, majjhimā paipadā cakkhukaraī ñāakara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 여기 여덟 가지 고귀한 길(ariyo aṭṭhagiko maggo : 팔정도)은 사람을 가르침의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 소개 된 것이다. 빅쿠보디는 Mdb.1173에서 여기 중도라고 소개 된 것의 언어적 표현에 걸려 아비달마적으로 번뇌와 성스런 길 사이의 대립은 새로운 각도에서 보면, 재물의 상속자와 가르침의 상속자의 대립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은 불편부당의 중용처럼 중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중도는 또한 대립물의 통일도 아니다. 중도는 존재를 묻지 않고 그 원인이나 조건을 묻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통찰의 길을 의미한다. 이 문맥에서 중도란 원인과 조건을 볼 수 있는 탁월한 앎을 말하는 것이다.

 

(76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빅쿠보디가 중도를 잘못이해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중도에 대하여 단지 문자적으로 아비담마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문자적이라 함은 중간을 의미할 것이다. 좌와 우가 있을 때 중간길을 뜻한다. 이런 중간길로서 중도적 개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연기에 바탕을 둔 사성제

 

경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탐욕과 성냄이라는 상극의 특성을 가진 마음의 요소에 대하여 중도로서 설명하고 있다. 모두 버려야 할 불선한 마음이다. 그래서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다고 하였다. 어떻게 버릴 것인가?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팔정도가 설명되어 있다.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탐욕과 성냄을 버리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모두 16가지 버려야할 오염원이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에서 분노도 악이고 악이고 원한도 악이라 하였다. 이는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노와 원한은 대립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후 소개 되는 오염원 질투와 인색, 환상과 광기, 고집과 격부느 자만과 오만, 허영과 태만도 마찬가지로 대립개념이 아니다. 팔정도를 실천하여 소멸시켜야할 오염원으로 보는 것이다.

 

오염원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실천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팔정도가 바로 중도라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의 내용과 동일하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과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하여 양극단이라 보고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이 중도에 대하여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실천도라 볼 수 있다. 동시에 목적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팔정도는 실천론과 목적론 이 두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사성제가 완성된다. 이렇게 본다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실천하는 것은 팔정도로서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사성제를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이다. 그런데 사성제는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 이라는 이지 연기로 되어 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속적 진리로서 연기의 순관에 해당되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출세간적 진리로서 연기의 역관에 해당된다. 이렇게 본다면 중도는 연기에 바탕을 둔 실천론자 목적론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중도는 존재를 묻지 않고 그 원인이나 조건을 묻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통찰의 길을 의미한다.”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중도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면 중도를 잘못 이해 하고 있다고 하였다. 중도에 대하여  참나라든가 본래면목, 그놈, 그분을 찾으려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하고 있음을 말한다. 결국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으로 접근하면 가르침에 크게 어긋남을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 또는 존재론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성철스님의 중도론이 그렇다.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대하여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한 가르침은 유명하다. 특히 백일법문을 보면 성철스님의 중도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중도론전도사를 자처하는 스님도 나타났다. 그 스님은 양변이 융합한 것이 중도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마치 좌와 우의 길이 있는데 중간길을 뜻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대하여 중도전도사를 자처 하는 스님은 성철스님의 중도론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보면 중도에 대하여 오로지 목적론 또는 구경론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백일법문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팔정도가 방법론(方法論)이냐 또는 목적론(目的論). 구경론(究竟論)이냐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팔정도는 구경 목표를 향하는 방법론이지 목적론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근본 뜻을 망각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중도를 바로 깨친 그 사람이 부처이므로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는 목적론인 것입니다.

 

(백일법문, 4 원교(圓敎)의 중도설, 성철스님)

 

 

성철스님은 법문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목적론(구경론)임을 분명히 말하였다. 더구나 부처님은 확실히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셨지 중도를 닦아서 바르게 깨달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라 하였다.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성철스님의 중도관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마성스님은 성철스님의 중도론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성스님, <百日法門> 나타난 中道思想)”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실천론과 목적론으로서 중도

 

성철스님은 중도에 대하여 실천론이 아니라 목적론이라 하였다. 하지만

초전법륜경에서는 분명히 목적론(열반)과 실천론(팔정도)이 언급되어 있다. 인이는 실천론과 관련된 말이 팔정도이고 구경론과 관련된 말이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S56.11)”라 하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전법륜경(S56.11)에서 부처님이 언급한 중도

 

    

 

방법론

(실천론)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팔정도 실천

구경론

(목적론)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열반의 성취

 

 

표를 보면 중도가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실천론으로써 중도가 설명되었고, 이어서 목적론으로써 중도가 설명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실천론과 목적론 모두를 설한 것이다. 성철스님이 말한 목적론으로서 중도와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고락를 예로 들어 중도를 설명하였다. 이를 고락중도(苦樂中道)라 한다.  이외에도 초기경전에서는 유무중도(有無中道), 자타중도(自他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일이중도(一異中道), 거래중도(去來中道), 생멸중도(生滅中道) 등 수 많은 중도의 가르침이 있다.

 

용수의 중도사상

 

성철스님이 중도라 한 것은 대승불교의 중도관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목적론으로서 중도이다. 이는 다름 아닌 용수의 중도사상에 더 가깝다. 그런 용수의 중도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 용수의 중도사상은 어떤 것일까?

 

융수의 중도사상은 공가중(空假中) 삼제로 삼제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힌두이즘(Hinduism) 속으로 사라진 불교(2010-10-1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용수는 세 가지 진리(三諦)가 있다고 하였다. 이를 공과 가와 중으로 설명한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3

진리

 

진제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의 입장

(施說)

속제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

중도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여 성립

 

 

용수가 말한 중()는 진리로서 중도를 말한다. 이는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는 입장에서 성립된 말이다. 용수는 현실에 대하여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현실은 모두 공한 것이라 하였다. 이때 공은 연기=관계성=무자성=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여기서 공은 가시설된 것(쁘라즈냡띠)일 뿐이라는 것이다.

 

용수에 따르면 세상의 실상은 공이 맞지만 실상은 연기 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라 한다. 다만 그 실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묘사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용수는 가시설(쁘라즈냡띠)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속제로서 가()가 성립된다.

 

용수는 언어적 표현을 넘어 궁극적 입장에서 본 진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를 진제라 하여 공()으로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속제로서 가 있고 진제로서 이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공한 것으로 보았을 때 공자체도 공한 것이 된다. 그래서 ,,,,…’ 하다 보면 ‘무기공’에 떨어지거나 ‘공병’에 걸린 것으로 본다.

 

공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인데 가시설이라 한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라는 긍정의 뜻이다. 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 중관학파에 따르면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공과 가의 ‘중간 정도의 입장’이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 가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고, 이 두가지 진리를 포괄하여 유무 양변을 떠나 중(중도)이라 한다. 이 공가중(空假中)에 ‘세가지 진리’라 하여 3제라 하는데 모두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

 

중도란 원인과 조건을 볼 수 있는 탁월한 앎

 

용수의 중도사상에 따르면 부처님의 중도사상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용수는 공이라는 진제와 가라는 속제 두 가지를 포괄하고 양변을 떠난 것을 중도로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중도는 팔정도와 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용수의 중도는 목적론이라 볼 수 있다.

 

성철스님이 중도에 대하여 실천론이 아니라 목적론이라 한 것도 용수의 공가중 삼제에 따른 중도사상의 영향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실천론과 목적론 모두 만족시킨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도 확인 된다. 특히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연기에 바탕을 둔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사성제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지연기로 설명된다.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의 가르침과 같다는 것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확인 된다. 이는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S12.15)”로 시작되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중도사상은 십이연기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맛지마니까야 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의 각주에서 “중도란 원인과 조건을 볼 수 있는 탁월한 앎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동의 한다.

 

 

2015-07-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