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님에게 돈 주지 말라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11. 12:33

 

스님에게 돈 주지 말라

 

 

육칠년전의 일이다. 도심포교를 목적으로 강남에 머물던 어느 스님이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불심 깊은 불자가 운영하는 음식점 작은 방에서 몇 차례 법회를 가졌다. 고작 서너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심 깊은 불자들은 스님을 깍듯이 모셨다.

 

스님이 산속으로 떠나던 날 몇 명 되지 않는 불자들은 돈을 모아 드렸다. 이렇게 스님에게 개인적으로 드린 돈은 처음이었다. 여비에 쓰라는 명목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는 적정한 금액이었다.

 

스님들이 돈을 만져도 되는 것일까?

 

스님들이 돈을 만져도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우문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들이 돈에 집착하여 돈벌이를 하는 인상을 준다면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출가한 스님들은 돈을 만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탁발의 전통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수행자도 돈에 의지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비구계에서는 분명히 금하고 있다.

 

구족계라 불리우는 비구계 37번째 항목을 보면 분명히 . . 동 보물을 받지 말라.”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돈을 받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스님이 돈을 받는다면 비구계를 어기게 된다. 부처님은 행위에 의해서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였으므로 비구계를 어긴 자는 비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금과 은을 허용하면 오욕락에 빠질 것

 

금과 은에 관련된 이야기가 촌장상윳따에 있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있을 때 왕궁의 신하들에게서 수근 거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금과 은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어느 촌장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을 신뢰하는 촌장은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은 보석과 황금을 떠났고, 금과 은의 사용을 단념했습니다.(S42.10)”라고 말하였으나 수근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촌장은 부처님을 찾았다. 수근거리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부처님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Na hi, gāmai, kappati samaāna sakyaputtiyāna jātarūparajata, na sādiyanti samaā sakyaputtiyā jātarūparajata, nappaiggahanti samaā sakyaputtiyā jātarūparajata, nikkhittamaisuvaṇṇā samaā sakyaputtiyā apetajātarūparajatā. Yassa kho, gāmai, jātarūparajata kappati, pañcapi tassa kāmaguā kappanti. Yassa pañca kāmaguā kappanti ( ) [(tassapi jātarūparajata kappati,) (syā. ka.)], ekaseneta, gāmai, dhāreyyāsi assamaadhammo asakyaputtiyadhammoti.

 

[세존]

촌장이여,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은 금과 은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은 금과 은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석과 황금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금과 은의 사용을 단념 했습니다.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한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만역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

 

(Maicūakasutta-마니쭐라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0, 전재성님역)

 

 

Gold and silver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명백히 금과 은을 금하였다. 오늘날로 따졌을 때 돈을 말한다. 그래서 금과 은을 허용하지도, 수용하지도, 받지도 않는 것임을 선언하였다.

 

만을 수행자에게 금과 은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오욕락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이는 어느 큰스님이 “스님들에게 돈 주지 마세요. 호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 안합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금과 은이 있으면 수행할 수 없게 됨을 말한다. 오욕락에 빠진 자를 수행자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 금과 은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서 있으면 앉고 싶어진다. 앉아 있으면 눕고 싶어진다. 누우면 졸린다. 마찬가지로 금과 은을 허용하면 딴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촌장의 의문에 부처님은 분명하게 답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 하였다.

 

 

Api cāha, gāmai, eva vadāmi – tia tiatthikena pariyesitabba, dāru dārutthikena pariyesitabba, sakaa sakaatthikena pariyesitabba, puriso purisatthikena pariyesitabbo [pariyesitabbo ’’ ti (?)]. Natvevāha, gāmai, kenaci pariyāyena ‘ jātarūparajata sāditabba pariyesitabba ’ nti vadāmī ’’ ti. Dasama.

 

[세존]

촌장이여, 더 나아가 나는 이와 같이 풀이 필요한 자는 풀을 구해도 좋다. 땔감이 필요한 자는 땔감을 구해도 좋다. 수레가 필요한 자는 수레를 구해도 좋다. 인부가 필요한 자는 인부를 구해도 좋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금과 은을 허용해도 좋을 어떤 이유나 구입해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Maicūakasutta-마니쭐라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수행자들이 금과 은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땔감과 수레와 인부의 비유를 들었다. 그러나 직업을 갖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 수행자들은 금과 은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수행자들은 재가자들에게 의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금과 은을 허용해도 좋을 어떤 이유나 구입해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셨다.

 

수행자를 좋아하는 이유

 

수행자들은 재가자들로부터 사대필수품을 보시 받아 생활한다. 그래서 금과 은이 필요치 않다. 오로지 탁발에 의존하고 세벌 옷으로 살며 숲에서 거주 하는 수행자에게 금과 은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수행자에게 금과 은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축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유하게 될 것이다. 금과 은을 받는 순간 무소유의 청정한 삶은 깨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로히니는 수행자를 좋아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Kammakāmā analasā,

kammaseṭṭhassa kārakā;

Rāga dosa pajaha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훌륭한 일을 하며 욕망과 성냄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5)

 

 

Tīi pāpassa mūlāni,

dhunantntti sucikārino;

Sabba pāpa pahīnes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세 가지 악의 뿌리를 남김없이 제거하고

청정한 행을 닦아 모든 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6)

 

 

Kāyakamma suci nesa,

vacīkammañca tādisa;

Manokamma suci nes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몸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말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생각에 의한 행이 청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 합니다.(277)

 

 

Vimalā sakhamuttāva,

suddhā santarabāhirā;

Puṇṇā sukkāna dhammāna,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티가 없고 진주조개처럼

안과 밖이 청정하고

깨끗한 특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8)

 

 

Bahussutā dhammadharā,

ariyā dhammajīvino;

Attha dhammañca dese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학식이 많고 가르침을 지니고

거룩하고,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목표와 담마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79)

 

 

Bahussutā dhammadharā,

ariyā dhammajīvino;

Ekaggacittā satimanto,

tena me samaā piyā.

 

또한 그들은 하나로 집중된 마음으로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0)

 

 

Dūragamā satimanto,

mantabhāī anuddhatā;

Dukkhassanta pajāna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먼길을 행각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지혜롭고 산란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1)

 

 

Yasmā gāmā pakkamanti,

na vilokenti kiñcana;

Anapekkhāva gacchanti,

tena me samaā piyā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2)

 

 

Na tesa koṭṭhe openti,

na kumbhi na khaopiya;

Pariniṭṭhitamesānā,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3)

 

 

Na te hirañña gahanti,

na suvaṇṇa na rūpiya;

Paccuppannena yāpenti,

tena me samaā piyā.

 

그들은 동전이나 금과 은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탁발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284)

 

(Rohinītherīgāthā-로히니테리가타, Thig 275-284, 일아스님역)

 

 

떠날 때는 말 없이

 

출가하기전 소녀 로히니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이다. 로히니가 수행자(samaā)를 좋아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 하고 있다. 그 중에 282번 게송을 보면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Yasmā gāmā pakkamanti, na vilokenti kiñcana)”라 하였다. 이것이 수행자의 특징이다. 가진 것이 없기에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한 것이 있다면 결코 떠나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로히니가 좋아 하는 수행자스타일 중에서 인상 깊은 것은 283번 게송이다. 이는 저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유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감동적인 문구가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Pariniṭṭhitamesānā)”라는 말이다. 여기서 Pariniṭṭhitamesānā‘Pari(all round)+niṭṭhita(was finished)’ 의 의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리를 해서 먹지 않음을 말한다. 철저하게 탁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조리 하려면 음식재료를 구입해야 할 것이다금과 은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구입한 재료는 쌓아 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주지에서 조리를 해서 먹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축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금과 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금과 은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굳이 탁발나갈 필요도 없고 필수품을보시받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사대필수품을 재가자로부터 보시 받지 않게 되었을 때 이는 단절을 의미한다. 승가는 법보시하여 공덕 쌓고, 재가는 재보시하여 공덕 쌓는 관계가 단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가는 승가에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가 되어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이 모든 출발점이 금과 은을 허용함으로써 시작된다.

 

재가자는 어디에 보시를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보시공덕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빅쿠에게 금과 은을 주라고 하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은 나는 금과 은을 허용해도 좋을 어떤 이유나 구입해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S42.10)”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들은 돈을 받아서도 안되고 재산을 축적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재가자는 어디에 보시를 해야 하는가?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양모이었던 고따미는 손수 가사를 골라 보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M142)”라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인적인 보시를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개인적 보시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르침이 오래 존속되기 위해서이다. 만일 스님들 개인에게 보시가 이루어진다면 승가의 존재이유가 상실 될 것이다. 승가가 존재 하지 않게 되면 머지 않아 가르침도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을 염려 하여 부처님은 이전 양어머니 고따미빅쿠니의 가사보시를 받지 않은 것이다. 대신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sage gotamī dehi, M142)”라고 말한 것이다.

 

고이면 썩는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지만 고이면 썩는다고 하였다. 금과 은을 받아 축적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썩게 된다. 더욱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더 악취를 풍긴다. 특히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빅쿠가 금과 은을 받아 조리를 해서 먹고 재산을 축적하는 삶을 산다면 더 이상 빅쿠라 볼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다.

 

오늘날 스님들은 돈을 받는다. 탁발이 금지된 현실에서 돈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축적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개인사찰을 만들어 놓고 재산을 불려 나간다면 더 이상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다.

 

스님 개인에게 돈을 주면 타락의 길로 가게 하고 승단에 돈을 주면 번영의 길로 가게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과 은을 허용한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S42.10)”라 하셨다. 또 어느 큰스님은 “스님들에게 돈 주지 마세요. 호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 안합니다.”라 하였다.

 

 

 

2015-07-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