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7. 8. 12:07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비가 옵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비가 내립니다. 가는다란 비 입니다. 수도권에는 고작 5-10밀리 될 것이라 하나 열기를 식혀 주기에 충분 합니다. 모든 오염물질을 씻어 내기에는 역부족 입니다.

 

비 내리는 학의천 길을 걷다가 멈추었습니다. 급히 갈 이유가 없기 때문 입니다. 쉼터에 앉아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비를 함께 합니다. 이럴 때 이렇게 외쳐 봅니다.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우리나라에 장마철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마철은 짧습니다. 불과 한달여 됩니다. 더구나 비도 오는 둥 마는 둥 하여 장마철인지 모를 지경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열대지역의 경우 건기와 우기로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그래서 우기 삼개월 동안은 비 내리는 날이 많다고 합니다.

 

비 내리는 우기, 몬순기에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소치는 다니야입니다. 원담스님의 글에서 옮겨와서 해설을 해 보았습니다.

 

소치는 다니야

 

마히(Mahi)강변에서 많은 소를 방목해 키우는 다니야(Dhaniya)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유한 아들로 태어나 많은 황소와 암소, 그리고 사랑스런 아내와 일곱 명의 아들딸이 있었다.

 

그들은 우기의 사 개월은 고지대에 살고 나머지 팔 개월은 풀과 물을 쉽게 얻을 수 있은 강변이나 호숫가에 머물렀다.

 

인도의 기후를 몬순(Monsoon)이라 한다. 우기와 건기를 순환하는 기후이다. 특히 건기에서 우기로 바뀔 무렵이면 자연과 인간의 표정이 매우 극적으로 바뀐다.

 

인도대륙의 땅이 황토 먼지 풀풀 날리며 메마를 때 산천초목은 작열하는 땡볕 아래 고행자처럼 숨을 참는다. 그러다가 홀연히 폭우가 쏟아지면 열기로 질식했던 대지가 숨을 토해내고 목말랐던 초목이 팔을 뻗어 하늘을 향한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비를 맞으며 춤을 춘다.

 

 

머리 위에 두텁게 쌓인

몬순의 구름은,

이 불타는 가슴에게는 기쁨입니다.

 

비의 계절,

억제할 수 없는 속삭임의 계절

, 부푸는 가슴이여,

, 하늘도 온통 물기에 젖어 있네.

 

번갯불의 혓바닥이 가장 먼저 날름거리고

천둥이 울리니,

후드득 후드득

발작하듯

소낙비가 쏟아지네.

 

그리고는 바람이 불어와

여름철의 열기를 쫓아버리는구나.

이제 거리로 나가

 

제 노래를 부를 때가

되었어요.

 

<미라바이의 노래>

 

 

다니야는 비를 즐기면서 마냥 춤을 출 수는 없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홍수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목동들은 우기의 징조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

 

현명한 다니야는 49일 동안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져도 침수되지 않을 지역에 튼튼한 외양간을 짓고 거처를 마련했다. 목재와 풀을 충분히 모으고, 암소의 젖을 짜고 천둥 번개에 날뛸지도 모르는 송아지들을 말뚝에 단단히 묶고, 벌레들을 쫓을 모깃불도 사방에 피웠다.

 

예상대로 사방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 무렵 머리를 깎은 낯선 손님이 찾아 들었다. 따뜻한 화롯가에 모여 온 가족이 식사를 하고 손님에게도 넉넉히 대접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의 즐거운 소란을 즐기는 찰나, 짙은 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번쩍이며 바위라도 쪼갤 듯 우르릉거렸다. 행복한 다니야는 소몰이막대로 장단을 치며 노래한다.

 

 

1.

[다니야]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2.

[세존]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3.

[다니야]

“쇠파리들이나 모기들이 없고,

소들은 강 늪에 우거진 풀 위를 거닐며,

비가와도 견디어낼 것이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4.

[세존]

“내 뗏목은 이미 잘 엮어져 있고

거센 흐름을 이기고 건너 피안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더 뗏목이 소용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5.

[다니야]

“내 아내는 온순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오랜 세월 함께 살아도 내 마음에 들고

그녀에게 그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6.

[세존]

“내 마음은 내게 온순하여 해탈되었고

오랜 세월 잘 닦여지고 아주 잘 다스려져,

내게는 그 어떤 악도 찾아 볼 수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7.

[다니야]

“나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고

건강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니,

그들에게 그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8.

[세존]

“나는 누구에게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

내가 얻은 것으로 온 누리를 유행하므로,

대가를 바랄 이유가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9.

[다니야]

“다 자란 송아지도 있고, 젖먹이 송아지도 있고,

새기 밴 어미 소뿐만 아니라 성년이 된 암소도 있고,

암소의 짝인 황소 또한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10.

[세존]

“다 자란 송아지도 없고, 젖먹이 송아지도 없고,

새끼 밴 어미 소뿐만 아니라 성년이 된 암소도 없고,

암소의 짝인 황소 또한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11.

[다니야]

“말뚝은 땅에 박혀 흔들리지 않고,

문자 풀로 만든 새 밧줄은 잘 꼬여 있어,

젖을 먹는 어린 소가 끊을 수 없을 것이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12.

[세존]

“황소처럼 모든 속박들을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아,

나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노래가 끝나고 검은 비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이 금세 언덕까지 찰랑거린다.

 

다니야와 아내는 낯선 손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다니야의 두 딸도 그분의 발아래 공손히 합장한다. 사방에 가득한 빗소리를 들으며 다니야가 여쭙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고뇌로 가득 찬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넌 자입니다.

 

 

14.

[다니야]

“우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

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눈을 갖춘 님이시여, 당신께 귀의하오니,

우리의 스승이 되어 주소서. 위대한 성자시여.

 

15.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

바른 길로 잘 가신 님 곁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으니

태어남과 죽음의 피안에 이르러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

 

 

그때 악마가 다가와 속삭였다. 소치는 다니야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오른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있는 생각을 악마가 대화에 끼어들어 속삭이는 것으로 기술한다.

 

 

16.

[악마 빠삐만]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기쁨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

 

 

17.

[세존]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타 Sn1.2, 전재성님역)

 

(출처 :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소치는 다니야-2015.5.4(),원담스님)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전재성님 번역의 다니야 경이다. 중간에 실려 있는 문구는 원담스님의 코멘트이다. 이 경에 대하여 해설을 하면 다음과 같다.

 

Deva의 의미는?

 

게송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후렴구가 있다. 그것은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atha ce patthayasī pavassa deva)”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늘이라 한 것은 deva의 번역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deva‘heavenly beings, deities’를 의미 한다. 전재성님은 하늘이여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deva신이여라는 뜻보다는 구름이여!. 하늘이여!’라는 뜻이다.”라 하였다. 또 주석서 Prj.II.28에 따르면 deva는 구름(megha)을 뜻한다고 하였다. 실제로 또 다른 빠알리 사전 ‘Concise P-E Dict’에 따르면 deva‘[m.] 1. a deity; 2. the sky; 3. a rain cloud; 4. a king.’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여!”라고 번역한 것이 무리가 없다.

 

소치는 다니야나 부처님이나 공통적으로 “atha ce patthayasī pavassa deva(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라 하였다. 그런데 세속인 다니야와 부처님이 생각하는 deva의 의미는 다르다. 소치는 다니야가 생각하는 deva는 단지 자연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생각하는 deva번뇌를 상징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탐욕이 스며든다. (dhp13)”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흘러내리는 것은 번뇌를 상징한다. 번뇌를 뜻하는 빠알리어 ‘아사와(āsava)’ 역시 흘러 내리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만한 다니야

 

소치는 다니야는 몬순기에 비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다. 몬순기 폭우를 대비하여 지붕도 수리하고 제방도 손 보는 등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안에는 착한 아내와 일곱명의 자식도 있고 많은 소도 있어서 폭우가 내려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만 하게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라 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 역시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라고 자신만만하게 말씀 하신다. 그것은 번뇌의 불을 꺼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오염원이 소멸된 수행자에게 움막까지 열어 놓았을 때 다시 번뇌의 비가 내린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역시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라 한 것이다.

 

소치는 다니야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만만 하다. 착하고 온순한 아내도 있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더구나 노동의 대가로 살아 간다고 하였다. 그것도 착하게 산다고 하였다. 여기서 노동의 대가로 살아간다(Attavetanabhatohamasmi)”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세상에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두 팔의 힘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 들이고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지니고(A8.54)”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노동의 대가란 다름 아닌 이마의 땀과 팔의 힘으로 벌어들인 것을 말한다.

 

마음의 밭을 가는 농부

 

수행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일하지 않으므로 빌어먹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무소유의 실천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탁발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다고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일까?

 

숫따니빠따 까시바라드와자의 경이 있다.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세존]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 (stn77)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 (stn80)

 

(Kasibhāradvājasutta-까시바라드와자의 경, 숫따니빠따 Sn1.4, 전재성님역)

 

 

부처님도 노동을 한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가는 노동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직업을 갖지 않아 놀고 먹는 것으로 비추어질지 모르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부정관을 닦아야

 

몬순기 소치는 다니야는 폭우를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어린 송아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말뚝을 단단히 묶어 놓았다. 이를 본 부처님은 황소처럼 모든 속박들을 끊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꼬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니(Nāha punupessa puna upessa gabbhaseyya: stn29)”라 하였다.

 

여기서 모태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윤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자애의 경(Sn1.8)에서 “na hi jātu gabbhaseyya punaretī(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와 같은 말이다. 여기서 abbhaseyya‘The womb(자궁)’을 의미한다. 빠알리어 punaagain()의 뜻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따라서 “na hi jātu gabbhaseyya punaretī”의 의미는 자궁에 들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음을 말한다.

 

모태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게송에서는 냄새나는 넝쿨을 짓밟아라 하였다. 여기서 넝쿨이라는 말이 ‘pūtilata이다. 영어로 ‘[f.] the creeper Coccolus Cordifolius.’의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의학용 넝쿨식물의 일정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아름다운 몸이 실제로는 썩은 냄새나는 몸(pūtikāya)’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각주를 보면 디가니까야 새김의 토대의 큰 경(대념처경, D22)’의 문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DN.II.294-295에 따르면, 또한 몸에 대한 관찰로 중요한 것은 몸의 실재적 모습을 분석적으로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그 가운데는 피부로 덮인 여러 부정물(不淨物)로 가득 찬 신체의 각부분이나 장기에 대한 관찰, , , 불 바람으로 구성된 신체에 대한 관찰 및 무덤에 버려진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먼저 부정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정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 감각적 욕구는 지각을 조건으로 한다. 육체적 매력은 피상적인 관찰에서 유래하며, 부정관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다.

 

경전은 마치 두 개의 구멍을 가진 푸대자루에 여러 가지 곡물이 들어 있듯이 이 신체를 32가지 부정물-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 근육, ,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

-로 가득차 있는 푸대자루처럼 하나씩 그 내물을 열거하면서 분석적으로 그 부정함을 관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91번 각주, 전재성님)

 

 

부정관을 하면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썩은 냄새나는 몸(pūtikāya)을 관찰함으로써 몸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어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모든 번뇌에서 벗어 났을 때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라 한 것은 번뇌의 비가 내려도 결코 모태에 들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법비(法雨)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후 경에서는 골짜기와 언덕을 채우면서 갑자기 커다란 구름이 비를 뿌리니라 되어 있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후대 삽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삽입에 대하여 논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경에서 후렴구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구절에서 비가 뿌려지는 것에 대하여 법비(法雨)’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야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당신께 귀의 하오니 우리의 스승이 되어 주소서(stn31)”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명 받은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하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같다. 다만 받아 들이는 근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법화경 약초유품에서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라 하였다.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도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차별이 있듯이 받아들이는 자의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비에 대한 것은 초기경전 도처에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의지처의 경에서는 땅에 의존하는 뭇삶들은 비[]라는 존재들이 그들을 키우네.(S1.54)”라 하여 대지의 여신과 같은 존재로서 비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가르침과 비와 어머니가 동급임을 알 수 있다.

 

 

Vuṭṭhi alasa analasañca

mātā puttava posati,
Vu
ṭṭhi bhūtūpajīvanti

ye pāā pahavisitāti.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Pajjotasutta-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 전재성님역)

 

 

비는 게으른자나 부지런한 자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뿌린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머니의 자식사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자식도 다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부모사랑에 대하여 비로 비유하였다. 그런데 경전에서 비는 가르침으로 비유 된다.

 

모든 생류에게 차별 없이 비가 내리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다니야와 다니야의 아내, 그리고 자식들은 부처님에게 법비를 맞았다.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다니야와 아내는 낯선 손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다니야의 두 딸도 그분의 발아래 공손히 합장한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경에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상황 설정을 훌륭하게 처리 하였다. 더구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 보았을 때 저는 고뇌로 가득 찬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넌 자입니다.”라고 한 것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비록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경을 보충해주는 아름다운 표현이다.

 

다니야는 부처님에게 귀의 하였다. 그리고 스승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더구나 청정한 삶을 살겠으니(brahmacariya)라 하여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 청정한 삶(brahmacariy)’의 의미는 하느님의 삶또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범행(梵行)’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청정한 삶은 성적교섭이 없는 삶을 말한다. 그럼에도 다니야와 다니야의 아내는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문구 태어남과 죽음의 피안에 이르러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stn32)”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처럼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 윤회의 종식을 위한 삶을 살아 가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

 

이렇게 다니야가 발심을 하자 이를 두고 보지 못하는 자가 있다. 악마 빠삐만이다. 악마가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다니야의 마음을 다시 돌리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악마가 속삭이듯이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기쁨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stn33)”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 갈까? 이 세상을 사는 낙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인생삼락을 이야기한다. 고상하게 부모형제무고와 부끄럼 없이 사는 것과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이다. 이는 집착이다. 재산을 갖는 것도 자식을 갖는 것도 안락한 삶을 바라는 것도 집착이다. 집착 없이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아니, 세상에 집착할 것이 좀 있어야 살맛이 나지,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라고 반박할 수 있다. 이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다.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악마 빠삐만은 다니야가 이제까지 해 왔던 삶처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악마는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자식에 대한 집착, 재산에 대한 집착이 기쁨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말이다.

 

초기경전에서 악마 빠삐만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 되는 말을 하고 있다.그런 빠삐만의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높이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다 된 밥에 잿밥 뿌리는 듯 보이는 악마 빠삐만의 말집착이 행복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가르침을 마무리 하고 있다.

 

 

[세존]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stn34)

 

 

2015-07-08

진흙속의연꽃